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9칙 趙州四門 - 조주화상과 사문(四門)

수선님 2018. 6. 24. 12:15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제9칙은 <조주록(趙州錄)>에 수록된 조주 화상의 동서남북 네 개의 문(四門)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주(趙州) 입니까?” 조주 화상은 말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지.”


擧. 僧問趙州, 如何是趙州. 州云, 東門, 西門, 南門, 北門.


조주 화상은 제2칙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설한 종심 선사(778~897)선사를 말한다. 하북성 서족에 있는 조주성(趙州城) 관음원에 머물면서 선법을 펼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조주 화상 혹은 그냥 조주라고 불렀다.

 

조주는 60살에 다시 구법행각의 길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참문 하였다. ‘7살 아동이라도 나보다 뛰어난 불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나아가 불법을 자문하고, 100살 노인이라도 나보다 견해가 못하면 나는 곧장 그에게 불법을 가르치리라’라고 서원을 세우고 80살 때 까지 깨달음을 체득한 이후(悟後)의 수행을 계속한 선승이다.

 

조주 화상이 조주 관음원에 있을 때에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조주 화상의 견해와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이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질문자의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질문하는 스님도 안목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조주 화상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지명(地名)임과 동시에 조주 관음원에 살고 있는 조주 화상을 지칭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 화상이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질문인가라고 생각하고 대답하면, 아니 조주 화상의 견해나 종풍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조주성이라는 지명(地名)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조주성이라는 지명에 대한 질문이라고 파악하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지명과 경계를 질문한 것이 아니라 조주 화상 당신의 견해에 대한 질문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문제에 걸친 질문이기 때문에 원오는 “하북 하남(河北 河南)”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河)는 황하(黃河)로서 하북과 하남은 이 황하를 두고 나누어진 것처럼, 조주도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을 포함한 문제라고 비유한 것이다. 원오는 이것은 진흙 속에 가시가 있는 질문이니 함부로 발을 내밀면 안 된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조주 화상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대답했다. 조주 화상을 곤경에 몰아넣고 조주의 안목을 시험하려던 그 스님은 조주의 대답에 오히려 본인이 곤경에 처하게 된 상황이다. 조주 화상의 대답은 단순히 조주성의 동서남북에 있는 문에 대한 대답인가. 아니면 조주 화상 자신의 입장을 대답한 것인가.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주성에도 동서남북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조주 화상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심, 수행, 보리(菩提), 열반(涅槃)의 네 개의 문(四門)인데, 밀교의 태장계만다라에서는 이것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에 배치하고, 발심은 동문, 수행은 남문, 보리는 서문, 열반은 북문으로 하며, 불법 수행은 이 네 개의 문(四門)을 통과하는 순서로 삼고 있다.

 

조주 화상처럼 위가 없는 불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는 발심은 출가수행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보리)을 성취하여 불법을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발심 수행하여 깨달음을 체득하여 열반적정을 경지에서 살고 있는 조주 화상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발심과 수행, 보리와 열반의 경지에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조주화상은 원오의 수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밝은 거울과 같은 지혜를 구족하고,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지혜의 칼(寶劍)을 손에 쥐고 어려운 질문을 한 스님에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한 것은 정말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원오는 조주의 대답에 “문이 열렸다(開也)”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조주성의 네 개의 문(四門)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자유롭게 출입 할 수가 있다. 이 조주성의 사문은 장군과 귀족, 승려나 거지 등 사람뿐 만아니라 말이나 마차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法門)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가 출입한다. <무문관(無門關)>에는 “불법을 체득하는 대도(大道)에는 고정된 문이 없다(大道無門)”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고정된 문이 없는 무문(無門)을 법문(法門)으로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일체의 모든 것이 깨달음의 문(門)이기 때문이다. 문이 없는 무문이라면 문을 닫거나 열거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문은 언제나 활짝 여덟 팔자(八字)로 열려 있는 것이다. 당대 관계(灌溪) 화상도 “시방에 울타리가 없고, 사면에 문이 없다”는 것은 온 천지가 그대로 완전히 열려 있는 텅 빈 허공의 세계(깨달음의 경지)를 읊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질문한 말에 선기(禪機)를 드러내어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지만, 삭가라(迦羅)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 동서남북의 문이 마주 보고 있는데, 아무리 철퇴를 휘둘러 처부셔도 열리지 않네.”

 

“어떤 것이 조주 입니까” 라고 질문한 스님의 지혜는 뛰어난 선기를 갖춘 인물이었다고 읊고 있다. 원오도 “고기가 움직이면 물이 흐린다”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흐린 물 속에 고기가 숨어 있는 것처럼, 스님의 질문한 말(句裏) 속에는 가시(함정)가 있는 질문이라고 하면서 조주 화상에게 가시 있는 질문을 한 것은 좀 실례된 것이 아닌가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두 번째 “삭가라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고 한 말은 조주화상을 칭찬한 말이다. 삭가라는 금강(金剛), 견고하다는 의미인데, 조주의 금강과 같은 지혜의 안목은 아무리 작은 먼지라도 분명히 밝혀내고 있다. 즉 조주는 질문한 스님의 의도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다.

 

세 번째 “동서남북의 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설두가 조주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조주의 눈에 티끌도 없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원오의 착어에 “문이 열였다(開也)”라고 한 것처럼, 대도무문(大道無門)이기 때문에 이 문은 예부터 본래부터 열려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불도의 문은 본래부터 열려 있기 때문에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대로 통과 할 수 있지만, 불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언제라도 통과 할 수가 없다.

 

원오는 “어디에 그렇게 열려있는 문이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원래 조주의 발심, 수행, 보리, 열반의 네 개의 문(四門)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 <능엄경(楞嚴經)>에서 설하고 있는 “하나의 길인 열반의 문(一路涅槃門)」이다. 일체의 모두가 그대로 조주의 네 개의 문(四門)이며, 아니 온 우주가 그대로 조주의 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조당집〉제7권에, 설봉이 일체의 모든 천지(乾坤)가 바로 해탈의 문”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무리 철퇴를 휘둘려 쳐부숴도 이 문은 열리지 않네”라고 맺고 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조주의 철문을 열수가 없다. 왜 그럴까? 항상 열려있는 이 무문(無門)의 문은 누구나 쉽게 통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조당집〉제5권에 운암이 “문으로 들어온 것은 참된 집안 보물이 될 수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고정된 문으로 들어온 물건은 시절인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되는 것이다. 경전과 어록의 설법을 사유하고 음미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할 때 무문의 문은 열리며, 한 길인 열반의 문은 열려 있는 것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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