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 글 끝 부분에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에 대해 언급하였다.
선사들이 그 말을 할 때에는 모든 분별을 남김없이 떨쳐버리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처와 자기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떨쳐버려야 할 분별이라고 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라고 함은 떨어져 죽으라는 얘기인데, 분별을 남김없이 떨쳐버리는 것을 두고 어찌하여 죽는 일에 비유하는가? 지난 회 글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분별을 삶의 기본적인 기능이며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무기라고 여긴다. 하기는 찬 것과 뜨거운 것, 네모와 세모 등 사물에 대한 단순한 분별은 물론이고, 먹어도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등등 온갖 분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데도 분별을 남김없이 떨쳐버리라는 것이니 가히 죽음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모든 분별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분별은 나 자신과 바깥세상 사이의 분별이다. 달리 말하자면 주객(主客)의 구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동하는 모든 분별은 그 가장 근본적인 분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자기를 위주로, 즉 나 자신을 주(主)로 삼고 바깥 세상의 모든 것을 객(客)으로 삼아 온갖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분별 자체는 이상하다 할 것도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우리는 워낙 삼라만상 가운데 하나, 즉 개별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틀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의 근본교리에서는 그런 불가피한 분별조차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듯한 대목이 있다. 윤회의 사슬에 매어 한 개별자로 태어나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불도(佛道)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이란 곧 윤회로부터의 해방이다. 윤회로부터 해탈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존재의 양상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존재 양상은 언제나 개별자로서의 존재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지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 양상, 즉 개별자로서 살아가는 양상의 범위 내에서만 이야기를 해보자. 문제는 우리가 각자 자기 자신을 위주로 해서 모든 개체를 분별할 줄만 알았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삼라만상이 모두 연기적(緣起的)인 존재라는 점은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신을 연기적인 존재로 본다는 것은 곧 기왕의 자아관념을 철저하게 버림을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주(主)로서의 ‘나’가 죽어야 연기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일이다. 성불하겠다고 불도를 닦는 이로서는 부처가 아닌 나, 부처와 구별되는 나를 죽이는 것이니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 성불하겠다는 삶의 마지막 의미까지 내려놓아야 하며, 바로 그때에 이미 부처인 나의 정체가 비로소 살아난다는 얘기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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