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장산스님

[스크랩] 명법품(明法品)

수선님 2018. 7. 1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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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법품(明法品) ▣

1. 정진혜 보살이 법혜보살에게 법을 묻다

경문 그때 정진혜 보살이 법혜 보살에게 물엇다. "불자여, 보살 마하살이 온갖 지혜를 구하려는 마음을 처음 내고는 어떻게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여 장엄하고 부처님이 거두어 주시므로 위없는 보리의 끝간 곳에 결정코 이를 것이니라."

(1) "모든 여래의 응정등각(應正等覺)께서 백천 아승지 겁 동안 보살의 행을 닦을 때에 모든 법장(法藏)을 수호하고 연설하여 보이며 여러 마군과 외도가 능히 방해하지 못하고 바른 법을 거두어 지니되 다함이 없음이니라."

(2) "또 저 보살 마하살들이 어떻게 수행해야 일체 무명과 어둠을 없애버리며, 마군을 쳐부수고 외도는 제어하고 번뇌는 영원히 씻어서 일체 선근을 다 성취하며, 모든 나쁜 길에서 벗어나며, 온갖 지혜의 길을 깨끗이 다스리며, 모든 보살의 지위와 바라밀다와 삼매와 여섯신통과 네 가지 두렵지 않은 청정공덕을 성취하며, 모든 중생을 성숙 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태어난 국토를 따라 성숙시키며, 근성과 시기를 따라 성숙시키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경계를 원만하게 하여 부처님 공덕으로 더불어 평등케 하겠나이까?"

(3)정진혜 보살이 게송으로 답을 하시다

①초발심공덕

어떤 보살이 처음으로 발심한 이는

복덕과 지혜 모두 이루고

생사 떠난 자리에서 시간 뛰어나

두루 바른 보리법 모두 얻느니라.

②수행해야 할 근본을 말하다

짓는 일 견고하여 헛되지 않고

온갖 공덕 이루어 벗어나지 않나니

수승한 이의 수행과 같이

청정한 도리를 얻느니라.

⊙ 합론

정진혜(精進慧) 보살이 수승한 법을 법혜 보살에게 성취하는 도리를 물은 것이다. 그 덕용(德用)을 여쭈다. 첫째는 정문(正問)이요, 둘째는 인덕(因德)을 물음이니 결인성과(結因成果: 결인성과란 뜻은 인으로 맺어서 그 과를 얻는다 라는 뜻)이다. 사람은 무명(無明)을 인하여 매(昧)하여서는 아는 바가 없고 또는 습기(習氣)로 살아간다. 선근을 어떻게 이룸이요, 어떻게 고통에서 출리(出離)하리요. 또 어떻게 삼악과 팔난에서 떠나리요.

☞ 해설

세간법을 버리고 부처님의 법에 들어가면 부처님의 무한공덕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그 근성을 아시는 까닭으로 일체 무한한 방편을 세워 놓으셨다고 하심 입니다. 곧 방편은 우리들을 어렵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보리도량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2. 보살의 지위에 머물다

경문 "불자여, 열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들로 하여금 모든 지위에 빨리 들어가게 함이니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복덕법과 지혜법을 원만함이요, 둘은 바라밀다의 도를 크게 장엄함이요, 셋은 지혜가 통달하여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음이요, 넷은 선지식을 항상 섬기고 여의지 않음이요, 다섯은 항상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음이요, 여섯은 여래의 신통한 힘에 머무름이요, 일곱은 선근을 닦는 데 피로하다 하지 않음이요, 여덟은 공덕 쌓는 마음 밝은 대승법의 지혜를 장엄함이요, 아홉은 지위마다 마음이 거기에 머물지 않음이요, 열은 삼세 부처님과 선근과 방편으로 더불어 자체 성품이 같음이니라.

불자여, 열 가지 법이 보살들로 하여금 모든 지위에 빨리 들어가게 함이니라."

"불자여, 모든 보살이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빨리 모든 지위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우리가 여러 지위에 머물면 이러한 크고 넓은 공덕을 성취할 것이요, 공덕을 구족히 하고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갈 것이며, 부처님의 지위에 머물면 끝없는 불가사의한 불사를 이루느니라."

⊙ 합론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평등히 보도(普度)하여 마음에 간택이 없을 새니라. 이 이름이 무이상(無異想)이라. 부처님의 행주좌와에 항상 심심한 승정(勝定)을 여의지 않음이니 소위 무불정심(無不定心)이니라. 부처님이 일체를 다 비추어 볼새 바야흐로 모두 버리고 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간다. 삼세제불의 법에 일체 지혜가 무상 만족하여 퇴전함이 없으면 소위 멸도를 이룬다.

3. 바라밀을 나타내다

경문 "온갖 세간에 짓는 업을 일부러 나타내며, 중생을 교화함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그들의 즐거워함을 따라 몸을 나타내고, 모든 일에 처해 있으나 물들지 아니하고, 혹은 범부로 나타내고, 혹은 성인으로 나타내고, 혹은 생사를 나타내고, 온갖 것을 장엄하여 탐착하지 아니하고, 모든 갈래에 두루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시니 이것이 곧 방편 바라밀을 깨끗하게 함이니라."

"깊은 마음에 들어갔으니 믿는 마음이 견고하여 힘을 갖추었으니 꺽이는 일이 없는 연고이며, 대비(大悲)의 힘을 갖추었으니 싫어함을 내지 않는 연고이며, 대자(大慈)의 힘을 갖추었으니 행함이 평등함을 얻었으며, 모두 지니는 힘을 갖추었으니 변재의 힘을 갖추었으며, 방편력(力)으로 온갖 것을 아는 연고이니라."

"불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청정하게 할 때와 모든 바라밀다를 버리지 아니할 때에 크게 장엄한 보살승 가운데에 머물러서 그 생각하는 바 일체 중생에게 법을 말하여 깨끗한 업을 증장하여 해탈을 얻게 하나니, 나쁜 갈래에 떨어진 이는 가르쳐서 발심케 하고, 팔난(八難)에 있는 이는 부지런히 정진케 하고, 탐욕이 많은 중생은 탐욕이 없는 법을 보여주고, 성을 잘내는 중생은 평등함을 행하게 하고, 삿된 소견에 빠진 중생은 연기법을 말하여 주고, 욕계의 중생에게는 탐욕과 성냄과 나쁘고 선하지 않은 법을 가르쳐 주느니라."

♧ 과학과 종교의 차이

연구실에서 과학자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토대로 계속적으로 또 다른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장미꽃을 연구하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지금 장미꽃의 색깔에 있는 효소와 분자의 배열을 연구 중입니다. 그런데 하얀 장미였든지 붉은 장미였던지 간에 분자 배열은 같게 되었다라는 것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과학자는 장미의 잎 속에 있는 녹색을 띠는 색소도 함께 연구 중입니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로 앞으로는 청장미, 흑장미 등 여러 가지의 장미꽃이 탄생될 것입니다.

또 어떤 과학자는 별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그는 별의 자전주기와 또 어떤 별은 그 크기와 형태 또는 온도 등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틀린지를 연구하는 것이 그의 주된 과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체망원경도 필요하고, 고성능 계산기가 필요하며, 고성능 컴퓨터도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지구와의 거리와 그 별이 갖고 있는 특성들을 캐내는 데 그 과학자는 온 정열을 다 쏟기 때문입니다.

이상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과학자는 이것이 왜라는 질문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분석입니다. 어떻게, 혹은 왜, 언제,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지 알아내는 것이 과학자가 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장미는 무엇 무엇 때문에 흰 장미꽃이 핀다든지, 혹은 무엇 무엇 때문에 붉은 장미가 핀다든지 하는 것을 캐내는 것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종교에서는 장미꽃이 핀 것을 학문으로 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왜 꽃이 피느냐' 라든지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라든지에 관심은 있으나 그것은 학문의 분야입니다. 정신의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신은 '아! 장미가 어느 봄날 차가운 땅을 뚫고 나오더니 약간은 붉은 색을 띤 연초록 색의 잎이 나고, 얼마 있다가 꽃봉오리가 맺더니 꽃이 피는구나' 하면서 그 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꽃이 피기까지는 땅 속의 수분과 그리고 땅 속의 양분과 필요한 모든 물질을 그가 좋을 대로 성장하는 데 썼을 것이고, 가시를 만들어야 할 영양, 잎을 만들어야 할 영양, 먼저 만든 잎을 유지하며 키워가는 영양과 더 앞으로 키가 클 수 있는 영양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하나도 잘못됨이 없이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과 신비.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장미 나무가 자라며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냐? 하는 장엄한 생명을 신성시하는 태도를 종교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작년에 했던 그대로 하나도 어김없이 똑같은 잎을 만들며 꽃을 만들어 내는 그의 실행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영리하고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아도 실은 모두 모릅니다. 장미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있습니다. 완전히 자기화(自己化)시키는데, 천재성이 그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가 담당하는 과정이 있고, 잎이 갖고 있는 능력은 또 다른 곳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녹색을 띠게 하는 색소 공장과 기타 여러 가지의 화학 공장이 바로 잎이라는 것을 알면 될 것입니다. 잎을 통하여 그 장미는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디에선가는 그 모든 기능을 통제도 하며 기능도 발휘하는 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몸의 줄기인지 또는 뿌리인 지도 모릅니다.

장미나 어떤 식물이라도 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노하우를 그들 식물은 절대로 잃어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만 위대한 줄 알지만 실은 그 작은 풀 한 포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위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땅을 지키고 있는 것만이라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만약 식물도 동물처럼 움직여야 하겠다고 하고, 움직이는 식물이 되어 모두 좋은 곳을 차지하고 산다고 합시다. 정말로 그 때부터는 모두 죽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식물들은 어떠한 환경이라도 아무 불평 없이 그들이 태어난 자리를 조금도 이동하지 않고 지켜 나갑니다. 땅의 황폐를 막아주고 기름진 땅을 만들어 주는 공덕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이 땅에 찾아온 공덕주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식물을 찬탄하는 바는 바로 종교일 것입니다. 그 장미가 갖고 있는 위대성을 인간에게 일깨워 주는 일은 종교의 몫입니다. 종교인은 이 지구상에서 있는 모든 존재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하여 주는 심성을 키워 주어 그들이 갖고 있는 위대성을 지켜 보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는 것입니다.

또 어떤 과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그들과 우리들 사이에 얼만큼의 거리가 된다는 것을 금세 알아내기도 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왜 그 별이 생겼는지, 그리고 왜 그 별은 그 곳에 생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 별은 그 크기로 있는 것인지, 왜 지금 생겼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 알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종교는 그 별을 그러한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괜찮습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아니한가? 그 옛날 옛적에 허공은 지구를 잉태하여 허공을 낳아 두었듯이 지금도 그렇게 수도 없이 그런 일은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할 뿐입니다.

그대는 허공의 별을 세지 말라. 그것은 모두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별은 지금도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이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그 별들의 생성, 혹은 소멸되는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관찰하면, 그것은 위대한 부처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어느 분이 또 부처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까 부처님이 창조를 하셨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이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부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창조라는 단어는 없어도 수도 없이 부처님의 속에서 이루어지고, 사라지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주의 진리는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우주는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길, 인연법으로 생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봐도 그것은 우주공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모두 경외스러울 뿐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흙 한 줌을 창조해 낼 수 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없이 있듯이 물질에게도 모두 업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업, 그 업은 바로 나(我)라는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각기 갖고 있는 업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 업은 인연들 맺어 오게 됩니다. 이러한 업이 다른 날에는 저런 업을 안고 오며 때로는 업 자신이 다른 모양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하여간 알 수 없는 일을 그 업은 한번도 쉼이 없이 계속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관찰하는 것은 종교의 몫입니다. 이런 것은 심오하기 때문에 청정한 정신을 소유한 자만이 사유(思惟)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욕심을 갖지 않고 오직 법계의 질서를 경외심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화엄경백일법문(華嚴經百日法門) -장산 저- 불광출판부 1999

출처 : 대불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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