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32칙 定上座問臨濟 - 임제와 불법의 대의

수선님 2018. 7. 29. 11:46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32칙에는 임제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정(定) 상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정(定) 상좌가 임제 선사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 선사는 선상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손으로 뺨을 한대 후리치고는 바로 밀쳐 버렸다. 정 상좌가 멍하니 서 있자,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말했다. ‘정 상좌! 선사께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 상좌가 임제 선사께 절을 하려는 그 순간 크게 깨달았다.”

 

擧. 定上座, 問臨濟, 如何是佛法大意. 濟, 下禪床, 擒住與一掌, 便托開. 定, 佇立. 傍僧云, 定上座, 何不禮拜. 定, 方禮拜, 忽然大悟.

 

이 일단은 고본 〈임제어록〉에는 보이지 않고 송대(宋代)에 종연 선사가 〈임제어록〉을 편집할 때 〈벽암록〉에 전하는 자료를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임제 선사는 황벽 선사의 불법을 전해 받은 유명한 선승으로 임제종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법문집을 모은 〈임제어록〉은 ‘어록의 왕(王)’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진수를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진인(眞人)의 사상으로 종합하고 있다. 임제의 선사상은 한마디로 ‘일체의 권위와 형식을 초월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일체의 망념 경계를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사는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시절인연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의 주체인 본래심을 자각하여 주인이 되어 살 수 있으면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이 진실된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고 주장했다.

 

임제 선사의 문하에서 참선수행하고 있는 정 상좌라는 스님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는데, ‘평창’에는 〈종문통요집〉 제6권 ‘정상좌’전에 수록된 자료에 의거하여, 덕산 문하의 수제자인 암두와 설봉, 흠산 이 세 사람이 임제 선사를 참문 하러 가는 길에서 정 상좌를 만나 임제 선사가 입적한 사실과 그의 무위진인(無位眞人)에 대한 설법을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무위진인에 대한 문제로 흠산과 선문답을 나눈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정 상좌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 상좌가 이처럼 곧바로 깨달음의 경지를 출입하고 왕래한 것을 보라. 임제의 정법을 계승한 인물이었기에 이렇게 선기를 전개할 수 있었다. 불법의 대의를 깨칠 수 있다면 하늘을 훌쩍 뒤집어 대지를 만들고 스스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좌는 이러한 인물이었다. 임제 선사에게 한 차례 따귀를 얻어맞고 절을 하다가 곧바로 불법의 귀착점(대의)을 깨달았다. 그는 북방 사람으로 기질이 아주 순박하고 강직했다. 임제 선사의 불법을 이은 후에는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 임제 선사의 큰 지혜(大機)를 활용했다. 그는 참으로 빼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임제 선사가 법당에서 설법할 때에 정 상좌가 ‘불법의 대의’에 대해서 질문하자, 임제 선사는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손으로 뺨을 한대 후리치고는 바로 밀쳐 버렸다. 선어록에는 ‘불법의 대의’와 ‘조사가 오신 참된 의미’ ‘선사의 가풍’을 묻는 질문이 정형화되어 있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임제와 정 상좌의 행동은 〈임제어록〉 행록에 처음 황벽의 문하에서 수학한 임제가 황벽 선사에게 “무엇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황벽 선사가 곧장 방망이로 내리쳤다는 행동과 비슷하다. 임제는 세 번이나 황벽을 찾아가 불법의 대의를 질문했지만 세 번 모두 방망이를 얻어맞고 결국 대우 선사의 인연으로 비로소 깨닫게 된 유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선불교에서 ‘불법의 대의’를 문제로 삼는 것은 〈육조단경〉에 오조홍인 선사가 문인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사람은 게송을 지어 보라고 지시하자, 신수가 먼저 깨달음의 게송(心偈)을 지어 벽에다 쓴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불법의 대의는 불법의 현지(玄旨)를 말하는데,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불성을 깨닫는 견성(見性)과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불법의 근본정신을 말한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면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 정법의 안목으로 일체의 만법을 올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법의 차별경계에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로써 보살도의 삶을 전개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다는 것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경지를 말하는데, 임제는 이러한 선사를 ‘무위진인’이라고 하였고, 진정한 견해를 갖춘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전등록〉 제14권에 도오가 “무엇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석두 선사는 “그대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면 알 수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시 “불법을 체득한 후의 세계에도 다시 진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창공은 걸림이 없다. 백운(白雲)이 날아다니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입장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대변하고 있다. 사실 선불교의 사상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정리되는 전불교의 실천정신을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으로 귀결시키고 있는데, 무심은 본래심이며 평상심을 말한다. 그래서 “무심(無心)이 도(道)” “평상심이 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상좌도 임제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한마디의 법문을 간청했다. 그런데 임제 선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선상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잡고 후리치며 밀쳐버렸다고 하는 것처럼 난폭한 행동으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황벽이 임제를 몽둥이로 후리친 것과 같이 거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오는 “오늘에야 붙잡았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임제가 매일 설법하면서 대장부를 찾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분명히 붙잡았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멱살을 붙잡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노파심 간절하게 지도하고 있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그런데 “정 상좌는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은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무아지경에 서 있는 모습이다. 불법의 대의를 행동으로 보여준 임제의 거친 노파심은 정 상좌를 무아지경에 몰아넣고 말았다. 원오가 “이미 귀신의 소굴에 빠졌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정 상좌가 무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혜의 작용이 없는 귀산의 소굴에서 사는 죽은 인간이 된다. 그런데 마침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정 상좌에게 “정 상좌! 선문답은 끝났다. 빨리 선사께 인사를 올리게!”라고 고함쳤다. 처음 선문답을 하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하고 마칠 때는 ‘선사의 깊은 법문 감사 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예절이 있다.

 

정 상좌는 옆에서 주의를 준 스님의 말을 듣고 무심의 경지에서 임제 선사께 절을 하려는 그 순간 불법의 대의를 깨달았다. 즉 자아의식이 완전히 없어진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옆에 있는 스님이 던진 한마디의 주의에 지금 여기 자신의 할 일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 상좌가 지금까지 많은 세월에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고심(苦心)으로 참구해온 결과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임제의 친절한 방편 수단으로 번뇌 망념을 초월하고 불법의 근본정신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황벽 선사의 지혜작용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어받은 것이 어찌 점잖을 리 있으랴!” 불법의 대의를 질문한 정 상좌를 선상에서 내려와 거친 행동의 지혜방편으로 제시한 임제 선사를 칭찬하고 있다. 임제도 황벽에게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고 방망이를 얻어맞는 거친 행동의 교화수단을 계승하고 있다. “거령신이 무심코 들어 올린 손 일격에 천만 겹의 화산이 쪼개졌네.” 거령신은 황하의 전설에 나오는 신으로 무심코 들어 올린 손으로 화산과 수양산을 나누어 그 사이로 황하의 물을 흐르게 한 것처럼, 임제의 무심한 행화가 정 상좌의 의심과 만 겹의 미혹을 타파하게 되었다고 읊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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