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30칙 趙州大蘿蔔頭 - 조주화상과 큰 무

수선님 2018. 7. 22. 12:33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30칙은 조주 화상과 진주에서 생산하는 큰 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했다. “소문으로 듣기를 화상은 남전 선사를 친견(親見)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조주 화상이 말했다.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

 

擧. 僧問趙州, 承聞和尙親見南泉, 是否. 州云, 鎭州出大蘿蔔頭.

 

이 선문답은 〈조주록〉에 전하고 있다. 조주 화상은 2칙과 9칙 등에 등장하고 있는 조주종심(趙州從 778~897)이다. 그는 학인들에게 임제나 덕산처럼 고함(喝)을 치거나 주장자를 휘두르는 거친 교화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한 두 마디의 말로써 불법을 자유롭게 설하여 지도하고 있다. 그래서 송대 법연선사는 조주의 입술에는 빛이 발한다는 의미로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평하고 있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법의 종교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선어록에는 생산노동과 관련된 쌀과 보리, 가지와 무 등의 식물과 호떡과 빵, 과자 등의 많은 음식물들이 선문답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전등록〉에 전하는 ‘청원화상과 여릉의 쌀값’ ‘운문의 호떡’은 유명한 말이다. 조주 화상이 진주지방에 큰 무가 많이 생산된다는 말을 하자 〈벽암록〉제98칙에 무선(蘿蔔頭禪)이라는 새로운 선어가 만들어 지고 있다.

 

〈전등록〉제13권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고불심(古佛心)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수산 화상은 “진주의 무는 무게가 세근이나 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 선문답도 조주의 고불심(古佛心)을 진주의 큰 무로 대답한 것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불(古佛)은 조사와 같이 존경한 경칭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소문으로 듣기를 화상은 남전 선사를 친견(親見)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말은 〈조주록〉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 화상이 출가하여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선사를 참문하여 선법을 체득한 인연을 배경으로 질문한 것이다. 즉 조주가 사미로서 처음 남전 화상을 친견하니 마침 남전 화상은 방장실에 누워있었다. 남전 화상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조주는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상서로운 모습을 보았는가?” 라고 묻자, 조주는 “상서로운 모습은 보질 못했지만 누워있는 여래(如來)를 친견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주를 맞이하고,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으로 불법의 안목을 체득하게 한 전법상승의 기연을 토대로 질문한 것이다.


특히 조주는 남전 선사를 40년이나 모셨고, 60살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는 구법행각을 하면서, ‘나보다 불법의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세살 어린애라도 가르침을 받고, 나보다 안목이 못하면 80 노인이라도 불법을 가르친다’는 원력을 세우고 20년을 유행했다. 나이 80살 때에 처음 진주 관음원에서 법당을 열고, 120살까지 수행자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조주 화상의 행적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질문한 스님도 “소문으로 듣기로”라고 정중하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전 화상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는 질문은 간단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하고, 선문답을 나눈 것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다. 〈금강경〉에 “만약 모양(色)으로 자아(自我)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聲)으로 구하려고 한다면 여래(如來)를 친견할 수가 없다”고 설한다. 질문한 스님은 소문으로 들은 것처럼, 조주 화상이 남전 선사를 친견하고 “누워있는 여래를 보았습니다”라고 한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남전을 친견하고 체득한 불법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설한 여래와 조주가 남전을 보고 말한 여래는 똑같이 참된 자아의 법신(法身)을 말한다. 법신 여래는 감각기관인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심의 지혜로 자각하여야 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남전의 모습을 보고 조주가 “누워있는 여래를 보았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남전을 친견한 것을 묻고 있는 스님은 ‘조주 화상이 남전(여래)을 친견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있다. 조주와 남전을 구분한다면 주객의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지고, 조주가 누워있는 여래(남전)를 대상으로 친견했다면 조주와 남전은 올바른 친견이 아니라 대상의 여래를 친견한 차별에 떨어진 것이 된다. 즉 ‘조주 화상 당신은 남전 화상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남전 화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불법은 어떠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인 것이다.

 

조주 화상은 “이곳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주는 조주 화상이 살고 있는 지명으로 큰 무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진주는 원래 큰 무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며, ‘조주 화상이 남전을 친견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스님이 ‘화상은 남전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 화상은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라고 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혀 관계없는 말이다. 이 공안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에게는 하늘에 통하는 길이 있다.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구봉(九峰)스님에게 “제가 듣기로 스님(구봉)은 연수(延壽)스님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앞산에 보리가 익었는가?”라고 대답한 말을.

 

원오는 이 일단의 선문답도 본칙의 공안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조주의 대답에 “하늘을 떠 바치고 땅을 버티고”라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조주의 대답은 천지(天地) 가득 무로 꽉 찼다는 의미인데, 조주와 무가 하나 된 경지, 조주화상은 만법(萬法)과 하나(一如) 된 법신(法身)의 입장에서 대답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주가 남전을 친견한 것도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인 법신으로서 남전의 법신(여래)을 친견한 것이었다.

 

지금 조주 화상이 ‘진주의 큰 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상황(풍경)에서 자신이 남전 선사로부터 전해 받은 새로운 불법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남전의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을 듣고 남전의 선법을 전해 받은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남전 화상을 친견하고 전해 받은 불법은 항상 지금 여기서 항상 자신이 불법의 지혜로 살고 있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있는가? 지금 그대는 ‘내가 남전을 친견하고 선법을 전해 받은 사실’에 집착되어 있다. 내가 새롭게 제시한 불법을 그대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진주에 왔으니 유명한 진주의 큰 무를 맛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진주의 유명한 무가 어떤 맛인지 그대는 아는가? 본인이 직접 먹어보고 맛보는 수밖에 없다”고 조주 화상은 설하고 있다.

 

선은 항상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불성의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처럼 과거의 일이나 남의 일을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한 일이며 자신의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물을 마셔보고 물의 찬 맛과 따뜻한 맛을 자각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자아의 법신(본래면목)을 친견하는 일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주 화상이 진주에 큰 무가 난다고 말하니, 천하의 납승이 조주를 흉내내며 선의 극칙으로 삼고 있네” 그러나 많은 수행자가 조주 화상의 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줄만 알 뿐,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어떻게 분별할까?” 그리고 “도적놈! 도적놈! 납승의 본래면목(鼻孔)을 체득하게 했다”는 말은 조주 화상의 교화를 읊은 말인데, 조주 화상은 질문한 스님의 집착심을 뺏는 도적이 되어, 수행자가 자기의 본래면목을 체득하도록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성본스님/동국대 교수 불교문화대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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