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칙은 혜초(慧超)스님이 법안종을 개창한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화상에게 질문한 한마디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혜초스님이 법안화상에게 질문했다. “제가 화상께 질문하겠습니다. 무엇이 부처 입니까?” 법안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혜초이다.”
擧. 僧問法眼, 慧超咨和尙, 如何是佛, 法眼云, 汝是慧超.
법안은 당말 오가(五家) 종풍으로 선풍을 떨친 법안종(法眼宗)의 개창자인 문익(文益) 선사이다. 문익 선사는 젊은 시절 도반과 전국을 행각할 때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어떤 암자에 뛰어 들어갔다. 암자의 주인인 나한계침(羅漢桂琛) 선사는 법안이 인물인줄 알고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불법의 대의를 논의하였다. 법안은 특히 화엄사상과 유식사상에 조예가 깊었다.
날씨가 맑아져 법안은 지장원을 떠나 다시 행각하려고 할때 나한 선사는 뜰 앞의 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는 어제 ‘삼계는 오직 마음이며 , 만법은 오직 인식에 있다(三界唯心, 萬法唯識)’고 말했는데, 지금 이 돌은 그대의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법안은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그 돌은 마음 안에 있지요.” 라고 대답하자, 나한 선사는 탄식하며, “행각하는 수행자가 어째서 하나의 돌을 마음 안에 짊어지고 다니는가?”라고 말하자 말문이 막혀, 그 암자의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탐구하게 되어 나한 선사의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유식사상을 아무리 잘 이해한다고 해도 지금 여기 자신의 생활에서 불법의 지혜로운 삶으로 전개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지식은 불법의 지혜가 아니다.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기 위해서 참선 수행하고 사유해야 한다.
법안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한 혜초는 부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사유한 수행자이다.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부처는 어떤 것인가? 수행자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혀야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과 방법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철저한 자각이 없이 많은 선사들이 주장하는 견성성불과 부처에 대한 법문을 아무리 많이 듣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부처가 되는 구법수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처란 무엇인가? 법당에 모신 등신불이 부처인가? 목불(木佛)인가. 동불(銅佛)인가? 아니면 부처의 삼신(三身)으로 설하고 있는 보신불(報身佛)인가? 법신불(法身佛)인가? 화신불(化身佛)인가?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부처라는 말에 혼란을 일으키고 미혹하게 된다.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선문답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운문은 “똥막대기(乾屎)”라고 하고, 동산은 “마삼근(麻三斤)”이라고도 대답했다. 질문은 같지만 대답은 모두 다르다. 선문답은 스승이 학인의 질문을 파악하여 수행자의 병폐(禪病)를 고쳐주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병이 다양한 것처럼, 처방도 다양해야 하는 것이다.
〈조당집〉12권에 선종화상의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길, ‘밤마다 부처를 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는 말했다. “그대는 옛 사람의 말을 믿는가?” “학인은 절대로 위배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옛 사람을 믿는다면 합장하고 묻는 그대가 바로 부처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어떤 대상과 모양에서 찾지 않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마조가 “마음이 부처(卽心是佛)”이라고 주장한 법문을 발전시켜 〈백장광록〉에서는 “부처는 바로 이 사람이며,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주장처럼, 마음과 불성을 부처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거쳐 이제 백장과 임제의 시대 이후에는 지상에서 활동하는 구체적인 사람이 부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의 제자인 반산보적 선사도 “전심(全心)이 바로 부처요, 전불(全佛)이 곧 사람이며, 사람과 부처는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체득하면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조당집 15권), 마음과 부처, 부처와 사람에 대한 일체의 차별도 없는 경지에서 불법의 지혜를 지상의 일상생활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혜초라는 수행자도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법안 화상에게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자문을 청하는 질문하고 있다. 선문답은 지식을 익히는 대화가 아니라 불법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확신을 체득하기 위한 절박한 질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철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을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법안 화상은 혜초의 질문에 “그대는 혜초이다.”라고 한마디로 대답한다. 법안 화상은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부처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고 부처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그대 자신을 두고 또 달리 밖을 향해서 부처를 구하지 말라. 그대의 이름은 혜초가 아닌가?, 그대의 이름과 부처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대답을 하고 있다. 법안화상은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원오극근도 법안 화상과 혜초의 선문답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어미닭이 껍질을 쪼아 생명이 새로 태어나게 하는 줄탁동시(同時)의 지혜작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법안 화상이 학인을 근기를 파악하는 지혜가 있었고, 혜초는 불법에 대한 참구와 수행이 무르익은 간절한 질문에 법안화상의 한마디에 깨달음을 체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가 무엇인가? 아무리 간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도 자기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고 음미하며, 반조(返照)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부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것은 질문하는 수행자의 간절한 구도심으로 응어리진 의문의 깊이에 따라서 스승의 대답이 영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종은 종을 치는 사람의 힘에 따라서 울림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원오 화상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혜초가 법안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대는 혜초이다.”라고 대답했다. 서로가 위배한 것이 없었다. 듣지 못했는가? 운문 화상이 “불법을 제시해 주어도 스스로 살펴보지 못하면 곧 잘못되고 만다. 사량분별하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한 말을.
옛 사람이 한마디의 선문답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되는 것을 살펴보면 불법의 대의를 정신 차려서 스스로 잘 사유하고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불법의 대의를 사유하고 살피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경전과 어록을 읽고, 법문을 들어도 체득할 수 없고,불법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두스님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강남 지방에 봄바람이 불지 않는데, 두견새는 꽃밭에서 지저귄다. 세 단계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 물고기는 용으로 바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밤새 연못의 물을 퍼내고 있다.”
앞의 두 구절은 법안화상과 혜초가 한마디의 선문답으로 부처가 무엇인지 곧바로 깨닫게 된 불성 지혜작용의 경지를 봄소식의 풍경으로 읊고 있다. 그러나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사량 분별하는 사람은 용문의 삼 단계 폭포를 오르지 못하고 쓸데없이 연못의 물이나 퍼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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