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마하시 사야도 법문

[스크랩] 12연기...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수선님 2018. 6. 17. 13:02

DIFFICULTY OF UNDERSTANDING

 

The Buddha-dhamma makes little appeal to the masses since i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ir sensual desire. People do not like even an ordinary sermon, let alone a discourse on Nibbāna, if it has no sensual touch.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불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법문은 말할 것도 없고, 감각적인 접근이 없다면 열반에 대한 법문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They do not seem interested in our teaching and no wonder, since it is devoid of melodious recitation, sentimental stories and hilarious jokes and other attractions.

 

그들은 우리의 가르침에 관심이 없는 듯하며 그도 그럴 것이 선율적인 독송, 감동적인 이야기와 재미나는 웃음거리와 다른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It is acceptable only to those who have practised vipassanā or who seek the dhamma on which they can rely for methods of meditation and extinction of defilements.

 

우리의 가르침은 위빠사나를 닦거나 명상과 번뇌를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의지할 수 있는 법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받아 들여질 수 있습니다.

 

 

 

But it is a mistake to deprecate, as some do, the sermons containing stories, jokes, etc as sutta sermons. Suttas differ basically from popular sermons in that they are profound, as witness Anattalakkhana sutta, Satipaṭṭhāna sutta and so forth.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설화와 웃음거리가 담긴 법문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경전들은 「무아상경(Anattalakkhana sutta)」(S22:59),「대념처경(Satipaṭṭhāna sutta)」(D22)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심오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법문과는 기본적으로 다릅니다.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too belongs to Sutta Piṭaka.

It is to be labelled Abhidhammā only because it is preached in the fashion of

Abhidhammā Piṭaka.

 

12연기의 교의도 경장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아비담마로 분류되는 이유는 논장의 형식으로 설해지기 때문입니다.

 

 

 

Since our teaching is unadulterated dhamma, some people confuse it with Abhidhammā and cannot follow it, much less grasp the Path and Nibbāna which it emphasizes.

 

우리의 가르침은 순수한 법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이를 아비담마와 혼동하고는 가르침이 강조하는 도와 열반을 이해하기는 커녕 따라오지도 못합니다.

 

 

 

Paticcasamupāda is hard to understand because it concerns the correlations between causes and effects. There is no ego entity that exists independently of the law of causation. It was hard to accept this fact before the Buddha proclaimed the dhamma.

 

12연기는 원인과 결과간의 상호관련과 관련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연기법 속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선포하시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The commentaries also points out the abstruse character of the doctrine. According to them there are four dhammas which defy understanding, viz., the four noble truths, the nature of a living being, the nature of rebirth and dependent origination.

 

주석서들은 또한 이 12연기법의 심오한 성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주석서들에 따르면 사성제, 중생의 본성, 태어남(再生), 12연기의 성질의 이해하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이 있다고 합니다.

 

 

 

It is hard to understand and accept the truth of suffering, the truth about its cause, the truth about its cessation and the truth about the way to its extinction. It is hard to appreciate these truths, still harder to teach them to other people.

 

첫 번째로,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성제(四聖諦)의 깊은 뜻을 파악하기는 더 어렵고 남들에게 그것들을 가르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Secondly, it is hard to understand that a living being is a nāma-rūpa process without any separate self, that the næmarþpa complex is subject to the law of kamma that determines a man’s future life according to his good or bad deeds.

 

두 번째로, 중생은 어떠한 개별적인 자아가 없는 정신과 물질(名色)의 과정이며 그러한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는 자신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 내생을 결정짓는 업의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hard to see how rebirth takes place as a result of defilement and kamma without the transfer of nāma-rūpa from a previous life.

 

세 번째로, 전생에서 정신과 물질(名色)의 전이 없이 번뇌와 업의 결과로 어떻게 재생(再生)이 일어나는지를 알기란 어렵습니다.

 

 

 

Lastly it is equally hard to understand Paṭiccasamuppāda. It involves the above three abstruse dhammas. Its negative aspect concerns the first two noble truths as well as the nature of a living being and rebirth while its positive aspect involves the other two truths.

 

마지막으로 12연기를 이해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12연기는 앞서의 세 가지 심오한 법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연기의 소극적인 측면은 고제와 집제, 중생과 태어남(再生)의 성질이고 그 적극적인 측면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포함합니다.

 

 

 

Hence it is most difficult to grasp or teach this doctrine. It may be easy to explain it to one who has attained the path and Nibbāna or one who has studied the piṭaka but it will mean little to one who has neither the illumination nor scriptural knowledge.

 

그래서 이 12연기법을 이해거나 가르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어쩌면 도와 열반을 얻었거나 삼장(piṭaka)을 공부한 사람에게 12연기의 교의를 가르치는 게 쉬울 것이지만 깨달음이나 경전의 지식이 없는 이에게는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The writer of the commentary on the doctrine was qualified to explain it because he might have attained the lower stages of the path or he might have a thorough knowledge of the Piṭaka.

 

12연기법에 대해 해설한 주석서의 저자는 적어도 도의 가장 낮은 단계를 얻었거나 삼장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추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격을 그것을 해설할 자격이 되었습니다.

 

 

 

He refers to its difficulty probably in order that its exposition might be seriously studied by posterity. He likens the difficulty to the plight of a man who has jumped into the sea and cannot get to the bottom.

 

저자는 후대사람들이 그 해설을 진지하게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이 어려움을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 밑바닥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곤경에 빗대고 있습니다.

 

 

 

He admits that he has written the exegesis on the basis of the Piṭaka and the old commentaries handed down by oral tradition. The same may be said of our teaching.

 

저자는 구전에 의해 전해 내려온 삼장과 옛 주석서들에 기초하여 주해를 썼다고 인정합니다. 우리의 가르침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ince it is hard to explain the doctrine, the yogi should pay special attention to it. If he follows the teaching superficially, he will understand nothing and without a fair knowledge of the doctrine, he is bound to suffer in the wilderness of samsāric existence.

 

12연기법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는 반드시 그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수행자가 가르침을 피상적으로만 따른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12연기법에 대한 상당한 지혜을 얻지 못한 채 윤회의 황야에서 괴로움을 겪어야만 합니다.

 

 

 

The substance of the Paṭiccasamuppāda teaching is as follows.

 

From ignorance there arises saṅkhāra (effort or kamma-formation.) From kamma-formation there arises consciousness of the new existence.

 

12연기법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無明)으로부터 업형성력(行 saṅkhāra)이 일어납니다. 업형성력(行 saṅkhāra)으로부터 새로운 생의 알음알이(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Consciousness gives rise to psycho-physical phenomena or nāma-rūpa. Nāma-rūpa leads to āyatana (six bases). From āyatana arises the phassa

(impression). Phassa causes feeling; feeling leads to craving.

 

재생연결식은 정신·물질적 현상, 즉 명색(名色 nāma-rūpa)을 일으킵니다. 명색은 육처(āyatana)를 일으킵니다. 육처에서 감각접촉(觸 phassa)를 일으킵니다. 감각접촉은 느낌(受)을 일으킵니다. 느낌은 또 갈애를 일으킵니다.

 

 

 

 

From craving there results clinging (upādāna). Because of clinging there is the process of becoming (kamma-bhava), from the process of becoming there arises rebirth (jāti) and rebirth leads to old age, death, sorrow, grief, and lamentation. Thus arises the whole mass of suffering.

 

갈애에서 취착이 생겨납니다. 취착이 있기 때문에 업으로써의 존재(業有 kamma-bhava)가 있습니다. 업으로써의 존재(업유)에서 태어남(jāti)이 있고 태어남은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으로 이릅니다. 이렇게 괴로움의 총체적인 무더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금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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