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saṅkhāra means volition (cetanā). Of the twelve unwholesome saṅkhāra eight are based on greed, two on anger and two on ignorance.
여기서 상카라(saṅkhāra)는 의도(cetanā)를 뜻합니다.12가지 불선한 상카라(saṅkhāra)중에 8가지는 탐욕에 2가지는 성냄에, 2가지는 어리석음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The greed-based (lobha-mūla) consciousness is of eight kinds viz., four with joy and attachment and four without joy but with attachment (upekkhā sahagutta).
탐욕에 뿌리박은(lobha-mūla)마음은 8가지인데, 네 가지는 기쁨과 탐욕이 있는 것이며 다른 4가지는 기쁨은 없지만 탐욕은 있는 것(upekkhā-sahagutta)입니다
Of the first four kinds two are bound up with belief and of the two with the belief or without the belief one is nonspontaneous (sasaṇkhārika) and the other is spontaneous (asaṇkhārika).
.기쁨과 탐욕이 있는 4가지 중 2가지는 사견이 있는 것이며, 나머지 2가지는 사견이 없는 것입니다. 사견이 있는 것 중의 한 가지는 자극 받은 것(saṅkhārika)이고 나머지는 자극 받지 않은 것(asaṅkhārika)입니다.
Belief is of three kinds, viz., belief in ego-entity, belief in immortality of ego and belief in annihilation of the ego without there being any kammic effect of good or bad deeds.
사견에는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 자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견(常見), 선행이나 악행에 대해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고 자아가 소멸한다는 단견(斷見)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Few people are free from the belief in egoentity. The belief dominates those who do not know that life is a nāma-rūpa process without a soul or a being.
유신견(有身見)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생이란 영혼이나 유정이 없이 다만 정신과 물질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유신견에 휘둘립니다.
The belief is weak among those who have some knowledge of Buddhist scriptures but their bookish knowledge does not help them to overcome it completely.
불교 경전을 좀 아는 사람은 유신견에 덜 휘둘리기는 하지만 그러한 책속의 지식은 유신견을 완전히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The yogis who have had a clear insight into the nature of nāma-rūpa through contemplation are usually free from the belief. Yet they may hark back to the belief if they stop contemplating before they attain the path.
관찰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의 본성을 보는 명료한 통찰지를 가진 수행자는 대개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도를 얻기 전에 관찰을 그만둔다면 다시 유신견에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As for the common people the ego-belief is deep-rooted, making them think that it is the self or the ego which is the agent, of whatever they do or feel or think.
범부들에게는 유신견은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무엇을 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행위자는 자아나 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Again those who believe in total extinction after death and reject the idea of future life and kamma have unwholesome consciousness that is bound up with nihilistic beliefs.
또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된다고 믿고 내생과 업을 부정하는 사람은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불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Hatred-based, (dosa-mūla) consciousness is of two kinds, viz., voluntary consciousness and involuntary consciousness.
성냄에 뿌리박은(dosa-mūla)은 마음은 자극이 없는 마음과 자극이 있는 마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But there are many kinds of hatred such as anger, envy, anxiety, grief, fear and so forth. Ignorance-based (moha-mūla) consciousness comprises doubt and restlessness.
이 성냄에는 분노, 질투, 불안, 걱정, 슬픔, 두려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리석음에 뿌리박은(moha-mūla)마음은 의심과 들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Doubts about the Buddha, Nibbāna, anatta and so forth are labelled vicikicchā. The mind is subject to doubt (uddhacca) when it wanders here and there restlessly.
의심(vicikicchā)은 부처님, 열반, 무아 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할 때 의심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것이 들뜸(uddhacca)입니다.
Thus apuññā-abhisaṅkhāra means the eight greed-based mental factors, two hatred-bases mental factors and two ignorance-based mental factors. It is opposed to puññā-abhisaṅkhā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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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여덟 가지 탐욕에 뿌리 박은 마음, 두 가지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 두 가지의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에 반대됩니다.
It serves to purify nāma-rūpa, leads to good rebirths with good kammic results where as the other defiles the nāma-rūpa process and leads to bad rebirth with bad kammic results.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정신과 물질을 청정하게 하여 선한 과보를 받는 좋은 재생에 이르고,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정신과 물질의 과정을 오염시켜 나쁜 과보를 받는 나쁜 재생에 이릅니다.
People do evil deeds for their welfare. They kill, steal, rob or give false evidence at court for their well-being. Even those who kill their parents do so to achieve their own ends.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들은 잘 살기 위해서 죽이고, 훔치고, 강탈하거나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합니다. 심지어 제 부모를 죽이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합니다.
For example, prince Ajatasattu killed his father to become king. Misguided by his teacher Devadatta, he had concluded that he would be able to enjoy life as a king for a longer period if he could make away with his father and take his place.
예를 들면 아자따삿뚜(Ajatasattu) 태자는 왕이 되기 위하여 예류자인 부왕을 죽였습니다. 스승인 데와닷따(Devadatta)의 사주를 받아 부왕을 제거하고 왕좌를 차지하면 보다 더 오랫동안 왕으로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For his great evil of parricide and the murder of a sotāpannā at that, he was seized with remorse and anxiety that causes him physical suffering as well.
아버지 살해와 예류자인 성인을 죽인 무간업(無間業 ānantariya-kamma)으로 인하여 그는 후회와 불안에 사로잡혀 육체적인 병까지 얻었습니다.
Later on he was killed by his son and reborn in hell where he is now suffering terribly for his misdeed.
나중에 그는 자기 아들의 손에 죽고 지옥에 떨어져서 지금 그 무간업에 대한 고통을 혹독히 받고 있습니다.
In the time of Kakusanna Buddha the Mæra called Susi did his utmost to harm the Buddha and the Saṇgha.
까꾸산다 부처님 당시에 두시(Dusi)라는 마라(Māra)가 부처님과 승가를 해꼬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Failing to achieve his object, he possessed a man and stoned to death the chief disciple Arahat behind the Buddha.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한 마라는 한 사내의 몸에 깃들어 부처님 뒤에 있던 상수제자 한분을 돌을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For this horrible crime he instantly landed in Avici hell, the lowest of the thirty-one worlds of living beings.
이 끔찍한 악업으로 인해 마라는 그 즉시 31가지 중생계중 제일 낮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습니다.
As a Māra he had lorded it over others but in Avici he lay prostrate under the heels of the guardians of hell.
마라였을 때 그는 남들 위에 군림하였지만 무간지옥에서는 지옥옥졸들의 발밑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He had hoped to rejoice over the fulfillment of his evil desire but now he had to suffer for his evil kamma. This is true of evil-doers all over the world.
마라는 못된 욕망을 성취함으로써 기뻐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악업에 대한 댓가로 고통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서나 악업을 짓는 자들의 현실입니다
It is the hope for happiness also that forms the mainspring of other two types of action, viz, puññā-abhisaṅkhāra and aneñja-abhisaṅkhāra. Aneñja-abhisaṅkhāra means the four arūpajhānakusaladhammas.
다른 두 가지 형태의 행위, 즉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와 네 가지 무색계 선법(arūpa-jhāna-kusala-dhamma)을 뜻하는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의 주요동기도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Anenja means equanimity or self-possession. A loud noise nearby may upset the
equanimity (samāpatti) of a yogi who is absorbed in rūpa-jhāna. But arūpa-jhāna is invulnerable to such distractions.
에너지 (aneñja)는 평온, 즉 침착함을 뜻합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는 색계선(rūpa-jhāna)에 들어 있는 수행자의 증득(等持 samāpatti)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색계선(arūpa-jhāna)은 그러한 소란에 방해받지 않습니다.
Arūpa-jhāna is of four kinds according as it relates to (1) sphere of unbounded space (ākāsānancāyatana-jhāna) sphere of nothingness (akincannāyatana-jhāna) and (4) sphere of neither-perception-nor-nor-perception (nevasannānasannāyatana-jhāna).
무색계선에는 (1) 공무변처(空無邊處) (2) 식무변처(識無邊處) (3) 무소유처(無所有處) (4)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These four jhānas are the saṇkhāras that lead to the four arūpa worlds. Apunnābhisaṇkhāra leads to the four lower worlds and punnābhisaṇkhāra leads to human, deva and rūpa-Brahma worlds.
이들 네 가지 선정은 네 가지 무색계로 인도하는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사악도에 이르게 하고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인간계, 천신계, 색계 범천계로 인도합니다.
People do these there kinds of kammas or saṇkāras for their welfare and as a result there arises vinnāña or consciousness. With vinnāña there also come into being nāmarū pa, salāyatana, phassa, etc of the new existence.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이러한 세 가지 업(kamma)과 행위(saṅkhāra)를 지으며 그 결과로 식(識)이 생겨납니다. 그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존재의 정신과 물질(名色), 육입(六入), 감각접촉(觸)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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