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23. 견성성불(見性成佛) 10

수선님 2018. 7. 2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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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하면 부처가 된다(見性成佛)'

 

아니, 더 철저하게 말하자면 ‘견성하면 그대로 부처(見性卽佛)’라고 하는 선(禪)의 명제는 견성만으로는 아직 부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부인한다.
 
견성과 성불을 동의어로 쓰지 않는 예가 선종 집안에도 있다. 특히 일본 불교에서 그런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견성을 일본어 발음으로는 겐쇼라고 하고 깨달음을 ‘사토리(悟り)’라고 하는데, ‘겐쇼’했다거나 ‘사토리’했다는 말은 해도 차마 그것을 성불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겐쇼를 몇 번인가 거듭하는 이야기, 그 때 어떤 경계를 체험했는가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이 바로 성불인지는 딱 부러지게 얘기하지 않는다.

 

하기는 한국 불교에서도 개념 정리가 분명치는 않다. 예를 들자면, 흔히 말하는 ‘한 소식’이라는 것은 과연 견성을 가리키는지, 특히 성불로서의 견성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불하는 깨달음까지는 아닌 그 어떤 신비체험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또한 고승대덕의 행장에는 대개 언제 어디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견성성불을 가리키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스님이 그 때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이냐?’고 감히 묻지를 못하는 분위기이다. 선종에서는 워낙 말 자체를 꼬치꼬치 따지는 일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해도, ‘아니다’라고 대답해도 듣는 이들에게 온갖 망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니 그런 질문은 하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석가모니는 외도(外道) 사상가가 제기한 열 네 가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답변하지 않고 침묵했다고 하고 그것을 무기(無記)라고 하는데, 지금 이 문제는 이를테면 선종의 무기(無記)라고 할 만하다.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숱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제기될 것이다. ‘한 소식’이라는 것이 ‘견성성불’의 견성이 아니라면 그건 또 어떤 체험이요 경지라는 말인가? 오도송을 읊게 한 그 체험이 견성이 아니라면 그건 또 어떤 체험인가? 견성은 그 뒤에 더 수행을 해서 도달하는 것인가? 그런데 왜 견성송(見性頌)이라는 것은 없나? 결국 현생성불(現生成佛)은 석가모니 이외에는 없는 일인가? 그러면 지금 당장 바로 여기에서 너 자신이 깨달아 부처가 되는 일만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선의 종지는 헛소리란 말인가?

 

‘그렇다’라고 대답해도 마찬가지로 숱한 망상을 일으킬 것이다. “아 글쎄 그이가 말 그대로 부처님이라는군! 가서 경배하세, 경배하세! 부처님이라면 병도 마음대로 고쳐주시겠네? 신통력이 대단하겠지? 그런데 웬 부처님이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생겼어? 부처님이라면 세상 모든 문제 해결할 속시원한 방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어?”

 

그 모든 의문이 망상에서 비롯되고, 그 자체도 망상이요 또한 나아가 새로운 망상을 낳는다. 부처는 이를테면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어떤 모습의 존재이리라고 하는 기대, 그러므로 우리들은 부처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그 망상의 핵심이다. 그것이 전회의 글에서 언급한 최후의 망상이다. 그 망상까지 떨쳐버려야 정말 망상을 다 내려놓은 셈이 된다. 나와 부처 사이에 조금의 간격이라도 남겨두면 ‘나=부처’임을 확인할 수 없고, 그저 ‘나≠부처’라거나 기껏해야 ‘나≒부처’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스스로 중생으로 살아가게 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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