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마하시 사야도 법문

[스크랩] 12연기...11.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行)이 일어난다

수선님 2018. 7. 1. 13:00

AVIJJĀ LEADS TO SAṄKHĀRA

 

To them sensual pleasure is the source of happiness, Nibbāna as the extinction of nāma-rūpa is undesirable and the way to it is arduous and painful. So they seek to gratify their desire through three kinds of action (kamma) viz., bodily action, verbal action and mental action.

 

11.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行)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각적 쾌락은 행복의 원천이고, 정신· 물질의 소멸인 열반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열반에 이르는 길은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세 가지의 행위(kamma)를 통해 욕구를 채우고자 합니다.

 

 

 

Some of these actions may be ethically good and some may be ethically bad. Some people will practice dæna, etc for their welfare hereafter, while some will resort to deceit or robbery to become rich.

 

이중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할 것이며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불선할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내생의 행복을 바라고 보시를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사기를 치고 강도짓을 할 것입니다.

 

 

 

A Pāli synonym for kamma (action) is saṅkhāra. Saṅkhāra is also of three kinds, viz., saṅkhāra by thought, saṅkhāra by speech and saṅkhāra by body. Saṅkhāra presupposes cetanā (volition).

 

빠알리어 깜마(kamma)의 동의어는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상카라 또한 세 종류인데 생각으로 짓는 상카라, 말로 짓는 상카라, 몸으로 짓는 상카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카라는 의도(cetanā)를 전제로 합니다.

 

 

 

The function of cetanā is to conceive, to urge or to incite and as such it is the mainspring of all actions. It is involved in killing, alms-giving, etc. The yogi knows its nature empirically through contemplation.

 

의도의 기능은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하게 하고, 부추기는 것으로서 모든 행위의 근본 동기가 됩니다. 의도는 살생이나 보시 등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관찰을 통해서 의도의 본성을 경험으로 압니다.

 

 

 

In another sense there are three kinds of saṅkhāra, viz, punnābhi (wholesome) saṅkhāra, with its good kammic result, apunnābhi (unwholesome) saṅkhāra with its bad kammic result and anenjabhi-saṅkhāra that leads to wholesome arūpajhāna which literally means immobile jhāna.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행위(상카라)는 선업의 과보를 낳는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와 악업의 과보를 낳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apuññā-abhisaṅkhāra), 그리고 문자적으로 부동선(不動禪)을 뜻하는 선한 무색계선(無色界禪 arūpa-jhāna)에 이르는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Rūpajhāna and all the good actions having the kammic results in the sensual world are to be classified as punnābhisaṅkhāra. Punnā literally means something that cleanses or purifies.

 

색계 선(色界禪 rūpa-jhāna)과 욕계(慾界)에서 업의 과보를 받는 선한 행위들(kāmā-vacara-kusala)을 모두 일러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공덕(puñña)의 글자 그대로 의미는 깨끗이 하는 것, 또는 정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Just as a man washes the dirt off his body with soap, so also we have to rid ourselves of kammic impurities through dāna, sila and bhāvanā. These good deeds are conducive to welfare and prosperity in the present life and hereafter.

 

비누로 몸의 때를 씻는 것처럼 우리는 보시, 지계, 수행을 통해 업의 더러움(不淨)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현생과 내생에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줍니다.

 

 

 

Another meaning of punnā is the tendency to fulfil the desire of the doer of the good deed. Good deeds help to fulfil various human desires, e.g., the desire for health, longevity, wealth and so forth.

 

공덕(puñña)의 또 다른 의미는 선행을 한 사람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경향성입니다. 선행은 건강, 장수, 부귀 등 다양한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If a good deed is motivated by the hope for Nibbæna, it leads to a life that makes it possible to attain his goal or it may ensure his happiness and welfare till the end of his last existence.

 

만약 열반에 대한 소원으로 선행을 하였다면 이 선행으로 인해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삶으로 가거나 마지막 생에 이르기 전까지 행복과 안녕을 보장합니다.

 

 

 

Abhisaṅkhāra is the effort to do something for one’s own welfare. It tends to have good or evil kammic results. So punnābhi saṅkhāra is good deed with good kammic result.

 

업 지음(abhisaṅkhāra)은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를 받게 합니다. 그래서 공덕이 되는 상카라(puññā-abhisaṅkhāra)는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 선행입니다.

 

 

 

There are eight type of good deed in sensual sphere (kāmavacārakusala) and five types in fine material sphere (rūpāvacāra). All these may be summed up as of three kinds, viz., dæna, sila and bhāvanā.

 

욕계의 선행(kāmā-vacara-kusala)에는 8가지 가 있고 색계(rūpa-vacara)의 선행에는 5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선행은 보시(dāna), 지계(sīla), 수행(bhāvanā)의 세 가지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Giving dāna gladly means wholesome consciousness which is kammically very fruitful. So the donor should rejoice before, during and after the act of alms-giving. In the scriptures this kind of dāna is credited with great karmic productivity.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업의 과보가 대단히 큰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시자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기뻐해야 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이러한 보시는 엄청난 업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The attitude of the donor may also be one of indifference (upekkhā) but if the mind is clear, his act of dæna too has high kammic potential. Any act of alms-giving that is based on the belief in kamma is rational and it may bear fruit in the form of rebirth with no predisposition to greed, ill-will and ignorance.

 

보시자의 태도는 평온(upekkhā)가운데 하나일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깨끗하면 이러한 보시행은 또한 크나큰 업의 효력을 가집니다. 업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보시행은 합리적인 것으로 탐욕, 성냄, 무지의 성향이 없는 재생(再生)의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An act of dāna that has nothing to do with a sense of its moral value or the belief in kammic result is good but unintelligent and it will lead to rebirth with no great intelligence.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없는 보시행은 좋기는 하지만 지혜가 결여된 것으로 뛰어난 지혜가 없는 재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It may bear such kammic fruit in everyday life but it does not make the donor intelligent enough to attain the path in his next life.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선한 과보를 받겠지만 다음 생에 도(道)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갖추지는 못합니다.

 

 

 

Again one may do a good deed spontaneously without being urged by others (asa ṅkhārikakusala); some do good deeds at the instigation of others (sasa ṅkhārikakusala).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것이며(asaṅkhārika-kusala),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선한 행위를 할 것입니다(sasaṅkhārika-kusala).

 

 

 

Of these two kinds of good deeds the former is kammically more fruitful than the later.

 

이러한 두 종류의 선한 행위 중에 앞의 것이 뒤의 것보다 업의 측면에서 더 큰 과보를 받습니다.

 

 

 

When we consider the four kinds of good deeds mentioned earlier in terms of these last two attributes, we have a total of eight types of wholesome consciousness in the sensual sphere.

 

앞에서 언급한 선한 행위 네 가지를 마지막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이 욕계에 모두 여덟 가지의 선한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Whenever we do a good deed, we are prompted to do so by one of these kusala dhammas; when we practise concentration and meditation, we have to begin with these eight types of wholesome dhammas.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 선법(kusala-dhamma)들 중의 하나에 의해 유발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명상을 닦을 때 우리는 이런 여덟 가지 선법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It is bhāvanā that can lead to jhāna, the yogi attains rūpāvacāra jhāna when his samādhi is well developed. Jhāna means total concentration of mind on an object of mental training.

 

만약 선(禪)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bhāvanā)이라면, 수행자의 삼매(samādhi)가 잘 개발되면 색계 선(rūpa-vacara-jhāna)을 얻게 됩니다. 선(jhāna)은 마음 닦는 수련의 대상에 오롯이 집중된 마음을 뜻합니다.

 

 

 

Samatha-Jhāna is concentration for bare tranquility. Jhāna samādhi is like flame burning in still air. According to the Suttas, the rūpāvacāra jhāna has four levels; in Abhidhamma it has five levels.

 

사마타 선(samatha-jhāna)은 순일한 고요함(寂靜)을 얻기 위한 집중입니다. 선 삼매(jhāna-samādhi)는 바람 불지 않는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색계 선에는 네 가지가 있고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금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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