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WHOLESOME KAMMAS
Opposed to puññā-abhisaṅkhāra is apuññā-abhisaṅkhāra or unwholesome kamma formations. These immoral deeds lead to lower worlds and evils in human life such as ugliness, infirmities and so forth.
12. 불선업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의 반대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입니다.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는 악처에 태어나게 하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용모가 추하게 되거나 병약한 몸을 갖게 됩니다.
They number twelve in terms of consciousness, viz, eight rooted in greed (lobha), two rooted in ill-will (dosa) and two rooted in ignorance (moha).
이들 선하지 못한 마음은 모두 열두 가지인데 탐욕(lobha)에 뿌리박은 마음 여덟 가지, 성냄(dosa)에 뿌리박은 마음 두 가지, 어리석음(moha)에 뿌리박은 마음 두 가지, 모두 합해서 12가지입니다.
The lobha-based dhammas comprise four with wrong belief and four without it. Of the four dhammas with wrong belief, two are joyful, spontaneous (asaṅkhārika) dhamma and joyful but unspontaneous (sasaṅkhārika) dhamma.
탐욕에 뿌리박은 불선한 마음(법)은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와 사견과 결부되지 않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 마음(법)가운데 두 가지는‘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지 않은(asaṅkhārika) 마음’과 ‘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은(sasaṅkhārika) 마음’입니다.
The neutral (upekkhā) unwholesome dhammas may be classified in the same way. Likewise there are two joyful, lobha-based dhammas without wrong belief and two lobha-based dhammas without joy and wrong belief. Every kamma is characterized by one of these eight lobha-based dhammas.
중립적인(upekkhā) 불선한 마음’도 위와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이고, 기쁨과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입니다. 모든 업은 이 여덟 가지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법) 중 하나로 특징 지어질 수 있습니다.
The dosa-based dhamma is of two kinds, viz, spontaneous kamma and unspontaneous kamma, This dosa-based consciousness is the mainspring of anger, dejection, fear and revulsion.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은 ‘자극이 있는 업’과 ‘자극이 없는 업’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악의에 뿌리박은 마음은 화냄, 낙담, 두려움, 혐오의 근원입니다.
The two kinds of moha-based consciousness are doubt (vicikicchā) and restlessness (uddhacca). The former concerns doubts about the Buddha, Dhamma, Sangha, sila, samādhi, the idea of a future life and so forth.
어리석음(moha)에 뿌리박은 두 가지 종류의 마음은 의심(vicikicchā)과 들뜸(uddhacca)입니다. 의심은 불, 법, 승, 지계, 삼매, 내생 등에 대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The latter refers to the person who is distracted and absent-minded. The mind is seldom calm and it usually goes wandering when it is not restrained through the practice of bhāvanā.
들뜸은 심난하고 얼빠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수행(bhāvanā)을 닦아서 제어하지 않으면 마음은 좀처럼 고요해지지 않고 보통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It is said, however, that uddhacca does not lead to the lower worlds. The other eleven unwholesome dhammas do so under certain circumstances and even in case of a good rebirth they usually have kammic effects such as sickliness.
하지만 들뜸이 악처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들뜸 이외의 다른 11가지 불선법 은 어떤 경우에는 악처로 이끌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에도 병약함과 같은 나쁜 업의 과보를 받게 합니다.
These twelve kinds of unwholesome volition (cetanā) are called apuññā-abhisaṅkhāra.
이 12가지의 불선한 의도(cetanā)를 일러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All over the world people wish to be happy and so they strive for their material welfare in the present life and hereafter. But it is greed and ill-will that largely characterize their activities.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에서 물질적 복리를 증진 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대개 탐욕과 성냄입니다.
Wholesome consciousness is confined to those who have good friends, Who have heard their dhamma and who think rationally.
선한 마음은 좋은 친구를 두고 그들로 부터 법을 들으며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Some go morally astray, being misled by their selfish teacher. In the lifetime of the Buddha a lay Buddhist abused good monks and so, on his death he became a peta in the latrine of the monastery he had donated to the Sangha.
이기적인 스승에게 잘못된 지도를 받는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재가신자가 선량한 비구를 헐뜯었는데 죽어서 자신이 생전에 승단에 보시한 승원의 변소에 사는 아귀가 되었습니다.
He told the elder thera Moggallāna about his misdeed when the latter saw him with his divine eye. What a terrible fate for a man who had materially supported the Sangha for his welfare in afterlife but was misguided to the lower world by his teacher.
그 아귀는 하늘 눈(天眼)으로 그를 알아본 목갈라나 존자에게 자기가 지은 악업을 말씀드렸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위해 물질적으로 승가에 보시하였건만 스승에 의해 잘못된 지도를 받은 사내의 운명은 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This shows that the person whose company we seek should possess not only deep knowledge but also good character.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아야할 스승은 학식뿐만이 아니라 선한 기질도 함께 지녀야만 함을 보여줍니다.
The mark of a good man is abstinence from any act, speech or thought that is harmful to other people. Those who keep company with good men or good bhikkhus have the opportunity to hear the good dhamma and if he thinks wisely his thoughts will lead to wholesome kamma.
선한 사람의 특징은 남을 해꼬지 하고자 하는 행동, 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선한 비구와 사귀는 사람은 좋은 법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만약 그가 현명하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선한 업으로 이어집니다.
On the other hand evil teachers or friends, false teachings and improper thoughts may lead to moral disaster. Some who bore unblemished character in the beginning were ruined by corrupt thoughts.
반면에 못된 스승이나 친구, 그릇된 가르침과 부적절한 사유는 도덕적 붕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엔 결점 없는 성질을 지녔지만 타락된 사상으로 무너집니다.
They were convicted of theft, robbery or misappropriation and their long standing reputation was damaged once and for ever. All their suffering had its origin in the illusion of happiness.
이들은 도둑질, 강도, 횡령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는 오랫동안 쌓아온 명성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이 모든 고통은 다 행복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됩니다.
Contrary to their expectations, they found themselves in trouble when it was too late. Some misdeeds do not produce immediate kammic results but they come to light in due course and lead to suffering.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곤란에 봉착해있는 자신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습니다. 어떤 악행은 즉각적인 과보가 생기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과보가 무르익어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If retribution does not follow the evil-doer here and now, it overtakes him in after life as in the case of the donor of the monastery who became a peta for his evil words.
현생에서 만약 악을 행한 자에게 업의 과보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귀가 되었던 승원 보시자의 경우처럼 내생에는 그를 덮칩니다.
His teacher who had misguided him fared worse after his death. For he occupied a place below his former pupil and had to live on his excreta. The kammic result of his misdeed was indeed frightful. He had committed it for his own end but it backfired and he had to suffer terribly for it.
그를 그릇되게 지도했던 스승은 사후의 운명이 더 비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제자의 아랫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제자의 똥을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악업의 과보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지른 행위의 과보는 역으로 그를 덥쳐서 그로 인한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Some jungle tribes make animal sacrifices to gods for good harvest, security, etc. These primitive beliefs still prevail among some urban people. Some worship the chief nat as if he were the Buddha.
밀림의 어떤 부족들은 풍작과 안전 등을 기원하며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믿음은 도시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력한 낫(nat)을 부처님인양 숭배합니다.
Some kill animals to feed guests on the occasion of religious alms-giving. Even some ignorant Buddhists have misgivings about this practice.
어떤 이들은 종교적인 공양의식에서 동물을 잡아서 손님들을 접대합니다. 심지어 일부 무지한 불교신자들도 이러한 관습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Whatever the object of the donor, killing has bad kammic result and it is not a good deed despite the belief of the killer to the contrary.
보시하는 사람이 목적이 무엇이든 살생은 나쁜 업보를 받으며 살생을 한 사람이 믿는 바와는 반대로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A good deed bears the mark of moral purity. Killing or hurting a living being cannot be morally pure in any sense if you identify yourself with the victim. He faces death or endures ill-treatment only because he cannot avoid it.
선한 행위는 도덕적인 청정을 특징으로 합니다. 희생자와 입장을 바꿔놓고 볼 때 생명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로도 도덕적으로 청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희생자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직면하고 학대를 당해야 합니다.
He will surely retaliate if he is in a position to do so. Some people pray for vengeance and so the killer is killed in his next existence or he has to suffer in hell for his misdeed. The Piṭaka abounds in many instances of the kammic consequences of killing.
그가 만일 보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수를 기원하여 살생을 저지른 자가 내생에 죽임을 당하거나 악행으로 인해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경장에는 살생의 과보에 대한 수없는 일화들이 많이 나옵니다.
Some long for human or deva life and devote themselves to dāna, sila and bhāvanā. Their good deeds serve to fulfil their wishes and lead to welfare in afterlife but every life is subject to old age and death and human life is inextricably bound up with ill-health and mental suffering.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나 천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며 보시, 지계, 수행에 힘씁니다. 그들이 지은 선한 행위로 인해 그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며 내생에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만 모든 삶은 늙음과 병듦을 겪어야 하며 인간의 삶은 병듦와 정신적인 괴로움과 피할 수 없게 얽매여 있습니다.
Some crave for the Brahmæ-world and practise jhæna. They may live happily for many kappas (world-systems) as Braha mas. But when life has run its course, they will be reborn as human beings or devas and any evil deed that they do may bring them to the lower worlds. After all the glorification of the Brahmā-life is an illusion.
어떤 사람들은 범천계에 가기를 갈망하여 선(禪)을 닦습니다. 이들은 범천이 되어 여러 겁에 걸쳐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였을 때, 그들은 인간이나 천인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악업을 지었다면 악처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결국 범천의 삶의 영광도 전도된 환상일 뿐입니다.
The illusion of happiness is not confined to common people. The illusion (vipallāsa and avijjā) that makes us regard dukkha as sukha lingers at the first two stages of the holy path and even at the anāgāmi stage the yogi still mistakes material life (rþpa-bhava) and immaterial life (arūpabhava) for a life of bliss.
행복이라는 환상은 범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기게 만드는 전도(vipallāsa)와 무명(avijjā)은 성스러운 도의 첫 두 단계(예류와 일래)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불환도에 들어서도 수행자는 색계의 존재(色界有 rūpa-bhava)와 무색계의 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를 삶의 지복으로 착각합니다.
So the object of the Ariyas at the first three stages is to do good. As for the common people they are mired in all the four illusions that make them regard the impermanent as permanent, the dukkha of nāmarūpa as sukha, the impersonal as personality (atta) and the unpleasant as pleasant.
그러므로 이 처음 세 단계(예류, 일래, 불환)에 있는 성자(ariya)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범부들의 경우에는 무상을 항상한 것으로, 정신과 물질의 괴로움(dukkha)을 행복(sukha)으로, 무아를 자아(atta)로 그리고 즐겁지 않은 것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는 네 가지 전도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Associated with these illusions are the four avijjæs. Because of these misconceptions and ignorance every bodily, verbal or mental action gives rise to good or bad kamma.
이러한 전도와 결부된 것이 네 가지 무명입니다. 이러한 전도와 무명으로 인하여 몸, 말,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선하고 불선한 업을 일으킵니다.
A good kamma arises only from volitional effort coupled with faith, mindfulness and so forth. If the mind is left to itself, it is likely to produce bad kamma.
선업은 믿음, 알아차림 등과 함께 하는 의도적 노력이 있을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악업을 짓게 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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