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成佛)이라 하면 ‘부처를 이룬다’는 말이니 ‘부처로서의 경지를 이룩한다’는 뜻이겠고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처가 된다’고 하면 되겠다.
그러나 전회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선(禪)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의 성불은 부처가 아니었다가 비로소 부처가 된다기보다는, 자기가 워낙 이미 부처였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자기의 본래 정체를 깨닫는 것이다. 자기에게 없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선종에서 깨달음 또는 성불을 두고 무소득(無所得)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무소득이라 하면 얻는 바가 없다는 뜻이니, 깨닫는다, 성불한다 하여도 실상은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부처의 경지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경전에도 해탈 또는 열반은 불가득(不可得)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같은 취지이다. 이를 두고 문외한들은 엉뚱하고 웃기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즉, 거 봐라, 불교에서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 이런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하면서 결국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고 불교 스스로 인정하지 않느냐, 그러니 불교에서 늘어놓는 그 숱한 법문이 결국에는 다 헛소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가득, 무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들이 풀이하듯이 ‘얻을 수 없다’,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깨달음 또는 부처의 지위는 얻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기에게 없던 것을 밖으로부터 가지고 와서 새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미 있던 것을 알게 되고 확인할 뿐이라는 얘기이다.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부처를, 또는 깨달음을 바깥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이 누누이 나온다. 그 예는 무수하게 들 수 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짓는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마조(馬祖)스님과 대주혜해(大株慧海)스님이 나눈 이야기도 한 예가 된다. 혜해스님이 처음 마조스님을 찾아와 참례하니 마조스님이 혜해스님에게 뭘 찾아왔느냐고 묻는다. 불법(佛法)을 구하려 한다고 대답하자, 마조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자기의 보배창고는 살피지 않고서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치달려 무엇하려느냐.” 그러자 혜해스님이 다시 묻는다. “무엇이 저의 보배창고라는 말씀입니까?” 이에 대한 마조스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바로 지금 나에게 질문을 하는 바로 그 놈이 그대의 보배창고이다. 거기에 이미 일체가 다 갖추어져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작용이 자유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스님이 말한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개념도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늘 자기 밖에서 구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촉각을 잔뜩 곤두세우고는 관심을 바깥으로만 내뻗는다. 부처의 경지나 깨달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깨닫지 못했으며 부처가 아니라는 도무지 깨지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깨달음과 부처를 저 밖의 어디에 있는 것으로만 여긴다.
그렇게 밖으로만 치닫는 서치라이트 빛을 되돌려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것이 회광반조의 뜻이다. 바로 거기에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있으며(本覺) 이미 부처로서의 정체(佛性)를 담고 있는 보배창고가 있는데 왜 자꾸만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며 수고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 즉 여기 저기 집적거릴 필요 없이 곧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질러 들어가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니, 바로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선종의 구호가 성립한 것이다.
윤원철/서울대학교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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