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ORANCE OF THE ORIGIN OF DUKKHA
People do not know that craving is the origin (samudaya) of suffering. on the contrary they believe that it is attachment that makes them happy, that without attachment life would be dreary.
8. 괴로움(DUKKHA)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사람들은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samudaya)이란 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취착으로 인해 행복하고 취착이 없으면 삶은 따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o they ceaselessly seek pleasant sense-objects, food, clothing, companion and so forth. In the absence of these objects of attachment they usually feel ill at ease and find life monotonous.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운 감각적 대상, 음식, 의복, 무리, 벗들을 찾습니다. 취착의 대상이 없으면 그들은 불안해하고 삶이 무료하다고 생각합니다.
For common people life without attachment would be indeed wholly devoid of pleasure. It is taṇhā that hides the unpleasantness of life and makes it pleasant.
범부들은 취착이 없으면 참으로 삶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습니다. 삶의 즐겁지 못한 모습을 가리고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But for the Arahat who has done away with taṇhā, it is impossible to enjoy life. He is always bent on Nibbæna, the cessation of conditioned suffering.
하지만 갈애를 제거한 아라한은 삶을 즐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아라한은 조건 지어진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항상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Taṇhā cannot exert much pressure even on the yogis (meditators) when they become absorbed in the practise of vipassanā. So some yogis do not enjoy life as much as they did before.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에 몰두하게 되면 갈애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몇 수행자는 과거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삶을 즐기지 않게 됩니다.
On their return from meditation retreat they get bored at home and feel ill at ease in the company of their families. To other people the yogi may appear to be conceited but in fact his behaviour is a sign of loss of interest in the workaday world.
집중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 그들은 가정생활을 지루해 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행자가 잘난 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의 행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사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는 표시입니다.
But if he cannot as yet overcome the sensual desire, his boredom is temporary and he usually gets readjusted to his home life in due course. His family need not worry over his mood or behaviour for it is not easy for a man to become thoroughly sick of his home life.
그러나 만일 감각적 욕망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다면 수행자가 느끼는 따분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머지않아 가정생활에 다시 적응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에 대해 완전하게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수행자의 이런 일시적 기분 상태나 행동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So the yogi should examine himself and see how much he is really disenchanted with life. If his desire for pleasure lingers, he must consider himself still in the grip of taṇhā.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을 면밀히 살펴 자신이 얼마나 삶의 환상에서 깨어나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갈애에 휘둘리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Without taṇhā we would feel discomfited. In conjunction with avijjā, taṇhā makes us blind to dukkha and creates the illusion of sukha. So we frantically seek sources of pleasure.
갈애가 없다면 좌절감을 맛볼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우리는 괴로움(dukkha)을 보지 못하고 행복(sukkha)의 환상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듯이 즐거움의 원천을 찾습니다.
Consider, for example, men’s fondness for movies and dramatic performances. These entertainments cost time and money but taṇhā makes them irresistible although to the person who has no craving for them they are sources of suffering.
예를 들면 사람들이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유흥거리에는 시간과 돈이 들지만 사람들은 갈애로 인하여 이를 마다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한 갈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들 유흥거리는 괴로움의 원천일 뿐입니다.
A more obvious example is smoking. The smoker delights in inhaling the tobacco smoke but to the non-smoker it is a kind of self-inflicted suffering. The non-smoker is free from all the troubles that beset the smoker. He leads a relatively care-free and happy life because he has no craving for tobacco.
더 명확한 예는 흡연입니다. 흡연자는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비흡연자에게는 일종의 자학적 괴로움입니다. 비흡연자는 흡연자를 괴롭히는 각종 번거러움이 없습니다. 비흡연자는 담배에 대한 갈애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걱정없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Taṇhā as the source of dukkha is also evident in the habit of betel-chewing. Many people enjoy it although in fact it is a troublesome habit.
괴로움(dukkha)의 원천인 갈애는 비틀(betel)잎을 씹는 습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잎 씹기를 즐기지만 사실 이는 번거롭기 짝이없는 습관입니다.
Like the smoker and the betel-chewer people seek to gratify their craving and this taṇhā, inspired effort is the mainspring of rebirth that leads to old age, sickness and death.
흡연자와 비틀잎 씹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의 갈애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 갈애가 부추킨 노력은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생(再生)의 주요원인이 됩니다.
Suffering and desire as its cause are evident in everyday life but it is hard to see these truths. For they are profound and one can realize them not through reflection but only through the practice of vipassanā.
괴로움과 그 원인인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분명하지만 이러한 진리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심오하며,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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