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16)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그러나 비록 먼저 깨달았다 하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생각에 감정이 일어나고, 반연을 만날적마다
마음은 대상을 만들어 혼침과 산란에 빠져서 고요함과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곧 상을 따라 수행하는 선정과 지혜를 빌려서
다스려야 함을 잊지 말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잠시 습기를 조절하지만 이미 마음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에 물들은 수행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이란 비록 공부를 잊지 않고 생각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을 일으켜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익으면 몸과 마음과 객관의 대상이 편안해진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한 것 같으나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 닦는 것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방편이 있지만 생각생각에 의심이 없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가면 자연히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계합되어 고요하고 아는 것이 자유롭고, 생각생각이 일체의 경계에 반연하면서도 마음마음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되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어 앞에 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상을 따르는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는 비록 점차로 수행해야 하는 근기를 가진 자가
행하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쇠로 금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안다면 어찌 자성문(自性門)
수상문(隨相門)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앞뒤의 차례가 있다는 두 가지 견해의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울 수 없다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빌려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의 저서
출처: Buddhapia, 김원각<시인·역경위원>
'수심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수심결(修心訣)(18) -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 (0) | 2018.07.29 |
---|---|
[스크랩] 수심결(修心訣)(17) - 글에 집착말고 참뜻을 바로 깨닫고 - (0) | 2018.07.29 |
[스크랩] 수심결(修心訣)(15) -말을 따라 알려하면 의혹 생기고- (0) | 2018.07.22 |
[스크랩] 수심결(修心訣)(14) - 돈문과 점문의 선정과 지혜 다른데- (0) | 2018.07.22 |
[스크랩] 수심결(修心訣)(13) -선악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이는- (0) | 2018.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