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28칙 南泉不說底法 -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수선님 2018. 7. 22. 12:33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28칙에는 마조 문하의 유명한 남전보원 화상과 백장열반 선사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남전 화상이 백장산의 열반 화상을 참문하자, 열반 화상이 질문했다. “예로부터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있지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입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설해 버렸군!”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不會).”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너무 많이 말했군!”

 

擧. 南泉參百丈涅槃和尙. 丈問, 從上諸聖, 還有不爲人說底法. 泉云, 有. 丈云, 作生是不爲人說底法. 泉云,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丈云, 說了也. 泉云, 某甲只恁, 和尙作生. 丈云, 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泉云, 某甲不會. 丈云, 我太爲說了也.

 

공안은 〈전등록〉 제9권 ‘백장유정(百丈惟政)장’에 전하고 있으며, 〈무문관〉 제27칙에도 수록하고 있다. 대개 백장열반 화상은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은 법정(法正)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항상 〈열반경〉을 강의하였기 때문에 열반 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남전화상이 조카상좌가 되는 열반 화상을 참문한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한 백장 화상은 마조의 제자 백장 유정(惟政) 화상으로 남전 화상과 법형제가 되는 선승인데, 그의 전기는 잘 알 수가 없다. 〈전등록〉에도 백장유정과 백장열반을 동일인으로 취급하는 혼란이 보인다.

 

남전(普願 : 748~834) 화상의 전기는 〈조당집〉 제16권, 〈송고승전〉 제11권 등의 자료에 전하고 있다. 출가하여 여러 곳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경율론 삼장을 연마했고, 〈중론(中論)〉 〈백론(百論)〉 등을 연구하여 불교학에 통달했다. 당시 마조의 선풍이 유명하여 참문하고 그의 선법을 체득하였다. 특히 마조는 그의 대표적인 제자 서당(西堂)과 백장(百丈)과 남전 화상 세 사람이 밤에 달을 보고, 마조가 “정말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은가?” 질문하자, 백장은 좋은 수행을, 서당은 좋은 공양을 말하자, 남전은 소매를 떨치고 밖으로 나갔다. 이러한 제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마조는 “경은 서당, 선은 백장에게 돌아갔네. 오직 홀로 남전은 일체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남전 화상이 동문인 백장열반 화상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백장산을 찾아갔는데, 백장열반 화상은 남전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예로부터 부처나 조사가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부처나 조사들이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말한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중생을 위하여 8만4,000 법문으로 모든 불법을 다 설하였고 그 설법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며 어록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제시한 문제는 8만4,000의 법문은 중생을 위한 방편법문으로 불법의 진실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것이지만, 불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도 ‘설할 수 없는 불법’이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를 중생들에게 설하고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의 진실을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전 화상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부처님이 평생 동안 중생을 위하여 8만4000 법문을 설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一字不說)고 〈능가경〉에서 주장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이 경전을 중시하는 것은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선종의 슬로건도 〈능가경〉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정신을 토대로 주장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염화미소(拈華微笑)’로서 교외별전과 이심전심으로 전법이 이루어지게 된 사실의 증명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선불교의 새로운 출발은 세존의 일자불설(一字不說)과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경전에서 언어 문자로 전하는 방편법문과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으로 주장하는 교학체계을 극복하여 불법의 진실을 본인이 직접 체득하는 실천체험의 종교를 주장한 점이다. 이 공안은 이러한 입장에서 주장된 선문답이다. 부처님이 49년동안 설법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말이 〈반야경〉에는 곳곳에 보이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에 걸림 없고(無碍), 집착 없고(無相), 머무름이 없는(無住) 반야의 논리를 말한다.

 

또 〈반야경〉에 “설사 열반의 경지를 초월하는 훌륭한 법이 있을 지라도 나는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설한다”는 말을 선승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는 방편법문이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부처나 조사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여 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설불급(言說不及),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불법은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깨닫고 체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물을 마셔보고 차고 따듯함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냉난자지(冷暖自知)’는 선불교의 체험종교를 대변하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장 화상은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인가?”라고 반문하자 남전 화상은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을 토대로 하여, 마조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고 하고, 남전은 “마음도 아니고(不是心) 부처도 아니고(不是佛) 중생도 아니다(不是物)”라고 설하고 있다. 불법의 진실은 지금 여기서 불심(佛心)의 지혜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불심의 지혜작용(본래면목)을 “부처다, 마음이다, 중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표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전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다”고 언어삼매의 경지에서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백장 화상은 “그렇게 말한 것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설해 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남전 화상이 “나는 단지 이와 같이 제시했는데, 스님은 어떻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제시하겠소?”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자 백장 화상은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즉 백장 화상은 나는 대선지식이 아니라고 하며 뒤로 물러서서,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분별과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안목을 ‘부지(不知)’라고 제시하며, 남전 화상의 지혜작용(禪機)을 점검해 보고 있다. 남전 화상도 “나도 모르겠소(不會)”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말한 ‘불회(不會)’는 백장이 말한 ‘부지(不知)’와 같이 ‘설할 수 있는 불법’ ‘설할 수 없는 불법’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중생의 분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근원적인 불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을 포용한 본래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달마가 양무제에게 말한 ‘불식(不識)’도 같은 의미이다.

 

지막으로 백장 화상은 “내가 그대를 위해서 너무 많이 말해 버렸군!” 하였다. 이 말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하여 남전은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너무 많이 말해 버렸다”고 한 것이다. 백장이 ‘부지(不知)’라고 했는데, 남전은 ‘불회(不會)’라고 대답한 것처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하여 두 사람이 많은 대화로 설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사나 부처는 예로부터 사람을 위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고금(古今)의 납승들은 다투어 언어 문자를 쫓고 있네. (남전과 백장의 본래면목) 거울(明鏡)이 비춘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남쪽을 향하면서 북두성을 바라본다” 남전과 백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방세계와 하나가 되어 얼굴을 남쪽으로 하면서 북두성을 보고 있는 절대(불심)의 경지에서 ‘설할 수 없는 불법’을 거울과 같이 무심(無心)의 대화로서 설하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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