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마하시 사야도 법문

[스크랩] 12연기...9. 세번째 멸성제(滅聖諦)와 네번째 도성제(道聖諦)에 대한 무지

수선님 2018. 6. 24. 12:28

IGNORANCE OF THE THIRD AND FOURTH NOBLE TRUTHS

 

Avijjā also means ignorance of the cessation of dukkha and the way to it. These two truths are also profound and hard to understand. For the truth

about cessation of dukkha concerns Nibbāna which is to be realized only on the Ariyan holy path and the truth about the way is certainly known only to the yogi who has attained the path. No wonder that many people are ignorant of these truths.

 

9. 세 번째 멸성제(滅聖諦)와 네 번째 도성제(道聖諦)에 대한 무지

 

무명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와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를 모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들도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는 열반에 관한 것이며 열반은 오로지 성자의 성스러운 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도(道)를 증득한 수행자만이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 진리에 대해 무지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Ignorance of the end of suffering is widespread and so world religions describe the supreme goal in many ways. Some say that suffering will come to an end automatically in due course of time.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는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종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의 목적을 설교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Some regard sensual pleasure as the highest good and reject the idea of a future life. This variety of beliefs is due to ignorance of the real Nibbāna. Even among Buddhists some hold that Nibbāna is an abode or a sort of paradise and there are many arguments about it. All these show how hard it is to understand Nibbāna.

 

어떤 이들은 감각적 쾌락이 최고선(最高善)이라고 생각하고 내생을 부정합니다. 이 다양한 교의는 모두 진정한 열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심지어 일부 불교신자들마저도 열반을 어떤 거처나 극락세계(極樂世界)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열반에 대한 이론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열반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In reality Nibbāna is the total extinction of the nāma-rūpa process that occurs ceaselessly on the basis of causal relationship. Thus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Paṭiccasamuppāda, avijjā, saṇkhāra, etc give rise to nāma-rūpa, etc and this causal process involves old age, death and other evils of life.

 

실제로 열반이란 인과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 과정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즉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과 상카라(行)등이 명색(名色)을 일으키고 이러한 인과의 과정들로 인해 늙음, 죽음 등 기타 삶의 괴로움들이 수반되어 따라오는 것입니다.

 

 

 

If avijjā, etc become extinct on the Ariyan path, so do their effects and all kinds of dukkha and this complete end of dukkha is Nibbāna.

 

성스러운 도(ariya-magga)에 의해서 무명이 소멸하면 그 결과물과 모든 괴로움 또한 소멸되며 이러한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 바로 열반입니다.

 

 

 

For example, a lamp that is refueled will keep on burning but if it is not refueled there will be a complete extinction of flame. Likewise for the yogi on the Ariyan path who has attained Nibbāna, all the causes such as avijjā, etc., have become extinct and so do all the effects such as rebirth, etc.

 

예를 들면 기름을 부으면 등불이 계속하여 타오를 것이나 기름을 붓지 않으면 불꽃이 완전히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한 수행자는 무명과 같은 모든 원인을 제거하여 재생(再生)과 같은 결과 또한 제거하였습니다.

 

 

 

This means total extinction of suffering, that is, Nibbāna which the yogi must understand and appreciate before he actually realizes it.

 

이것은 수행자가 실제로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 반드시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뜻합니다.

 

 

 

This concept of Nibbāna does not appeal to those who have a strong craving for life. To them the cessation of nāma-rūpa process would mean nothing more than eternal death. Nevertheless, intellectual acceptance of Nibbāna is necessary because on it depends the yogi’s whole-hearted and persistent effort to attain the supreme goal.

 

이 열반의 개념은 삶에 강한 갈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정신· 물질의 과정이 소멸한다는 것은 단지 영원한 죽음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열과 성을 다하는 부단한 노력은 이러한 이해와 받아들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Knowledge of the fourth truth, viz, truth about the way to the end of dukkha is also of vital import!ance. only the Buddhas can proclaim the right path; it is impossible for anyone else, be he a deva, a Brahma or a human being, to do so.

 

네 번째 진리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를 아는 것 또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오직 부처님들만이 바른 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천신이나 범천, 인간 같은 다른 존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But there are various speculations and teachings about the path. Some advocate ordinary morality such as love, altruism, patience, alms giving, etc., while others stress the practice of mundane jhāna. All these practices are commendable.

 

그러나 그 도에 대한 갖가지 추론과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 박애(博愛), 인욕, 보시 등과 같은 일반적인 도덕을 설파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세속적인 선 수행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모든 수행들은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According to the Buddhist teaching, they lead to relative welfare in the deva-Brahmæ worlds but do not ensure freedom from samsāric dukkha such as old age, etc., So they do not form the right path to Nibban although they are helpful in the effort to attain it.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천신계나 범천계에 태어나는 상대적인 행복에 이르지만 늙음과 같은 윤회고로부터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비록 열반을 얻기 위한 노력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열반에 이르는 바른 도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Some resort to self-mortification such as fasting, living in a state of nature and so forth. Some worship devas or animals. Some live like animals. From the Buddhist point of view all these represent what is termed silabbataparāmāsa which means any practice that has nothing to do with the Eightfold Path.

 

어떤 이들은 절식이라든지, 원시인처럼 사는 것과 같은 고행에 의지합니다. 어떤 이들은 천신이나 동물을 숭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동물처럼 삽니다. 불교의 견지에서 볼때 이러한 모든 것은 팔정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수행을 뜻하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을 나타냅니다.

 

 

 

The Eightfold Noble Path comprises right view, right intention,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templation. The path is of three kinds, viz., the basic path, the preliminary path and the Ariyan path.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도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즉, 근본 도(mūla-magga), 예비 수준의 도(pubbabhāga-magga), 그리고 성스러운 도(ariya-magga)입니다.

 

 

 

Of these the most vital is the Ariyan path but this path should not be the primary objective of the yogi nor does it require him to spend much time and energy on it. For as the vipassanā practice on the preliminary path develops, the insight on the Ariyan level occurs for a thought-moment.

 

이중에 가장 중요한 길은 성스러운 도이지만 이것이 수행자의 일차적 목적이 되거나 수행자가 그것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쓴다든가 에너지를 쏟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비 수준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발전함에 따라 성자의 단계에 있는 통찰지가 한 의식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For example, it requires much time and effort to produce fire by friction but ignition is a matter of a moment’s duration. Similarly, the insight on the Ariyan path is instantaneous but it presupposes much practice of vipassanā on the preliminary path.

 

예를 들자면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도에 서 통찰지는 눈깜짝할 사이에 오지만 이는 예비 수준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를 전제로 합니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금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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