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25칙 蓮花峰拈拄杖 - 연화봉 암주의 지팡이

수선님 2018. 7. 15. 13:05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25칙은 연화봉의 암주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연화봉 암자 주지가 입적하던 날 주장자를 제기하고 대중에게 설법했다. '옛 사람은 여기에 이르러 왜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대중이 아무 말도 없자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것은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이어서 말했다. '필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스스로 대중을 대신해서 말했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옆눈 팔지 않고 첩첩히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擧. 蓮花峰庵主, 拈杖, 示衆云, 古人到這裏, 爲什不肯住. 衆無語. 自代云, 爲他途路不得力. 復云, 畢竟如何. 又自代云, 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화봉은 원오의 '평창'과 <오등회원> 15권에 '천태산 연화봉'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조정사원> 7권에 의하면 연화봉은 천태의 별산(別山)으로 천태덕소가 입적한 곳이라 하고 있다. 연화봉 암주는 운문의 법을 이은 봉선사 도침(道琛)의 제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잘 알 수가 없으며, 보통 상(祥)암주로 불렸는데, <연등회요> 27권과 <오등회원> 15권에 그의 법문을 전하고 있다. <벽암록> 25칙의 공안도 <연등회요> 27권에 수록된 상암주의 법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연화봉 암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송(宋)나라가 건국되었을 무렵 천태산 연화봉에 암자를 세웠다. 옛사람들은 도를 얻은 뒤에는 초옥이나 석실에서 발 부러진 가마솥에 나물 뿌리를 삶아 먹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인연따라 한마디 법문(一轉語)을 하면서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고저 하였다. 그는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바로 주장자를 들고서,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했다. 이렇게 전후 20년간을 설법했지만 끝내 한 사람도 올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늘은 암주가 입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장자를 들어 보이면서 '옛사람은 왜 깨달음의 경지(주장자)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하여 대중에게 법문하고 있는데, 역시 대중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장자는 선승의 7가지 도구 중에 하나로서 항상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다. 선에서는 만법의 근본을 상징하는 도구이며 각자의 불성,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는 지혜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원오는 이 말에 대하여 '허공에다 못을 박지 말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 있는 임제의 말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는 것은 허공에 못을 박는 것처럼, 무모하고 헛된 일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법화경> '화성유품'에 한 사람의 길 안내자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보물을 찾아서 먼 길을 갈 때 도중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환화(幻化)의 성(城)을 만들어 쉬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환화의 성에 안주하고 만족하여 참된 보물을 찾으려는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환화의 성을 없애고 모두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길 안내자는 부처님이요 보물은 불법을 비유한 것인데, 수행의 도중에 퇴굴심이 생기면 방편으로 제시한 깨달음의 경지를 중생들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인줄 알고 집착한다.

 

암주가 주장자로, 이곳(깨달음의 세계)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으로 제시한 환화의 성과 같은 것이다. <금강경>에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지 말라(無住)'고 주장하고, <유마경>에도 '밖으로 범성(凡聖)의 차별경계를 취하지 말고, 안으로 근본(깨달음)에 안주하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이 일절은 <임제록> 등 선어록에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암주의 설법도 이러한 불법의 정신을 독자적으로 설하고 있다. 중생의 차별세계는 물론,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기 일에 몰입하여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선어록에 '백척의 긴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법문과 <벽암록> 23칙에 묘봉산의 정상에서 안주하지 말라는 법문도 똑같은 내용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암주의 법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암주는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것(주장자)은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주장자라는 것은 길을 갈 때는 필요한 생활도구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다. 불법수행을 하는 도중에서는 부처나 여래, 깨달음이나, 열반,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주장자가 필요하지만, 여기 깨달음의 집에 도달(歸家穩坐)한다면 자기와 주장자가 하나가 된 본래면목이 그대로 다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주장자라는 방편의 도구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임제록>에 '한 사람은 도중에 있으면서 집(家舍)을 여의지 않고, 한 사람은 집(家舍)에 있으면서 도중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다. 도중은 수행과 중생구제의 길에서 활약하는 경지이고 집은 깨달음의 마음(본래심)을 상실하지 않은 것이다.

 

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주장자란 평소 수행자가 사용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까? 옛사람은 이런 경지에도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금가루가 비록 귀중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는 것과 같다." 주장자나 언어 문자나, 부처나 깨달음 등은 불법 수행에 필요한 방편적인 도구이다. 그러한 방편도구나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면 자신의 생활도구가 자신을 얽어매는 집착과 속박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원오는 '금가루가 귀중하지만… …'이라는 속담을 인용하고 있다.

 

암주는 또 다시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필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어떻게 해야 올바른 불법의 수행자가 될 수 있는가? 학인들에게 분발심을 일으키도록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이 말했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옆 눈 팔지 않고, 첩첩히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이 말은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제자 엄양(嚴陽)존자 선신(善信)의 말이다. 지금까지 주장자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했는데 그 주장자를 옆으로 짊어지고 한눈도 팔지 않고, 암주가 '이 주장자에도 안주하지 않고'라고 말한 것처럼, 대중들의 마음으로부터 주장자를 뺏어들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장자를 옆으로 짊어지고 첩첩히 쌓인 산중을 향해 들어간다는 말에 원오는 "단지 담판(擔板)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판자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옆을 볼 수 없고 오직 앞만 보고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쪽 부분 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이 라고 경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수행의 길(도중)에도 있지 않고, 깨달음의 집에도 안주하지 않고, 또한 주장자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오직 자기의 일에 몰입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눈 속의 티끌, 귓속의 흙이여! 천봉우리 만 봉우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네. 꽃이 떨어지고 물이 흐르니 아득하기만 한데, 눈썹을 치켜세우고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을까?" 암주의 눈은 먼지가 가득하고 귀에는 흙이 가득 함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함께하는 동사섭(同事攝)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중생교화의 설법에 진력하고 있다고 칭송하고 있다. 천봉 만봉 가운데로 들어가 자취도 없고 흔적도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그대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가? 라고 읊고 있는 것은 학인들이 암주의 행방을 찾고 그의 소식을 참구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말이다. 암주의 지혜작용은 자취가 없고 소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낙화유수처럼, 인연따라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도도하게 끝없이 작용하고 있다. 암주의 전광석화와 같은 지혜작용을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하면 볼 수가 없다.

 

성본스님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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