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은 세상과 인간의 온갖 문제에 대해서 그 궁극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개인의 마음가짐에서 찾는 선종의 기본 입장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하기는 이것은 선종에서 새롭게 개발한 입장은 아니고, 워낙에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불교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고 그 해결책도 우리 자신에게 있다.
흔히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로 꼽는 사성제(四聖諦)에도 그런 메시지가 담겨있다. 세상살이가 모두 근본적으로 괴로움인데(苦諦),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 하든 괴로운 일은 피하고 즐거운 일만 누리려고 발버둥 친다. 그 발버둥이 번뇌이다. 그런 헛된 발버둥을 어지럽게 쳐대는 것은 탐욕 때문이다. ‘나’를 즐겁게, 편안하게, 영광되게 하고 싶어서 안달하기 때문이다(集諦). ‘나’를 붙들고 사는 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안고 태어났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사의 쳇바퀴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나’라는 것이 허상이며 즐거움, 편안함, 영광됨이 다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바르게 살면(道諦) 그 쳇바퀴를 벗어나 괴로움이 근본적으로 해결된다(滅諦).
그러니까 세상을 괴로움의 바다로 만드는 것은 저기 높은 하늘 위 어디에 있는 조물주도 아니고, 살인, 강도, 도둑, 사기꾼 등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나 아까운 사람 병들어 죽게 하여 애달프게 하는 세균 같은 것만도 아니요, 가뭄이나 홍수, 태풍 등 이른바 천재지변도 아니고, 결국 나 자신이라는 얘기이다. 내가 세상의 진상, 즉 무아, 무상의 진상을 모르고 ‘나’(我)의 ‘영속적인’(常) 즐거움과 편안함과 영광됨을 붙들려고 발버둥 치는 행태가 그대로 괴로움의 바다를 연출한다. 따라서 세상이 괴로움의 바다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나밖에 없다. 우선 말초적인 즐거움에 속지 말고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괴로움임을 깨닫고, 나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실상은 무상하며 무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살이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데 개인의 마음가짐에 관심의 초점을 두는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고전종교와 고전사상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여기에서 고전종교와 고전사상이라 함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말한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에 중국, 인도와 그리스, 로마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사상과 종교를 말한다. 축의 시대란 기원전 8세기에서 2세기까지 즈음을 가리키는데, 서양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동양의 석가모니와 공자, 노자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이 모두 이 시대에 일제히 태어났다. 현재까지 인류가 가진 제반 사상과 종교의 중요 가치관들은 모두 이들 축의 시대 인물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적어도 사상과 종교에서는 그 뒤로 아직까지 그만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선종에서 말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사상이다. 동서양 고전종교와 고전사상을 싸잡아서 이야기했으니, ‘너 자신을 알라’는 서양 쪽의 경구도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神殿) 현관 기둥에 새겨진 구절이라는데, 흔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잘못 알려졌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이 격언을 언급하였다. 그는 인간의 지혜는 신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전제 하에,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무지(無知)를 아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이 중요하다고 하여 이 격언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윤원철/서울대학교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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