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견성성불의 뜻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본각(本覺), 불각(不覺), 시각(始覺) 개념을 소개하였다.
본각이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즉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모든 중생이 본래 깨쳐 있다’는 말로 바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것은 ‘불성’이라는 말을 ‘부처가 될 잠재적인 가능성’이라는 뜻으로 보는 데에서 더 나아간 것이다. 본래 깨쳐 있다면 본래 부처라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가 부처인가? 세간에서 온갖 탐욕을 부리며 번뇌 속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째서 부처라는 말인가?
증명해 봐라!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라! 이런 질문과 요구가 당연히 쏟아지겠고 이에 답변하는 논변과 법문도 많이 쌓여왔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조리 있게 설명한다 해도, 이에 대해 아무리 설득력 있고 감동 깊게 설파를 해준다 해도, 결국에는 믿음의 문제이다. 이해할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경론(經論)에서도 이런 대목에 오면 흔히 ‘부사의(不思議),’ 요즘 쓰는 말로는 ‘불가사의(不可思議),’ 즉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고 의논하여 해명될 것이 아니라는 말로 결론을 짓곤 한다.
어느 종교에나 그 핵심 교의를 붙들고 논리적으로 이해를 추구해 가다보면 더 이상 논리와 사변으로써 해명할 길이 막히는 대목, 달리 표현하자면 말의 길이 끊어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대목이 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그 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신조(信條, creed), 즉 믿음의 조항이 있다. 이해의 길은 막혔지만 그것을 받아들여 믿으면 그 종교의 신자요, 거기에서 못 믿겠다고 나가떨어지면 신자가 못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조물주이며 예수는 그 아들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의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 교의가 한 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였고 이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신조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증명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마느냐 하는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선언은 동북아 대승불교의 기본 신조로서, 비유를 통해서 좀더 그럴 듯하게 설명을 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진위(眞僞)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말고 할 사항은 아니다.
아무튼, 본각 개념에서 참으로 아리송한 것은 ‘본래’라는 말이다. 그 말이 가지는 뉘앙스가 참으로 묘하다. 중생이 곧 부처이다! 더 이상 할 말 없다! 네가 그것을 알건 모르건 아무튼 간에 너는 부처다! 더 이상 무슨 얘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러고 말 수도 있다.
한편으로, ‘본래는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어감도 있다. ‘아니다’까지는 아니더라고, ‘모르고 있다’는 사정을 암시하고 있다. 하기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본각이니 불각이니 시각이니 하는 말도 원래 필요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말로 설명을 하려다보니 할 수 없이 짐짓 그런 구별하는 개념들을 동원할 뿐이라고 하였다. 본래 부처인 자기 정체를 그대로 살면 되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말로 된 설명을 요구하는 사정, 설명을 듣고도 아리송해하는 사정, 바로 그것이 중생의 근본적인 역설을 나타낸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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