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6칙은 운문(雲門文偃 : 864-949)화상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명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 마디(一句) 해 보아라.” 스스로 자신이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지(日日是好日)!”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당송대의 선원에서는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정기적으로 설법하는 것을 상당(上堂), 혹은 시중(示衆)이라고 한다. 선원의 주지 설법은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실행된 상당 법문을 대참(大參)이라고 하고, 또한 아침저녁에 수시로 설법하는 것을 소참(小參)이라고 한다.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은 중생교화의 보살행으로 학인들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전인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운문의 법문도 15일 실시하는 정기설법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문이 말하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인데, 마침 15일은 정기 설법으로 상당법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 15일을 기준으로 하여 학인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15일 이전은 지난 과거가 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생각하는 일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15일 이후는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분명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 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이 체득한 지혜의 안목으로 한 마디(一句) 말해 보아라!”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마디(一句)는 불법의 대의를 언어 문자의 개념으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는 한 마디를 말한다. 불법의 교리나 정신에 대해서 지식으로 설명하거나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어도, 한 마디(一句)로서 깨달음의 경지를 만들어 살 수 있는 지혜로운 말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법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운문의 문하에 모인 대중들도 운문의 문제제기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이 스스로 대답한 일구(一句)가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운문이 말하는 ‘날마다 좋은 날’은 그냥 매일 매일 즐겁고 보람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법의 대의와 사상은 의미 없는 종교가 된다.
불법의 정신을 모르고 사바세계에 사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가 있는가?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날이 자기에게 닥쳐오기를 바라는 요행이 아니라 좋은 날을 만들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능력과 지혜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는가? 매일 좋은 날로 만들어 살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과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면 이 법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로 끝난다.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 날짜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삶을 살고 있는 매일이다. 한달은 하루하루의 연속이며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있지만 시간은 물과 같이 연속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나누어 토막을 낼 수가 없다.
사실 한달이나 하루는 ‘지금’이라는 한 순간(一念: 刹那)의 연속시간이다. 따라서 좋은 하루를 만들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실 불교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 좋은 친구나 많은 것들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無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대사(生死大事) 혹은 일대사(一大事)는 무상에 관련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도록 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지혜로 극복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를 좋은 날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교의 정신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바세계의 삶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자아의 영원한 존재가 없는 무아(無我)이고, 탐.진.치 삼독과 오욕에 물든 더러운 예토(穢土)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반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사는 법신의 삶은 번뇌 망념의 나고 죽음이 없는 불변의 세계(常)에서 항상 법희(法喜)의 즐거움(樂)이 있고, 자신의 청정한 불성의 지혜작용을 청정한 법계(淨土)에 두루 지혜의 광명으로 비추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각자 자기자신이 주인이며 주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경전에서는 ‘불성’, ‘여래장’, ‘진여자성’, ‘청정심’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선불교에서는 평상심, 본래심, 주인공, 진인(眞人), 본래인(本來人) 등으로 불린다. 사물에 집착하고 삼독심에 떨어진 범부의 중생심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한 깨달음의 주체를 말한다.
따라서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자기가 깨달음의 본래심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하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 교차되는 곳에 살고 있다. 자신이 있는 여기라는 공간을 바꾸고 옮길 수가 없으며, 또한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미리 끌어당겨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교에서는 시절인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란 육체적인 일과 정신적인 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가장 절박한 숨쉬는 일에서 육체를 움직이는 일(行住坐臥 語默動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 노동을 하는 일, 매사 인간은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자신의 일인 것이며, 일과 삶은 같은 말이다. 또한 정신적인 일은 일념(찰나) 일념에 번뇌 망념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생멸(生滅; 生死大事)의 일을 비롯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경전을 읽고 사유하는 지혜작용의 일 등 한순간도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보살도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의 일에 몰입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본래심으로 삼매의 경지에서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조사선의 참선은 언제 어디서나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생활종교이다. 임제가 “자신이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라고 설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일상생활속에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로 위대한 보살도를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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