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출처; 한국 명상원
IMPORT!ANCE OF THE DOCTRINE
The doctrine of Paṭiccasamuppāda or Dependent Origination is very important in Buddhism.
The bodhisatta began with dependent origination when he reflected deeply on the nature of existence and attained Enlightenment.
1. 12연기의 중요성
12연기(paṭiccasamuppāda)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보살은 12연기로 존재의 속성에 대해 깊은 숙고를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He first pondered old age and death, as did every other bodhisatta when he was about to become the Buddha in his last existence.
For it was only after seeing the old, the sick and the dead that the bodhisatta saw the ascetic (samañña) and renounced the world in search of the ageless and the deathless Dhamma. He had seen the evils of life in old age, sickness and death.
보살은 다른 보살들이 마지막 생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늘 그랬던 것처럼 먼저 늙음과 죽음에 관해 명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늙은이와 병든 사람, 그리고 시체를 보고 나서 사문(sāmañña)를 만났고 늙음과 죽음이 없는 법을 구하기 위해 출가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늙음, 병듬, 죽음이라는 삶의 괴로움을 보았습니다.
Every living being wants to avoid these evils of life but there is no end to these evils which follow him in one existence after another. In view of this endless process of life all living beings appear to be in bondage and subject to suffering.
모든 중생들은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따라다니는 이런 괴로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삶의 유전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중생들은 속박에 얽매여 있고 괴로움을 겪어야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Life is in fact an infinite process of births and deaths.
사실 삶은 태어남과 죽음의 무한한 연속입니다.
The fate of fowls and ducks is terrible indeed. Some are eaten up while still in the eggs. If they emerge from the eggs they do not live long but are killed when they grow up a little. They are born only to be killed for human consumption. If the fate of a living being is thus to be repeatedly killed it is gloomy and frightful indeed.
닭과 오리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몇몇은 아직 부화되기도 전에 잡아 먹힙니다. 알에서 부화된다 해도 얼마 살지 못하고 조금 자랐을 때 도살됩니다. 그들은 오직 인류의 소비를 위해 도살되려고 태어났을 뿐입니다. 만약 한 생명이 이렇게 계속해서 도살되는 운명이라면 참으로 암울하고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But the fowls and ducks appear to be well content with their lot in life. They apparently enjoy life, quacking, crowing, eating and fighting with one another.
They may think that they have a lot of time to live although in fact they have little time to be happy, their life being a matter of days or months, with each of them coming into existence and then dying after a short time.
하지만 닭과 오리는 삶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서로 싸우거나 꽥꽥거리거나 모이를 주어먹거나 하며 확실히 삶을 즐깁니다. 그들은 아마 살아갈 시간이 아주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즐거워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며칠이나 몇 달의 문제로 태어나서 얼마 안 있어 곧 죽습니다.
The span of human life, too, is not very long. For the man in his fifties or sixties the past seems in retrospect as recent as yesterday.
Sixty or seventy years on earth is a day in the life of a deva which is, however, very short in the eyes of a Brahma who may live as long as the duration of
the worlds (kappa).
사람의 수명 또한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50, 60세가 되면 과거는 마치 어제적일처럼 회고됩니다. 지상의 60년 또는 70년은 천신(deva)의 하루에 해당합니다만 겁(kappa)의 단위로 사는 범천(Brahma)의 눈으로 볼 때는 천신의 수명도 짧은 것입니다.
But even the Brahma who outlives hundreds of worlds is insignificant and his
life is short in the context of samsaric eternity. Devas and Brahmæs, too, have to age and die eventually.
하지만 몇 백 겁 이상을 사는 범천조차도 영원한 윤회에 비추어 볼 때 대수롭지 않으며 수명이 짧은 것입니다. 천신과 범천도 언젠가는 늙어서 죽습니다.
Although they are not subject to sickness and marked dotage, age tells on them invisibly in due course of time. So every living being has to face old age and death and nobody can escape from these evils of life.
그들은 비록 질병이나 드러나는 노화의 징후는 겪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현듯 나이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은 늙음과 죽음을 겪어야하고 아무도 이런 삶의 괴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REFLECTION OF THE BODHISATTA
Reflecting on the origin of old age, the bodhisatta traced back the chain of dependent origination from the end to the beginning.
2. 보살의 숙고
늙음의 원인을 숙고하면서 보살은 처음부터 연기법의 사슬을 추적해나갔습니다.
Old age and death have their origin in rebirth which in turn is due to kammabhava (condition or kamma for renewed existence.) kammabhava stems from grasping or attachment (upādāna) which is caused by craving (taṇhā).
늙음과 죽음은 다시 태어남을 원인으로 하고 이 다시 태어남은 업으로써의 존재(業有 kamma-bhava)에 기인합니다. 이 업으로써의 존재(業有)는 갈애(taṇhā)로 일어나는 집착(upādāna)에 기인합니다.
Craving arises from feeling (vedanā) which is produced by sense-bases (āyatana) such as eye, visual form, etc. Sense-bases are the product of nāma-rūpa (consciousness and corporeality) which results from viññāṇa (consciousness) which is again caused by nāmarūpa.
갈애는 눈(眼), 형상(色)등의 감각장소(處 āyatana)에 의해 생기는 느낌(受 vedanā)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감각장소는 정신과 물질(名色)로 말미암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에서 일어난 정신과 물질(nāma-rūpa)의 부산물입니다.
The full Pāli texts about Paṭiccasamuppāda attribute viññāṇa to sañkhāra (kammaformations) and sañkhāra to avijjā (ignorance).
12연기에 대한 완전한 빠알리어 경문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원인을 업형성력(상카라)로 돌리고 상카라의 원인을 무명(avijjā)에 돌립니다.
But the bodhisatta’s reflection is confined to the interdependence of næmarþpa and viññāṇa in the present life. In other words, he reflected on the correlation between viññāṇa and næmarþpa, leaving out of account the former’s relation to past existence.
하지만 보살의 숙고는 현생의 정신과 물질(名色),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상호의존에만 국한됩니다.다른 말로해서 보살은 과거생과 관계된 이야기는 남겨둔채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와 정신과 물질(名色)의 상호관계만을 숙고하였습니다.
We may assume therefore that for the yogøs reflection on the present life will suffice to ensure the successful practice of vipassanā.
그래서 우리는 현생에 대한 수행자의 숙고는 성공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보장하기에 충분할것이라고 추정할수 있습니다.
ANULOMA REASONING
The bodhisatta reasoned about the correlation between viññāṇa and nāmarūpa thus: “This viññāṇa has no cause other than nāmarūpa. From nāmarūpa there results viññāṇa; from viññāṇa there arises nāmarūpa. Hence from the correlation between viññāṇa and nāmarūpa there arise birth, old age and death; there may be successive births or successive deaths.”
3. 수순(ANULOMA)하는 추론
보살은 알음알이(識)와 명색(名色)과의 상호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론했습니다.
“이 알음알이(識)는 명색(名色)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명색에서 알음알이가 생기고, 알음알이에서 명색이 생겨난다. 그래서 알음알이와 명색사이의 상호관계에서 태어남(生)이 일어난다. 그래서 연속되는 태어남이나 죽음이 있게 된다.”
Moreover viññāṇa causes nāmarūpa: nāmarūpa causes sense-bases (āyatana). From sense-bases there arises contact; contact leads to feeling, feeling gives rise to craving, craving to grasping, and grasping results in rebirth which in turn leads to old age, death, anxiety, grief and other kinds of mental and physical suffering.
게다가 알음알이(識)는 명색(名色)을 일으키고 명색은 또 감각장소(處 āyatana)를 일으킵니다. 감각장소(處)에서 감각접촉(觸)이 일어납니다. 감각접촉(觸)에서 느낌(受)이 일어나고 느낌에서 갈애(愛)가 일어납니다. 갈애에서 취착(取)이 생기며 취착은 재생으로 이르고 이로써 늙음, 죽음, 불안, 슬픔과 다른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Then the bodhisatta reflected on dependent origination negatively. If there were no viññāṇa there could be no nāmarūpa; if no nāmarūpa, then no āyatana and so on.
The negation of the first link in the chain of causation leads to the extinction of suffering that has be set us ceaselessly in the infinite series of samsāric existences.
그러고 나서 보살은 12연기를 역관(逆觀)하였습니다. 만약 알음알이(識)가 없으면
명색(名色)도 없을 것이고, 명색이 없으면 감각장소(處)등도 없을 것입니다. 인과관계라는 사슬의 첫 번째 고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한한 윤회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핍박하는 괴로움의 종식으로 인도합니다. .
After this reflection on dependent origination in its positive and
negative aspects, the bodhisatta contemplated the nature of the aggregates of grasping.
12연기에 대한 순관과 역관을 하고 난후 보살은 오취온(五取蘊)의 속성을 수관하였습니다.
Then he attained the successive insights and fruitions (maggaphala) on the Ariyan holy path and finally became the all-Enlightened Buddha. Every bodhisatta attained supreme Enlightenment after such contemplation.
그렇게 하여 성스러운 도의 도와 과를 연속적으로 얻고 마침내 바르게 깨달은 부처님(正等覺者)이 되었습니다
모든 보살들은 그러한 수관 후에 위없는 깨달음(正等覺)을 얻었습니다.
They did not learn what and how to contemplate from others but owing to cumulative
potential (parami) that they had acquired through innumerable lifetimes, they contemplated as mentioned before and attained Enlightenment.
그들은 남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수관하는지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윤회를 거치면서 쌓아온 바라밀(parami)로 인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수관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BEYOND REASONING AND SPECULATION
Then when it was time to preach the Buddha thought thus: This dhamma which I know is very profound. It is hard to understand; it is so sublime and so conducive to inner peace. It is not accessible to intellect and logic (atakkavacaro).
It is subtle and it is to be realized only by the wise.
4. 추론과 사유를 벗어난 것이다
부처님은 설법할 시기가 되자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너무나 심오하다. 이해하기 어려우며 매우 고귀하고 내적인 평화를 안겨준다. 지성과 논리(atakkavacaro)로는 접근할 수 없다. 미묘한 것으로 오직 현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All over the world philosophers have racked their brains about freedom from old age,
sickness and death. But freedom from these evils means Nibbana and Nibbana is beyond the reach of reason and intellect.
전 세계의 철학자들은 늙음, 병듦, 죽음을 벗어나는 길에 관해 머리를 싸매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열반(nibbanā)이며 이 닙바나는 사유와 지성의 범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It is to be realized only through the practice of the middle way and vipassanā.
Most philosophers rely on intellect and logic and there are various doctrines which they have conceived for the welfare of all living beings. But these doctrines are based on speculations that do not help anyone to attain vipassanā insight, let alone the supreme goal of Nibbana.
그리고 이 닙바나는 중도와 위빠사나(vipassanā)수행을 닦아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지성과 논리에만 의지하고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안해낸 다양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러한 사상들은 열반이라는 지고의 목표는 고사하고 위빠사나 지혜를 얻는데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Even the lowest stage of vipassanā insight, viz., insight into the distinction between nāma and rūpa does not admit of intellectual approach.
위빠사나 지혜의 가장 낮은 단계, 즉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조차도 지성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The insight dawns on the yogi only when, with the development of concentration, and in accordance with Satipattānā method he watches the nāmarūpa process and distinguished between consciousness and corporeality, e.g. the desire to bend the hand and bent hand, the ear and the sound on the one hand and the consciousness of hearing on the other and so forth. Such knowledge is not vague and speculative; it is vivid and empirical.
수행자(yogi)가 집중을 개발함에 따라 통찰은 분명해지고 사념처 수행법에 따라 정신과 물질을 관하고 알음알이(識)와 물질(色)을 구별합니다. 예를 들면 손을 구부리고자 하는 의지와 손을 구부리는 동작, 귀(耳)와 소리(聲), 그리고 귀의 알음알이(耳識)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모호하고 추론적이지 않으며 명백하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It is said on the authority of scriptures that nāmarūpas are in a constant flux and that we should watch their arising and passing away. But for the beginner this is easier said then done.
권위 있는 경전에서는 정신과 물질(名色)은 끊임없는 흐름에 있으며 우리는 이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주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초심자에게는 말하기는 쉽고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The beginner has to exert strenuous effort to overcome hindrances (nivarana). Even freedom from nivarana helps him only to distinguish between nāma and rūpa. It does not ensure insight into their arising and passing away. This insight is attained only after concentration has been developed and perception has become keen with the practice of mindfulness.
초심자는 가열차게 노력해서 장애(五蓋 nivarana)를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애에서의 자유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도록 도와는 줄지언정 이것이 그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혜는 오직 집중이 개발되고 알아차림(sati)의 수행으로 지각이 예민해지고 나서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Constant mindfulness of arising and vanishing leads to insight into anicca, dukkha and anatta of all phenomena. But as merely the beginning of lower vipassanā, this insight is a far cry from the path and its fruition.
Hence the description of the dhamma as something beyond logic and speculation.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끊임없는 알아차림(sati)을 통해 모든 현상의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에 대한 통찰지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빠사나의 초보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는 도과와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법을 논리와 사유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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