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리에 입각해서 보면 무명번뇌라는 것이 본래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는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무명이요 온갖 번뇌의 발단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아무튼 있다는 얘기 아니냐, 그렇다면 결국 무명번뇌가 있다는 데로 논리가 귀결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 무아(無我)를 잊지 마시라.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인식의 주체는 우리 각자의 자아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자아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오온(五蘊),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그때그때 일시적으로 모여서 만들어졌다가 그 요소들이 흩어지면 자연히 없어져버리는 것이라고 본다. 생각의 주체라는 것이 그처럼 허망하니 그것이 만들어낸다는 온갖 생각 또한 자연히 허망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색수상행식 오온이 뭐냐? 이 개념은 초기 불교 교리부터 무수하게 등장하지만, 아무리 잘 설명해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전문가들은 또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일단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자. 즉, 우리가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 자신이라고 여기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아라는 것이 실상은 우리 몸의 감각 및 지각 기관과 외부의 대상이 접촉하여 만들어내는 인식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내놓은 교리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온갖 일과 사물에 대하여 일으키는 기뻐하고 성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감정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며 내리는 판단, 그 늘 변화하는 인식의 마디와 흐름들을 가지고 바로 우리 자신의 자아라고 착각할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정불변의 자아라고 여기는 것은 지어낸 관념일 뿐이다. 그 자아가 일으킨다고 여기는 절실한 감정과 판단과 인식도 모두가 지어낸 것이다. 흔히 듣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아는 없다 해도 마음이라는 것이 또 따로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지는 마시라. 그 또한 설명을 위한 개념일 뿐이니까.
이쯤해서 독자 여러분께 생각할 거리를 하나 드리겠다. 싯다르타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고 한다. 복을 받거나 내생에 좋은 데 태어나기 위해 공덕을 쌓는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납자(衲子)의 본분(本分)이라고 선사들이 흔히 강조하곤 하는 것도 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깨쳐서 부처가 되고 해탈했다는 것은 곧 그 생사 문제를 해결했다는 얘기인데, 과연 어떻게 해결했는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는가? 아니다. 석가모니도 결국에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생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다는 말인가? 이 생은 죽음으로 마감했지만 다음에는 다시 환생하지 않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찌하여 그럴 수 있게 되었는가? 환생은 업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계속된다고 하는데, 석가모니는 어떻게 해서 업을 다 소멸하였다는 말인가? 진리를 깨침으로써 일거에 유루(有漏)의 업, 즉 환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다 소멸했다는데, 석가모니가 깨쳤다는 생사의 진상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런 어마어마한 효력을 발휘하는가? 이 문제를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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