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마하시 사야도 법문

[스크랩] 12연기...13. 선업을 거부하는 것은 악업을 의미

수선님 2018. 7. 1. 13:00

REJECTION OF GOOD KAMMA MEANS BAD KAMMA

 

Some people misinterpret the lack of good or bad kamma on the part of the Arahat and say that we should avoid doing good deed.

 

13. 선업을 거부하는 것은 악업을 의미

 

어떤 사람들은 아라한이 선업이나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는 선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For an ordinary person the rejection of good kamma will mean the upsurge of bad kamma just as the exodus of good people from a city leaves only fools and rogues or the removal of useful trees is followed by the growth of useless grass and weeds.

 

보통사람들이 선업을 거부하면, 마치 도시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면 오직 바보들과 불량배들만 남는 것처럼, 혹은 유용한 나무를 제거해버리면 쓸모없는 풀이나 잡초만 무성해지는 것처럼 악업만이 급증합니다.

 

 

 

The man who rejects good deeds is bound to do bad deeds that will land him in the lower worlds. It will be hard for him to return to the human world.

 

선업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처에 떨어지는 악업만을 짓게 됩니다. 일단 악처에 떨어지면 인간세상으로 되돌아오기 힘들어 집니다.

 

 

 

In point of fact the Arahat’s dissociation from good kamma means only that because of the extinction of avijjæ his action is karmically unproductive.

 

아라한이 선업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그가 무명(avijjā)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위가 아무런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Indeed the Arahats do good deeds such as revering the elder theras, preaching, giving alms, helping living beings who are in trouble and so forth.

 

사실 아라한은 윗스님을 공경하거나 설법하거나 보시를 하거나 곤란에 처해있는 중생을 도와주는 등의 선행을 합니다.

 

 

 

But what with their total realization of the four noble truths and the elimination of avijjā, their good actions do not have any kammic effect. So it is said that the Arahat does not have good kamma, not that he avoids doing good deeds.

 

하지만 사성제를 완전히 체득하고 무지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아라한의 선행은 어떠한 업의 효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선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지 선행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An ordinary person who does not care for good deeds because of his avijjā and mistaken view will build up only bad kamma that are bound to lead to the lower worlds.

 

무명과 잘못된 견해로 선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범부는 악처에 떨어지는 악업만을 짓게 됩니다.

 

 

In fact the lack of the desire to do good is a sign of abysmal ignorance that makes the holy path and Nibbāna remote. The mind becomes inclined to good deeds in so far as avijjā loses its hold on it.

 

사실 선행을 하려는 욕구가 없다는 것은 성스러운 도와 열반에서 멀어지는 깊은 무명의 표시입니다. 무명이 엷어지게 되면 될수록 마음은 선행을 하려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A sotāpanna yogi is more interested in doing good than when he was an ordinary man. The same may be said of those-at the highers stages of the Ariyan path.

 

예류자가 된 수행자는 범부였을 때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싶어 합니다. 성스러운 도의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성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only difference is the increasing desire to give up doing things irrelevant to the path and devote more time to contemplation. So good deeds should not be lumped together with bad deeds and purposely avoided.

 

유일한 차이점은 도와 상관없는 일들을 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더 커지고 더 많은 시간을 관찰에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를 악한 행위와 하나로 뭉뚱그려 의도적으로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Every action that is bound up with avijjæ means either good kamma or bad kamma. In the absence of good kamma all will be bad kamma.

 

무명과 결부된 모든 행위는 선업이거나 악업 중 하나입니다. 선업이 없다면 모두가 악업일 것입니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금강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