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공성(空性)도 마음의 대상이다.
보살승과 금강승 모두 공성을 강조한다.
법의 핵심을 공성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성은 감로와 같은 환희의 경험이다.
공성은 일시적 신비체험이나 단순한 신화가 아니며, 그저 만들어진 어떤 것도 아니다.
분명한 과학적 실재이지, 단순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공성은 우주적 현상의 핵심이다.
이를 깨달으면 에고가 만들어낸 모든 고정관념은 사라져 버린다.
그로 인해 해탈에 이르러 영속적 지복을 경험한다.
우리를 진정한 법, 즉 여래의 경지로 고양 시켜주는 것이 바로 공성인 것이다.
연민이 솜처럼 부드럽다면 공성은 칼과 같다.
솜은 아무리 만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나
공성이라는 지혜의 칼은 모든 장애를 뚫고 들어가 모든 망상을 잘라버린다.
우리가 어떻게 망상에 사로잡히는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 아침 '배고픔은 느낀 나'는 식사를 하러 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배고픈 나'는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배가 고프다'는 의식은 그대로이다.
'배고픈 나는 지금 식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지속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다.
그 결과 오늘 아침을 먹고 있는 나도 어제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어제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과거의 경험들을 현재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이런 존재인데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어.'
그러나 과거를 현재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는 과거이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는데 여전히 과거를 달고 다닌다.
과거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네 유정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이다.
'매순간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머리로는 비영속성을 잘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과거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를 오늘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살면서 무엇을 경험했든 그것을 경험한 것은 이미 지금의 내가 아니다.
과거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존재야'하고 아무리 자신을 이상화해도 그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무언가와 동일시하는 순간 자신은 이미 다른 무언가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아주 과학적인 사실이다.
공성의 순간적인 체험만으로는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환상, 단단한 명상을 잘라버리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체험과 더불어 공성을 분명히 이해하면-우리가 에고를 어떤 식으로 개념화하며,
에고는 어떤 본성을 갖고 있는지,
그 모든 망상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내는지 등을 이해하면- 에고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면 드디어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공성이란 아주 어려운 개념이어서 여러 해동안 열심히 공부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공부를 통해 공성을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공부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창조해낸 고정관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에고라는 환상을 분명히 보지 못하면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힘들다.
에베레스트 산에 대한 정보는 줄줄이 꿰고 있지만 한 번도 그 산에 올라보지 못한 여행자처럼 언제나 배고픔만 느낄 것이다. 요컨대 공성에 대한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에고가 지니는 환상을 분명히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공성을 체험할 수 없다.
한 예로, 공성에 대해 명상하다보면 가장 먼저, '나는 이런 존재'라는 고정된 자의식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의식을 차근차근 분석해 들어가면 어느 순간 이 '나'가 사라진다.
이럴 때는 그 경험을 개념화하려 들지 말고 기대없이 잠자코 지켜본다.
그러다 다시 환상이 일어나면 그때 다시 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맑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 들여다보기를 계속하면 다시 에고가 사라진다.
그러면 <'나'라는 의식이 사라진 그 공의 상태>에 집중한다.
공성이라는 대상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선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대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대상 없이는 마음도 주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없는 마음은 지팡이 없는 노인과 같으며, 지팡이가 없으면 노인은 서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마음과 마음의 대상은 전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오로지 無인 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대상이 없는 의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상에도 조야한 것에서부터 미묘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원이 있다.
가장 미묘한 차원에서는 대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주 미묘하긴 하지만 공성도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체적인 사물로서의 대상은 아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 마음으로 명상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의 대상이다.
이런 대상이 없으면 마음은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
공성과 직면할 때는 자기 존재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대상들을 되도록 차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잠을 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생를 잠든것과 같은 상태로 살아왔다.
우리의 눈은 감겨 있고 망상은 언제나 시계처럼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배해 왔다.
하여튼 집착을 유도하는 것은 오감에 의한 감각적 인식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 만들어내는 의식. 즉 에고의 개념화 작용이다.
우리의 오감이 행정관이라면 에고는 대통령과 같다.
'나는 이러저러하다. '라는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은 행정관이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에고라는 말이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43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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