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른 모든 선업들은 파초와 같아서
열매를 맺는 즉시 시들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서
(끊임없이)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성장하노라.
보리심의 이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상사도 단계를 수행할 수 있는 공덕의 선한 씨앗으로 절. 탑돌이. 등불 공양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을 할 때, 탑돌이를 할 때 또 등불 공양을 할 때
‘내생에도 인간의 몸의 받기를..’ 이렇게 기도를 하고, 발원을 합니다.
선행을 했더라도 후에 상사도에 태어난다면 이는 결실(과果)를 맺은 것이기에 그 공덕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공덕을 이룸으로써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 이라고 합니다.
상사도 단계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받으면 공덕의 힘은 끝이 납니다.
어떤 결실을 바라고 세운 원은 그 결실을 이루면, 그 원력이 사라집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를 발원하여 아라한과를 이룬다면 이 발원은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인 것입니다.
절 또는 등 공양 같은 선행을 통해 번거로움을 소멸시키고 난 후 아라한과를 이루었으면 하는 원을 세워 수행하는 것을 해탈 즉 아라한과를 이루기 위한 선행이라 합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선행을 통해 번뇌가 모두 사라지면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이며, 이 선행의 결실을 맺는다면 그 선행의 힘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절을 하거나 공양을 통해 선행을 쌓을 때 “허공을 가득 채울 만큼 수많은 중생”을 위해서 일체지를 이루겠다는 발원을 하면서 선업을 짓는다면 그 선업의 결실은 부처가 될 때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이런 선행의 씨앗은 처음부터 수많은 중생을 위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이 사라지기 전까지, 공덕의 힘은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덕을 이룸으로써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과 해탈을 이룸으로써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과 같은 선행을 파초와 같다고 한 것은 파초는 열매를 맺으면 시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행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원을 세우기 때문에 그 결실을 얻으면 선행의 힘은 소멸할 수밖에 없지만, 보리심을 목적으로 할 때 그 공덕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것인데,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끝이 없는 것이기에 그 결실 역시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서 (끊임없이)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성장 하노라.”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보리심의 공덕 즉 복을 쌓은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죄악을 정화시키는 데에도 보리심의 힘은 정말 큽니다.
“선근이 있는 자라면 어찌 그것에 의지하지 않겠는가?” 하신 것처럼 악업을 정화할 때도 보리심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입보리행론 해설 26. 악업을 정화하는데는 보리심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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