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14. 견성성불(見性成佛) 1

수선님 2018. 7. 1.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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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선종의 교의에 담긴 뜻을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선종에서는 세상의 근본문제를 결국에는 우리 마음의 문제로 수렴시켜 진단하였다.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생사의 문제이고, 생사의 근원은 무명번뇌라는 것이 십이연기설로 대변되는 불교 일반의 진단이다. 선종에서는 그 모든 문제의 근원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더 꼭 집어서 말한다.


무명번뇌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자리이며, 무명번뇌 그 자체가 지금 우리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무명번뇌를 없애는 것도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고 그것이 없는 경지 또한 우리의 마음자리에서 펼쳐진다. 모든 것을 개체와 개별 현상으로 분별하고 분절적인 틀로만 보면 생사가 엄연히 있다. 그러나 삼라만상을 다 싸잡아 보듬는 전체의 장에서 보면 개체의 생사, 개별 현상의 생멸은 다 그 속에 녹아버리고 모두가 연기(緣起)일 뿐이다.


그처럼 생사를 비롯한 모든 문제의 비밀과 열쇠가 사람 마음에 들어있으니 바로 그것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 ‘직지인심’이라는 선종의 교의이다. 거기에 함께 붙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견성은 견자본성(見自本性), 즉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본다는 말을 줄인 것이라고 풀이된다. 여기서 ‘자신’이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가리킨다.


모든 중생의 본래 성품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보면 부처가 된다고 할까? 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중생의 본래 성품은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대승불교 사상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이다. 중생의 본래 성품은 부처의 성품이라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얘기가 된다. 어찌하여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건가? 중생과 부처가 다른 근본적인 연유는 무명번뇌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엄연히 개별적인 실체라 여기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실상은 공(空)이듯이, 무명번뇌도 마찬가지로 공이다. 즉 중생과 부처를 가르는 근본적인 연유가 본래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중생과 부처는 본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로 귀착된다.


그런 뜻을 담은 개념이 이른바 본각(本覺)이다. 중생은 본래 깨쳐 있다, 즉 본래 부처라는 것이다. 헌데,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해도 지금은 엄연히 중생일 뿐이 아니냐는 의심도 든다. 아무리 무명번뇌가 본래 공이요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해도, 중생이 부처가 아니라 중생으로 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한 현실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기는 그렇다.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의 글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그것이 숨어있고 가려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생이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중생인 줄로만 알고 중생으로서만 마음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불각(不覺), 즉 깨치지 못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인 그 정체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불각의 상태를 타개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 사건을 일컬어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그러면 시각에서 깨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그 어느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본래 깨쳐 있었음을, 본래부터 부처였음을 깨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가 아니었다가 깨침으로써 비로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부처였다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뿐이다. 견성성불, 즉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말은 그러니까 말을 좀 바꾸면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아차림으로써 그야말로 부처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이 본각, 불각, 시각 이야기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나오는데, 그럴 듯하면서도 들여다볼수록 아리송하다. 어떤 대목이 아리송한지는 다음 회의 글에서 이야기를 잇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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