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본각의 차원에서 보면, 중생이니 부처니 할 것도 없고 깨쳤느니 못 깨쳤느니 하는 말도 의미가 없다.
본각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다. 그저 본래 부처인 자기 정체 그대로 살면 된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처임을 도무지 인정하지 못한다. 선종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망상이 바로 그것, 즉 자기가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이라고 본다.
번뇌망상이라고 하면 온갖 번잡한 고뇌와 그릇된 생각이니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상적인 사례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런 모든 번뇌망상은 지엽적인 것이요, 자기가 부처인 줄을 모르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십이연기설에서 생사의 궁극적인 연유로 지목한 무명(無明)도 바로 그런 상태, 즉 자기가 부처인 줄을 모르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그러면 그런 근본적인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불교 교리에서 이에 대한 직설적인 답은 없다. 석가모니는 이 세계가 무상(無常)한지 아닌지, 유한(有限)한지 무한한지, 영혼과 신체는 같은지 다른지, 죽은 뒤의 삶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등 외도(外道)의 사상가들이 제기한 열 네 가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논변을 펼쳐보았자 끝없는 논쟁만 벌이게 될 뿐이어서,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일컬어 무기(無記)라고 한다. 무명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그 열 네 가지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이것 또한 그런 종류의 문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 전에 언급했듯이 무명은 개체로서의 생명체의 존재에 기본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다. 생명체라 하면 이미 개체요 개별자이다. 물론, 생명을 생각할 때 꼭 개체성, 개별자로서의 존재들이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시야에서 볼 수도 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은퇴해서 시골에 내려가 환경학교를 이끌면서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는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이라는 개념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개별자로서의 생명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범위로 하는 역동적인 생명 개념이며, 불교의 세계관과도 통하는 점이 꽤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명체라 할 때에는 생명을 지닌 개체 낱낱의 존재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중생, 즉 뭇 생명이라는 개념도 일단은 그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온생명’처럼 포괄적이라고 할까, 전체적이라고 할까 하는 그런 의미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전에 십이연기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했듯이, 무명은 개체로서의 생명체의 존재조건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기 이외의 개체들 및 세계와 분리된, 그것들을 객체로 삼는,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무명이란 존재의 그런 기본조건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무명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곧 존재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다. 불교 교리에서는 존재의 기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세계가, 그 속의 삼라만상 및 생명체들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문제는 위에서 말했듯이 무기(無記)의 문제에 해당한다. 그래서 무명의 기원은 불교에서 직설적으로는 다루지 않는 문제이다. 그냥 무시이래(無始以來), 즉 ‘시작이 없는 때부터’라거나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있는 것이라고만 한다.
윤원철/서울대학교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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