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석가모니는 ‘생사라는 것이 본래 없다, 그러니 생사는 애당초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생사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했다.
그런 이치를 대승불교에서는 무생법(無生法)이라고 일컫는다. 더 온전히 말한다면 무생무멸법(無生無滅法)이 되겠고 실제로 경전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같은 뜻의 말을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생겨남이 없으면 사라짐 또한 자동적으로 없으니 굳이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아니, 분명히 모든 것이 생겨났다 없어지는데, 어찌하여 생겨남과 없어짐이 없다는 말인가? 모든 존재를 개체로서만 보면 그 운명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생겨남과 없어짐을 꼽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얼마간 지속되는 기간과 양상이 있고, 그동안 온통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존재가 지속되는 동안의 개체로서는,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이며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고 절박하게 여겨지게 마련이다. 무생물이나 하급 생명체야 그런 고민이 없겠지만, 사람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문제가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 흔히 하시는 말씀이, ‘생사가 근본 문제이니 이를 해결하는 것이 납자의 본분사’라고 한다.
생사가 모든 존재의 너무나 자명한 운명이요 절실한 문제로 보이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하나의 개체로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세상 전체, 우주 전체를 단위로 해서 보면 생사라는 게 본래 없다고 했다. 리틀붓다라는 영화를 보면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찻잔을 내던지는 장면이 있다. 찻잔이 깨져 바닥에 흩어지고 잔 속에 들어있던 차도 쏟아진다. 쏟아진 차를 걸레로 훔쳐 하수구에 짜버리고 찻잔 조각을 주어 쓰레기통에 버리면, 찻잔과 차는 정녕 이 세상에서 아예 없어진 것인가? 그 찻잔과 차만 가지고 보자면 그렇다고 해야 하겠지만 세상 전체로 보자면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물을 마시면 컵에 담겼던 그 물은 없어지지만 그것이 소변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닷물이 되면서 유전(流轉)한다.
그리고 이철수씨의 판화 ‘백장암 가는 길에’를 보면,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부도가 서있고 그 위에 구름이 한 점 떠있다. 그 아래에 이철수씨가 써넣은 글귀는 다음과 같다. “탑, 비는 막돌이 되기까지야 고생 아닌가? 편할 날이 있으리니 참고 지내시게.” 바위를 가지고 탑이나 비를 깎아 세워놓고는 이게 부처님 몸이라네, 이게 아무개 스님의 몸이라네 하면서 합장하여 절하고 그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해대니, 바위 그 자체로서는 고생이라는 얘기이다. 풍우에 마모되어 다시 막돌이 되어야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엉뚱한 의미를 덮어씌우지 않고 내버려두는 원래의 바위 그대로의 존재를 되찾으리라는 얘기이다.
비슷한 비유로, 철광석을 녹여 철을 뽑아내서는 그것으로 쟁기나 호미를 만들어 쓰다가 녹슬고 망가져 버려서 긴 세월 뒤에 분해되고 흙으로 돌아갔다면 그것은 철광석의 생사인가, 철의 생사인가, 쟁기나 호미의 생사인가? 철광석, 철, 쟁기나 호미의 입장에서 보면 생겼다 없어짐이 있지만 세상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말이 가서 붙을 데가 없다. 그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우주 전체를 내 몸으로 삼는 의식으로 보자면 아무 것도 나고 죽는 것이 없다.
그러니 생사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 의식과는 무관하게 어디 저 밖에서 엄연하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이, 개별자로서의 사고방식에만 매어있는 이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 문제를 풀려면 다른 것 힐끗거릴 필요 없이 바로 네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얘기가 ‘직지인심’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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