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9. 직지인심(直旨人心) 7

수선님 2018. 6. 2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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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 사상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로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리석음으로 가려져 숨어있는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부처와 중생은 역시 엄연히 다르다. 중생에게는 어리석음이 있고, 그것을 없애야 부처로서의 성품이 드러나 비로소 성불한다는 구도이다. 여기에서 어리석음이라고 일컬은 것은 한자말로는 무명(無明), 또한 무명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온갖 번뇌(煩惱)를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여래장이니 불성사상이니 해서 어려운 것처럼 느껴져도, 요점은 이해 못할 게 아닐 듯도 하다. 한 마디로 중생은 부처가 될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리석음, 무명, 번뇌 등등 뭐라고 부르건 간에 중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 해탈하고 성불한다는 교리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가 있으면 중생이고 문제를 해결하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래장이니 불성이니 하는 것은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뜻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종에서 말하듯이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심하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다. 여래장이니 불성이니 해도, 역시 처음에는 중생이었다가 나중에 성불할 수 있다는 얘기이지 어찌 감히 중생이 그대로 이미 부처라고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중생과 부처 사이의 관계를 과연 어디에 초점을 두고 얘기하느냐 하는 점이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에 초점을 두면서 같아질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수도 있겠지만, 중생이 워낙 부처로서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중생과 부처가 근본적으로 같다는 점을 강조하는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중생으로 살아가는 데 푹 빠져서 헤어나올 생각을 않는 이들에게는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한 부처님의 경지를 이야기해준다. 한편 부처의 경지를 신비화한다거나 성불은 너무 어렵고 요원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중생이 워낙 여래장이요, 당신도 이미 부처로서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어리석음만 떨쳐버리면 된다고 격려한다.


어쨌든, 여래장사상, 불성사상에서 말하는 성불은 중생이 완전히 환골탈태해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바뀌고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해설해도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여래장이니 불성이니 하는 것 자체가, 중생이 원래 부처로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가 온전히 발현하게 되는 것이 성불이지 전에 없던 어떤 자질이 새로 생긴다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이미 중생과 부처 사이의 어떤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선종에서 중생이 그대로 이미 부처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사상, 불성사상이 말하는 중생과 부처 사이의 연속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방편설일 뿐인가? 어차피 모든 언설이 방편이라고 보기도 하니까 그렇게 말해도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선종의 그 이야기에는 단순히 중생 교화를 위한 기술적인 편의 이상의 의미가 깔려있다. 어리석음의 정체에 관한 견해가 거기에 전제로 깔려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리석음, 즉 무명번뇌는 워낙 그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중생과 부처를 가르는 장벽인 무명번뇌가 원래 없으니 중생과 부처는 같다는 논리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다음 회의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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