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공부를 하는 것이 어째서 ‘동쪽으로 간다면서 서쪽으로 가는 짓’이라는 걸까?
그것이 어찌하여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어긋나는 짓일까? 경전 공부에 대해 선종이 그런 극단적인 비판을 퍼부은 데에는 새로운 종파로서 권세 있는 기존 종단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시 수증(修證)의 문제, 즉 닦고 깨치는 문제에 대한 선종의 교의(敎義)가 전반적인 배경으로 깔려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불교란 과연 무엇이냐, 그 요체가 무엇이냐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선종의 입장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불교든, 교리와 의례, 공동체 등 갖가지 요소가 담긴 종합적인 종교로서의 불교든, 불교의 요체는 역시 깨달아 성불하는 데 있다는 것이 선종이 들고 나온 가장 근본적인 신조이다. 그거야 누구나 아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가 아니냐, 거기에 이의를 달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새삼스럽게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종 사람들이 보기에 기존의 불교는 그 매우 당연한 명제를 잊고 있는 듯했다.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긴 세월이 흐르면서 잡다한 신행의 곁길들이 이리저리 뻗어나갔고, 오랫동안 멀리 오다가 보니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본령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그 곁길들을 본령으로 착각하고 집착함으로써 불교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선종에서는 단순히 깨달아 성불하는 것이 불교의 요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깨달아 성불하는 것, 지금 당장 바로 여기에서 나 자신이 깨달아 성불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불교 신행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법문 열심히 공부하고, 염불과 기도 열심히 하고, 법회 열심히 참석하고, 계율 잘 지키면서 차츰차츰 닦아가다 보면 긴 세월 뒤에(몇 년, 몇 십 년 뒤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내생을 거듭한 뒤에) 마침내 성불하리라는 것이 불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당장은 성불을 내팽개치고 경전공부, 염불, 기도, 계율에만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이 선종 사람들이 목청을 돋구어 외친 비판이었다.
지금 나는 미천하고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고, 차츰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앞으로 언젠가는 성불하겠거니 하는 매우 겸손하고 상식적인 그런 태도에 대해 어째서 선종은 그토록 매몰찬 비난을 퍼붓는가? 선종에서는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님이라는 명제를 대전제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님인데 그것을 모르고 ‘나는 지금 중생이고, 노력해서 앞으로 성불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라는 얘기이다. 불교의 깨달음이란 내가 이미 부처님이고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님임을 깨닫는 것이지, 조금씩 조금씩 부처님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점차 부처님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대해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셈이라고 오금을 박았던 것이다.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님이라는 말을 스님들 법문에서 많이 들어 익숙한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것은 참으로 황당한 얘기이다. 중생과 부처는 워낙 반대말인데, 그것을 동의어라고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종에서는 어떤 근거에서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힘주어 하는 걸까? 그것은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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