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의하면, 중생은 이미 부처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미 무명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양면적이라 할까, 모순이라 할까, 역설적이라 할까, 그런 아리송한 존재이다.
‘역(逆)의 합’이라는 말이 있다. 라틴어 ‘coincidentia oppositorum’을 번역한 말인데, 고대 문헌에 이미 등장하니 매우 오래된 개념이다. 반대되는 양극(兩極)이 한 데 모였음을 가리킨다. 한 데 모였다고 해서, 양극이 합쳐서 뭔가 중간의 것이 생성되고 양극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합쳐서 보라색이 만들어지고 파란색과 빨간색은 없어지는, 그런 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어느 한 극이 없으면 다른 쪽 극도 의미가 없어지므로 늘 양극이 쌍으로 함께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양극이 늘 상대를 동반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남자라는 개념과 여자라는 개념은 반대되는 양극을 가리키는데, 그 둘은 늘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지 따로 떼어놓으면 어느 쪽도 성립할 수 없으며,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다.
종교학자들은 종교상징, 종교적 세계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이 역의 합을 거론한다. 성(聖)과 속(俗)이라든가 조물주(造物主)와 피조물(被造物) 등 대척(對蹠)되는 양극이 함께 함으로써 종교라는 현상이 펼쳐지게 되고, 그러한 역의 동반 내지 역의 합이 종교의 사상과 신행에 주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각(覺)과 불각(不覺), 부처(깨달은 이)와 중생(못 깨달은 이)도 그러한 양극의 관계이다. 그리고 중생이 이미 부처라고 하는 얘기나, 불각인 듯해도 실상은 모두 본래 깨쳐있다고 하는 본각 개념은 그 양극의 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부처라는 쪽은 내버려둔 채 무명만 발동시키고 무명에만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데 중생의 문제가 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무명이라 하면 ‘밝지 못하다’ ‘보지 못한다’는 뜻이니, 인생과 사물의 진상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알아야 할 인생과 사물의 진상이 뭐냐? 불교 교리에서 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답이 되는 것은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이다. 무상이란 모든 존재와 현상은 영원하지 않고 늘 변하며 생겨났다 없어지곤 한다는 뜻이고, 무아란 그러므로 모든 존재와 현상은 아(我)라고 할 만한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혹자는 “나는 무아니 무상이니 하는 얘기는 숱하게 들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르니 하는 말이지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서 무아와 무상의 이치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그 이치를 온몸으로 살아가느냐 못하느냐는 뜻이지, 머리로 아느냐 아니냐는 정도를 문제삼는 게 아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요”라고 아무리 일러주어도, 그런 얘기 많이 들어보았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도 속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한다. 일상생활에서 부처님으로서 산다는 것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나고 그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바로 당신이 그대로 부처님이요”라고 일러주면 속으로는 “앞으로 성불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안다’는 정도로는 안 되고 견(見), 즉 ‘보라’고 한 것이다. 견성(見性), 즉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정체를 온전하게 확인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불(成佛)이란 부처가 아니었다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부처였음을 확인할 뿐이라는 뜻이다.
윤원철/서울대학교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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