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빠알리니까야로 본 금강경(金剛經)

수선님 2018. 6. 17. 12:52

 

빠알리니까야로 본 금강경(金剛經)

 

 

 

처음 금강경을 접하였을 때 대략 난감하였다. 뜻을 전혀 파악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글씨의 한문으로 된 책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번역을 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강사스님의 강의를 들어 보아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래서 외우기로 하였다. 외우다 보면 뜻이 자연스럽게 와 닿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모두 5.249자에 달한다. 물론 한자어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금강경을 대부분 독송한다. 금강경 독송을 하면 가피를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강경을 보면 수지독송가피에 대하여 수 없이 나온다. 그것도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엄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금강경 독송하는 것이 마치 복을 바라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5249자에 달하는 금강경을 모두 다 외었어도 뜻을 다 알 수 없었다. 일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든가 응무소주이생기심, 약이색견아이음성구아 같은 게송이었다. 왜 이해가 잘 가지 않은 것일까? 나중에 안일이지만 금강경은 압축된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편찬자가 이곳저곳에서 비유나 게송, 문구를 가져와서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 즉 보살사상, 공사상 등을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金剛經

 

 

이렇게 고도로 압축된 금강경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내용은 어려워 보인다. 어려우니 심오해 보인다. 그래서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다. 해설자마다 다른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한문자체가 난해하고 경의 내용 또한 고도로 압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약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앞뒤 문장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한줄이 빠진듯이 보여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난해하고 심오하게 보이는 금강경을 독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고 대다수 종단에서도 역시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수지독송공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금 은 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 이가 있고, 만약에 또 다른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경전을 가지고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서 설명하여 준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리라.”와 같은 문구때문일 것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없는 대승경전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은 시대의 산물이라 한다. 시대의 요청에 의하여 만들어진 경전으로서 시대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금강경이 출현한 것은 시대의 요청 때문이다. 불멸후 5세기, 즉 기원전후에 부파불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였을 때 나온 것이다. 그런 내용이 어후말세(於後末世)능수지독송차경(能受持讀誦此經)’이라든가, ‘수지독송차경(受持讀誦此經)약시인경천(若爲人輕賤)’등 과 같은 표현이다. 요즘 시대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이다. 금강경이 나온 시대에나 적합한 말이다. 따라서 금강경을 현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금강경은 그 시대의 산물로서 그 시대의 역할을 다 하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금강경은 이곳저곳에서 비유나 게송이 많다. 그리고 인상적인 기억에 남을 문구가 많다. 그런 문구의 원천은 어디일까?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금강경에 등장하는 게송이나 비유, 문장이 대부분 빠알리 니까야에서 유래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것일까?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뗏목의 비유

 

 

금강경

 

如來常設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러한 이유로 여래가 항상 너희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설명한 법은 마치 강건너가는데 쓰는 뗏목이나 널조각과 같다. 그런데 마음이 밝으면 즉, 강건너 갔거든 배를 내려야 되는데, 강을 건너가고도 여전히 배를 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金剛經, 6 正信希有分 -정신희유분)

 

 

맛지마니까 M22

 

Kathakārī ca so bhikkhave puriso tasmi kulle kiccakārī assa? Idha bhikkhave tassa purisassa uttiṇṇassa pāra gatassa evamassa: bahukāro kho me aya kullo, imāha kulla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 uttiṇṇo, yannūnāha ima kulla thale vā ussādetvā4 udake vā opilāpetvā yena kāma pakkameyyanti. Eva kārī kho so bhikkhave puriso tasmi kulle kiccakārī assa. Evameva kho bhikkhave kullūpamo mayā dhammo desito nittharaatthāya no gahaatthāya. Kullūpama vo bhikkhave dhamma desita ājānantehi dhammā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

 

(알라갓두빠마경- Alagaddūpamasutta-뱀에 대한비유의 경, 맛지마니까 M22, 전재성님역)

 

 

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가 뗏목의 바유이다. 금강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법상응사하황비법(法尙應捨 何況非法)’이라 하였다.

 

무비스님의 번역에 따르면 옳은 법()도 오히려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른 법[非法]이겠는가?”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법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집뿐만 아니라 법집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아공법공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이는 부파불교시대에 법에 집착하여 수행은 게을리하고 교학에만 열중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라 본다. 또 금강경이 출현할 당시 최대부파를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논리를 부수기 위해서이었다고 본다.

 

설일체유부는 구경법으로서 75법이 마치 원소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의미로 일체유부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런 설일체유부의 논리를 지적하기 위하여 옳은 법()도 오히려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른 법[非法]이겠는가?”고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금강경의 법공논리는 문제가 있다.

 

오로지 금강경밖에 모르는 불자들은 뗏목의 비유가 오로지 금강경에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뗏목의 비유에 대한 원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맛지마니까야에도 뗏목의 비유가 있다. 시기적으로 맛지마니까야가 금강경 보다 훨씬 더 이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금강경 편찬자는 맛지마니까야의 뗏목의 비유를 가져와서 법공의 논리를 편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뗏목의 비유를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부처님이 설하신 뗏목의 비유는 금강경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이는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M22)”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타고 온 뗏목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다음에 탈 사람을 위해서 뭍에 올려 놓거나 흘러가지 않도록 물가에 매어 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각주를 보면 그러나 버려야 할 것은 뗏목의 비유처럼 포기되어야 할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말이지, 선한 진리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전재성박사)”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만약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에서처럼 옳은 법마저 버린다면, 그래서 법도 공한 것이라 한다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허무주의 빠져 막행막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금강경에서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의 법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들어 법공을 역설하였지만, 도덕적허무주의와 막행막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지날 뗏목의 비유를 보면 올바른 진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였다.

 

 

2. 포말의 비유

 

 

금강경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모든 작위(作爲)가 있는 것은 마치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하도록 하라

 

(金剛經, 32 應化非眞分 –응화비진분, 무비스님역)

 

 

상윳따니까야 S22:95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
ā saññā

sakhārā kadalūpamā,
M
āyūpamañca viññāa

dīpitādiccabandhunā.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페나삔두빠마경-Pheapiṇḍūpama sutta-포말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5,전재성님역)

 

 

법구경 Dhp46

 

Pheūpama kāyam-ima viditvā, 페누빠망 까야미망 위디뜨와

Marīcidhamma abhisambudhāno,   마리찌담망 아비삼부다노
Chetv
āna Mārassa papupphakāni,   체뜨와나 마랏사 빠뿝파까니
Adassana
Maccurājassa gacche.  아닷사낭 맛쭈라잣사 갓체

 

이 몸은 물거품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 같다고 깨닫는 님은

악마의 꽃을 잘라버리고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

 

(법구경, 뿝파왁가-Pupphavagga-꽃의 품 Dhp46, 전재성님역)

 

 

 

금강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송 중의 하나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일 것이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유위법이라는 말이 나온다. 유위법이 있으면 무위법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위법은 현상계를 설명하는 것이고, 무위법은 절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용수의 공가중(空假中)  삼제에 따르면, 가에 해당되는 것이 유위법이고, 공에 해당되는 것이 무위법이다. 이는 또 속제와 진제로 구별될 수 있다. 그래서 유위법으로 설명되는 현상계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가시설(假施說)된 것이라 한다. 가짜가 아니라 가시설된 것이다. 이렇게 임시적이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유위법에 대하여 금강경에서는 “마치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빠알리니까에서도 꿈, 물거품 등과 같은 게송이 있다. 빠알리니까야가 먼저 성립되었으므로 원조가 된다. 금강경 편찬자가 빠알리니까에 있는 게송을 차용하여 공의 논리를 설명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상윳따니까야에 표현된 게송은 오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오온이 모두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물질에 대하여 포말로, 느낌에 대하여 물거품으로, 지각에 대하여 아자랑이로, 형성에 대하여 파초로, 정신에 대하여 환술로 표현하였다.

 

이는 금강경과 다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일체형성된 모든 것들, 즉 무위법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일체유위법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 표현하였지만,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오온으로 표현된 인간으로 한정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인간을 떠나 다른 그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오온이 공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도 금강경 사구게와 유사한 게송을 발견하였다. 46번 게송에서 이 몸은 물거품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 같다.(Dhp46)”가 바로 그것이다. 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 하셨을까? 각주에 따르면, 이몸은 머리카락 등처럼 32가지 신체의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 물질적인 다발로소 무력하고 허약하고 오래지속되지 못하고 일시적인 의미에서 거품같다는 것이다.

 

또 아지랑이는 멀리서 보면 형태를 가지고 분명히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공허하고 비어있고 만질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이 몸도 매순간 사멸하고 다시 생겨난다는 의미에서 아지랑이 같다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말하는 아지랑이는 오온에서의 지각으로 비유된다. 지각, 즉 상(, 산냐)은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의 사구게 보다 훨씬 더 이전에 성립된 빠알리니까에서 본 게송은 철저하게 오온에 적용되어 설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진리의 몸을 보는 자

 

 

금강경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육신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는 볼 수 없으리라.

 

(金剛經, 26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무비스님역)

 

 

상윳따니까야 S22:87

 

Ala vakkali. Ki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Ma passanto dhamma passati.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박깔리의 경-Vakkali sutta,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재성님역)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로 시작되는 게송 역시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처음접한 사람들은 이 게송의 의미를 잘 모른다. 왜냐하면 한줄이 빠졌기 때문이다.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라는 문구가 붙어야 하나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 한 것이다.

 

한 줄이 빠진채 해석하려 하니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구마라즙이 한역하는 과정에서 빠진 것이라 한다. 그 빠진 내용이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빠진 내용과 함께 다시 구성해 보면 만약 육신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는 볼 수 없으리라.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고 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부처님의 매력적인 겉모양, 32상만 보지 말고 부처님의 진리의 몸을 보라는 것이다. 진리의 몸은 법신이다. 법신을 보았을 때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이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왁깔리경(S22:87)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라 하였다. 부처님의 제자 왁깔리가 부처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설법을 하여도 얼굴만 빤히 쳐다 볼 뿐 설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부처님이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라고 하여 법신(法身)으로서 부처님의 몸을 볼 것을 요청한 것이다.

 

 

4.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보시하여도

 

 

금강경

 

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 等身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 等身布施
수보리 약유선남자선녀인 초일분 이항하사 등신보시 중일분 부이항하사 등신보시
如是無量 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여시무량 백천만억겁 이신보시 약부유인 문차경전 신심불역 기복승피 하황서사
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堤,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수지독송 위인해설 수보리, 이요언지 시경 유불가사의 불가칭량 무변공덕,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오전의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또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때에 또한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해서, 이렇게 하기를 한량없는 백 천 만 억겁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느니라.

그런데 하물며 이 경전을 쓰고 출판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해설하여 주는 일이겠는가?

 

(金剛經, 15 持經功德分-지경공덕분, 무비스님역)

 

 

상윳따니까야 S20:4

 

Yo bhikkhave, pubbahasamaya okkhāsata dāna dadeyya, yo majjhantika samaya okkhāsata dāna dadeyya, yo sāyahasamaya okkhāsata dāna dadeyya, yo vā pubbahasamaya antamaso gadduhanamattampi metta citta bhāveyya, yo vā majjhantika samaya antamaso gadduhanamattampi metta citta bhāveyya, yo vā sāyahasamaya antamaso gadduhanamattampi metta citta bhāveyya, ida tato mahapphalatara.

Tasmātiha bhikkhave, eva sikkhitabba: mettā no cetovimutti bhāvitā bhavissati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ti. Eva hi vo bhikkhave sikkhitabb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아침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을 보시하고 점심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을 보시하고 저녁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을 보시하는 것보다 아침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거나 점심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거나 저녁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 닦는 것이 보다 커다란 과보가 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우리는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옥카사따경-Okkhāsatasutta-백 가마솥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4, 전재성님역)

 

금강경에는 과장된 표현이 많다.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적 스케일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성이 없어서 황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표현 중의 하나가 ‘항하사(恒河沙)’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에 대한 비유이다.

 

지경공덕분에서 보시공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 세 번에 걸쳐서 항하사만큼이나 많은 ‘몸보시(身布施)’를 하더라도 금강경을 알려 주는 보시가 더 수승함을 말한다. 그런 몸보시는 어떤 것일까?

 

보시에는 일반적으로 재물로 베푸는 재시(財施)와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법시(法施), 그리고 두려움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제해주는 무외시(無畏施) 이렇게 세 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더 있다고 한다.  몸보시(身布施)’음성보시(布施)’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보시가 있다고 한다. 이중 몸보시를 육보시(布施)’보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따까나 설화에서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육보시 이야기는 설산동자의 투신설화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한 몸 기꺼이 야차의 먹이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육보시에 대한 이야기를 금강경에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금강경의 유통을 위한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자의 공덕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항하사만큼의 육보시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 니까야에도 유사한 비유가 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보시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금강경 처럼 허황되고 황당한 표현은 아니다. 아침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백가마솥분량의 보시는 실현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항하사에 해당되는 육보시는 우주적 스케일로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황당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자애를 말씀 하셨다.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 세 번에 걸쳐 백가마 솥에 해당되는 보시를 한다고 할지라도 아침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는 것이 훨씬 더 큰과보(mahapphala)’를 가져 올 것이라 하였다. 바로 이런 점이 금강경과 다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알려 주는 것이 우주적 스케일의 과보라 하였으나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慈心解脫)’의 과보가 더 크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5.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금강경

 

須菩堤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불야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是故須菩堤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시고수보리 제보살 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 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 기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세상을 장엄(莊嚴)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보살이 세상을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며,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텅 빈[淸淨] 마음을 낼지니라.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반듯이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그 외의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그래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金剛經, 10 莊嚴淨土分-장엄정토분, 무비스님역)

 

 

상윳따니까야 S35:136

 

(1)

Rūpā saddā rasā gandhā

phassā dhammā ca keval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ca

yāvatatthīti vuccati.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2)

Sadevakassa lokassa ete

vo sukhasammatā

Yattha ceto nirujjhanti

ta tesa dukkhasammata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3)

Sukhanti diṭṭhamariyehi

sakkāyassuparodhana

Paccanīkamida hoti

sabbalokena passata

 

개체가 소멸하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

 

 

(4)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5)

Passa dhamma durājāna

sammūehattha aviddasū

Nivutāna tamo hoti

andhakāro apassata,

 

이 알기 어려운 원리를 보라.

무지한 자는 여기서 미혹되니,

미혹된 자에게는 암흑이며

보지 못한 자에게는 어둠이다.

 

 

 

(6)

satañca vivaa hoti

āloko passatāmiva

Santike na vijānanti

magā dhammassa akovidā.

 

참사람에게는 열려 있고

보는 자에게는 광명이라

위대한 가르침을 아는 자들은

가까이에서 그것을 인식하네.

 

 

(7)

Bhavarāgaparetehi

bhavasotānusārihi

Māradheyyānupannehi

nāya dhammo susammudho.

 

존재의 탐욕에 굴복하여

존재의 흐름을 따라 흐르면

악마의 영토에 들어가

이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네.

 

 

(8)

Ko nu aññatra mariyehi

pada sambuddhamarahati.

Yampada sammadaññāya

parinibbanti anāsavāti.

 

거룩한 이를 빼놓고

누가 도데체 그 길을 잘 알아

번뇌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님은

길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리.

 

(빳타마루빠라마경-Pathamaruparamasutta-형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136,전재성님역)

 

 

 응무소주이생기심문구는 유명하다. 풀이하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왜 유명할까? 그것은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사들이 금강경의 예를 들어 설법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육조혜능이 나무를 팔러 갔다가 우연히 금강경에서 이 대목을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훤히 열렸다는 바로 그 문구이다. 하지만 금강경을 처음 접한 불자들은 왜 이 문구가 의미하는 것을 잘 모른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하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에 따르면 혜능은 응무소주이생기심문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 대한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

 

 

何期自性本自淸淨

何期自性本不生滅.

何期自性本自具足.

何期自性本無動搖.

何期自性能生萬法

 

나의 자성이 본래 저절로 청정하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본래로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본래 저절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 자성이 본래로 아무런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 자성이 능히 일체 만법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혜능은 응무소주이생기심문구를 통하여 자성청정, 불생불멸 등을 노래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육조혜능은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수행의 지침,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선불교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을 텅 빈[淸淨] 마음을 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있게 만든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 간과 된 듯 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만 따로 떼어 내어 자성청정, 불생불멸의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금강경에서 언급된 여섯가지 감각대상에 관한 것은 빠알리니까야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S35, Saāyatana Sayutta)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 귀 등 여섯가지 감각능력이 형상, 소리 등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특히 괴로움이라는 사실()은 해제에 따르면, 감각능력과 감각대상과 감각의식 이렇게 세 가지가 화합(三事和合)하여 이루어지는 접촉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접촉은 주관적 현상도 아니고 객관적 현상도 아니라 한다. 단지 그것들에 의해서 조건지어지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라고 정형구로 설명된다.

 

이와 같은 접촉결과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으로 부처님은 설명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접촉으로 발생된 모든 것들이 결국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범부들은 괴로워 하지만 생멸의 원리를 깨달은 자들은 오히려 즐거운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범부와 깨달은 자들은 정반대로 사실을 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셨다.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이런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불사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금강경과 다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따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자성청정심을 말하였으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접촉의 원리를 알아 열반을 실현 하는 것이라 하였다. .

 

 

6. 갠지스강 모래의 비유

 

 

금강경

 

須菩堤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 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 여항하중 소유사수 여시사등 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須菩堤言 甚多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영위다부 수보리언 심다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須菩堤  我今實言告汝 若有 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
(수보리  아금실언고여 약유 선남자선녀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 삼천대천)
世界 利用布施 得福多不.
(세계 이용보시 득복다부)
須菩堤言 甚多世尊

(수보리언 심다세존)

佛告須菩堤 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爲他人說此福德勝前 福德.
(불고수보리 약 선남 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 수지 사구게등위타인설차복덕승전 복덕.)

“수보리야,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그렇게 많은 항하강이 있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그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의 수는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저 모든 항하강의 수 만 하여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그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이르리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저 항하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 은 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였다면 그가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준다면 이 일의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金剛經, 11 無爲福勝分-무위복승분, 무비스님역)

 

 

상윳따니까야 S20:2

 

ta kimmaññatha bhikkhave, katamannukho bahutara yo vāya mayā paritto nakhasikhāya pasu āropito, aya vā mahāpahav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많은가?”

 

 

Etadeva bhante, bahutara yadida mahāpahavī. Appamattakoya bhagavatā paritto nakhasikhāya pasu āropito. Sakhampi na upeti, upanidhimpi na upeti, kalabhāgampi na upeti mahāpahavi upanidhāya bhagavatā paritto nakhasikhāya pasu āropito'ti.

 

[수행승]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많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는  아주 적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를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헤아릴 것도 못되고 비유할 것도 못되며 아주 적은 부분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Eva meva kho bhikkhave, appakā te sattā ye manussesu paccājāyanti. Atha kho eteva bahutarā sattā ye aññatra manussehi paccājāyanti.

Tasmātiha bhikkhave, eva sikkhitabba: "appamattā viharissāmā"ti eva hi vo bhikkhave, sikkhitabb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은 훨씬 적고 인간이 아닌 다른 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은 훨씬 많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우리는 방일하지 않으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나카시카경-Nakhasikhāsutta-손톱 끝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2,전재성님역)

 

 

금강경에서는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식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주로 보시공덕을 설명할 때 사용한다. 그런 보시는 재보시가 아니라 법보시이다. 즉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라도 남에게 알려 주면 항하사 같은 삼천대천세계,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여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과장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에서도 과장된 비유를 통한 제자들과 문답식 법문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런점은 금강경과 너무나 유사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빠알리니까에서는 비유가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는 것이다. 대지의 흙과 손톱끝먼지 비유는 누가 보아도 허황되거나 황당한 비유가 아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보는 항하사와 삼천대천세계의 비유는 지나치다 못해 황당하다. 더구나 저 항하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 은 보화(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 世界)”라 하였는데, 이는 삼천대천세계가 항하의 모래수만큼이나 된다는 뜻이고 그런 세계를 금은 보화로 가득채웠다고 하는 내용은 과장이 지나쳐 현실성이 없다. 우주적 스케일의 비유를 단지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준다면라고 말하여 금강경을 알리는 공덕이 더 큼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대지의 흙과 손톱끝의 흙의 비유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에 적용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 나기 어려움을 손톱끝의 흙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7.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금강경

 

爾所 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이소 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堤,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시명위심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들을 여래는 모두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
金剛經, 18 一體同觀分 , 일체동관분, 무비스님역)

 

법구경 Dhp348

 

Muñca pure muñca pacchato,       문짜 뿌레 문짜 빳차또
Majjhe muñca bhavassa p
āragū,    맞제 문짜 바와싸 빠리구
Sabbattha vimuttam
ānaso          삽밭타 위뭍따마나소
Na puna j
ātijara upehisi.      나 뿌나 자띠자랑 우뻬히시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서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서도 벗어나라.

존재의 피안에 도달하여 마음이 일체에서 벗어나면,

그대는 결코 다시 태어남과 늙음에 다가가지 않는다.

 

(법구경, 딴하왁가-Tahāvagga-갈애의 품 Dhp348, 전재성님역)

 

  빠알리니까야로 본 금강경.docx

 

 

금강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말이었다. 왜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다고 하였을까? 이전 문구에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라 하였지만 금강경 문구만 보아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떡장수 할머니를 등장시켜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려고 하시오?”라 하여 고정된 마음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늘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라 한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도 금강경 게송과 유사한 게송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서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서도 벗어나라.”라는 문구는 틀림없이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과 똑 같은 내용이다. 그렇다면 금강경 편찬자는 법구경의 348번 게송을 이용하여 금강경에서 보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다 아는 여래를 설명하고자 함일까. 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는 부처님, 실지실견(悉知悉見)하는 부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법구경 게송을 이용한 것일까? 법구경이 금강경 보다 먼저 성립되었으므로 법구경을 잘 아는 금강경 편찬자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놀랍게도 법구경에 금강경에 실려 있는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과 똑같은 문구가 그대로 실려 있다. 단지 순서만 현재와 미래가 바뀌어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서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서도 벗어나라.(Muñca pure muñca pacchato Majjhe muñca bhavassa pāragū, Dhp348)”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뜻일까?

 

법구경 348번 게송에서 과거에서 벗어나라.(Muñca pure)”라는 뜻은 과거의 존재의 다발(오온)과 관계된 애착, 소망, 욕망, 소유, 망상, 집착, 갈애에서 벗어나라.(DhpA.IV.63)’라고 설명된다. 이렇게 미래, 현재 역시 오취온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렇게 오온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존재의 피안에 도달(bhavassa pāragū)’ 할 것이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오온)과 열두가지 감역(십이처), 열여덟가지 인식의 세계(십팔계)와 같은 조건지어진 것에서 마음을 해탈하여 보다 높은 지혜, 완전한 앎, 사라짐, 지멸, 선정, 깨달음을 통하여 세 가지 존재의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세 가지 존재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한다.

 

이렇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마음이 일체에서 벗어나는 것(Sabbattha vimuttamānaso)’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을 말한다. 그런상태가 다시태어남이 없는 불사(不死, atama)라 하였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지켜 보는 부처님으로 묘사하는데 활용하였지만, 법구경에서는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을 벗어나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로 묘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같은 문구라도 쓰임새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

 

이상 일곱가지 예를 들어 금강경에 표현된 빠알리 니까야 문구를 살펴 보았다. 학자가 아닌 보통불자의 해석이라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비교한 결과 금강경 편찬자는 빠알리니까야를 잘 아는 논사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빠알리니까야에 풍부하게 실려 있는 게송과 비유를 이용하여 대승불교의 법공사상(뗏목의 비유), 유위법의 허망함(포말의 비유), 진리의 몸(법신) 등을 설명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빠알리 니까야의 표현을 빌어와 나타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금강경이 출현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부파불교시대 수행보다 소모적인 교리논쟁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금강경이 출현할 당시 최대부파를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이다. 구경법 75가지에 대하여 실유(法有)로 설명하는 유부의 법집을 논파하기 위하여 법공(法空)의 논리를 편 흔적이 뗏목의 비유에서 보인다.

 

또 인용된 게송과 비유를 빠알리 니까야와 비교해 보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과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과 관련하여 자성청정심을 설명하는가 하면,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지켜 보는 부처님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약이색견아로 시작되는 게송에서는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가 빠져 있다. 이는 빠알리니까야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에 해당된다. 이렇게 한 줄이 빠짐에 따라 문맥이 연결되지 않아 초보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 결과 금강경이 난해하고 심오한 경전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금강경과 빠알리니까야를 비교해 보면 원조는 빠알리니까야임을 알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의 성립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리지날 텍스트를 접하면 금강경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금강경은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의 요청에 따라 편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에도 그 내용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지금 시대는 부파불교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은 이제 빠알리니까야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2013-05-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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