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장산스님

[스크랩] 범행품(梵行品)

수선님 2018. 7. 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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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행품(梵行品) ▣

1. 정념 천자가 범행에 대하여 묻다

경문 이 때에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 보살에게 여쭈었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범행이 청정하게 되며, 어떻게 하여야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도에 이르오리까."

⊙ 합론

범행이라는 말은 여기 말로 하면 정(淨)이니 이르되 정행으로써 중생을 이익케 한다는 말이다. 고로 세간에 있을 때 일체 행법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할새 가히 얻을 게 없어서 곧 행하는 것마다 깨끗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범행이라 하였으니라. 어떤 것이 정념이냐 하면 무념의 념을 이름 일새 정념이 되는 것이다. 행을 따라 념이 없을새 이름이 정념이 되니라.

범행은 무엇으로써 체(體)를 삼는가. 체가 간략히 삼(三)이 있으니 일(一)은 곧 '계(戒)' 이니 계가 능히 비(非)를 방어(防禦)함일새 고로 범(梵)이라. 이(二)는 사등(四等: 사등이라 함은 일은 聖行이요, 이는 梵行이요, 삼은 天行이요, 사는 瓔兒行이요, 오는 病行이다.)이라. 삼(三)은 혜(慧)니 열반 오행(涅槃五行) 가운데 사무량심이라(사무량심이라는 것은 慈悲喜捨).

2. 열 가지 관찰하는 법의 이름을 말하리라

경문 법혜 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 마하살은 범행을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몸과 몸의 업과, 말과 말의 업과, 뜻과 뜻의 업과,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과 계율이니라. 마땅히 관찰하기를 몸이 범행인가, 내지 계율인가 할 것이니라."

"불자여, 만일 몸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가는 것, 머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왼쪽으로 돌아보는 것, 오른쪽으로 돌아보는 것, 꾸부리는 것, 펴는 것, 숙이는 것, 우러르는 것이니라."

"불자여, 만일 말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인사, 문안하고, 대강 말하고, 널리 말하고, 비유로 말하고, 바른 말하고, 칭찬하고, 헐뜯고, 방편으로 말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세속에 따라 말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니라."

"불자여, 만일 뜻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생각함이며, 추위이며, 더위이며, 주림이며, 목마름이며, 괴로움이며, 즐거움이며, 근심이며, 기쁨이니라."

"불자여, 만일 교법이 범행이라면, 적멸이 법인가, 열반이 적멸인가, 생기지 않음이 법인가, 일어나지 않음이 법인가, 말할 수 없음이 법인가, 분별없음이 법인가, 모이지 않음이 법인가, 순종치 않음이 법인가, 얻을 바 없음이 법인가."

⊙ 합론

천(天)은 곧 정(淨)이니 깨끗함이라는 것이다. 물은 바 사리가 물듦이 끊어진 자리이다. 범행은 천행(天行)을 의지하여 이룸을 얻는 까닭이라. 무념을 이루되 둘이 아님을 정(淨)이라 하느니라. 범행이라 하는 말은 열반경에 천행(天行)이라 하였다. 선(善)의 삼업으로 귀의 삼보하고 계를 받음과 따름을 얻을진대 어찌 관(觀)함을 다시 요구하리요. 자성게(自性偈)에 이르되, "지. 수. 화. 풍.의 질량이 씻어도 향결(香潔)하게 못하리라. 종종히 부정물이 몸에 가득하여 유출해서 그치지 않음이니 하여금 루낭(漏囊 : 루낭이라 함은 샘이 있는 가죽 주머니와 같다는 것이다.)에 물건을 담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신업이란 몸(身)의 작용을 말함이다. 어(語)나 의(意)도 또한 그러하다.

3. 스님의 예류향을 찾아가면

경문 "불자여, 만일 스님이 범행이라면, 예류향(豫流向)이 스님인가. 예류과가 스님인가. 사다함향이 스님인가. 사다함과가 스님인가. 아나함향이 스님인가. 아나함과가 스님인가. 아라한향이 스님인가. 아라한과가 스님인가. 삼명이 스님인가. 육통이 스님인가."

☞ 해설

삼명은 부처님과 아라한이 얻은 세 가지 십통인데 이 세 가지가 다 밝아서 삼명(三明)이라 한다. 삼명은 숙명명(宿命明), 신통명(神通明), 누진명(漏盡明)이다. 육통이란 육신통을 말함이다. 육신통은 신족(神足), 천안(天眼), 천이(天耳), 타심(他心), 숙명(宿命), 누진통(漏盡通)을 말함이다.

⊙ 합론

스님을 보는 관점에 열 가지가 있으니 앞의 여덟은 사람의 성품을 말함이요, 뒤의 둘은 덕에 나감을 말함이라. 소승경에 말하기를, 예류라 한 것은 처음 범부에서 뛰어나 성류(聖流)에 들어감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일래(一來)라는 것은 닦아야 할 미혹이 아직 남아 있음을 말한 것이다. 불환(不還)이라는 것은 욕계의 혹(惑)이 다하매 욕계에 다시 오지 않음을 말함이요, '아라한'이라는 것은 세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이름이 살적(殺賊)이니 이미 일체 모든 번뇌를 끊은 연고며, 둘은 이름이 불생(不生)이니 삼계의 생함이 다한 연고이며, 셋은 이름이 응공이니 응당 인천(人天)의 대공양을 받아도 됨이라.

[주] 여기에서 향이라 하는 것은 성과(聖果)를 얻음이니 향기가 저절로 난다는 뜻이다. 이 사바세계의 모든 것은 다 향기가 있다.

4. 열 가지 법을 닦아감에 게으르지 말지니라

경문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옳은 곳 그른 곳을 아는 지혜며, 과거 현재 미래 세상의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며, 모든 선정 해탈 삼매를 아는 지혜며, 근성(根性)이 왕성하고 하열함을 아는 지혜며, 갖가지 아는 지혜며, 갖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며, 온갖 것의 길을 아는 지혜며, 천안통이 걸림 없는 지혜며, 숙명통이 걸림 없는 지혜니 여래의 열 가지 힘을 낱낱이 한량없이 뜻이 있는 것을 마땅히 물어야 하느니라."

5. 설법을 항상 들으라

"또한 설법을 들은 뒤에는 크게 자비한 마음을 낼지니, 자비한 마음을 내면 중생을 관찰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모든 법을 생각하여 쉬지 않게 하며, 위없는 거룩한 일을 하고도 얻음을 바라지 아니하며, 경계가 모두 마치 환과 같음을 보는 것이니라. 만일 이와 같이 보살이 행함으로써 서로 응하면 모든 법에 두 가지 (옳고 그름을 말함)이해를 내지 아니하여 모든 부처님의 가피가 빨리 앞에 나타날 것이며, 발심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모두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것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 왕자의 즐거움

어떤 왕이 근심이 생겼습니다.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왕자는 아무 즐거움이 없어 보입니다. 어느 날 왕은 태자를 불렀습니다. "태자야, 무슨 근심이 있는가?" 라고 묻자, 왕자는 말합니다. "저는 웬지 모르게 하나도 즐거움이 없습니다. 세상이 허무할 뿐입니다." 왕은 왕자가 근심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이든지 다 해줬지만 왕자는 하나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다 할 수 있으니, 그는 즐거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중생들은 쉽게 얻어지면 다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어렵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있어야 성취했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자에게는 이런 즐거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나 고귀한 위치에 있더라도 그가 뛰어오를 수 있는 곳은 높은 곳이어야 합니다. 설사 그곳이 오를 수 없는 자리라고 하여도 그 곳을 뛰어오를 수 있을 때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왕은 방문(榜文)을 써 붙였습니다. "누구라도 왕자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짐은 그에게 상을 주리라."는 내용의 방문을 보고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왕자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왕은 그를 왕자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람은 왕자를 만나자, 백지 위에 흰 물감으로 글을 쓴 뒤에 왕자에게 주면서 "왕자님, 제가 떠나고 나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이 백지를 펴보세요." 그는 왕자의 방을 나왔습니다. 왕자는 그가 간 후에 어두운 방에 가서 그 백지를 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번씩 남에게 기쁜 일을 하십시오." 그때 왕자는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다. 그래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야말로 곧 나의 기쁨이로구나.' 라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 배수의 진(背水陣)을 쳐라

'배수의 진' 이라 하는 것은 병법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배수의 진인가? 배수진은 등 뒤에 강을 두고 진을 친 것을 배수진이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전장에서 물러설 출구를 만들어 놓고 싸운다면 그 싸움은 진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승리만 있다라고 하는 사람은 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진군만이 이긴다'라고 하는 굳은 결의만이 그로 하여금 평상시보다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은 소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대승적, 즉 대아적 사고가 '무한한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기도를 하든 공부를 하든 공장을 돌리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도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Burn your bridge behind you 즉 '네 뒤의 다리를 불살라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면 서양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싸우자! 그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이 때 '싸우라는 것은 남과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수영을 가르치는 수영선생님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초보자를 데리고 강으로 나갔으나, 모래사장에서 수영을 가르친다고 가정하면, 그는 수영을 올바르게 배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물로 들어 가다가 도피처가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껴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타는 집에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불타는 집에서 뛰쳐 나와야 살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힘을 몇 배나 발휘하여야 합니다. 무한능력이 그 작은 몸에서 솟아 나와야함 그는 살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아주 미미한 힘밖에 나지 아니하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그 이상의 무한한 힘을 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무한능력이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이 모두 다같이 이러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로마의 집정관인 시이저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I come I saw I conquered." "나는 왔노라. 나는 보았노라. 나는 정복했노라." 시이저는 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는 건너올 필요가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앞에 두고 주저하고 있을 때 시이저는 대담하게 그 루비콘 강을 건너는데 선봉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력을 다하는 사람만이 성공을 거둡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력을 믿는 사람, 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생명력을 미미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주저하는 사람 앞에는 좌절의 쓴 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승리를 하는 그날까지 배수의 진을 치고, 한 가지에 골똘히,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날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미혹한 사람은 아무리 이런 말을 해주고 또 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까닭으로 미망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단지 기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나를 새롭게 만들고, 미래를 열어가는 그런 공부입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생각 사(思)자와 생각할 상(想)자입니다. 사상은 생각입니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곧 사상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만 할까요.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면 그는 부처님 생각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광명사상이라 하는 것도 부처님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 가운데에도 유독 '광명' 그러니까 '빛의 사상'이라는 믿음을, '빛'이 있다라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빛은 길입니다. '길'은 곧 '빛'이라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길이 보입니다. 길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길이요, 부처님의 마음은 '빛'입니다. 여러분들의 자신 속에 말씀과 빛을 담아 두십시오. 그것이 곧 내가 불교를 믿는 이유이며, 그것이 내가 불교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화엄경백일법문(華嚴經百日法門) -장산 저- 불광출판부 1999

출처 : 대불법회
글쓴이 : 장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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