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32. 불립문자(不立文字) 5

수선님 2018. 8. 12. 12:27


칼 야스퍼스가 ‘축(軸)의 시대’라고 일컬은 고전문명의 형성기, 즉 서력기원전 5세기 앞뒤로 각각 3세기 정도에 걸친 시기에 등장한 위대한 사상가와 종교적 선지자 가운데에는 글을 남기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앞의 글에서 했다.
 
그들의 사상과 언행은 뒤에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문자 기록으로 남긴 덕분에 오늘에 전해진다. 옛날에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고 극히 특수한 사람들만 글을 읽고 썼다지만, 그들은 식견이나 지위, 또한 관심사로 보아 글 읽고 쓰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을 듯한데 왜 말은 그토록 많이 하면서도 글을 남기지는 않았을까?

그 시대는 동·서양 고대문명의 중심지에서 바야흐로 문자의 사용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이지만, 본격적인 기록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 그때라는 얘기이다. 그 동안 구비전승(口碑傳乘)되던, 즉 입에서 입으로 말과 기억으로 전해오던 것들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기록의 대상이 된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성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우리가 흔히 신화라고 싸잡아 부르는 이야기들이다. 인도에서 베다 내지 우파니샤드 문헌이 등장했고 호머(Homer)가 전래 신화를 글로 써서 편찬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는 갑자기 엄청난 양의 문서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앞글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말을, 그것도 세계와 인생의 궁극적인 진상에 대한 심각한 통찰과 지혜를 담은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으면서도 정작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들이 글을 남기는 일에 대해 뭔가 공통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앞의 글에서 제기했는데, 그런 짐작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 석가모니,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예수 등이 모두 언어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특히 말보다는 글에 대해서 더 비판적이었다(물론 그들의 그런 면모도 뒤에 글로 전해진 것이어서 정말 당사자들이 그랬는지, 그 글을 쓴 이들의 생각이 거기에 얼마나 반영이 되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大覺)을 이루고 나서 삼칠일동안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석가모니는 마침내 생사문제를 해결한 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한편으로, 당신이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르쳐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 중요한 깨달음을 당연히 가르쳐주어야지 그걸 왜 고민했을까 의아할지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심각한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의 내용이 워낙 세간의 말로 전달할 수가 없는 출세간적인 것이었고, 굳이 말로 가르친다고 해도 듣는 사람들은 다 제 요량으로 받아들여 세간적으로 이해(오해)하고 말겠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그 일화가 고전문명 발상기의 사상가 및 고전종교 종조들이 언어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유를 단적으로 시사해준다. 세계와 인생의 궁극적인 진상에 대한 통찰과 지혜는 말에 온전히 담아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이 그렇거늘, 이와 관련해서 문자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 풀어놓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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