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없애려면 먼저 고통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 괴고. 행고의 세 가지 괴로움에 대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중에서도 행고에 대해 아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스스로를 예로 삼으면 좋습니다.
고고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고통을 말합니다.
짐승조차도 고고가 괴로움인지를 압니다.
괴고라는 것은 유루에 대해 행복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유루에 대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실은 괴고인데, 유루에 대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비록 행복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세하게 살펴보면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행고라는 것은 괴로움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고통의 뿌리라 하는 이유는 현상계 자체가 업과 번뇌로 이루어져 있어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업과 번뇌로 이루어진 삶 혹은 오온을 바로 행고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행고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사성제에 대하여 “이것은 고성제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업과 번뇌로써 이루어진 오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업과 번뇌로 이루어진 오온을 “괴로움 그 자체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을 생각하고 그것이 괴로움 그 자체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상함의 이유가 괴로움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설명하실 때 고제의 네 가지 특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무상. 공. 무아. 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은 ‘순간순간 사라지는 무상’과 ‘생명의 흐름이 죽음으로 끝나는 무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제에서는 순간순간 변하는 더욱 미세한 무상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거친 무상을 봅니다. 자신의 몸을 보아도 나이가 들어가고, 나무를 보아도 점차 변하여 나중에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라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보면 서서히 변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예로 죽음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나이를 먹고, 나이가 들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오온이 자리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들어 죽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거친 무상이 생기는 경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갑자기 죽거나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사라지는 것조차 서서히 변하면서 사라집니다.
서서히 여러 형태로 모습이 변하면서 결국 사라집니다.
잘 생각해 보면 거친 무상이 있기까지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명백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나이가 들어 사라지는 것 또한 여러 해를 거쳐 변하는 것입니다.
한 해는 여러 달이 변하기 때문에 한 해가 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한 해가 바뀔 수 없습니다.
또 한 달이 변하는 것은 여러 날이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한 달이 변할 수 없습니다.
한 날이 변하는 것 역시 한 시간 한 시간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며, 한 시간의 변화 또한 일 분, 일 분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며, 그 일 분의 변화는 일 초, 일 초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변합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변하는 거친 무상은 현상 존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조건’에 ‘장애가 되는 주변조건’의 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순간순간 변하는 것-미세한 무상-은 다른 조건과 원인에 의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 본성 자체가 본디 무상한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무상은 그 원인이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세한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미세한 무상은 다시 스스로 생겨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본래 갖추고 있습니다.
그 원인 자체가 적합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의 변화에는 생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무상한 존재이건, 무상하지 않은 존재이건 간에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은 그 원인 자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원인에 의한 것으로써 ‘나’라는 것은 오온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윤회계의 중생은 각자가 받은 오온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각각에 의해서 생긴 이 오온은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 자체에서 생긴 원인에 의해서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을 생기게 하는 원인의 중심에는 ‘업’과 ‘부모의 정혈’과 많은 것이 있지만 이유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무명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무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번뇌의 뿌리와 같으며 뒤집힌 의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오온의 근본을 깊이 살펴보면, 고통의 뿌리와 번뇌의 바탕인 무지한 법집에 의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업과 번뇌에 의지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업과 번뇌로 이루어진 이 오온의 원인을 찾아봅시다.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 몸은 불결한 36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근본을 찾아가면 무명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은 영원히 즐겁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행(行)이라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 근원에는 번뇌가 있으며, 번뇌는 자신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모두를 타락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뇌로 인해 생긴 이 몸은 ‘썩 좋지 않은 것’이라는 마음이 생길 때, 앞서 말한 것처럼 번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번뇌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길 때 ‘번뇌에 의지하고 있는 이 오온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의 얽매임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이 마음과 번뇌로 인해 생긴 ‘이 오온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이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을 염리심(厭離心)이라 합니다.
행고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동기가 잘못되지 않은 염리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모든 중생을 위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자신을 바탕으로 하는 번뇌에 얽매여 있는 것과 법집인 무지에 의지해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삼계의 모든 중생은 법집의 노예입니다.
세세생생 법집의 노예로,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할 수 없는 그 이유는 이 몸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하다고 우리들은 생각하며 그렇지 않으면 두려워 고통이 올 것처럼 느낍니다. 무명은 바른 실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와는 정반대가 되는 ‘실재하는 법의 실체(법집法執)는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본디 마음은 공한 것’임을 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무명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내가 없애겠다!’는 마음이 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면, 고통을 겪을 때마다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그런 방법에 의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진정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이 강력하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만큼 자비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하여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등을 돌리거나, 원래 고통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더 불러들이는 것을 볼 때, ‘아! 어떻게 하나?’ ‘이를 어쩌나?’ 하는 무한한 자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성을 깨달은 지혜를 동반하는 자비심은 그 힘이 아주 큽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고통에 빠져있는 모든 중생을 위해 자비와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가?’를 알아차리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할 때 자비심은 크게 일어납니다.
어제 부처님의 법을 설명할 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사성제를 생각하면 삼보(三寶)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삼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이로써 발심의 유익함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이로써 법을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인 ‘인간으로 태어난 좋은 기회’를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법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무상을 생각하고 의미 있는 이 기회를 얻은 지금, 조심하지 않는다면 죽은 후 그리고 다음 생에 큰 아픔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친 무상인 ‘죽음의 무상’을 생각해 법을 행하도록 노력하고, 꾸준히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보리행론 해설 38. 괴로움은 없앨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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