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세간법'과는 동떨어진 전혀 다른 법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비록 초발심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걸림 없는 경지에 이르러 '정각' (正覺)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깨달음이라면 결코 <지금의 것>을 바꾸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만약 <지금의 것>을 바꾸어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분명 생사법(生死法)이요, 인과법(因果法)이요, 수보법(受報法)이니,
그것을 어떻게 참된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어요?
요컨대, '깨달음'을 얻어서 '안목'이 밝아진다는 것은
곧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분명히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온갖 법의 실상(實相)>이란 과연 뭘까요?
― 온갖 법이 오직 사람의 망령된 업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마음 속에 투영되는,
즉 전혀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이것을 <저 바깥에 있는 실체>라고 오인해서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한 시도 쉴 겨를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일체가 오직 '청정한 한 마음' 뿐임을 철저히 깨닫고,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지금의 환(幻)과 같은 허망한 법을 조금도 허무는 일이 없는 겁니다.
― 물결을 죄다 제하고 나서야 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러기에 고인은 이르기를,
「환(幻)인 줄 알면 이미 여읜 것이니,
다시 방편을 쓸 것이 무엇이겠는가?」고 했던 겁니다.
만약 당신이 진실로 안목이 밝아져서,
<참으로 마음 밖에서 티끌만한 한 법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업(業)도 보(報)도 다 붙을 데가 없을 테니,
다시 무슨 죄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언필칭 오무간지옥(五無間地獄)에 떨어질 죄업도 찰나에 빙소와해(氷消瓦解)되고 말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만약 마음 밖에서 티끌만한 한 법이라도 본다면,
곧 한 톨의 쌀이라도 먹었다면 당신은 결코 범계(犯戒)의 허물을 벗어날 수는 없으며,
지옥 끝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 *
'참된 관'(眞觀)은 <관하는 자>(能觀)와 <관하는 바>(所觀)가
모두 없는 관(觀)을 말합니다.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으면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한다」고 했는데,
<마음에 능소가 없는 관>이라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 잘 생각해 보세요.
본래 모든 작용은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일을 짓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래 스스로는 작용이 없는 근본지혜(根本智慧)가 인연에 감응하여
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일으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연기설(緣起說)의 골자입니다.
즉 만법은 모두가 인연 따라 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작용의 주체>가 없는 거예요.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작용이 혼자서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생멸이 있는 듯 한데,
실제로는 생멸도 없고 거래도 없는 게 바로 제법실상인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내가 본다"고 할 때에도
실은 거기에 <보는 자>가 있어서 <보는 일>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다만 '참 성품'(眞性)이 인연에 감응해서 <봄>(見)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이 몸이 환화공신(幻化空身)인데 무슨 작용이 있을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보고 들음>(見聞)이 꿈속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것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줄 오인하여,
보고 들을 때마다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 들음(見聞)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닌 줄 알아서,
보고 듣는 가운데 집착하는 일만 없다면,
다시 말해서 마치 맑은 거울이 무심히 사물을 비추듯이, 그렇게 비출 수만 있으면,
이것이 수행자의 안목이 열리는 순간이며, 머지 않아 곧 '부처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 * *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거기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습니다.
중생들이 이 <연기(緣起)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이 이 '몸'과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身口意 三業) 것이 바로 <나>라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몸도 입도 뜻도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마치 환(幻)과 같은 존재이므로
무력해서 작용이 없는 것인데, 곧잘 스스로를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몸과 입과 뜻을 굴리는 주재자(主宰者)가 바로 <나>라고 여기고 있으니,
다생누겁의 업의 뿌리가 그만큼 깊은 탓입니다.
저 바다의 물결이 스스로의 뜻과 힘이 있어서 물결치는 것이 아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 ―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막론하고 ―
그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므로,
겉보기엔 마치 작용이 일어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공적(空寂)하여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는 게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간파하는 게 중요합니다.
<고요함과 작용이 걸림 없는 지혜>(寂用無碍智)가 바로 '부처 지혜'임을 알아서,
이 세상사가 지금 있는 이대로 상주(常住)함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청맹과니의 비방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 지금 현재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있을 때,
거기에 <일하는 자>가 없으며, <일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일>이 혼자서 이루어 지겠어요?
끝내 <밥 주머니>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옳습니다.
* * *
'진리'(眞理)에 상응(相應)하기를 바라는 학인이라면
모름지기 알아들은 바 말의 참 뜻을 깊이 참구해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는
중생의 천 년 묵은 업식(業識)을 도저히 둘러 뺄 수가 없으며,
<상식의 딱딱한 껍질>을 깨어 버리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음도 경계도 다 진성을 여의지 않았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과연 진실이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
진성(眞性)이란
말 그대로 그 성품이 참되고 여여해서 변전(變轉)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고,
이 '마음'과 '경계'가 서로 의지하면서 이 세상을 엮어내고 굴리고 하는 것이라면,
「마음도 경계도 다 '진성'을 여의지 않았다」는 말은
곧, 이 세상사(世上事)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여여부동(如如不動) 하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즉 이른 바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곧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는 것이요,
바로 여래의 행리(行履)가 현현(顯現)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이미 <닦고 조작하고>(修造) 할 일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곧
「성상(性相)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닦을 게 없다」는 지견을 내어서,
중생이 닦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에
「여여(如如)한 가운데 <닦음 없이 닦는 도리>(修無修修)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수행은 닦음도 있고 이룸(成)도 있고 얻음(得)도 있는
세간법의 유위행(有爲行)과는 다른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본분납자(本分衲子)의 행각이요,
'참 수행'(眞修)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되이 '가'(假)를 좇으면서 헛애를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교(實敎)에 의한 수행이며,
「작은 방편으로 쉬이 깨친다」는 도리이니,
마음에 능히 감당할만한 사람은 모름지기 힘쓸 일입니다.
* * *
일체 존재가 다 내 마음이 빚어낸 것일 뿐이요,
'마음' 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고
제 입으로 분명히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말의
<진정한 함의(含意)>를 알지 못하는 게 큰 병통입니다.
지금 질문자는 마음 밖에 엄연히 절대공간(絶對空間)
절대시간(絶對時間)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른 바 '세속의 상식'에 완전히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는 거예요.
이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몽땅 사람의 '마음'에 허망하게 나타나는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쳐야 합니다.
시간도 공간도 결코 예외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한다」고 한 게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이 '마음'이라는 말도 다만 세간법을 따라 세속 사람들과의 교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말일뿐이며,
일체 만법은 본래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는,
그야말로 그림자 같고 메아리와 같은 존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굳이 사족(蛇足)을 단다면,
이 '마음'이란 다만 <하나의 신령한 앎의 성품>이요,
<신령한 광명>입니다.
이 '광명'은 이미 온 누리에 두루해 있으며, 항상 스스로 짬 없이 환히 빛나고,
타(他)의 조작을 빌리지 않습니다.
즉 사람의 감관(感官)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환히 비추는 거죠.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감관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현상이 싹도 트기 이전인 거예요.
모름지기 이 '마음의 광명'(心光)에 의해 비추어지지 않고
혼자서 성립되는 법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 살필 일입니다.
―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설명으로도 이 '마음의 성품'(心性)을
직접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므로,
당연히 모든 성인들의 말씀은 몽땅 방편의 말씀일 뿐이요,
그 가운데는 결코 '진리'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모름지기 이 방편의 말씀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 *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법은 <나는 일이 없음>(無生)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생멸(生滅)하는 모습을 보고, 거래(去來)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전혀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인 이 산하대지 삼라만상을
실체(實體)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무명(無明) 중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이와같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올바로 관(觀)하여,
밝은 안목을 갖추게 되면 지금처럼 이와 같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이 세상이
지금 이대로인 채로 공적(空寂)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한 게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시종일관 꿈속과 같아서 전혀 실다운 성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이런 사람을 일러서 달인(達人)이라 하고, 깨달은 사람(覺者)이라 하는 것이니,
거기에 무슨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군말이 있을 수 있겠어요?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여실(如實)히 보는 안목을 갖추면,
즉 일체만법이 전혀 <중생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서
모든 경계에 전혀 장애를 일으키지 않을 수만 있으면 바로 여래(如來)를 보게 되고,
거기엔 이미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생멸하는 모습도, 가고 오고 하는 모습도 없어서,
이른바 성·상(性相)이 상주(常住)하는 <하나의 법계>가 현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딱한 것은,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질문자도,
아마 모르긴 해도 늘
불생불멸(不生不滅) 불래불거(不來不去)라는 말은 되뇌고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다른 모든 것을 다 접어두고라도 오직 이 말의 뜻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지금과 같은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 옛 사람이 무엇을 얻었기에 문득 쉬었습니까?』
『 도둑이 빈집에 든 것 같았었느니라.』 ···
* * *
진정한 출가(出家)는 이 몸과 마음으로 어떤 공덕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달아서,
이 세상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바로 가장 위대한 것을 얻은 사람이요,
이 사람을 일러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본래 마음>(本心) 속에는 고(苦)도 없고, 낙(樂)도 없으며,
나아가서 빛깔(色)도 소리(聲)도 없는데, 사람들은 늘 빛깔과 소리를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업의 그림자'(業影)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있으면 온갖 법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온갖 법이 없다」고 한 겁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見聞覺知)하는 모든 법이
다만 제 마음의 거울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인 줄 철저히 깨달아서
다시는 현혹 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 ··· '해탈'을 바라는 자는 이미 '해탈의 마귀'에 홀렸고,
'열반'을 바라는 자는 이미 '열반의 마귀'에 홀렸으며,
― 나아가서 '성불'을 바라는 자는 이미 '부처 마귀'에 홀렸느니라」라고 했던 겁니다.
모름지기 일체 만법이 다만 제 마음으로 지어낸 허망한
'업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서,
더는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탐내거나 하는 일은 영원히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인(達人)이라 하며,
능히 모든 사람을 이끌어서 <원적(圓寂)한 경지>에 안치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참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삼매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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