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즉 일체 존재는 모두 <다른 것>에 의지해야만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불법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말하지요.
여기서 <다른 것>이란 인연(因緣)을 말하는데,
만약 모든 존재가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즉 독립적인 성품과 기능이 있는 것이라면 꼭 인연에 기대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제 스스로의 힘으로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분명히 타(他)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거든요.
마치 물체에 의지해야만 <그림자>는 있고, 음성에 의지해야만 <메아리>는 있듯이 말입니다.
그림자나 메아리는 분명히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실재(實在)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경전 도처에 <만유(萬有)는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다>는 말이 되풀이 강조되지만,
사람들이 이 무유자성(無有自性)이라는 말을 그저 건성으로 지나쳐 버리기 때문에
성인들의 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겁니다.
한 마디 더 첨언하지요.
불법에서 말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세간에서 말하는 인과법(因果法)과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세간에서의 인과법은
<일정한 원인하에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가 난다>는 것이지만
불법에서의 연기설은
<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법이 법을 내지도 못하고, 법이 법을 들이지도 못한다.
따라서 인(因)이 과(果)를 내지도 못하고
과(果)가 인(因)을 갚(酬)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일은 꿈과 같고 환과 같아서
전혀 인간의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헛되이
'있음'이 된 것이니,
따라서 실제(實際)란 없는 것이므로
모름지기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 * *
만법이 성품이 없어서, 이 세간상(世間相)이 <지금 있는 이대로>가 적멸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면전에서 번성하게 생겨났다 머물렀다 변했다 사라졌다 하는 이 모든 현상이
전혀 말로만 있는 것이요, 실체가 없어서, 그저 만법이 참되고 여여할 뿐인데,
이와 같은 일여도(一如道) 가운데서 생·멸을 보기 때문에 유·무가 갈려져서
마치 실제인 양 마음의 흐름을 장애하는 겁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 만법과 짝(伴)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서강수(西江水) 물을 다 마시고 오라. 그러면 말해 주리라.」
이 문답에서처럼, 이 몸도 마음도 나아가서 대천세계(大千世界) 까지
몽땅 한 입에 삼키고 나면
안팎으로 텅 트여서 도무지 마주 상대하여 서로 알아볼 것이 없을 텐데,
다시 <누가> 있어서 <무엇>을 상대하여 '있음'과 '없음'을 논하겠으며,
또 좋아하여 애착하고, 싫어하여 배척하고 하는 따위의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진실로 면전엔 한 법도 없건만,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하여 <유·무의 소견>이 다하지 않는 것이니,
모름지기 참된 수행자라면,
「 만법이 성품이 없음을 사무쳐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느니라」 하는 말을 들으면
'있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없음' 까지도 마저 보냄으로써,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의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 *
본래 아무 일도 없는 <여한 법>(如法) 가운데서
헛되이 생멸(生滅)을 보고 거래(去來)를 봄으로써
이 세상사(世上事)가 마치 꿈처럼 환(幻)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투영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실상(實相)은 전혀 범부의 망령된 계교(計巧) 때문에 <있음>이 된 것이므로,
이 치우친 망견(妄見)을 떼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공(空)한 도리>를 설하게 된 것인데,
사람들은 이 방편의 말씀을 잘못 알고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있음>이라고 알면 그르고,
<공(空)했다>고 알면 옳다는, 또 하나의 망견(妄見)을 갖기에 이르렀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법실상은 공·유(空有) 양변(兩邊)이 모두 옳지 않으며,
이 <옳지 않다>는 말도 또한 군말일 뿐입니다.
요컨대, <법의 본래법>(本法)은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니,
<여여>(如如)라고 해도, <여여가 아니라>(不如如)고 해도 다 맞지 않아서,
마치 두꺼운 철판 위에 올라앉은 모기처럼 도무지 부리를 댈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여여>라고 해도 벌써 변해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정코 불생불멸 법문(不生不滅法門)에 들어서,
진실로 면전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을 사무친 사람은,
일체의 현전상(現前相)이 순전히 정식(情識) 만으로 망령되이 세워진,
자기만의 허망한 소견임을 알게 되며,
이야말로 <만법이 유식임>(萬法唯識)을 말하는 근거인 겁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일찍이 한 법도 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이를 일러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한다」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결국 설법(說法)이란,
말함도 없고, <드러내 보일 것>(示現)도 없는 것이
<참된 설법>(眞說)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법시(法施)란 자신이 기왕에 보고 듣고 배워서 기억해 두었던 것을
남에게 말해주는 게 아니라,
― 그것은 세속의 강의나 강연입니다 ―
순전히 천진(天眞)한 자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한 생각이
온누리를 껴잡는 것이라야 참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끝내 인간의 범용(凡庸)한 지견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일체의 이치(理致)나 도리(道理)가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요약하건대, 선지식이란,
범부가 미혹 때문에 스스로 지은 업영(業影)임을 깨닫지 못하고,
면전에 전개된 온갖 경계를 지나면서 이에 까닭 없이 막히고 걸리고 하면서
헐떡이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는,
선교(善巧)한 방편을 베풀어서, 붙은 것은 떼어주고,
막힌 것은 뚫어주고 하는 것이 바로 선지식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스스로는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 협열(狹劣)한 소견으로
성지(聖旨)를 어둡히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 * *
인연 따라 나는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습니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듯이,
― 여기서 물체가 바로 <인연>이고 그 인연에 의해서 그림자가 생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만약 그림자가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인연'을 기다릴 것 없이
혼자서 저절로 성립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즉 꿈이나 환(幻)과 같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타(他),
즉 인연에 의지해야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기는 것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름이 있고 모습이 있는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다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은
곧 꿈이나 환처럼 실(實)다운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 이건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셈이며,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마찬가집니다.
결국 <온갖 것>이 <온갖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몸도 마음도 이 세상도 다 빈 이름만 있을 뿐이요,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꿰뚫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얻는 요체인 겁니다.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간파(看破)하여
실상의 해탈을 얻을지언정
헛되이 그림자나 메아리에 현혹되어서
사주니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따위의 속류(俗流)들의 잠꼬대에
영합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모름지기 영향지류(影響之類),
즉 그림자나 메아리에 현혹되어 이쪽 저쪽으로 휘둘리는 사람은 제도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마땅히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 * *
연생(緣生)하는 모든 법은 다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면전엔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꿈속에서 보는 것과 같은 온갖 사물을 실체인 줄로 오인해서,
이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면서 살아온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이것이 업(業)으로 엉겨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겁니다.
결국 불법(佛法)의 오묘한 뜻을 깊이 깨달아 살펴서,
온갖 법의 실상(實相)을 밝히고 보면,
지금 현재 면전에는 진실로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한 것이니,
현재 면전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법은,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다만 범부의 정식(情識)으로 헛되이 지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경전에서도 이르기를,
「일체 유위법이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했던 것인데,
사람들이 그 말만을 배우고 <마음의 눈>(心眼)은 조금도 열릴 기미가 없는 거죠.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나이가 얼마>라는 생각 등이 없어야 보살이라 한다」고 했던 것이니,
모처럼의 불법의 인연을 소중히 알아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철저히 구명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젊은 스님이 평소 열심히 염불하고 정진하다가,
어느 날, 절에 불공 드리러 온 처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을 뺏겨서 번민하던 끝에, ···
어찌어찌 하다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아기자기하게 잘 살다가 가세가 기울고 재앙을 만나서,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객지를 유랑하던 끝에 도중에서 자식 하나를 역병으로 잃고,
길가에 묻고 떠나게 되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 하였겠어요?
그러다가 부부가 함께 가지도 못하고 서로 헤어져서
낯선 객지를 떠돌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그 슬픔과 고통이 너무도 우심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끝에
문득 꿈에서 깨고 보니, ···
자신은 인자하신 부처님이 굽어보시는 가운데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드리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던 거예요.
이에 젊은 중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워서
다시는 연연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새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주의에 물들어 있는 젊은이들이
이런 설법에 귀나 기울일는지 알 수 없군요.
예나 이제나 인정의 흐름은 다를 게 없습니다.
* * *
본래 태어난 일도 없는데 무엇이 완전히 소멸하겠어요?
― 연기설(緣起說)을 철저히 깨달아 살피도록 하세요.
그래서 모든 법이 본래 남(生)이 없음을 사무쳐야 합니다.
요컨대,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공적(空寂)하여
티끌 하나 실다움이 없는 겁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인데, ···
티끌 하나 없는 가운데서 태어남(生)을 보고,
태어남을 보기 때문에 죽음(滅)을 보게 되고,
이렇게 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마치 실제인 양 면전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현혹(眩惑)한 지가 수천 년이 된 겁니다.
이 세상은, ― 일여도(一如道)는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공연히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그 모양새가 너무 초라해서 불법에 인연을 맺고는
오래 참구(參究)한 끝에 <두려움 없음>을 증득하기도 하고, ···
모두가 까닭 없는 헛된 짓입니다.
결국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도 <죽음 앞에 초연히 두려움 없는 자>도 진실에
상응하기는 글렀어요.
요컨대,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과 <끊임없이 유동(流動)하는 이 세계>가
실제인 줄로 알고,
<마음 뿐>(唯心)인 도리를 등지고 바깥으로 다른 것을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고,
간택(揀擇)하는 짓을 그만두기 전에는 결코 <성스러운 뜻>(聖旨)에 계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 *
세상사(世上事)는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다만 인연 따라 일어나는,
꿈 같고 환(幻) 같은 것이어서, 전혀 실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모랫벌에 모래성(城)이 생겼다가는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모랫벌의 모래 자체야 도무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끝끝내 생멸도 없고 가고 옴도 없어서, 항상 <지금 있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국소적(局所的)인 인식작용이 이 <참되고 여여한 법의 성품>(眞如法性)
가운데서 번성(繁盛)하게 생멸하고 왕래하는 모습을 취하여
실체로 삼고는 이에 현혹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이 <움직이는 경계>를 좇으면서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며
일으키는 온갖 알음알이는 이것이 번뇌(煩惱)요, 헛된 망식(妄識)일 뿐이요.
결코 <나의 참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참 마음>(眞心)은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고,
<망령된 마음>(妄心)은 허망하여 나(生)는 일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참 마음>의 거울에 비친 <업의 그림자>(業影)를 붙잡아서 실체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世上)인 겁니다.
결국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시작도 끝도 없어서, 시간, 공간적인 일체의 변천상(變遷相)이 몽땅 허망하여
티끌만큼도 움직이는 모습이 없음을 꿰뚫어 보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이라 하며, 견도(見道)한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 * *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는 말은,
그와 같은 물건은, 그런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실제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헛된 형상(形相)에 헷갈린 사람들이 면전에서 생멸하는 모습과 가고 오는 모습을 보아서,
그것을 실체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게 현실상인 겁니다.
지금 이렇게 묻고, 이렇게 대답하는 것도 모두 공적(空寂)하여서,
당신이 물은 일이 없고, 나 또한 대답한 일이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알아야 합니다.
― 만법의 무생(無生)을 사무치는 데는 <모래벌 법문>이 꽤 괜찮습니다. ―
한 무리의 어린 꼬마들이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재잘거리며 놀고 있습니다.
길도 만들고 '터널'도 만들고, 동산도 만들고, 집도 짓고,
울타리도 만들고, 모래성도 쌓고 하면서
그렇게 네 것, 내 것을 가리며 재미나게 놀다가,
조금만 경우에 어긋나면 울고불고 싸우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모두 집으로 돌아갈 때면
그토록 공들여 만들었던 것들을 마구 발로 뭉개버리고
모래사장을 떠나버리지 않습니까? ···
모두 떠나버린 뒤의 모래사장은 적막하기만 하고요.
그런데 그토록 아기자기하게 쌓아올렸던 모래 구조물들은
과연 실제로 생겼던 걸까요?
모래사장은 꼬마들이 한창 신명나게 놀고 있을 때나,
해가 저물어서 다 떠나버린 다음에나 늘 그대로요,
조금도 늘거나 준 일이 없지 않습니까?
영겁에서 영겁에 이르도록 모래사장은 늘 그대로요,
조금도 변하거나 옮긴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면,
그렇다면 그 아기자기하던 현실의 놀음놀이는 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허구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라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즉 근본은 조금도 변천하는 일이 없는데,
다만 인연 따라 그 겉모습만 변하는 듯이 보이는 거죠.
따라서 사람들이 인연 따라 생멸하는 외양(外樣)만을 좇는다면
끊임없이 산하대지(山河大地)의 현혹하는 바가 되어서
도무지 그 안목(眼目)이 밝아질 기약이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경에도 이르기를,
「모든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닌 줄만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했던 겁니다.
* * *
깨닫고 나면 깨닫기 전과 꼭 같습니다.
지금처럼 웃을 일이 있으면 웃고, 울 일이 있으면 울고,
시비득실(是非得失)에 얽매인 마음인 채로 시비도 가리고,
득실도 따지고 하면서 지금처럼 세상을 보내게 됩니다.
다만 그와 같은 일들이 다 허망해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므로
종일토록 이와 같은 잡다한 일들을 굴리면서 세상사를 꾸려나가지만,
끝내는 <없는 것>을 굴리는 것이므로
그 뒤끝이 항상 깨끗하고 맑고 고요할 뿐입니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도
―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망설이는 일이 없고,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허둥거리는 일이 없으며,
일이 끝난 다음에도 후회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무상(無常)한 것이니,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기 때문이며,
생멸법이 이미 멸하면 적멸(寂滅)이 낙(樂)이 되느니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낙이라고 한 것은 고(苦)를 배제한 <느낌>으로서의 낙(樂)이 아니니,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친 자에게만 주어지는 무생낙(無生樂)이요,
먼저는 시끄러웠다가 나중에야 고요해지는 적멸(寂滅)이 아닌 겁니다.
따라서 이 구경(究竟)의 적멸은 학인에 의해 증득되는 것이 아니며,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가지런한 자리에서 얻어지는 지복(至福)인 겁니다.
* * *
초발심에서부터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발심>을 해야만 합니다.
결국 아무 일도 없는 <일여한 법계>(一如法界)에서
범부가 헛되이 생멸(生滅)을 보고 거래(去來)를 봄으로써
이 세상이 마치 실제(實際)인 양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刻印)되어,
<나>와 <내 것>, 나아가 이 몸과 마음과 세계가 실유(實有)로 오인되어,
이를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고 집착하면서,
꿈속을 헤매듯 살아오기를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결국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전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본래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게 진실인 겁니다.
― 즉 저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간파(看破)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아무 일도 없이 공적(空寂)하다는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간상이 상주한다」(世間相常住)는 경전의 말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밥을 먹기는 먹는데, 술을 마시긴 마시는데,
거기에 <먹고 마시는 주체(主體)가 없다>는 게
바로 연기설(緣起說)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시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마시는 일>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결국 이 세상 모든 일은 공적(空寂)하여, 끝내 아무 일도 없는데,
다만 어리석은 중생들이 온갖 형상(相)을 실제인 줄 오인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경계에 끄달려서 한 시도 쉴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모습(相)이 모습이 아닌 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끝내 허망한 지각활동(知覺活動)을 실제인 줄 알고 이를 좇는다면
걸음걸음마다에서 귀신과 사귀리니,
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욱 용맹정진하세요.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삼매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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