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요해

[스크랩] 각관(覺觀)/심사(尋伺)의 뜻을 정확히 알자. 초선에서의 각관/심사란 무엇인가?

수선님 2018. 7. 15. 12:05

초선에서의 각관(覺觀)/심사(尋伺)의 뜻을 제대로 알자.

각관(覺觀)과 심사(尋伺)는 같은 의미이며, 번역자에 따라서 용어가 달라진 것이다.

 

아래 내용은 용수보살의 대지도론과 용수보살의 선법요해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아래의 글로 분석하면 각자 스스로 각관(심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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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禪經)』에 이러한 선게(禪偈)가 있다.
 
  
  욕락과 삿된 법을 여의면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며
  생사를 여의어 기쁘고 즐거우니 
  이것이 초선정에 드는 것이다. 
  
  음욕의 불길을 여읜 뒤에는
  시원한 선정을 얻게 되나니
  사람이 매우 뜨겁고 괴로울 때
  서늘한 못에 들면 기쁜 것과 같다. 
  
  가난한 이가 보물을 얻으면 
  매우 기뿐 느낌이 마음을 움직여 
  분별하면 그것을 관이라 하니
  초선정에 든 것도 그러하니라. 
  
  두 법이 마음을 흔드는 줄 알면
  비록 착한 법이라도 여의어야 하나니 
  마치 바닷물이 맑고 고요하면 
  물결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어떤 이가 
  편안히 누어 깊이 잠들었을 때
  곁에서 누군가가 크게 부르면
  그 마음 대단히 어지럽듯이 
  
  마음 모아 선정에 들어갔을 때
  각과 관이 도리어 번거롭나니
  그러므로 각과 관을 제해버려야 
  한 의식의 경지에 들어가리라.

   
  속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선정이 생기어 기쁨을 얻나니
  이 두 선정에 들어간 뒤엔 
  기쁘고 용맹하여 매우 기쁘리. 
  
  마음 거두는 일이야말로 으뜸가는 정이니, 
  적연(寂然)히 아무것도 생각지 않아 
  근심도 기쁨도 버리려 함이
  각과 관을 버리는 마음과 같네.
  
  느낌 때문에 기쁨이 있고 
  기쁨을 잃으면 근심을 내니
  기쁘고 즐거운 느낌을 여의고
  생각도 방편도 모두 버리네.
  
  성인이라야 버릴 수 있고
  다른 이는 버리기 어렵나니
  즐거움이 근심인 줄 알 수 있으면
  견해가 요동치 않아 매우 편하리.  
   
  근심과 기쁨은 이미 제했고
  괴로움과 즐거움도 이제 끊어서
  생각을 끊은 청청한 마음은
  제4선에 들어가리라. 
  
  제3선 속의 즐거움은
  덧없이 움직이기에 괴로우니
  욕계 가운데 근심을 끊고
  초선과 2선에서 기쁨을 제하네.
  
  그러므로 불세존께서도
  제4선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먼저는 근심과 기쁨을 끊고
  지금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한다네.
  
또한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면서 외딴 곳에 혼자 한가히 살며, 모든 감관을 거두고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부지런히 사유하여 밖의 즐거움을 버리고 선(禪)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며, 모든 욕망과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고 가라앉고 집중된 마음[未到地]에 의지하여 초선정을 얻는다.  
 

초선은 아비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초선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맛[味]이 상응함이요, 둘째는 정(淨)이요, 셋째는 무루(無漏)요, 넷째는 초선에 속하는 과보로서 얻어지는 5중(衆)이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맑은 무루[淨無漏]에 들어가나니, 2선ㆍ3선ㆍ4선 역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비구가 모든 욕망과 악과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면,

 각(覺)과 관(觀)이 있으며 생을 여의어 기쁘고 즐거운 경지인 초 선에 들어간다” 하셨다.
    
모든 욕망이라 함은 애착하는 대상인 색 등 5욕이니,

생각하고 분별해서 욕망을 꾸짖는 법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이라 함은 탐욕 등 5개(蓋)이다. 
 

이러한 안팎의 두 가지를 여의기 때문에 초선을 얻게 되는데,

초선의 모습은 각과 관이 있고[有覺有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집중된 마음[一心]이다.
 

각과 관이 있다고 함은

초선 가운데서 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착한 법의 공덕을 얻는 까닭에

마음이 크게 놀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항상 욕망의 불길에 태워지다가 초선을 얻을 때는 마치 서늘한 못에 들어간 것 같고,

또한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보배광을 얻은 것과도 같다.
 

곧 수행자는 욕계의 허물과 죄를 사유하고 분별한 뒤에

초선의 이익과 공덕이 매우 많은 줄을 알고는 마음이 크게 기뻐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각과 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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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아래는 넓은 의미의 각과 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문] 각과 관은 한 법인가? 두 법인가?
 

[답] 두 법이다.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종을 쳤을 때 처음의 소리가 큰 것은 각이요,

나중에 소리가 가늘어지는 것은 관이라 할 수 있다.
 
 

[문] 아비담에서는 말하기를 “욕계로부터 초선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에 각과 관이 있어 상응한다” 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말하기를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은 각이요,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은 관이다” 하는가? 
 

[답] 두 법이 한마음에 있기는 하지만 두 모습이 함께하지는 않는다.

각이 있을 때는 관이 분명치 않고, 관이 있을 때는 각이 분명치 않다.

 

마치 해가 떴을 때 뭇별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일체의 심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게 되는 것도 그러하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일 한 법을 끓는다면, 나는 그대가 아나함(阿那含)36)을 얻게 됨을 보증하노라” 하셨다.

 

한 법이라 함은 곧 간탐(慳 貪)이거니와 실제에는 5하분결(下分結)을 다 끊어야 아나함을 얻는다 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한 법만 끊으면 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곧 이 사람은 간탐에 치우침이 많아서 다른 번뇌가 모두 따라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탐이 끊어지면 다른 번뇌도 끊어진다 하신 것이다.
 
각과 관이 때에 따라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이와 같다. 
 

 

# 참고 : 아래는 수행에서의 각관에 대한 추가 설명이다. 

 

수행자는 이 각과 관이 비록 좋은 법인 줄은 아나,

집중된 마음[定心]을 어지럽히기에 마음에서 그것을 여의기를 원한다.

 

때문에 이 각과 관을 꾸짖어 생각하기를 ‘각과 관이 선심(禪心)을 요동시킨다’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맑은 물에 파도가 치면 비치지 못하는 것 같으며,

또한 몹시 피로한 사람이 쉴 틈을 얻어 자려 하는데 곁의 사람이 부르면 갖가지로 어지러워지는 것 같으니,

마음을 거두어 속으로 안정시키는데 각과 관이 흔들어 어지럽히는 것도 이와 같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각과 관을 꾸짖어 각과 관이 멸하면

내적으로 청정해지고 마음을 한 곳에 매어두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집중[定]에서 생겨나는 기쁨이 있는 경지인 제2선에 들어간다.

 

2선을 얻은 뒤엔 2선에서 일찍이 얻어보지 못했던 비할 바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각과 관이 멸한다고 함은 각과 관의 허물을 아는 까닭에 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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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초선의 번뇌[結使]가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단지 각관만을 말하는가?

 

[답] 초선의 번뇌를 각관이라 하니,

      왜냐하면 선(善)한 각관으로 인하여 애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초선의 번뇌를 각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초선을 얻었을 때는 아직 나머지에 대한 집착이 없다.

 

또한 본래 일찍이 없었던 각관을 얻으면 매우 기쁘니,

매우 기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무너뜨리며,

선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한다.

 

또한 아주 깊은 2선(禪)의 선정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각관을 제거하니,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이익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치 욕계의 작은 즐거움을 버리면 큰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다.

 

 

 

[문] 단지 각관을 멸해야 한다고만 말할 뿐, 초선의 번뇌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답] 각관은 곧 초선의 선한 각관이니,

      초선의 애착[愛] 등을 또한 각관이라고 이름한다.

 

<악한 각관>은 2선(禪)의 도를 장애하므로 마땅히 멸해야 하고,

<선한 각관>도 수행자로 하여금 그 마음이 즐거움에 머물러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므로

모두 마땅히 멸해야 한다.

 

곧 다시 생각해 보면,

 

<악한 각관>은 진짜 적(賊)임을 알 수 있으며,

<선한 각관>도 비록 친하고 선량한 것 같아도 이 역시 적이니,

우리의 큰 이익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아가 이 두 가지 각관을 멸해야 한다.

 

각관이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매우 피로하여 편안하게 잠을 자려 해도

온갖 소리가 그를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 각관을 멸한 다음 2선(禪)을 구해야 한다.

 

비유컨대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깨끗한 물을 흐리게 하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욕계의 5욕에 의해 혼탁해진 마음은 마치 흙먼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과 같고,

각관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마치 바람이 물을 흔드는 것과 같다.

 

각관을 멸해야 안으로 청정함을 얻을 수 있으니,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는 선정의 상태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2선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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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해탈도론에서 발췌한 넓은 의미로써의 각관(심사)에 대한 내용이다.


 

[] 각과 관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 방울을 흔들었을 때와 같나니, 처음의 소리가 각이라면 뒤의 소리는 관이 된다. 또 마음의 소연(所緣)과 같나니, 처음의 것이 각이 되고 뒤의 것이 관이 된다. 또 선()을 구하는 것이 각이고, 수호하는 것이 관이다. 또 기억은 각이고, 놓지 않는 것은 관이다. 또 거친 마음으로 수지하는 것은 각이고, 세밀한 마음으로 수지하는 것은 관이다. 어떤 처에 각이 있으면 그 처에는 관이 있지만, 어떤 처에 관이 있으면 그 처에는 각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각이 없는 경우도 하다. 삼장에서 처음에 마음을 사()에 두는 것을 각이라 하고, 각을 얻었어도 정해지지 않은 것을 관이라 한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

 

남녀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남녀가 이와 같은 색,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알아보는 것을 각이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계가 있는지 계가 없는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귀한 자인지 천한 자인지 관찰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각은 찾아서 데려오는 것이고, 관은 지키고 유지하며 좇는 것이다. 새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열심히 날갯짓하는 것과 같은 것이 각이고, 유유히 떠도는 것과 같은 것이 관이다. 처음 가르치는 것이 각이고, 오랫동안 가르친 것이 관이다. 각으로써 수호하고, 관으로써 찾고 가려낸다. 각으로써 사유하며, 관으로써 따라서 사유한다.

 

각행은 악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관행은 선()을 수지하는 것이다. 사람이 힘이 있어 입을 다물고 경을 외워 그에 따라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관이다. 소각(所覺)을 각하고, 각하고 나서는 능히 아는 것과 같나니, 사변(辭辯) 및 요설변(樂說辯)을 관하는 것은 각이고, 의변(義辯)법변(法邊)을 관하는 것은 관이다. 마음이 승()을 이해하는 것은 각이고, 마음이 분별을 이해하는 것은 관이다. 이것이 각과 관의 차별이다.

 

 


 

 

 

각관(覺觀)/심사(尋伺)의 뜻을 정확히 알자. 초선에서의 각관/심사란 무엇인가?


출처 : 무인아제
글쓴이 : 무인아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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