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님이라는 것이 선종의 대전제라는 이야기를 했다.
중생과 부처는 원래 반대말인데 어찌하여 중생과 부처가 같다는 걸까? 중생이 곧 부처요 윤회가 곧 열반이라는 이야기는 대승불교에서 오래 전부터 해왔다. 모든 것의 본래 정체는 다 텅 비었다고 하는 공도리(空道理)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불이(不二) 법문에서는 모든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실상은 다 같다고 말한다. 더 온전하게 말하자면, 불일불이(不一不二) 또는 불일불이(不一不異), 즉 하나(같지)도 아니요 둘(다르지)도 아니라고 한다. 같지 않다는 쪽은 일단 너무나 당연하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같지 않다는 쪽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니, 불일(不一) 쪽은 언급조차 별로 하지 않는다. ‘불일불이법문’이라 하지 않고 ‘불이법문’라 일컫는 것도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불이법문에 관해서는 다음 회의 글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라는 선종의 대전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성(佛性)이라는 교리 개념과 연관시키는 것이 편리하다. 불성은 원래 붓다다투(Buddha-dhatu)라는 인도 말을 번역한 것인데, ‘다투’라는 말은 대개 계(界)라고 번역되곤 했으니, ‘붓다다투’는 불계(佛界)라고 번역할 만도 한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불성이라고 번역되었다. 복잡한 사정과 뜻이 있겠지만, 다 젖혀두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끌어가자. 교리 개념 하나 하나의 복잡한 사정을 샅샅이 파헤치는 데 전념하는 전문학자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단순화시켜 이야기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아무튼, 불성이라고 해놓고 보니 부처의 성품이라는 뜻이 되었고 우리도 이해할 만한 개념이 되었다. 그러니까 <열반경>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한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는 부처의 성품, 부처로서의 성질이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중생과 부처라는 말의 용법을 보자면 부처가 아닌 뭇 생명을 중생이라 하고 중생 중에서 진리를 깨쳐 해탈한 이를 부처라고 한다. 그러니까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함은 곧 누구나 부처가 될 소양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순조롭다.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이라는 개념도 이와 관련이 있다. 중생에게는 여래, 즉 부처로서의 성품이 있는데, 그것이 가려지고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장(藏)이라는 말이 감추어져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무엇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가? 무명(無明), 즉 중생의 어리석음이 자신의 불성을 가려서 그것이 드러나고 발휘되지 못하게 한다. 그 대신에 이를테면 중생성만 발휘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달리 말하자면 모든 중생이 다 부처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어리석음 때문에 부처로서 살지 못하고 중생으로 살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어리석음만 뺀다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라는 것도 말이 된다.
그러나 선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모든 중생이 더도 덜도 없이 이미 다 부처라고 선언한다. 어리석음을 쓸어내야만 부처가 된다고 보는 것이, 즉 불성을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조로울 텐데, 어째서 어리석음이라는 요소는 무시해버리는 것일까? 다음 회에서는 위에 잠깐 언급한 불이법문, 또한 본각(本覺)이라는 개념과 연관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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