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스크랩] 수심결(修心訣)(14) - 돈문과 점문의 선정과 지혜 다른데-

수선님 2018. 7. 22. 12:54



수심결(修心訣)(14)

-“돈문과 점문의 선정과 지혜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나요”-



자기 성품이란

‘걸림없는 고요함과 아는 것이 원래 무위여서

하나의 티끌도 상대함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정(情)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


하고는 결론짓기를

‘이것이 담박에 깨닫는 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은

‘이치에 따라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법에 따라 공을 관조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에 들어간다’


하고 결론 짓기를

‘이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 즉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경계를 다스려나가야 합니까?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공부로써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뒤에

자기 성품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만약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고요함과 아는 것이 자재하여

다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공력이 없을 텐데

어째서 수상문, 즉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마치 흰 옥에 무늬를 새김으로써

본바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먼저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얻어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완성한 뒤에

자기 성품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점차로 수행하는 열등한 근기가

깨닫기 이전의 점차로 닦아나가는 공부이니,

어째서 돈문(頓門)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되

노력 없는 노력을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전후가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돈문과 점문의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가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의 저서


출처: Buddhapia, 김원각<시인·역경위원>



출처 : - 행자실 -
글쓴이 : 성불하십시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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