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의 글에서, 나와 부처 사이에 간격을 두고 지금의 나는 부처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최후의 망상이라고 했다.
제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고 추스려서 뭇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흔히 발동하는 거친 망념망상을 다 가라앉혔다고 해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라고 하는 생각만은 참으로 떨치기 어렵다.
선사들의 법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를 망념망상으로 수렴시켜서 이야기를 한다.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전제를 내세우고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그런데도 중생은 공연히 스스로 망념을 일으켜서 시끄럽게 괴로움을 일으키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것이 물과 바람의 비유이다. 중생의 본래 마음자리는 완벽하게 잔잔한 물과 같다. 이국의 풍경사진에서 가끔 보는 잔잔한 호수를 떠올려 보시라. 수면이 거울과 같아서 주변의 온갖 풍경이 그대로 비친다. 하늘, 구름, 산, 나무가 각자 그 모습 그대로 비친다. 그런데 바람이 한줄기 불어오면 물결이 치고 수면은 이제 더 이상 거울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물은 중생에 해당하고 바람은 무명(無明)에, 그리고 물결은 망념망상에 해당한다. 이런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중생과 부처의 불이적(不二的)인 관계이다. 물결이 치는 물이 중생이라면 물결 없는 잔잔한 물은 부처이다. 그러나 물이라는 점에서는 둘이 똑같다. 중생과 부처가 본래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분명히 다르다. 같은 물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잔잔한 물과 물결이 요동치는 물은 다른 것이다. 완벽하게 잔잔한 물이 모든 것을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비치는 것은 부처의 대원경지(大圓鏡智), 즉 이 세상 전체만큼 크고 굴곡이나 티끌이 조금도 없어 세상 모든 것을 그대로 비치는 거울과도 같은 지혜를 비유한다. 반면에 물결이 일어 주변 풍경을 그대로 비치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것, 심지어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물결만 소용돌이치는 것은 번뇌망상으로 들끓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비유한다. 그런 차이를 보면 중생과 부처는 하나가 아니다(不一).
대승불교, 특히 선종에서는 그 양면을 한꺼번에 볼 것을 강조한다. 그처럼 정반대 되는 양면이 한꺼번에 참이라고 하면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이 바로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보는 것을 변견(邊見)이라 해서 잘못된 견해라 하고, 양면을 다 보는 것을 중도실상견(中道實相見)이라 해서 옳다고 한다.
하지만 선사들의 법문에서는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피상적일 뿐이고 동질성이 본질적이라고 강조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중생이 워낙 분별하는 습성에 매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부처가 되겠다고 불도(佛道)를 닦는 이들에게 막바지까지 남는 분별은 자기가 아직 부처가 아니라는 의식일 터이다. 선(禪)에서 성불이란 나는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요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나와 부처 사이의 분별을 남김없이 떨쳐버리는 것이다.
분별은 사실 중생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무기이다. 우리는 분별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고 여긴다. 사려분별(思慮分別)이라는 말도 좋은 뜻으로 쓰인다. 선사들이 흔히 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도, 그 모든 분별, 즉 삶의 무기를 버리고 벼랑 끝에 섰을 때 그래도 붙들고 있는 삶의 의미, 즉 부처가 되겠다는 분별까지 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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