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AVIJJĀ (IGNORANCE)?
According to the Buddha, avijjā is ignorance of the four Noble Truths, viz, the truths about suffering, its cause, its cessation and the way to its cessation.
7. 무명(AVIJJĀ)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에 따르면 무명(avijjā)은 고· 집· 멸· 도라는 사성제에 대한 무지입니다.
In a positive sense avijjā implies misconception or illusion. It makes us mistake what is false and illusory for truth and reality. It leads us astray and so it is labelled micchāpaṭipatti-avijjā.
적극적인 의미로 무명(avijjā)은 착각이나 환상을 뜻합니다. 무명으로 인해 헛되고 환상인 것을 진실 되고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명은 중생을 타락된 길로 빠지게 하기 때문에 그릇된 도닦음의 무명(micchāpaṭipatti-avijjā)으로 분류됩니다.
Avijjā therefore differs from ordinary ignorance. Ignorance of the name of a man or a village does not necessarily mean misinformation whereas the avijjā of Paṭiccasmuppāda means something more than ignorance.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일반적인 무지와는 다릅니다. 사람이나 마을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반드시 그릇된 정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12연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 이상의 어떤 것을 뜻합니다.
It is misleading like the ignorance of a man who has lost all sense of direction
and who therefore thinks that the east is west or that the north is south. The man who does not know the truth of suffering has an optimistic view of life that is full of dukkha (pain and evil).
이는 오해로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동쪽이 서쪽이고 북쪽이 남쪽이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dukkha)으로 가득찬 삶에 낙천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It is mistake to seek the truth of dukkha in the book for it is to be found in one’s own body. Seeing, hearing, in short, all nāma-rūpa arising from the six senses are dukkha. For this phenomenal existence is impermanent, undesirable and unpleasant.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자신의 몸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책에서 찾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고, 듣는, 간단히 말해서,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은 모두 괴로움(dukkha)입니다. 왜냐하면 이 현상의 존재는 무상하고 바람직하지 않으며 즐겁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may end at any time and so all is pain and suffering. But this dukkha is not realized by living beings who look upon their existence as blissful and good.
현상의 존재는 어느 때라도 끝날 수 있어서 모든 것은 고통과 괴로움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좋고 축복된 것으로 여기는 중생들은 이러한 괴로움(dukkha)를 깨닫지 못합니다.
So they seek pleasant sense-objects, good sights, good sounds, good food, etc. Their effort to secure what they believe to be the good things of life is due to their illusion (avijjā) about their existence.
그래서 중생들은 즐거운 형상, 즐거운 소리, 맛있는 음식 등의 감각대상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존재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Avijjā is here like the green eye-glass that makes a horse eat the dry grass which it mistakes for green grass. Living beings are mired in sensual pleasure because they see every thing through rose-coloured glasses. They harbour illusions about the nature of sense-objects and nāmarūpa.
여기서 무명은 말로 하여금 마른 풀을 푸른 풀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그것을 먹도록 하는 푸른색 안경과도 같습니다. 중생들은 장밋빛 안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탐닉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대상과 정신·물질(名色)의 성질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A blind man may be easily deceived by another man who offers him a worthless longyi, saying that it is an expensive, high quality longyi. The blind man will believe him and he will like the longyi very much.
장님은 싸구려 롱지(Longyi)를 주면서 이것은 값비싼 훌륭한 재질의 롱지라고 하는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장님은 그를 믿고 그가 준 롱지를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He will be disillusioned only when he recovers his sight and then he will throw it away at once. Like-wise, as a victim of avijjā, a man enjoys life, being blind to its anicca, dukkha and anatta.
하지만 장님이 시력을 회복하고 나면 속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 즉시 이 롱지를 내던져버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의 희생자자인 사람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즐깁니다.
He becomes disenchanted when introspection of nāma-rūpa makes him aware of
the unwholesome nature of his existence.
하지만 정신·물질(名色)에 대한 성찰로 자기 존재의 불건전한 속성을 알아차리게 되면 환상은 깨집니다.
Introspection of nāma-rūpa or vipassanā contemplation has nothing to do with bookish knowledge. It means thorough watching and ceaseless contemplation of all psycho-physical phenomena that comprise both the sense-objects and the corresponding consciousness.
정신· 물질(名色)에 대한 성찰이나 위빠사나 관찰은 책속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대상들과 그에 상응하는 알음알이(識)들로 구성된 정신·물리적 현상을 철저히 주시하고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을 뜻합니다.
The practice leads to full awareness of their nature. As concentration develops, the yogi realizes their arising and instant vanishing, thereby gaining an insight into their anicca, dukkha and anatta.
수행은 정신·물질(名色)의 본성을 철저히 알아차리게 합니다. 집중이 개발됨에 따라 수행자는 그들의 끊임없는 일어남과 즉각적인 사라짐을 알게 되고 그로써 그들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지를 얻습니다.
Avijjā makes us blind to reality because we are unmindful. Unmindfulness gives rise to the illusion of man, woman, hand, leg, etc., in the conventional sense of the terms.
무명은 우리가 마음을 챙기지 않기 때문에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챙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습적인 의미에서의 남자, 여자, 손, 다리등과 같은 환상이 생깁니다.
We do not know that seeing, for instance, is merely the nāma-rūpa or psycho-physical process, that the phenomenon arises and vanishes, that it is impermanent, unsatisfactory and unsubstantial.
예를 들면 우리는 보는 것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실체가 없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단지 마음과 몸, 즉 정신·물질적 진행에 불과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Some people who never contemplate die without knowing anything about nāma-rūpa. The real nature of nāma-rūpa process is realized by the mindful person.
한번도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nāma-rūp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알아차림(sati)이 있는 사람은 정신과 물질작용의 진정한 성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But the insight does not occur in the beginning when concentration is not yet developed. Illusion or the natural way of consciousness precedes contemplation and so the beginner does not gain a clear insight into the nature of nāmarūpa.
그러나 집중이 개발되기 전에 처음부터 통찰지가 생기지는 못합니다. 환상 즉 알음알이(識)의 자연스런 방식이 관찰에 선행하기 때문에 초보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의 성품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얻지 못합니다.
It is only through steadfast practice that concentration and perception develop and lead to insight-knowledge.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만이 집중력과 지각력이 개발되어 통찰지에 이릅니다.
If, for example, while practising mindfulness, the yogi feels itchy, he is barely aware of being itchy. He does not think of the hand, the leg, or any other part of the body that is itchy nor does the idea of self as the subject of itchiness, “I feel itchy” occurs to him.
예를 들어 만일 알아차림을 닦는 중에 수행자가 가려움을 느낀다면 그는 그냥 가렵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에게는 손이나 다리, 몸의 어느 부분이 가렵다거나, 가려움을 느끼는 것이 자기라는 생각, ‘내가 가렵다’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There arises only the continuous sensation of itchiness. The sensattion does not remain permanent but passes away as he notes it.
거기에는 단지 지속적으로 가려운 감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한 감각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면 사라져 갑니다.
The watching consciousness promptly notes every psycho-physical phenomenon, leaving no room for the illusion of hand, leg and so on.
지켜보는 마음은 모든 정신적-물리적 현상을 즉각 알아차려 손, 다리라는 환상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Illusion dominates the unmindful person and makes him blind to the unsatisfactory nature (dukkha) of all sense-objects. It replaces dukkha with sukha. Indeed avijjā means both ignorance of what is real and misconception that distorts reality.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은 환상에 지배되어 모든 감각 대상의 불만족스런 성품(dukkha)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게 합니다. 참으로 무명은 실체를 모를 뿐만 아니라 실체를 왜곡하는 전도된 생각입니다.
Because he does not know the truth of dukkha, man seeks pleasant sense-objects. Thus ignorance leads to effort and activity (saṅkhāra). According to the scriptures, because of avijjā there arises saṅkhāra but there are two links, viz, taṇhā and upādāna between them.
사람은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운 감각 대상만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무명은 노력과 행(行 saṅkhāra)으로 인도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무명으로 인해 행(行)이 일어나지만 그 사이에는 갈애(taṇha)와 취착(upādāna)이라는 두개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Ignorance gives rise to craving (taṇha) which later on develops into attachment (upādāna). Craving and attachment stem from the desire for pleasure and are explicitly mentioned in the middle part of the doctrine of Paṭiccasamuppada.
무명은 갈애를 일으키고 갈애는 이후 취착으로 발전합니다. 갈애와 취착은 감각적 욕망(kāmā)에서 나오는데 이는 연기법의 중간 부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When the past is fully described, reference is made to avijjā, taṇhæ, upādāna,
kamma and saṅkhāra.
연기와 관련되는 과거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면 무명(avijiā), 갈애(taṇha), 취착(upādāna), 업(kamma)과 행(saṅkhāra)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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