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士 學 位 論 文
『大乘起信論』의 硏究
- 衆生卽佛觀을 中心으로 -
指導敎授 睦 楨 培
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李 直 秀(玄 性)
1999
博士 學 位 論 文
『大乘起信論』의 硏究
- 衆生卽佛觀을 中心으로 -
李直秀(玄性)
指導敎授 睦 楨 培
이 論文을 博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0年 6月 日
李直秀(玄性)의 哲學博士 學位論文을 認准함.
2000年 6月 日
委員長 權 奇 悰
委 員 李 智 冠
委 員 金 煐 泰
委 員 全 好 蓮
委 員 睦 楨 培
東國大學校 大學院
목 차
Ⅰ. 緖 論 1
1. 硏究 目的 1
2. 硏究 範圍와 方法 5
II. 佛陀觀의 형성과 변천과정 7
1. 初期經典上의 佛陀觀 7
1) 불타 재세시의 佛陀觀 7
2) 불멸후(부파불교 성립 이전)의 佛陀觀 8
(1) 佛身 중심의 佛陀觀 9
(2) 法身 중심의 佛陀觀 10
2. 部派佛敎의 佛陀觀 11
3. 大乘經典上의 佛陀觀 12
1) 大乘佛敎 興起의 起源 12
2) 多佛陀觀 14
3) 內在佛의 佛陀觀 17
III. 衆生心卽佛 20
1. 題名에 보이는 衆生卽佛觀 20
2. 三身說에 보이는 衆生卽佛觀 29
1) 眞如自體相으로서의 衆生卽佛觀 40
2) 眞如用大로서의 衆生卽佛觀 45
3. 淨法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54
1) 妄心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60
2) 眞如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63
(1) 自體相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64
(2) 用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68
3) 衆生卽佛의 示現 72
4. 覺과 衆生卽佛 74
1) 始覺에 작용하는 衆生卽佛 82
2) 本覺과 衆生卽佛 106
(1) 衆生卽佛로서의 隨染本覺 106
(2) 衆生卽佛로서의 性淨本覺 120
5. 序分의 衆生卽佛觀 137
1) 歸敬偈의 衆生卽佛觀 139
(1) 衆生卽佛로서의 佛寶 152
(2) 衆生卽佛로서의 法寶 161
(3) 衆生卽佛로서의 僧寶 164
(4) 歸敬偈 衆生卽佛觀의 結辭 171
2) 述意의 衆生卽佛觀 174
IV. 僧寶와 衆生卽佛 182
1. 歸敬의 三寶와 衆生卽佛 182
2. 報身佛과 衆生卽佛 183
3. 寶로서의 僧과 衆生卽佛 187
V. 佛道와 衆生卽佛 189
1. 對治邪執과 衆生卽佛 190
2. 分別發趣道相과 衆生卽佛 196
1) 信成就發心과 衆生卽佛 198
2) 解行發心과 衆生卽佛 220
3) 證發心과 衆生卽佛 226
3. 勸修利益과 衆生卽佛 243
4. 總結廻向과 衆生卽佛 249
VI. 結 論 251
참고문헌 262
ABSTRACT 276
표 목 차
<表 1> 『대승기신론』의 구성 3
<表 2> 一心法의 三身佛 30
<表 3> 三大의 組織과 衆生卽佛 53
<表 4> 淨法熏習과 衆生卽佛 73
<表 5> 衆生卽佛로서의 覺 136
<表 6> 三種發心 198
<表 7> 發心의 次第 242
Ⅰ. 서 론
1. 硏究 目的
『대승기신론』1)이 나오기 이전에 인도에서 마음의 청정한 면(空)만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中觀사상과 마음의 染汚한 면을 주로 밝혀 온 瑜伽사상을 주장하는 양대 조류가 있었다. 이 양대 주장의 극단적인 면을 止揚하고 잘 調和시켜 眞俗一如 一心思想이 대승불교 후기에 馬鳴보살에 의하여 『대승기신론』이라는 제목으로 찬술되었다. 『대승기신론』은 중국 隋나라의 開皇年間(A.D. 550년경)에 眞諦(Param rtha)에 의하여 漢譯되어 중국에 소개되었을 때 當代에 유명하였던 隋의 淨影寺 慧遠, 新羅 元曉, 唐 의 賢首法藏 등이 이에 대한 주석을 반복하게됨에 중국 한국 일본 등지의 學人들이 널리 애용하는 바가 되어 中國佛敎 思想史上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승기신론』은 序分의 게송에서 論主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귀경게와 造論의 大意를 밝히고, 末尾의 게송에서 本論의 공덕이 "널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게"2) 되기를 祈願하는 廻向發願偈로서 맺고 있다. 논주의 이 두 게송은 『대승기신론』의 序分과 流通分에 해당하는데, 이 두 게송의 사이에 本論部分인 正宗分이 있다. 이 正宗分은 五段으로 나누어 ①因緣分, ②立義分, ③解釋分, ④修行信心分, ⑤勸修利益分으로 구성한다.
①因緣分은 『기신론』의 各敎說을 설하는 인연을 八種으로 정리하고 있고,
②立義分은 『기신론』의 世界觀의 근본 뜻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 근본 뜻을 大乘이라고 하고, 大乘을 法과 義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法이 곧 衆生心이라고 하고, 衆生心을 一心이라고도 하며 이를 二門(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의 法相으로 나누어 義로 설명한다. 그리고 義를 三大(體大, 相大, 用大)와 二乘(過去乘과 未來乘)의 思想으로 제시한다.
③解釋分은 立義分에서 제시한 法相을 敷衍하여 해석하는 부분으로서 전체의 4분의 3을 점하고 있다. 이 해석분은 『대승기신론』중에서 「大乘」의 부분을 밝히고 있으며, 이는 다시 顯示正義(心眞如門, 心生滅門), 對治邪執(人法我見對治), 分別發趣道相(信成就發心, 解行發心, 證發心)으로 三分하여 해석한다. 이 중 顯示正義 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여기에서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설명이 있고, 眞如, 覺과 不覺, 本覺과 始覺, 三細와 六 , 熏習論 등이 기술되어 지금까지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다음 對治邪執에서는 人我見과 法我見을 대치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分別發趣道相에서는 佛道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相을 분별하는 것으로, 信을 성취하는 데에서 일으키는 발심, 解와 行을 함에서 일으키는 발심, 證을 함에서 일으키는 발심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대승기신론』에서 「起信」부분을 설명하는 部分이다.
④修行信心分은 이상 顯示正義에서 설명된『대승기신론』의 세계관을 직접 체험하여 증명하기 위한 修道論을 설하고, 修道 그 자체가 곧 佛의 行이라고 밝히고 있다. 修道에는 四信[信根本(理法身), 信佛寶, 信法寶, 信僧寶]과 五行(施, 戒, 忍, 進, 止觀)을 설명하고, 최후에 專意念佛의 勝方便을 겸하고 있다.
⑤勸修利益分은『대승기신론』을 공부함으로서 얻는 이익을 설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修習할 것을 권유한다.
이러함으로 『대승기신론』의 조직을 통상적으로 一心-二門-三大-四信-五行이라고도 한다. 『대승기신론』의 주요한 구성을 간략하게 아래 표에 나타내었다.
+-----序分(偈)
|
| +-----因緣分
| |
| +-----立義分------------+
| | +------大乘
起信論------+----正宗分---+-----解釋分------------+
| | +------起信
| +-----修行信心分--------+
| |
| +-----勸修利益分
|
|
+-----流通分(偈)
<表 1> 『대승기신론』의 구성
이와 같은『대승기신론』은 現代에 이르러서도 일본 한국 등에서 많은 학자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연구 되어온 훌륭한 논문은 起信論思想3), 元曉의 一心思想4), 원효의 眞俗圓融無碍觀5) 원효의 기신론 철학6), 원효의 起信論觀 理解7) 혹은 如來藏思想8) 외 다수 있다.
이들은 한결 같이『대승기신론』에서 眞과 俗이 一心에 포섭되니 우리 인간들이 발심하여 迷汚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세계(眞)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참(眞)된 인격을 이룩하자고 주장하며, 한편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染汚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가자고 주장한다. 이러한 眞俗一如의 一心思想을 연구한 논문에 전적으로 긍정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결 같이 『대승기신론』중 '대승'에 편중된 연구가 되어 '기신' 부분을 소홀히 다룬 감이 있다.
필자는 『대승기신론』의 궁극적 목적은 '기신'에 있고 '대승'은 '기신'을 위하여 설명되어진 것이라고 이해한다. '기신'에 목적을 두고 『대승기신론』을 이해 할 때 衆生卽佛을 설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하여 다음 세 가지 부분에 연구의 관점을 두고자 한다.
첫째, 『대승기신론』의 一心을 '기신'과 관계되는 報身佛과 僧寶의 연구에 중점을 두고 僧寶를 위한 修行과의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法身佛 應身佛 報身佛은 곧 衆生卽佛의 용임을 밝히고, 衆生卽佛觀을 밝히는 과정에서『대승기신론』이 하나의 思想書라기보다, 佛道修行書로서 귀중한 論書임이 증명되기를 바란다.
둘째,『대승기신론』은 信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기신론』상에서 설하는 信仰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종교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불교를 영어권에서 "Buddhism"이라고 영역하여 왔어도 아무도 이에 대한 異意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불교학자들도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불교를 "Buddhism"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Buddhism"이라고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이를 어떤 사상이나 철학으로 誤認 하는 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승기신론』은 信行를 강조하지만 信行을 권장하는 근저에는 信仰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뚜렷이 부각시켜 『대승기신론』이 불교를 한 종교로서 개인의 서원을 성취함에 도움이 되는 논서로서 믿어지게 하고자 한다.
셋째, 근래에 와서 불법승 삼보중 승보에 관한 문제가 매우 심각하여 지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필자는 승보에 관한 문제를 절감하였다.
외국에서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의식하며 지역사회의 정신문화 발전에 공헌하고, 한국불교문화를 보급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는 윤리와 도덕관이 투철하며 가장 생산적이고 봉사하는 일꾼을 培養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게 하기 위하여 불교 신앙 단체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근본을 『대승기신론』의 衆生卽佛觀에 의지하여 밝혀 보고자 한다.
2. 硏究 範圍와 方法
불타는 迷路에 있는 중생에게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락을 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 一心으로 根源에 還歸하게 한다. 범부에게 이러한 의지를 일으키게 하는 자가 바로 그 자신에게 내재하는 佛陀라고 설하는 것이『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이다.
이 衆生卽佛觀을 설하는『大乘起信論』의 중심 내용은 대승이 중생의 마음이고 중생의 마음을 一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一心을 그 心相에 따라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卽 心眞如門의 空과 不空 眞如가 중생의 마음에 있고, 중생심 중 心生滅門에서 覺과 不覺, 本覺과 始覺, 熏習, 修行, 信仰 등도 역시 중생의 마음에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에 있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현실 생활 속에서 迷界로 流轉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이치"를 自覺하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 지라도 佛性이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不覺의 중생이 覺의 진여세계로 추구하고자 하는 意志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의지는 수행으로 轉依되어 그 수행에 의하여 "마음에 있는 이치"를 깨닫는 세계로 還滅되어 결국은 一心의 本源인 완전한 진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항상 작용하고 있는 불성이 누구에게나 현존하므로 중생즉불이다.
이와 같은 중생즉불관을『대승기신론』의 귀경게와 회향게를 포함한 一心 二門 三大 四信 五行에서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있다. 이 모두 중생 자신이 곧 佛身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衆生卽佛觀을 보이기 위하여 『대승기신론』상에서의 불타의 三身說과 一心 二門 三大와의 관계를 밝히고, 三身說과 熏習論과의 관계, 三身說과 覺不覺과의 관계, 귀경게의 佛法僧 三寶, 그리고 『대승기신론』의 가장 큰 특징인 報身佛과 僧寶와의 관계, 그리고 부처가 되는 길(佛道), 法身佛이 되는 길(佛道), 즉 佛道로서 對治邪執, 分別發趣道相, 修行信心分, 勸修利益分, 廻向偈가 모두 법신 그 자체(卽佛)이면서 또 법신이 되는 길을 닦아 가는 법까지를 그 범위로 한다.
『大乘起信論』과 『新譯大乘起信論』, 慧遠의『大乘起信論義疏』, 원효의『起信論疏』와『大乘起信論別記』,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의 原文中 관계된 單語나 文句만을 拔萃하는 형식을 취하지 아니하고 文단락 전체를 인용함으로서 개별적인 뜻과 전체의 뜻을 유지하도록 하고, 그리고 漢譯 原文을 脚註로 처리하여 참고가 되게 하였다.
『大乘起信論』과 『新譯大乘起信論』을 대조하여 볼 수 있게 하여, 뜻이 模糊할 때 바르게 해석함에 도움이 되게 하고, 그리고 三疏를 대조함으로서 本論을 확대 해석할 때 그 뜻을 따르면서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大乘起信論』 『新譯大乘起信論』 그리고 三疏의 뜻을 종합 정리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論과 疏 등에 대한 評을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들을 잘 이해 정리하여 衆生卽佛觀을 들어내고자 하는 데 관점을 두었다.
그리고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의 내용과 원효의『起信論疏』와 『大乘起信論別記』의 내용은 원문 그대로 인용하여 전체적인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이 유사한 곳에서는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의 내용을 한 두 단락 인용하는 정도에서 멈추었다. 왜냐하면 원효의『起信論疏』와 유사하다는 점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으나 뜻을 파악하는 데는 새로운 것이 없으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원효의『起信論疏』보다 나중에 나온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를 줄였다. 慧遠의 『大乘起信論義疏』에서는 본 논문의 취지와 직접 관계되는 부분만 필자의 自意로 취사 선택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간혹 본 논문의 취지와 無關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대승기신론』에서 설한 衆生卽佛觀의 배경을 알아보기 위하여 불타관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간단히 검토하고자 한다.
II. 佛陀觀의 형성과 변천과정
1. 初期經典上의 佛陀觀
1) 불타 재세시 佛陀觀
불타 재제시 불타는 迷妄의 세계를 證悟하여 인간적인 능력을 초월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나는 一切의 勝者요, 一切의 智者며, 無上士, 阿羅漢, 等正覺者,"9) "佛陀",10) 覺者,11) "十號具足한 불타"12)이다라고 칭하여 일체 煩惱障을 斷盡한 勝者이며, 所知障을 완전히 여읜 知者이며, 일체 보고 듣는 바를 모두 覺知하고 通達한 正覺者임을 제자들의 現前에서 밝혔다.
석존의 제자가 찬미하는 석존. 원시경전상에 석존의 제자들이 불타의 威德을 찬미하는 표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人天의 光明 가운데 佛陀의 光明이 最上이 된다,"13) "天界를 包含한 世界 中에서는 佛陀가 第一이다,"14) "應供 正等 正覺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世尊"15)이라고 하여 불타의 威德이 最勝함을 찬미하고 있다.
佛 弟子들의 威神力. 佛陀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도 自在하게 威神力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어보면 「나의 제자들은 여러 가지의 神通을 증득하고 있다. 즉 一身을 多身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多身을 一身으로 나투기도 한다. 자유 자재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기도 하며 벽을 뚫고 가되 마치 허공을 지나가듯 하며, 물위를 걷되 마치 땅 위를 걷듯 빠지지 않고 가며, 가부좌를 하고 허공을 날아가기를 마치 새가 공중을 날 듯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大神力이 있어 해나 달을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또 몸을 가진채 梵天界까지 갈 수 있다」16)고 한다. 그의 제자 目 連이 神通力으로 龍을 항복시켜 불타에 귀의하게 하였다17)고 한다.
釋迦牟尼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도 在世時에 모든 魔障을 調伏 받고 중생을 구제하는 威神力이 自在하여 누구보다 월등하였음을 보임으로서 중생들은 보고 듣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혹은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하등의 의심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석존은 일체 번뇌장과 소지장을 단멸하여 大悟하여 일체지자가 되어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일체 중생을 자비로서 구제하였다. 그의 초인적인 능력에 감복하여 수많은 제자가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고, 그를 믿고 따르던 많은 제자들도 깨달음을 얻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2) 불멸후(부파불교 성립 이전)의 佛陀觀
불제자나 신자들에게 절대의 존중과 신뢰를 받았던 석존의 入滅은 그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至高한 불타 숭배는 불타를 절대적 신앙의 대상으로한 信行생활로 이어지게 되었다. 信仰생활을 위한 불타관은 부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는 불타관과 부처의 몸(身)을 근본으로 하는 불타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나누어 진 것은 아니지만 혼합된 가운데 그러한 두 潮流가 있었다. 부파불교 성립 이전까지의 시한으로 경전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佛身 중심의 佛陀觀
불타 재세시 불타의 위력에 감명 되어 부른 존칭이 如來十號 였으나, 불멸후 제자들은 이로서 만족할 수 없어 불타의 육체상으로나 정신상으로 특수한 덕성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육체적으로 32相과 80種好로써 장엄한 완전무결한 最上, 最勝의 모습으로 묘사하게 되었고,18) 정신적으로는 十八不共法을 갖춘 불타관을 논하게 되었다. 十八不共法은 불타가 불타의 내면 세계에서 갖는 18가지 법으로 다른 깨달은 사람들과 共有하는 법이 아니라는 뜻으로 不共法이라고 한다. 이들 18가지 정신력은 十力, 四無所畏, 三念住, 그리고 大悲 등 불타 특유의 德性이다.19) 이들 중 앞 17不共法은 불타의 無盡한 중생 구제력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며 18불공법의 마지막 大悲는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평등이 붓다의 자비가 베풀어진다는 구제관이다. 이것은 당시 중생은 붓다가 더 이상 자기들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붓다의 완벽한 중생 구제 능력을 갈망하고, 그리고 한 중생도 빠짐 없이 구제하고자 하는 붓다의 자비심에 의존하여 붓다를 신앙하고자 하는 불타관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불타관과 신앙은 久遠多生劫來의 積功累德에 의한 원만한 공덕상,20) 三世多佛과 現在他方佛信仰21)으로 전개되게 된다.
이로서 佛身을 중심으로 하는 佛陀觀에는 超人的 絶對的 佛陀觀(相大, 報身), 大悲救濟 佛陀觀(人間的 佛陀觀, 用大, 化身), 三世諸佛, 他方佛, 一世界一佛이라는 普遍的인 佛陀觀(體大, 法身)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중생이 갈망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요구된 불타관이라고 볼 수 있다.
(2) 法身 중심의 佛陀觀
석존이 입멸시 불제자들에게는 실로 암담한 일이었으나 불타께서는 임종시에 「法燈明 自燈明」의 遺偈는 물론 나의 入滅後에는 내가 說하여 둔 戒律과 법을 汝等의 師로 하라22)라고 遺言하였다. 마땅히 이 뜻을 명심하라. 나 釋迦牟尼佛은 壽命이 영원하리라. 왜냐하면 肉身은 비록 소멸되어 없어진다 하여도 法身만큼은 恒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뜻이다.23) 實로 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者는 法을 보리라.24) 如來는 법을 恭養한다. 그러므로 法을 恭養하는 자는 곧 나(如來)를 恭養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 이미 法을 본 者가 있다면 곧 나를 본 것이다. 이미 法이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이다25)라는 佛陀의 말씀은 모두 영원 불멸하고 상주하는 法身과 佛陀가 一如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法을 떠나 佛이 있을 수 없고 또 佛을 떠나 法이 있을 수 없는 관계이다. 일반적 진리로 볼 때는 法(또는 法身)이라고 부르고 또 人格的으로 볼 때는 佛陀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를 신앙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불멸의 보편적 진리 그 자체를 불타의 본질, 즉 實身 또는 法身이라 하고, 이에 대해 역사적 존재로서의 釋尊을 父母生身 또는 色身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原始佛敎上에 이미 二身說의 元型인 法身과 色身, 또는 實身과 父母生身의 二身說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 중심적인 사고도 불제자나 재가 신자들 대부분에게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法은 그 자체로서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늘 석존이라는 인격을 통하여 석존이 깨달은 법을 듣고,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하고, 세존에 의해 이끌리며, 세존에게 의존한다」26)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석존이라는 인격을 통하여서야 법이 불제자나 신자들에게 그들 자신을 모두 들어 몰입할 수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처 없이 법이 없으며, 석존을 통하여 비로소 법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타 중심적인 사고 방식에서 불타 숭배의 신앙심이 강하게 나온 것이다. 불타 숭배의 신앙심은 知性的이거나 理性的인 사유를 초월한 불타의 보편화 방향으로 절대화되어 가는 불타관으로 정립되어 갔다고 하겠다.
2. 部派佛敎의 佛陀觀
部派佛敎란 阿毘達磨라고도 하는 바 대체로 불멸후 100여년 무렵 원시불교교단이 上座.大衆 2부로 분열하여 불멸 5.600년경 大乘佛敎가 興期할 때까지를 대체로 부파불교라고 한다.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는 이 부파불교의 傳承인 것이다.
兩系가 모두 原始佛敎의 근본교리를 바탕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그 근본교리, 예를 들면 苦集滅道 四諦에 대해 上座部系는 객관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서 苦集의 前二諦문제, 즉 輪廻轉生의 현실세계 설명에 주력하고 있음에 비해, 大衆部系는 主觀的 唯象論의 입장에 서서 滅道의 後二諦, 즉 열반해탈의 理想悟界에 중심을 둔 것이라 볼 수 있다.27) 이에 따라 제반 교리의 해석, 또는 그 적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근본적 관점과 태도의 차이에 따라 部派佛敎의 佛陀觀에 있어서도 歷史的 現實存在로서의 불타에 중점을 둔 上座部系의 佛陀論과 超歷史的 理想存在로서의 불타에 중점을 둔 大衆部系의 그것으로 대별된다.
上座 有部系에서는 事實的 歷史的 根據를 중요시 함으로서, 그들의 불타관을 인간의 思惟와 文字의 범위 안에서 많은 발전을 시켜온 공로는 인정된다. 그러나 오히려 佛陀를 凡夫적 인간의 사유와 문자의 범위 안에 구속시키는 결과도 초래하게 되어 인간의 思惟와 文字의 한계를 벗어난 경계에 있는 불타에 대하여는 誤謬를 범하게 되는 佛陀觀으로 變轉되어 갔다고도 보여진다.
大衆部系에서는 불타는 상좌 유부계의 制限的이고 束縛的인 불타관을 破하고 자유자재한 불타로 昇華하여 모든 중생을 한 사람 한 有情도 빼 놓지 않고 모두 구제할 수 있는 超人的 능력의 소유자이며 이 刹那에도 중생 구제를 위한 교화활동을 하고 있다는 투철한 자비구제의 목적 의식과 信仰的 차원에서 보는 佛陀觀을 정립하여 가는 과정 이였다고 보여진다.
3. 大乘經典上의 佛陀觀
1) 大乘佛敎 興起의 起源
대승불교 흥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제학자간에 많은 異見이 있으나 대체로 B.C. 1C 경 내지 紀元전후에 진보자유파의 大衆部가 성행하였던 南印度 Andhara 지방을 중심으로 般若등의 大乘思想이 흥기하였다고 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佛塔信仰 등의 大乘的 불교운동이 Gandh ra 미술의 영향을 받은 캐시미르 지방을 중심으로 北印度에서 일어났다고도 한다.28) 또 이들 南北 兩印度地方은 義淨(A.D. 635-713)이 『南海寄歸內法傳』卷1에 이른바 대승이란 二種에 불과하다. 하나는 中觀이며 또 하나는 瑜伽이다29)라고 하며, 平川彰은 대승불교의 원류로서 부파불교의 교리, 불전문학 그리고 불탑신앙 등의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고 한다.30) 大乘佛敎가 부파불교의 교리적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하여도 부파불교의 교리를 근거로 하여 발전 시켜 갔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부파불교의 교리. 대중부계의 불타관은 그대로 대승 불타관의 원류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大衆部系의 菩薩願生說은 有部系의 「業生說」과 달리 大乘菩薩觀의 근간이 되었다. 일체보살은 欲想과 想과 害想을 일으키지 않으며, 보살은 일체 유정을 饒益하게 하고자하여 惡趣에 나기를 願하고, 願하는 뜻대로 능히 머문다31)고한 大衆部系의 菩薩觀은 大乘菩薩觀의 근간이 되었으며, 또 大衆部系의 「心性本淨客塵煩惱說」도 大乘의 「法身常住」내지「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여래장사상의 원류라 볼 수 있는 것이다.32) 上座部系에서는 六識心이상의 心識의 존재를 인정하여 有部에 이미 阿賴耶의 명칭이 비칠 뿐 아니라,33) 無我說과 輪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제시된 독자부의 보특가라(Pudgala), 즉 「非卽非離蘊我說」과 化他部의 「窮生死蘊」내지 「種子相續說」, 經量部의 「細意識」내지 「種子熏習說」등은 모두 大乘唯識思想의 선구라 보지 않을 수 없다.34)
佛傳文學. 原始佛敎이래 佛陀의 전생에 관한 『本生經』(J t ka) 내지 『譬喩經』(Apad na)등의 설화문학이 더욱 발전하여 제부파를 통해 『大事』,『普曜經』,『佛本行集經』등 수많은 佛傳文學이 산출되었던 것이다. 이들 佛典流는 불타의 成佛因緣 내지 성불가능의 修行(本行)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불전문학의 공통된 설명의 하나로서 燃燈佛(D pa kara, 定光如來)에 의한 釋迦菩薩의 授記說은 대승불교의 記 (Vy karana)思想의 원류를 이루고 있으며, 또 記 을 받은 이후의 三阿僧祗劫을 통한 6바라밀의 수행 내지 그 修行階位로서의 十地說等은 그대로 대승불타관의 기초사상이 되는 것이다.
佛塔信仰. 『法華經』이나 『阿彌陀經』을 비롯한 많은 大乘經典에 佛塔信仰이 중시되고 있다.35) 대승불교의 救濟佛陀觀은 이러한 불탑신앙을 근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部派佛敎가 불타의 교법에 초점을 둔 「法中心의 佛敎」내지 「出家中心의 佛敎」라면 대승불교는 그와 달리 救濟佛로서의 불타 그 자체에 역점을 둔 「佛陀中心의 佛敎」내지 「在家中心의 佛敎」라 볼 수 있다. 이러한 救濟佛陀觀과 在家菩薩思想運動의 근거지로서 佛舍利와 佛骨을 봉안한 佛塔이 중시되어 그 佛塔信仰을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諸救濟佛觀 내지 菩薩思想이 전개되었다36)고 한다. 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하층민의 신앙을 고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도 볼수 있다.
대승흥기의 역사적 배경으로서 불교 외적 요인은 힌두이즘(Hinduism)의 형성과 그 사상운동이다. 그들의 唯一神을 바탕으로한 化身思想은 그대로 대승의 佛陀觀과 그 신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37)
대승불교의 종교적 특징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엄격한 계율엄수와 이론적 교리해석에 치중한 부파불교와는 달리, 불타의 大慈悲와 救援에 대한 철저한 신앙과 나아가 누구나 成佛할 수 있다는 신념아래 스스로의 주체적 자각에 의한 菩薩行의 실천을 강조한 점이라 볼 수 있다. 大乘 諸經典의 佛陀觀을 살펴본다.
2) 多佛陀觀
過去佛. 앞에서 설한바와 같이 過去七佛說과 二十四佛說 등이 이미 원시불교에서 대두되었다. 이러한 過去佛思想은 그대로 계승 발전되어 『大毘婆沙論』卷27에 의하면 釋迦菩薩이 三阿僧祗九十一劫의 修行時代에 釋迦牟尼佛을 비롯하여 迦葉佛에 이르기까지 무려 二十數萬의 불타를 親見하였다38)고 하며, 또 『佛本行集經』卷1에 의하면 釋迦菩薩이 과거 修行時代에 親見 奉事한 佛이 數十億에 달한다39)고 한다.
當來佛로서의 彌勒佛. 未來佛思想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原始佛敎時代에 『長阿含經』卷6 『轉輪聖王修行經』등을 통해 미래불로서의 彌勒佛의 출현을 예시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當來佛로서의 彌勒佛思想은 『佛本行集經』卷140), 『六度集經』, 『生經』, 『菩薩本行經』, 『前世三轉經』, 『彌勒菩薩爲女身經(帝釋本生)』 등의 佛傳文學에 의해 더욱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며,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彌勒經典이 산출되면서 본격적으로 彌勒佛信仰이 대두되었다고 본다.41)
이러한 彌勒佛信仰의 중심경전으로서 흔히 彌勒 六部 내지 三部經을 든다. 『佛說彌勒下生成佛經』(『下生經』, 後秦, 鳩摩羅什譯), 『佛說彌勒大成佛經』(『成佛經』, 羅什譯),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上生經』, 劉宋, 沮 京聲譯)의 三經을 중시한다. 미륵신앙에는 彌勒下生信仰과 彌勒上生信仰이 있다.
現在他方佛觀의 出現. 現在他方佛觀이 출현하게 된 이유에는 內因과 外緣이 있다. 內因으로는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불교의 세계관이 확대되어 가고 불타의 絶對化 神秘化됨에 따라 「一界一佛說」의 해석이 다양하게 되었다. 外緣이란 佛敎外的 종교상황으로 힌두교의 唯一神的 民衆信仰運動, 특히 紀元前 2C경에 유행된 바가바드 기타(Bhagavad-g t )등의 비쉬뉴神에 대한 박티(Bhakti)신앙 등에 크게 자극 받아 現在佛觀이 대두되었다고 한다.42) 또 靜谷正雄은 불교 우주관의 확대와 성불을 목표로 하는 다수의 보살 존재 및 佛塔신앙의 佛塔교단을 중심으로한 신앙 활동이 現在他方佛觀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한다.43) 불탑교단의 사람들은 불탑숭배와 성지순례를 통해 그들의 종교적 요구를 달래 왔으나, 佛陀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만족할 수 없게 됨에 자연히 見佛聞法할 수 있는 現在佛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阿 佛, 彌陀佛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 한다.
부파불교시대를 지나 본격적인 현재타방불관이 제기되어 불교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한 것은, 초기대승불교시대에 나타난 東方妙喜國의 阿 (Aksobhya)佛說 내지 西方極樂淨土의 阿彌陀(Amita)佛說이라 볼 수 있다. 물론 『般若經』에도 他土佛說이 나타나고 있으나44) 아직 암시적임에 불과하고, 이 밖에도 『寶綱經』(西晉 竺法護譯)의 六方六佛說,45) 『滅十方冥經』(同譯)의 十方十佛說,46) 또는 『大乘寶月童子問法經』(宋 施護譯) 등이 제기되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대표적인 현재타방불로서는 東方妙喜國의 阿 佛과 西方極樂淨土의 阿彌陀佛 및 琉璃光淨土의 藥師如來등이다.
阿 佛은 동방에 정토를 이루고 있는 佛로서 이곳 閻浮提에서 동방으로 千世界를 지나면 阿毘羅提(Abhirati, 妙喜, 善快, 妙樂)라고 하는 世界가 있어 그는 그곳의 主世佛이라 한다. 그런데 옛날 이 세계에 大目如來라고 하는 佛이 출현하여 설법 시에 一人의 比丘가 大目如來 앞에 나아가 「이제부터 無上正眞道意」를 발하고 원을 일으켜서 一切嗔 를 끊고 淫慾을 끊으며 수행 정진하여 最正覺을 이루리라」는 大誓願을 세워 阿 (Aksobbya, 無着, 無嗔 )의 號를 얻게 되었다 한다. 이를 本經에서는 이때에 菩薩摩訶薩은 일체의 嗔 를 내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阿 이라 한다. 일체의 嗔 를 내지 않으므로 阿 國土에 住한다47)라고 하여, 人間은 물론 일체 금수와 미물에까지 嗔 를 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이러한 無嗔 의 誓願을 세워 무수겁을 통해 온갖 善行과 수행정진 끝에 드디어 성불하여 현재 동방 阿毘羅國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阿 佛의 由來인바 「阿 佛刹善快品」第2에는 아촉여래가 옛날 보살도를 행할 때에 佛道를 닦아 佛刹을 嚴淨하기를 誓願하여 無數人에게 積功累德하고 無上正覺道를 닦음으로써 드디어 그 願대로 佛道를 이루고 妙喜淨土를 이룩하였다48)고 하는 것은 비구자신이 瞋 를 厭惡하여 瞋 가 없는 세계를 大目如來에게 誓願하고 大目如來를 信仰하고, 善行과 修行을 장구한 세월동안 積功累德한 결과 드디어 無上正覺과 더불어 妙喜淨土를 이룩하였다. 成佛한 그는 그 정토로 오기를 원하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瞋 없는 정토에서 안락을 구하여 편안히 살게 하고 있다는 예를 보이는 것이다. 즉, 佛陀觀과 信仰이 正覺과 淨土의 근본이 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極樂淨土의 阿彌陀佛. 『無量壽經』卷上에 의하여 本佛의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무수의 구원 겁전에 錠光如來가 세상에 출현하고 뒤이어 光遠如來등 五十二佛이 차례로 출현하였으며 제54번째로 世自在如來가 출현하였는데, 그 때에 이 세상에 가장 거룩한 國王이 있어 그 佛의 설법을 듣고서 크게 감동되어 마침내 無上菩提心을 발하여 王位를 버리고 출가하게 되니 이름하여 法藏比丘라 하였다. 그는 부처님에게 나아가 出家意志를 告하되 스스로는 일체중생의 구제자로서 最極無上의 불타를 이루고 시방제불토의 훌륭한 것을 모두 갖춘 唯一無比의 嚴淨佛土를 성취할 것을 말씀드리니, 부처님은 이를 칭찬하면서 二百十億이나 되는 諸佛淨土의 眞相과 그 佛土에의 往生因行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는 5겁 동안의 사유를 통해 이 가운데 최선의 淨土와 가장 쉬운 因行을 선택하여 四十八願을 세운 후, 그로부터 兆載永劫을 통해 6바라밀 등 보살도를 닦아 드디어 10겁 이전에 正覺을 이루니 그가 곧 아미타불로서 이곳으로부터 西方으로 10만억국토를 지나 極樂淨土를 건설하여 있다고 한다.49)
法藏비구가 世自在如來를 만나 발심하여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는 無上正覺을 이루어 嚴淨佛土 등 四十八願을 성취하고자 하는 誓願을 世自在如來에게 고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믿고 兆載永劫을 통해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정각을 이루고 극락정토를 건설하여 지금도 극락정토에서 중생구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도 역시 신앙심으로 발심 서원하고 수행을 실천하여 구경에 정각을 이루어 그 서원을 모두 이룩하였다는 현재불관의 예이다. 중생구제 불타관과 신앙이 성불과 극락정토 건설 그리고 중생구제의 근본이 되어 있음을 보이고 있다.
3) 內在佛의 佛陀觀
과거, 현재, 미래의 제불에 대한 통일불로서 모색된 『법화경』의 久遠釋迦佛로서의 불타관은 『화엄경』의 十方遍滿佛로서의 불타관으로 발전하였다. 대승중기에 이르러서는 如來藏系經典 및 『열반경』에 의하여 불타관은 內在佛사상으로 발전한다.
이는 부파불교시의 「心性本淨客塵煩惱說」50) 은 『법화경』의 一佛乘(一切皆成)觀으로 발전하고 이어서 『화엄경』의 心如工畵師觀,51) 心佛及衆生無差別觀,52) 여래의 지혜가 모두 衆生身 中에 구족하여 있다고 보는 관념,53) 등으로 발전하는 동시 『열반경』에서는 一切衆生悉有佛性54) 등의 관념으로 발전하였다. 여래를 우리들 마음 가운데서 찾으려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입장에서의 불타관은 여래장이란 내재불 사상으로 발전하여 온 것이라 본다.
여래장사상은 특정한 학파나 종파는 형성하지 못하였으나55) 그 사상은 『해심밀경』『보살지』『대승장엄경론』『중변분별론』『섭대승론』『불지경』『대승기신론』『능가경』『대일경』『금강정경』『법화경』『화엄경』등에 핵심 혹은 중요한 사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래장사상은 인도 大乘佛敎思想史에 있어서 중관사상 유식사상과 더불어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상을 전파한 것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여래장사상은 유식론과의 교류관계에 따라서 3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56)
그 첫 시기는 유식론과 교류 이전의 여래장사상만이 논하여 진 시기이다. 여기에 속하는 경론은 『如來藏經』『不增不減經』『勝 經』『涅槃經』『大法鼓經』『大集經』『無上依經』『寶性論』『大乘法界無差別論』등이 있다.57) 제일 앞의 세경(『여래장경』『부증불감경』『승만경』)을 如來藏系 三部經이라 일컬어진다.58)
제2기는 여래장사상과 阿賴耶識이 병행되어 설해진 시기로 여기에 속하는 經論은 『大乘莊嚴經論』『攝大乘論釋』『十地經論』『佛性論』등이다.
제3기는 여래장과 아뢰야식이 서로 조화 융합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경론은 『入楞伽經』『大乘密嚴經』『大乘起信論』등이다. 이 경론 등에서는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동일시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불타재세시에는 불타 스스로 "나는 一切의 勝者요, 일체의 智者요, 無上士, 阿羅漢, 等正覺者다"라고 제자들의 現前에서 밝혔다. 그리고 제자들은 보고 듣은 것에 대하여 하등의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보고 듣은 것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랐다.
불멸후에 불제자와 불자들은 불타를 멸한 불타로서가 아니라 현재불로서 절대적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증대하게 되었다. 이에 응하여 불타의 32相과 80種好, 十八不共法, 三世多佛, 現在他方佛 등 불타 중심적인 사고 방식에서 현재불로서 불타 숭배의 신앙심이 강하게 나온 것이다. 현재불로서의 불타 숭배의 신앙심은 知性的이거나 理性的인 사유를 초월한 불타의 보편화 방향으로 절대화되어 가는 불타관으로 정립되어 갔다.
『법화경』이나 『아미타경』을 비롯한 많은 대승경전에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救濟佛로서 신앙하는 불타관과 信行을 중시하는 대승보살사상이 동시에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阿 佛과 阿彌陀佛은 현재불신앙의 대상이다.
여래장과 아뢰야식이 동일시되는 『大乘起信論』의 입장에서는 구제불로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불타관과 信行으로서 佛道 그리고 현재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재불관을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불타관을 정립하고 있다. 이를 衆生卽佛觀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과 과정에서 생긴 『大乘起信論』에 관하여 연구하여 보고자 한다.
III. 衆生心卽佛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중생심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낸다. 大乘의 體인 眞如相을 중생심이 보이고, 마음의 生滅因緣相이 大乘 自體의 相.用을 보인다. 이러한 중생심은 卽佛로서 일체의 世間法과 出世間法을 總攝하고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善因果를 내게 한다. 卽佛로서의 중생심의 작용이 『대승기신론』의 題名, 三身說, 法身, 覺, 序分 등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자 한다.
1. 題名에 보이는 衆生卽佛觀
1) 大乘
원효는 本論의 題名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衆生心觀을 설하고 있다. 그는 大乘의 「大」는 이치에 합당한 법으로 널리 싼다는 뜻이 있다고 표하여 衆生心은 곧 一切世間法과 出世間法을 總攝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대승의「乘」은 실어 나르는 것이 功能이라고 비유함으로서 누구라도 如來地에 도달할 수 있는 방편을 보였다. 그의『기신론소』에 의하면, 大乘을 총체적으로 보면 『虛空藏經』에서 「大乘」은 無量 無邊 無崖하기 때문에 일체에 두루하여 마치 허공이 일체중생을 넓고 크게 수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대승의 총섭의 의미를 강조하고, 또 「乘」은 四攝法을 비롯하여 三十七助道品 등 모든 菩提分法 하나 하나를 바르게 닦아 일체중생을 장애가 없게 하는 지혜의 밝음을 수레로 삼고, 그리고 육바라밀에도 머물지 말고 薩般若에 회향하며, 四聖諦에 無 하여 저 해안에 도달하는 것을 大乘이라고 한다59)라고 하였다.
"「大」는 衆生心法에 널리 감싸서 포섭하는 뜻이 있다"고 하는 「大」는 중생심에 常住하는 진여가 있음을 뜻하고 "「乘」의 의미에는 모든 보리분법을 닦아야 한다"는 것은 수행과 회향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원효는 이어서 『虛空藏經』60)을 인용하여 「大乘」의 의미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닦아 運載를 功으로 하는) 이 「乘」은 모든 붓다가 받아들이는 바고, 성문과 벽지불이 觀하는 바며, 일체 보살이 타(乘)는 바다. 또 帝釋天과, 梵天 그리고 護世四天王이 마땅히 공경배례하는 바인 것이며, 일체중생이 응당 공양하는 바다. 또한 일체 지혜 있는 자가 마땅히 찬탄하는 바인 것이며, 일체 세간이 응당 향하여 돌아가는 바고, 일체 모든 魔들이 파괴할 수 없는 것이며, 일체 외도들이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고, 일체세간이 능히 함께 겨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61)
라고 설한다. 이는 "수행과 회향을 功으로 하는 행자의 공덕"이 곧 佛로서 제석천, 범천, 호세사천왕, 일체중생, 일체 지혜 있는 자 등 人天이 응당 공경배례하고 공양하고 찬탄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하고 한다.
그리고 "일체 세간이 돌아가는 바"라고 하는 것은 수행과 회향을 공으로 하는 「乘」에 의하여서만이 일체중생이 돌아 가야할 바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돌아 가야할 바"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돌아가야 할 근본을 뜻하는 것으로, 바로 우리 모든 불자들의 所願인 「本覺」이다. 本覺은 곧 法身이며 佛이다. 그러므로 모든 하늘과 인간이 공경하고 찬탄하고 공양을 올리는 신앙의 대상이 되며, 法身은 降魔하는 威力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일체 魔들이 파괴할 수 없는 것이며, 일체 외도들이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고, 일체세간이 능히 함께 겨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수행과 회향을 功으로 하는 행자의 공덕"이 바로 佛의 德이라고 하는 것을 「本覺」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또 원효는 "행자의 공덕"을 『對法論』과 『顯揚論』을 들어 설한다. 첫째 『對法論』62)의 七大性은 境大性, 行大性, 智大性, 精進大性, 方便善巧大性, 證得大性, 業大性이다. 이와 같은 보리심을 가지고 수행정진한 사람은 生死際가 다하여 일체의 菩提를 이루어 광대한 모든 佛事를 建立하기 때문에 大乘에 상응한다. 이 7가지중 앞의 5가지가 因이 되어 뒤의 2가지 果를 이룬다63)고 한다. 여기에서도 누구나 "수행과 회향을 功"으로 하는 菩薩道를 실천하는 행자는 필경 證得大性과 業大性을 이루어 佛事에 회향할 것이므로 「大乘」에 상응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둘째 『顯揚論』64)의 大乘의 性品은 菩薩乘의 七大 性品과 모두 상응하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한다. 七大性은 法大性, 發心大性, 勝解大性, 意樂大性, 資糧大性, 時大性, 成滿大性이다.65) 『瑜伽論』66)에 의하면, 앞의 여섯 가지는 成滿大性의 因이고 成滿大性은 果이다. 그리고 成滿大性은 곧 圓證大性이다. 本七大性에서는 보살도를 닦는 바른 법을 일곱 가지로 설하고 있다. 無上正等菩提(圓證大性)를 성취하여야 함을 원효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위의 두 가지 七大性은 그 글자는 같지만 그것을 세운 뜻은 다르다고 원효는 주석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大乘의 性品 즉 "수행과 회향을 功으로 하는 행자"의 性品과 菩薩乘의 七大 性品이 상응함을 나타내고 있다.
원효는 위에서 본『허공장경』에서 菩薩道 혹은 菩提分法으로 四攝法, 十善業, 資糧, 견고하고 청정하고 한결 같은 마음, 禪定, 四無量心, 善知識, 時非時, 無常 苦 空 無我의 說法, 七覺支, 五淨眼, 大悲心, 四正勤, 四念處, 四神足, 五力, 八正道, 智慧, 六婆羅密, 四聖諦 등을 설하고 또 『對法論』의 七大性과 『顯揚論』의 七大性 等이 所乘法이 되어야 모든 중생이 能乘할 수 있는 運載의 功이 成滿하여「대승」이 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로서 원효는 「대승」을 뜻함에 있어 "수행과 회향"을 근본으로 하는 보살도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살도를 수행하는 행자의 공덕이 報身佛로서 衆生卽佛이 되어 중생을 널리 감싸 포섭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能乘할 수 있는 運載의 功能이 성만하게 된다. 그 결과 無上正等菩提를 이루니 법신불과 일치하여 법신 보신 응신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중생을 널리 제도함으로서 天下가 우러러보고 경례하며 숭배하고 찬양하고 공양하는 대상이 될 것이라고 원효는 설하고 있다.
2) 起信
원효는 『大乘起信論』의
「起信」이라고 하는 것은 이 『논』의 글에 의하여 중생이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起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의 「信」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確信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理法이 진실로 있다는 것, 그 理法은 수행하여 증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증득된 理法에는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確信하는 것이다. 그리고 "理法이 진실로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體大롤 믿는 것이다. 體大를 믿는다는 것은 일체 現像法은 그 존재성을 認得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실로 평등한 理法界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理法은 수행하여 증득할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理法에 相大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相大라는 것은 理法이 갖추고 있는 本性의 功德이 중생을 熏習하기 때문에 相大이다. 즉, 相大가 훈습함으로써 중생이 반드시 그 근원으로 돌아갈 수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또 "이 법에 무궁한 공덕의 작용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 법에 用大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用大를 믿는다는 것은 用大에 의지하기만 하면 못할 바가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67)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면 능히 불법에 들어가서 모든 공덕을 낳으며 모든 번뇌의 魔境에서 벗어나 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화엄경』의 다음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68)
믿음은 佛道의 근본이며 공덕의 어머니다.
믿음은 일체 善根을 증장시키고
믿음은 일체 의심과 유혹을 除滅해 버리며
믿음은 無上道를 개발하여 나타낸다.69)
믿음은 능히 모든 魔境을 벗어나게 하여 無上解脫道를 나타내고
믿음의 모든 공덕은 파괴되지 않는 씨가 되어 無上菩提樹를 태어나게 한 다.70)
고 한 것과 같이 믿음이라는 것은 무량한 공덕이 있다. 『대승기신론』에 의하여 발심하는 것이니 따라서 「起信」이라 한다고 원효는 주석하고 있다. 원효는 「화엄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믿음이 無上道를 이루는 근본이 됨을 인식하게 하고, 또 믿음에 의하여 體相用 三大(法身 報身 應身)가 일어남을 나타내 보였다. 믿음은 "理法(法身)이 있음을 믿는다"와 같이 때로는 上向的 의미가 있고, "理法의 공덕(法身)이 중생을 훈습한다"는 것과 같이 때로는 下向的 의미가 있다. 따라서 「믿는다」라는 의미 보다 「믿게 된다」는 신앙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더 흔히 작용하고 있다. 믿는 다는 것은 理法이 갖추고 있는 공덕이 중생을 훈습하여 그에 상응하는 行을 낳게 하므로 그 行은 곧 佛身의 行이 되는 것이다. 즉, 相大가 훈습함으로써 중생이 반드시 그 근원으로 돌아갈 수가 있음을 의식하여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信仰이다. 佛을 信仰함으로서 불을 믿고 佛道를 수행하고 그 공덕을 회향하는 것을 功으로 하는 信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信行은 信仰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위에서 대승은 중생심이고 중생심은 우리와 같은 범부의 마음이라71)고 했다. 이렇게 범부의 마음이 중생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本性이 純粹淸淨하게 되는 自性淸淨心72)(法身)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심에 體相用 三大를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理致的으로 볼 때 法이라고 하고, 原因 또는 뜻으로 의식하여 볼 때 義라고 하며, 자기의 마음에 자성청정심(法身)이 있음을 깨달으면 이는 곧 因인 수행의 결과로 생기는 理解 혹은 智慧이다. 이 지혜가 원효가 의미하는 「起信」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起信」이 되게 하는 智慧는 自性淸淨心卽佛의 用이다.
그러므로 먼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信仰하고 위에서 원효가 제시한 바와 같은 철저한 수행과 회향을 통하여 자신의 순수한 청정심(衆生心)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지혜가 성숙하고, 지혜의 成熟度에 따라 원효가 가르치고자 하는 體相用 三大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게 生하여 수행과 회향이 더욱 增長된다고 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혜의 성숙도에 따라 三大에 대한 믿음이 더욱 生하여 증장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생심에 본래 갖추어진 청정함이 드러나는 정도에 따라 의식하게 된다는 뜻이지 본래 없는 三大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에 이미 각 행자에게 존재하는 衆生卽佛의 用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원효가 여기에서 의미하고자 하는 믿음(信)은 信仰心이라고 해석한다. 중생심이 청정하게 되면 그 智慧力은 무량 무변하여지고 무량 무변한 智慧力은 무량 무변한 信仰心을 낳으니 모든 지혜를 갖춘 信仰心의 힘이 무량 무변하게 된다. 무량무변한 신앙심의 힘은 모든 마군과 외도가 헤아릴 수 없는 四無畏心과 四無量心 等을 示現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智慧力이나 신앙심이 얻어 지는 것은 下向的으로 볼 때에 불타의 本願에 의한 자비한 위신력의 가피를 입은 것이다. 上向的으로 볼 때에는 지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보살도의 실천에서 얻어 지는 것이지만 上向心이 일어나는 것도 자신에게 이미 내재하는 자성청정심의 相大의 작용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앙하고 신행하여 얻는 모든 불타의 가피는 모두 衆生卽佛의 役事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論
원효는 『大乘起信論』의
「論」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了解하고 軌範이 될 수 있는 文言을 건립하고 매우 깊은 法과 相의 도리를 판별하여 설하는 것이다. 이 了解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뜻을 판별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논」이라고 한다.73)
총체적으로 「대승」이 이 논의 宗旨의 體고 「기신」은 이 논의 수승한 공능이다. 이를 합하여 제목을 삼으니 『大乘起信論』이라고 한 것이다.74)
라고 하여 원효는 『大乘起信論』의 題名이 衆生心法에 널리 감싸서 포섭하는 뜻을 종지로 하고, 불교 신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수행하고 회향하여 스스로 이 종지와 합일하는 도리를 판별하여 설하는 것을 제명으로 한다고 주석하였다. 참고로 曇延과 法藏의 제명에 대한 주석을 알아보기로 한다.
曇延은 그의 『大乘起信論義疏』卷上에서,
別義로 三種이 있다. 첫째는 體大의 뜻이다. 이 心眞如의 體는 고루 일체의 법성이 되어, 일체법에 生滅, 染淨의 異相이 있다. 이 眞如는 평등하여 증감이 없는 까닭이다. 이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고루 일체의 법체가 될 수 없다면, 혹은 칭명하여 '小'라고 해야 한다. 이미 능히 모든 법체가 되는 까닭에, '大'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둘째는 相大의 뜻이다. 이 진여의 體의 모든 공덕이 相이 된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이 體는 모든 공덕에 있어서 만일 구족하지 않은 바가 있다면, 稱名하여 '小'라고 해야 한다. 이미 무량의 性功德을 구족하는 까닭에, 또 '大'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셋째로는 用大의 뜻이다. 이 진여의 相은, 능히 世, 出世間의 善因果를 낳는 것을 가지고 用이라 한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因果가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 또한 稱名하여 '小'라고 해야 한다. 이미 일체의 因果는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大'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세 뜻의 大에 의한 까닭에, 慈悲는 이것에 의해서 허공에 가득차고 반야는 이것을 타고서 법계에 두루한다. 大乘의 이름은 이것에서 생기는 것이다.75)
라고 설한다. 「대승」을 주석하는 논리로 "心眞如의 體는 고루 펴져 있는 일체의 법성"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이 사실에 어긋나면 '小'라고 칭명하지만 사실은 體가 두루함으로 '大'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논리로 「大乘」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이유를 해설한다. 「起信」에 관한 해설도 이에 준하여 하고 있다.
法藏은 그의 『大乘起信論義記』卷上에서,
"釋論題目"을 함에 「大」라는 것은 理致의 體를 제목한 것이고 包含의 뜻이 있다. 「乘」이라는 것은 비유이며 運載로서 공덕을 삼는다. 법은 대승이 믿는 경계이다. 그 경계의 體가 義가 된다. 「起信」은 곧 능히 믿을 수 있는 마음이다. 맑고 깨끗함을 그 본성으로 한다. 마음과 경계를 합하여 제목하기 때문에 大乘起信이라 한다. 이것은 곧 대승의 기신이다. 이것은 경계에 대한 분별하는 마음이고 認證하는 것은 아니다. 또 大乘의 信을 일으키는 것도 宗旨에 대하여 특별한 행을 행하는 것이고 小乘의 信은 아니다. 또 「大」라는 것은 義에 나아가 體相用 三大에 不過한 것을 말한다. 「乘」이라는 것은 작용으로 佛性 三位가 운반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自性이 佛性에 머무는 것이 所乘이 되고 佛性을 이끌어 내는 것이 能乘이 된다. 결과을 얻음에 이르는 것은 佛性이 타고 이르는 곳이 된다. 三義의 體用은 오직 一心의 轉變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乘과 大가 가지는 業이라고 해석한다. 또 『雜集論』에 의하여 七種大性이 相應하기 때문에 大乘이라고 한다. … .76)
라고 설한다. 법장은『雜集論』의 七大性을 간략히 설명하고 瑜伽『顯揚論』은 "亦同此說"이라고 하고 그치지만 원효는 『顯揚論』도 『雜集論』에서와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顯揚論』과『雜集論』은 그 세운 뜻이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법장은 믿음에 관한『화엄경』의 게송에서도 "信爲道源功德母"77) 1句만 인용하고 있으나 원효는 믿음의 중요성을 지극히 설명하고 있다. 수행에 있어서도 법장은 원효만큼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신앙과 수행부분을 강조한 원효의 뜻이『대승기신론』을 지은 마명의 뜻에 좀더 부합78)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며, 대승불교사상의 흐름 속에서『대승기신론』과 원효의『起信論疏』와 『大乘起信論別記』는 불타의 가르침을 믿음으로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행이 따르고, 그 행에 의하여 소원을 실제로 성취하게 된다고 설한다. 그리고 믿음이 일어나고, 그 믿음에 의하여 행이 따르는 모든 작용은 곧 중생즉불의 훈습이라고 설함으로서 종교로서의 불교를 확립시키고자 한 점에 그 의의가 있으며, 또한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三身說에 보이는 衆生卽佛觀
이 『논』에서 설하는 一心은 衆生心이고, 衆生心인 "一心에는 動靜의 두 방면이 있다. 그 動的 방면은 곧 생멸문에 있어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으로 곧 相對界이다. 또한 一心의 靜的 방면은 곧 眞如門에 있어서의 마음의 본체이다. 본체도 현상도 함께 일심에 있다."79) 이것은 일심을 떠나서는 本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현상계인 作用도 없다는 것이다.
이 『論』에는 대승Mah y na을 總說(總攝.總持)하고, 이 大乘을 '法'과 '義'로 나눈다. 大乘法은 衆生心을 말하고, 大乘義는 이 衆生心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를 밝히고 있다. 이 중생심은 大乘法의 心眞如相에서 대승의 體를 나타내고,
+---(法)心眞如門 (根本, 大乘의 體, 眞如)-------------------------+
| |
| |
一心法--+ |
(중생심)| |
| +---體大(眞如)---+ +-眞如
| | +-+ |(一心,
+---(義)心生滅門(自性淸淨心)--心生滅因緣相-+--相大(如來藏)--+ | | 佛身)
| | |
+--用大(善因果)--+ | |
| | |
+--------------------------------------------+ | |
| +-----------------------------------+ |
| +----眞如自體相----法身(理智不二)------+
| |
| +--------- 分別事識--------應身--+ |
+----------+ +-----+
+--------- 業識------------報身--+ |
衆生卽佛------+
<表 2> 一心法의 三身佛과 衆生卽佛
또 衆生心은 大乘義의 心生滅因緣相에서 대승의 自體相用을 나타내어 大乘法인 중생심의 뜻을 밝히고 있다.80) 心生滅門에서는 眞如를 自性淸淨心이라고 人格化하여 「自」字를 붙여 심진여문의 體와 구별하여 "眞如自體相"이라고 한다. 이 마음의 體相用 三大義는 佛身論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表로 나타내면 위 표와 같다.
위 표에서 보인 바와 같이 전체적으로 고찰하면, 衆生心의 본질이 佛身이 된다. 제불여래는 중생심의 본질이 眞如이기 때문에, 모든 보살은 이 마음을 타고서 迷界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81) 이와 같은 배경에서 『대승기신론』의 大乘(摩訶衍Mah y na)의 大乘은 「衆生心」이 되고, 法身, 眞如, 本覺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또 이 衆生心은 중생의 마음이라는 意味로 우리와 같은 凡夫의 마음82)이기도 하다. 그리고 大乘이란 衆生心에는 「乘」이란 의미가 있어 一切諸佛이 본래 이 一心에 태워져 있기 때문에 일체 보살이 모두 이 法을 타고 如來地에 도달한다83)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은 범부의 마음인 중생심에 대승이 있으므로 중생심이 卽佛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중생심을 즉불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대승기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佛道를 輕視하였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20년에 日本의 「스즈끼.다이세쯔」(鈴木大拙)가 이미 『기신론』을 英譯하고 주석 하였다. 이에 대한 李箕永의 評을 소개하면, "1929년에 프랑스의 불교학자 「뽈.드미에빌」(Paul Demi ville)은 『大乘起信論』을 「大乘佛敎哲學의 가장 明快한 槪論書」라고 評했고, 이보다 앞서 1920년에 日本의 「스즈끼.다이세쯔」(鈴木大拙)가 이 책을 「大乘에의 믿음의 改發」(Awakening of Faith in the Mah y na)이란 제목으로 英譯했을 때 미국의 철학자 「폴.케이러스」(Paul Carus)는 이러한 간결하고도 중요한 論書가 아직까지 유럽인들에게 紹介되지 않았었다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 위대한 佛敎思想家의 思想에 親熟해지면 질수록 나는 더욱 이 책이 英譯된다는 사실에 感銘을 禁할 길이 없었다」고 述懷했다"84)고 한다. 이러한 論評을 통하여 筆者는 『대승기신론』이 서양에서 成佛을 위하여 수행을 권하는 佛敎書로 인정받기 보다 철학서나 사상서의 일종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기신론』이 이와 같이 비치는 원인을 찾아보고자 Yoshito S. Hakeda가 1967년에 미국 Columbia 대학에서 英譯한 『기신론』을 검토하였다. Hakeda가 英譯할 당시, 그는 미국 Columbia 대학 中國科 日本科 Assistant Professor로 재직중에 있었다. 그가 英譯한 『大乘起信論』題名과 몇 가지 점에서 검토하여 본 결과 그가 『大乘起信論』을 바르게 소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몇 가지를 지적하여 보고자 한다.
Hakeda의 一心과 三大의 해석
Yoshito S. Hakeda85)가 英譯한 『大乘起信論』 『The Awakening of Faith』에서 Hakeda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기신에 관한 표준이 될만한 주석서 가운데 정영사 혜원(523-592)의 것과 한국 스님 원효(617-686)가 쓴 것과 법장(643-712)의 것이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가운데 마지막 것, 법장의 것이 (대승기신론) 본문의 뜻을 바르게 이해함에 있어 최고의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불교에서는 본문 뿐만 아니라 중요한 주석서들도 깊은 연구의 주제로 취급하여 왔다. 따라서 법장의 기신에 대한 것을 많이 논의하고 그에 대한 평가도 하였다.86)
라고 하였다. 즉 Hakeda는 법장의 것을 최고로 확신하고 그것을 주로 참고 하겠다고 하였다. 은정희87)는 일본 『기신론』학자들과 법장에 대하여,
「기신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법장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기신론」을 여래장 연기종설로만 알고 있고 … 「기신론」을 화엄가의 管見으로 본 법장의 여래장 緣起宗說 또한 원효의 판석보다 보편성이 적은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88)
고 진술한바와 같이 일본 학자 Hakeda도 무비판적으로 원효의『起信論疏』와『大乘起信論別記』를 貶下하였다고 본다. 일본 불교 학자 鎌田茂雄은 그의 『大乘起信論講話』에서,
不空眞如의 뜻을 說明한 것으로 法藏이 쓴 『起信論義記』가 있으나 이것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어렵기만 하지 그 참뜻을 理解하기란 불가능하다. 眞實하게 不空眞如를 몸으로 體得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9)
라고 하였다. 鎌田茂雄이 지적 한 바와 같이 법장은 원효가 제시 한 바와 같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을 하여 몸으로 진리(空과 不空眞如)를 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효가 제시한 수행과 信仰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고도 보여 진다. 때문에, 원효의『起信論疏』를 「起信」을 위하여 더 충실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보다 오히려 切下하는 愚를 범하여 「起信」의 방향에서 「如來藏 緣起宗」방향으로 왜곡 시켰다고 본다.
一心과 三大를 설하는 「立義分」에 대한 Hakeda의 英譯의 일부와 그의 주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立義分」을 "Outline"이라고 번역하고 그 내용을,
글을 쓴 이유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다음은 그 개요를 제시하겠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승은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 할 수 있다. 하나는 法이고 다른 하나는 義이다."90)
"法은 "衆生心"이다. 이 마음은 그 자체에 현상세계와 출세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계층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 마음에 의거하여 마하연의 뜻을 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절대적인 면은 마하연의 체를 표현하고, 이 마음의 현상은 마하연 자체의 體相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 "91)
라고 英譯하고 「Mahayana」와 「Mind」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한다.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마하연"이라는 용어는 보통 우리들이 사용하는 대승 대 소승이라는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한다. 이하의 논설에서 곧 바로 할 定義에 의하여 마하연은 '그대로' 혹은 '絶對'를 가르킨다. 그러므로 本論의 제목 '그 大乘에서 起信'은 "그 絶對에서 起信"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대승불교를 소승불교로부터 차별하는 의미로서의 大乘이 아니다."92)
라고 "摩訶衍"을 주석하였다. 이 주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Hakeda가 「마하연, 대승」을 "Absolute絶對"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의 의미는 相對를 초월한 "絶對"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신론 본문에서 "법은 중생심을 말하고 이 마음은 곧 일체세간법과 출세간법을 攝한다"93)고 하고, Hakeda 자신도 이 부분을 "The Principle is "the Mind of the sentient being." This Mind includes in itself all states of being of the phenomenal world and the transcendental world."라고 번역하고 있고, 원효의『起信論疏』에서는 「大乘」의 「大」는 廣苞의 뜻이 되고, 「乘」은 運載의 공능에 비유된다94)고 하였다. 이를 참고해 볼 때에 "마하연"을 "Absolute絶對"라고 번역하거나 주석하게 되면 "마하연"의 뜻으로부터 總攝이라는 뜻을 얻을 수 없으므로 오히려 歪曲되게 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둘째, Hakeda는 위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마하연"이라는 용어는 보통 우리들이 사용하는 대승 대 소승이라는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러므로 대승불교를 소승불교로부터 차별하는 의미로서의 大乘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95)
라고 하였다. Hakeda의 의도는 명확하지 않으나, 본론에서 뜻하고자 하는 것은 Hakeda의 진술과는 반대로 대승과 소승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라고 사려된다. 곧 대승은 중생심이고 이 중생심은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一切를 總攝할 수 있지만 소승법에서는 別體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各體는 각체의 분야밖에 攝할 수 없으므로 총섭할 수 없다96)고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소승법에서는 五蘊 12處 18界에 別體가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대승에서는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別體가 없으므로 五蘊 十二處 十八界에 즉하여 能入所入이 자유자재하다고 대승법에서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 법계에 오직 하나의 體만이 있음이 참이라고 보는 대승이기 때문에 一心이 大乘法이 되고 대승이 중생심이 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셋째, Hakeda는 一心을,
"마음"이라는 용어는 개인의 정신적인 능력으로 사용 되는 것도 아니고 물질에 대조하는 마음으로 사용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마음)은 서론(12쪽을 보라)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법을 상징한다.97)
라고 주석한다. 그러나 12쪽에는 一心 二門을 설명하고 있을 뿐, 형이상학을 정의하는 글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주석은 Hakeda가 『기신론』立義分 중,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卽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98)을 "The principle is the Mind of the sentient being. This Mind includes in itself all states of being of the phenomenal world and the transcendental world."99)라고 英譯하고 이 마음이 "metaphysical principle형이상학적인 법"을 상징한다고 주석한 것이다.
『기신론』을 英譯할 당시 Hakeda는 五蘊 12處 18界에 小乘的인 별체가 있다고 간주하였으므로 "대승"을 소승적인 別體를 초월한 "Absolute"로 보게 되고, 또 그의 소승적인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metaphysical principle형이상학적인 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즉, "마음이 세간 출세간의 모든 법을 통섭한다"고 하는 마명의 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사려된다.
일체를 총섭한다고 하는 대승의 마음을 Metaphysical하게 보면『기신론』에서 "起信"하는「四信」과 四信을 일으키는 「衆生卽佛觀」이 성립될 수 없고, 『마하지관』에서 "一念三千說"과 "一心三觀"100), 『화엄경』에서 "一卽一切 一切卽一", "一念卽是 無量劫 無量遠劫 卽一念" 둥이 모두 형이상학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기신론』에서 설하는 一心을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Hakeda의 "마음"의 개념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형이상학적인 법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의 불교 학자 鎌田茂雄은,
『起信論』은 절대로 形而上學的인 논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종교적인 수행 경험에 의하여 인간 마음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어 보이겠다는 것이다.101)
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 鎌田茂雄은 『기신론』에서 설하는 「起信」을 하기 위하여 『기신론』에서 설하는 종교적인 수행 경험이 절대 필요하다고 권하고 있다. 이는 그 자신이 수행을 하여 체험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확실하게 진술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Hakeda와 같이 스스로 「기신」하여 보지도 못하고 수행하여 체험하여 보지도 못하고 오직 학문으로『기신론』을 이해하려고 하면 "형이상학"적으로밖에 이해될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의식밖에 있는 것을 설하는 『기신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신론』에서 설하는 佛道(分別發趣道相과 修行信心分)를 직접 닦아 체험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들의 의식밖에 있는 眞如를 認知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넷째, Hakeda는 本論의 구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五分 中 "the last two subjects(修行信心分과 勸修利益分) present almost no difficulty at all."102)이라고 하였다. 그가 『기신론』의 「해석분」을 읽고 『기신론』에서 원래 목적한 바대로 그 뜻을 이해하였다면 修行하여 信心이 일어나 「修行信心分」의 글대로 수행을 하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전혀 하여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진술할 수 있었다고 사려된다. 그리고 참되게 수행을 하였다면, 그가 안고 있었던 많은 문제들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修行信心分」은 본래 수행법을 실천하여 「해석분」의 참뜻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3)
다섯째, 本論의 題名 『大乘起信論』을 번역함에 있어 Hakeda는「論 」字를 번역에서 除하고 있다. 除할 수 있을 정도로 「논」字의 의미가 없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논」자는 원효의 주석104)에 의하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며 또 "'起信'이라고 하는 것은 이 『논』의 글에 의하여 중생의 믿음이 일어나게 하기 때문에 '起信'이라고 한다"105)라고 하여 '論'과 '起信'과의 不離관계를 설하고 있다. 전통적인 뜻으로도 「논」은 경율론 삼장의 일부이고, 또 삼보중 법보로 崇仰하므로 본론에서도 『기신론』을 비방하면 삼보의 종자를 단절하므로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죄의 과보를 받을 것이요 일체보살이 이 법대로 수행하면 佛智에 들어감이 마치 일체여래가 다 이 법에 의하여 열반을 얻음과 같다106)라고 하여 본론이 삼보에 속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을 題名 번역에서 탈락한 점은 무리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여섯째, Hakeda는 본서의 제목,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는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Absolute"라고 이해하여야 한다107)고 했다. 사실 『大乘起信論』이라는 題號는 본론 전체의 내용을 集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또 전체 내용의 看板이라고도 볼 수 있음으로 주의를 끌게 된다. 내용의 집약과 간판이라는 관점에서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Absolute"를 한글로 번역하면, "절대에서 믿음을 깨우친다"가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라고 읽을 때에 'It's a good English라는 느낌을 주지만 본론의 내용을 집약한 간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제약적이고 고정적이고 그리고 『大乘起信論』이라고 읽을 때의 語感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어색한 기분을 준다. 이러한 기분을 주는 원인을 심사하여 본 결과 ① 관사 'the'가 Awakening과 Mahayana 앞에 있어 가장 자유자재한 "Mahayana"108)와 "Awakening"를 어떤 고정 관념이나 틀에 구속한 느낌을 준다.
② 관사 'the'가 Faith 앞에 없으므로 Faith가 不定하여 開放적인 느낌을 주지만 실은 『기신론』에서 "信"은 四信이라고 定義 하고 있다. 『기신론』에서 "正信"109)만이 "佛種을 不斷"한다고 확실히 밝혔고, 또 『논』전체가 『기신론』에서 의미하는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믿음을 증장 시킬 수 있으며, 그 믿음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으며, 그 믿음으로 어떠한 이익이 있는가 등을 상세히 그리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110) Faith 앞에는 관사 "the"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③ 전치사 'in'을 "Mahayana" 앞에 둔 것은 대승을 "the Absolute"라는 뜻으로 고정하였기 때문에 전치사 "in"를 택하게 되었다고 생각 된다.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에서, "謂一心 二門 三大 四信 五行等法 此卽是大乘之中起信之法"111)이라고 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本論 전체에서 "in the Mahayana"의 의미로 사용한 예를 찾아 볼수 없다. "Mahayana"가 사용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起大乘正信"112), "有法能起摩訶衍信根"113), "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114), "如是摩訶衍諸佛秘藏我已總說"115), "入大乘道"116) 등이다. 本論에서 "摩訶衍"이 주로 사용되는 예는 '대승이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와 '대승에게 (중생이 대승에 대해) 믿음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따라서 주로 사용되는 부사는 '의' '이' '에게'이다. 이 가운데 꼭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本論의 지배적인 내용상 「대승」을 주체로 하는 '대승이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일어키다 이다.
그러므로 『大乘起信論』을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 y na" 혹은 "the Awakening of Faith"로 번역하여 『기신론』을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전파하는 것은 마명과 원효의 뜻을 왜곡하게 하는 원인 제공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예를 참고하여 볼 때 위와 같은 원효의 「大乘」의 乘에 대한 주석과 「기신」에 대한 주석의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 眞如自體相으로서의 衆生卽佛觀
眞如自體相을 自體大와 相大로 일단 나누어 自體를 理, 相을 智에 배대하여 설명하지만 理智는 不二관계에 있다고 설하고 합하여 法身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의 법신은 理와 智를 兼備하고 있다.
眞如自體는 일체의 言語名相과 思慮分別을 넘어선 平等一相으로서 凡夫에게나 聲聞 緣覺 菩薩의 三乘에게나 諸佛에게 하등의 增減(差別)이 없으며, 過去 現在 未來의 三世를 통해서 하등의 生滅이 없는, 곧 永遠不滅하고 普遍平等한 無限絶對의 體性(體大)인 것이다.117) 그러나 이러한 진여 자체에는 일체의 無限性功德이 本具되어 있어서 大智慧光明 等 不思議한 性德이 常恒不絶하므로 이를 相大라 한다.118) 이와 같은 眞如自體相(體大와 相大)을 因位에서는 如來藏이라 부르고 果位에서는 如來法身119)이라 하는 것이다.120) 이와 같이 범부에게도 眞如自體相이 本具되어 있으므로 過去 現在 未來의 三世를 통해서 하등의 生滅이 없고, 永遠不滅하고, 普遍平等한 無限絶對의 體性(體大)이 있다. 이 體性이 곧 범부에게 내재하고 있는 佛이므로 이치적으로 이름하면 法身이고 인격화 하면 衆生卽佛이다.
이와 같이 眞如自體相을 法身이라 보는 『大乘起信論』의 입장에서 볼 때 體大는 法身의 本質로서의 理法身을 말하고 相大는 법신이 本具한 無漏性功德121)으로서 智法身을 뜻한다. 진여자체상을 구족한 이 마음이 불타를 實現 하였을 때는 진여의 德相이 모두 顯現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義를 해설하는 것은 불타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불타가 존재하는 방편을 설명하는 體相用이기 때문에 體大, 相大, 用大라고 「大」자를 붙인다122)고 한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은 중생에게 내재한 불타의 존재와 그 작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생즉불관을 세우고 있다고 보여 진다.
『대승기신론』「해석분」에서는 이와 같은 體大와 相大를 합하여 理智不二의 法身을 밝혔다.123) 이와 같이 이 진여법신은 처음부터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 공덕을 본 「해석분」에서는 육종의 공덕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①大智慧光明義 ②遍照法界義 ③眞實識知義 ④自性淸淨心義 ⑤常樂我淨義 ⑥淸凉不變自在義124)이다. 이 六義는 相大를 나타낸다. 相大는 지혜와 지혜의 작용을 나타낸다. 즉, ①大智慧光明은 본각의 義이고, ②遍照法界는 大智慧光明이 법계를 두루 비추이는 義이다. 즉, 법계에 고루 미쳐서 모든 법을 명확하게 하므로, 우주의 일체의 존재가 붓다의 一切智에 의하여 開顯된다. ③眞實識知는 諸法의 理解가 진리와 완전히 합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④自性淸淨心: 相大에는 붓다의 지혜가 있는 동시에 純粹淸淨, 善의 성질을 가진 마음이 있다. 이것이 自性淸淨心이라는 義이다. ⑤常樂我淨: 그리고 또 자성청정심은 常樂我淨의 성질을 구비하고 있다는 義이다.
이 常樂我淨은 『勝 經』에서 여래장의 성질로 설명하고 있고 『열반경』에서는 佛性의 성질 혹은 涅槃四德으로 설명한다. 이 자성청정은 여래장과 같으므로 『기신론』에서 수용하고 있다. 迷한 셰계가 無明의 妄染에 의해 無常하므로 苦이고, 無我, 無淨한 것에 비하여 진여는 常樂我淨의 德을 구비하고 있다. 더욱이 이 德은 변하지 않는 性德이라고 한다. 그러나 凡夫는 迷한 현실에서 常住, 樂, 我, 淸淨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誤謬를 주장하는 것이 常樂我淨說이다. 따라서 불교는 原始佛敎 시대부터 無常 苦 無我를 설하여 常樂我淨을 표면에서 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승만경』과 『열반경』에서, 더욱이 『기신론』에 와서 大乘의 空思想과 中道思想을 근거로 하여 常樂我淨이 설하여 졌다. 원시불교에서 「諸行無常」을 설하지만 涅槃寂靜, 즉 常住하는 세계도 있고 最高의 樂이 있다는 것은 『法句經』등에 간혹 설하여 지고 있다. 그러므로 원시불교에서도 無常 苦의 현실의 세계의 彼岸에 常住 安樂의 열반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기신론』이 열반에 든 불타에게 常樂我淨의 性德이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은 원시불교의 사상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⑥淸凉不變自在는 진여에는 번뇌의 熱惱가 없으므로 淸凉이라고 하며, 생멸이 없으므로 불변이라고 하고, 번뇌에 繫縛되어 있지 않음으로 自在라고 한다는 義이다. 이상의 六義는 相大의 내용125)이므로, 이것에 의해서 『기신론』에서 설하는 「붓다의 법신」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진여는 청량하고 불생불멸하며 자재한 중생즉불임을 알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서 體大와 相大를 합하여 설하는 것은 眞如와 智慧, 즉 진여의 본성이 智慧인 것은 自性淸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 理와 智를 나누면 理에는 智가 반드시 속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있지만 진여와 지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진여에서 無明이 제하여지면 진여의 본성인 지혜가 자연히 顯現해 진다. 그러나 진여에서 지혜를 分離할 수는 없다. 진여의 自體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相大가 항하강의 모래알 보다 많은 六義의 性德을 갖추고 있는데 이 무한한 성덕이 진여의 體를 여의지 않으므로 不離이고, 無始로부터 상속이 계속되므로 不斷이며, 體와 같은 맛(味)이므로 不異이고, 항하강의 모래알 수 보다 많은 뜻(義)이 있기 때문에 不思議 하며, 오직 붓다만이 모두 通達할 수 있으므로 佛法이라고 한다.126)
혹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성덕이 없었다면 여래가 이것을 증득하여 덕을 구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여에 이와 같은 만덕이 원만하여 조금도 缺如됨이 없다는 것이 명확하다. 이와 같기 때문에 진여로부터 여래가 생겨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萬德이 顯現할 때 眞體가 그 의지하는 바가 되는 점에서 「法身」이라고 한다.127)
그런데 일반적으로 여래장이라고 하면 「在纏位의 法身」를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여 범부에게 있는 번뇌에 계박되어 있는 법신을 뜻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승만경』의 설이다. 여래장에는 이러한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體大 相大를 가리키는 여래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진여가 여래를 낳았다(生)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128)
李箕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여의 相을 六義로 표현한 마명은 진여의 相을 세속적 경험적인 의미의 덕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超越的인 第一義的인 의미의 德性으로 보는 것이다. 마명이 보는 진여의 相은 「眞如自體의 相」이므로 「報身」과 같이 인간적 조건하에서 도달될 수 있는 열반의 樣相을 相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129)
라고 한다. 인간적 조건이란 곧 不覺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不覺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나서 경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니 이름하여 無明의 상태에 있다는 조건이다. 無明이 있는 한 寂靜이 아니며 性功德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일어남이 있어서 다른 경계를 분별하여 구하여야 할 것이 있음을 본다면, 佛法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非異非一한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을 만족하여서 단절함이 없기 때문에 진여를 설하되 여래장이라 이름하고 또한 다시 이름하여 여래의 법신이라 한다.130)
원효는 『논』에서 眞如의 相大의 無漏性功德을 개별적으로 나타낸 것은 "먼저 차별은 있지만 眞如와 功德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진여와 무루성공덕이 평등하여 둘이 없으면서도 차별되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131)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신론』에서의 眞如 法身이란 바로 眞如自體相을 가리킨 것으로서 그 법신을 言語道斷의 體, 곧 離言眞如와 無量性功德藏으로서의 相의 면, 곧 依言眞如의 두가지 측면으로 밝히고 있다. 本論에서 말하는 如實空과 如實不空도 바로 진여법신의 이러한 兩面을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기신론』에서는 철두철미 理智不二의 法身觀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 법신관은 곧 중생즉불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法身과 色과 心의 관계를 더 宣明하게 밝히고 있다. "法身은 色의 實體이기 때문에 능히 여러 가지의 色을 나타낸다. 이른바 원래부터 지금까지 色과 心은 둘이 아니고, 色의 본성이 바로 마음의 本性이기에 설하되, 智身이라 이름한다. 마음의 본성이 바로 色의 自性이기에 설하여 法身이라 이름한다. 法身에 의하여 일체 여래의 나타내는 바 色身은 모든 곳에 두루 다하여 間斷됨이 없는 것이다"132)라고 하므로 法身, 色의 本性, 마음의 本性, 智身 등은 모두 法身을 의미함을 알 수 있고, 色의 本體나 마음의 본성은 법신으로서 一切處에 두루하고 간단이 없다고 한다. 이 마음은 곧 중생의 마음이다. 중생의 마음의 本性은 法身으로서 一切處에 두루하고 간단히 없으므로 衆生卽佛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眞如用大로서의 衆生卽佛觀
이와 같은 眞如自體相으로서의 法身이 본래 중생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건만 아직 본래의 淸淨自性에 투철하지 못한 凡夫중생으로서는 그 眞如法身을 보지 못하고 不覺迷妄에 떨어져 있으므로, 여기에 진여의 無限業用에 의하여 報身과 應身 등 衆生敎化를 위한 諸佛의 작용이 나타난다.
應身은 分別事識에 의한 것으로서 범부나 이승의 마음이 보고 듣는 佛身이다. 分別事識이라고 하는 것은 意識(六識)을 말하는 것133)으로 外界가 보는 바대로 존재한다고 認識하는 작용이다.134) 凡夫의 일상적인 인식작용이다. 이 分別事識에 의하여 자기의 인식내용을 결정하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佛을 應身佛이라고 한다. 이러한 凡夫 중생은 唯識의 理致를 조금도 모르는 까닭에135) 자기가 인식한 대상이 마음의 深層의 작용인 轉識이 나타난 것인 줄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136) 그래서 물질세계에 대한 차별을 취하기 때문에 참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137)
물질세계에 대한 차별을 취한다는 것은 외계에 보는 바대로 사물이 존재한다고 분별사식(六識)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분별사식의 인식은 32相 80種好를 갖춘 應身佛이 외계에서 자기에게 와서 加被를 준다고 믿는 것이다.138) 이것은 자기의 주관적인 인식작용에 의하여 불타가 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139) 그 불타에 의하여 자기가 引導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범부 二乘이 보는 것에는 分齊의 色이 있지만 사실은 分齊의 相을 떠나야 함140)을 깨닫지 못하여 "色의 分齊를 취하여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41)라고 말한 것이다. 이 『대승기신론』중에서는 六道의 차별의 相이 있는 것으로 아는 범부와 二乘이 보고 느끼는 불타를 應身이라 하고 十解 이상의 보살이 보는 分齊를 여읜상을 報身이라고 한다.142)
이와 같은 報身은 業識에 의하여 보여지는 佛陀이다. 業識은 業으로 말미암은 無明이 일심에 동하여 생기는 가장 미세한 식이다. 거기에는 아직 轉識과 現識이라고 하는 主客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이 分化 이전의 業識에서 경험하는 식이다. 더욱이 業識은 과거의 業에 의하여 色이 붙어 있는 인식이다.143) 이와 같이 깊은 深層에 있는 佛身을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 보살이다.144)
十解에서 菩薩盡地까지의 보살은 완전히 唯心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145) 자기가 보는 것은 唯識의 所現이라고 통달하고 있기 때문에 轉識과 現識이 작용하기 以前에 業識에 의하여 佛身를 보는 것이다.146) 唯識의 도리를 아는 이 보살은 바로 色分齊가 無分齊임을 아는 것이다.147) 無色分齊인고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 가(邊)가 없고, 毁損되지도 않고 損失되지도 않는 것이다.148)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은 모두 보살의 육바라밀의 깊은 수행의 공덕으로 이루어 진 熏習과, 또 진여의 불가사의한 熏習이 성취하는 바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이름하여 「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살은 "무량한 樂의 相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報身이라고 한다"149)고 한다.
원효는 위와 같이 논하는 응신과 보신에 관하여 경전과 논전에 따라 異說이 있음을 설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150) 『同性經』에서는 "더러운 穢土에서의 成佛을 이름하여 化身이라고 하고, 깨끗한 淨土에서의 成佛을 이름하여 報身이라 한다"151)라고 하고, 『金鼓經』에서는 "三十二相과 八十種好의 相을 이름하여 應身이라 하고, 六道의 相을 따라서 나타내시는 몸을 이름하여 化身이라고 한다"152)고 설하고 있다.『攝論』의 설에 의하면 "十地이전에 보는 바를 變化身이라 이름하고, 十地 이상에서 보는 바는 受用身이라 이름한다"153)고 설한다. 이와 같이 經論에 따라 차이가 있는 까닭은 法門의 분야가 무량하여 오직 하나의 길만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施設되어지는 것에 따라서, 모두가 다 道理가 있는 것이다.154)
故로 十解 이상 十地이하의 三賢菩薩에 대하여,『攝論』속에서 說한 十地 以前의 散心의 경계에서 보는 바는 分齊의 相이 아직 있기 때문에 化身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 『기신논』에서 밝힌, 이 보살의 三昧의 경계에서 보는 바는 分齊의 相을 떠났기 때문에 報身에 속한다고 한다. 이 道理로 말미암아서 經論에서 설하는 바가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간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155)라고 한다. 원효는 이와 같이 각기 다른 經論의 異說을 會通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또 원효는 『기신론』상의 報身中에 三賢菩薩과 十地菩薩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삼현보살은 我空(人空)법문에 통달하여 진여의 이치를 깨달았지만 이것은 相似解에 불과하다.156) 그러나 地上菩薩은 淸淨心을 증득한 보살이다. 청정심을 증득한 보살은 모든 業識을 떠났기 때문에 아무른 相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業識에 의하여 轉相과 現相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業識을 여의면 轉相과 現相은 그 근원을 여의게 되어 業識과 더불어 소멸된다. 그러므로 아무런 상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157)라고 원효는 설명한다.
『新譯大乘起信論』에서는 初地에서 十地에 이르기까지 業識이 점차 소멸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淨心菩薩은 初地에서 미세한 작용을 보지만 점차 더욱 수승하게 되어 보살의 究竟의 境地 속에서는 미세한 것을 보는 일이 바야흐로 없어진다. 이 미세한 것이 보일 때의 작용이 受用身인 것이다. 業識이 있으므로서 受用身을 보지만, 만일 業識을 여의면 바로 보여짐이 없는 것이다. 일체의 여래는 모두가 法身으로서 피차의 차별적 色相을 서로간에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58)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살은 "능히 맡을 수 있는 바에 따라서 또 원하고 좋아 하는 바에 따라서 무량한 受用身과 무량한 莊嚴土를 보며 각각 차별되지만 서로간에 障 하는 일이 없고, 단절도 없는 것이다"159)라고 하여 초지보살은 차례로 정진하여 第十地에 이르게 됨에 따라 業識은 점점 미세하여 져, 보살 究竟地인 金剛喩定에 이르러 究極의 法身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究極의 法身을 본다는 뜻은 菩薩盡地에서 業識이 완전히 消滅되어 心源에 돌아와 佛을 이루어 보는 물건도 보여지는 물건도 없는 평등한 진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러心이 受用身(報身)이 되었을 때(多佛) 受用身과 所住處가 각각 다르지만 서로 장애됨이 없고 단절함이 없는 이치(多佛卽一佛)는 진여의 자유자재한 작용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應身은 범부와 이승의 轉識인 분별사식이 보고 듣는 佛身이기 때문에 참된 佛身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는 또한 범부와 이승의 眞如用大의 훈습에 의하여 작용하는 衆生卽佛의 用이다. 그러므로 이는 衆生卽佛의 은밀한 用이라고 할 수 있다.
報身은 分齊의 相을 여읜 業識에 의하여 보여지는 衆生卽佛이다. 그러므로 응신과 보신의 차별은 수행 계위상의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分齊의 相을 분별하는 轉識의 분별사식으로 佛身을 보고 듣는 수행 계위와 轉識과 現識이 分化하기 이전의 業識에서 佛身을 경험하는 수행 계위와는 분명한 수행상의 발전 단계가 있다. 그러나 衆生卽佛의 작용의 면에서는 차별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에 관한 慧遠의『大乘起信論義疏』와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의 견해를 참고 하고자 한다.
慧遠의『大乘起信論義疏』에서는,
業識을 第七識이라고 하고 初發意는 地前菩薩이며 地前菩薩의 所住依果(果報)는 곧 蓮華藏世界다160)
고 한다. 法藏의『大乘起信論義記』』에서 묻기를,
佛身이 어찌하여 오직 중생의 마음이냐. 답하기를, 중생의 眞心과 모든 붓다의 體는 평등하여 둘이 아니다. 다만 중생이 본래부터 眞理에 迷惑하여 妄念을 일어킨다. 이 때 진여는 단지 染相을 나타내고 진여의 작용을 나타내지 않는다.161)
그 本覺이 妄心을 안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세속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함이 있다. 厭求가 있기 때문에 진여의 작용이 나타난다. 厭求가 劣等하기 때문에 작용이 相과 相卽하고, 厭求가 점점 增長함에 진여의 작용은 점점 微細하여 진다. 이와 같이 점점 心源에 이르러 無明이 다하여져 厭求가 모두 쉬게된다.162)
始覺이 本覺과 같아서 진여의 작용이 體로 되돌아와 평등하여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163)
"만약에 이 뜻에 의거하여 중생의 自心 가운데 진여의 작용이 있다면 어떻게 하여 佛의 報身과 化身을 설하는가."164) 답하여 이르데, 중생의 眞心이 곧 모든 붓다의 體요 더욱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165)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만약에 어떤 사람이 三世의 일체 붓다를 알고자 하면 응당 이와 같이 마음이 모든 여래를 짓는다고 관할 것이다.166)
또 『부증불감경』에서 이르데 법신이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법신이다. 법신과 중생의 뜻이 하나이나 이름하여 다르다167)고 한다. 이미 法身을 따라 보신과 화신의 작용이 일어나니 어찌 중생의 眞心이 아니랴.168)
뜻은 그렇지만 중생심이 붓다로 돌아와 스스로 중생을 교화한다면 어찌하여 붓다의 자비한 원력이라고 설하는가.169) 답하여 이르데, 이 眞心은 붓다의 자비한 願이다. 이른바 無緣大悲와 중생심의 自體는 장애가 없는 붓다의 원으로서 곧 性起의 大作用이다.170)
묻기를, 중생이 이미 무시이래로 마음이 있다면 어찌하여 일찍이 化身의 작용이 일어나 無明을 滅하지 않았는가.171) 답하여 이르데, 세속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72)
묻기를, 원래 본각이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일찍이 훈습하여 세속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지 않았는가.173) 답하여 이르데 무명이 두텁고 얕음이 같지 않고 인연을 서로 갖추지 못함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174)
라고 한다. "법신이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법신이다."라고 설한 것은 곧 중생즉불관을 설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法身을 따라 보신과 화신의 작용이 일어나니 어찌 중생의 眞心이 아니랴."고 설한 것도 역시 중생즉불관이다. 진여법신 중생심의 본질인 眞心이 모두 같은 이치를 밝히고, 또 현실적으로 다른 원인은 중생심에 무명의 厚薄이 같지 않고 인연의 互闕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상의 『대승기신론』의 설에 의하면 應身과 報身은 本覺인 眞心의 작용이 중생의 業識에 의한 妄心에 나타나는 佛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응신 보신의 佛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實在로 존재하는 것은 眞如의 妙用뿐이다. 그러므로 "用大는 自心의 가운데 진여의 작용이라고 하고 이것을 報身과 應身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중생의 眞心이 곧 諸佛의 體다"고 한 것은 중생의 眞心과 諸佛의 體는 平等無二한 것이라는 뜻으로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다. 그리고 報身과 應身은 衆生卽佛인 진여가 수행자의 수행 정도에 따라 나타는 차별이므로 世俗諦이다. 世俗諦라고 하는 것은 報身과 應身은 第一義諦에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실재하는 것은 法身뿐이라는 의미이다. 법신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생즉불이다.
『起信論』의 불타관의 특색은 體大와 相大를 합하여 法身이라고 하고, 用大에서 應身과 報身으로 나누어 三身을 중생즉불관으로 설명하는 점이다. 法身에 體大와 相大를 합하는 것은 「理智不二」로 보는 佛身論이다. 즉, 여래 법신의 본질은 진여이며, 진여에 佛智가 있고 진여와 佛智와는 不二 관계로 內屬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眞如에 無漏의 性功德이 구족하여 있고 이는 곧 중생심에 있으므로 衆生卽佛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론에서는 眞如法身을 三身 가운데 第1身으로 볼 뿐 아니라 三身의 基本으로 봄과 동시에, 나아가 成道의 주체 또는 완성된 佛陀如來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총괄적인 法身이라고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眞如法身이란 본래 무차별 평등하며 무량성 공덕이 충만한 진여자체상으로서의 一心, 즉 衆生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므로 衆生卽佛임은 제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行者가 色의 分齊를 여의기 시작하는 三賢位에서 行者의 수행이 성숙하여 報身이 되는 것은 중생즉불의 용이 보다 성숙하게 드러난 것이다.
行者에게 色의 分齊가 있을 때는 分別事識이 작용하는 것이고 분별사식은 現識에 의한 智識의 작용이다. 현식은 六塵의 경계가 實在한다고 보이게 하여 탐욕을 일으키게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迷路에 빠져 윤회의 세계에 流轉하게 한다. 그리고 現識은 轉識에 의한 것이고, 轉識은 業識에 의한 것이며, 業識은
+------- 體大--+---------------------------+------如來法身----+
| | +----大智慧光明----+ | |
| | +----遍照法界------+ | |
| | +----眞實識知------+ | |
+------- 相大--+---+ +----+ |
義-----+ +----自性淸淨心----+ +----衆生
| +----常樂我淨------+ | 卽佛
| +----淸凉不變自在--+ |
| +--------- 應身-----------(分別事識)-------+
+------- 用大------+ +--劣---(三賢位菩薩)-----+
+--報身---(業識)--+ |
+--勝---(法身佛)---------+
<表 3> 三大의 組織과 衆生卽佛
무명에 의한 것이며, 무명은 과거세에 지은 業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色의 分齊가 있다고 보는 것은 무명의 훈습의 소산이고, 色의 분제를 여의는 것은 眞如熏習의 소산이다. 그리고 진여훈습의 작용은 진여의 본성이 智慧인 것은 自性淸淨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은 體大와 相大가 非一非異하게 진여에 合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法身이라고 하고 法身은 중생심에 내재함으로 법신에 의한 모든 작용은 衆生卽佛의 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신론』의 三大의 組織과 衆生卽佛과의 관계는 위 표와 같다.
3. 淨法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迷路에 있는 중생은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끊임없이 六塵에 끄달려 고통받는 윤회의 세계에 유전하여 삼악도에 빠지기도 하고 衆生卽佛의 훈습을 받아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인 일심의 근원으로 환멸하기도 하고 응신불 혹은 보신불이 되기도 한다.
먼저 熏習의 定義를 『대승기신론』과 疏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熏習이란 마치 세간의 의복이 실제로는 香氣가 없지마는 사람이 香으로 계속 반복하여 옷에 작용하면 옷에 香氣가 생기는 것을 훈습이라한다. 이와같이 眞如淨法에는 실로 染이 없지만 다만 無明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眞如에 染相이 있으며, 無明染法에는 실로 淨業이 없으나 다만 眞如로 熏習하기 때문에 無明에 淨法이 있게 된다. 이것을 淨用이라고 한다.175)
고 한다. 즉 세간에서 입는 의복에는 실제로는 향냄새가 없지만 의복에 향을 훈습하면 의복에 향기가 젖게 된다. 진여와 무명의 관계도 이와 같다. 眞如는 純粹淸淨한 本來平等一味이다. 一相이 되면 無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된다. 이 진여의 淨法에는 실제로는 染相은 없다. 그러나 무명을 가지고 진여에 훈습하면 染이 없는 진여에 染相이 나타난다. 본래 一相이였던 진여에 차별상이 나타난다. 이 차별상이 染相이다. 差別相은 상대적이라 상대적 善과 상대적 惡을 포함한다. 이것이 차별상이 染相이 되는 이유이다.
원효는 眞如正法은 本覺의 뜻이고 無明染法은 不覺의 뜻이라고 하고 하나의 識이 이 두 가지(本覺과 不覺) 뜻을 포함하기에 서로가 훈습하여서 두루 다 빠짐없이 染淨을 낳는다.176)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고, 진여가 무명을 훈습한다는 것은 生滅門 안의 性淨本覺을 설하여서 眞如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에 훈습의 뜻이 있는 것이지 眞如門 속의 眞如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진여문 속에서는 能生의 뜻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라177)고 원효는 설명한다.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세간의 의복을 染淨의 法體에 비유하고 실제로 향이 없다는 것은 行用에 비유한 것이라"178)고 한다. 혜원이 "衣服者喩染淨法體也"라고 한 것은 '의복은 染淨이 작용하는 의지처에 비유한 것이다'라는 정도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도 읽을 수 있겠지만 "染淨法體"라고 하는 용어 자체는 『기신론』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신론』에서는 淨法에는 體가 있으므로 영원하며 間斷이 없지만 染法에는 體가 없으므로 소멸될 수 있는 대상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하여 원효는 "依眞如法有無明者是顯能熏所熏之體也"179)라고 밝히고 있다. 이점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大乘起信論義記』』에서 현수는 "妄法에는 體가 없다"180)고 하고 "本覺은 안으로 不覺을 훈습하여 生死를 싫어하고 涅槃을 구함을 성취하게 한다"181)고 한다. 그리고 佛性의 "佛은 覺이요 性은 本이므로 佛性이 곧 本覺이다"182)라고 설명 한다.
이상으로서, 眞如의 淨法은 그 自相이 染汚가 아니지만 무명이 훈습하기 때문에 바로 染相이 있게 된다. 그리고 無明의 染法은 참으로 淨業이 없는데 진여가 훈습하기 때문에 淨用이 있다. 진여가 훈습하는 것은 本覺이 厭求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本覺이 존재하는 것은 佛性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厭求를 일으키는 마음을 認知할 때, 그 行者에게 本覺의 淨用이 있음을 나타 내 보인 것이다. 그러나 厭求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행자 자신은 厭求하는 마음이 불타의 작용임을 알지 못하지만 실은 佛의 淨用인 것이다.
佛性의 "佛은 覺이요 性은 本이므로 佛性이 곧 本覺이다"라고 하는 것은 중생에게 있는 佛性이 곧 本覺이라는 뜻이므로 衆生卽佛이고 佛의 淨用은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정법훈습. 輪廻苦에 流轉하는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여 열반의 세계인 일심의 근원에 還歸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대답을 淨法熏習에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법훈습이 곧 衆生卽佛의 用이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무엇이 훈습하여 정법을 일으켜 끊기지 않는 것인가. 이른바 진여법이 있어 능히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다.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써 곧 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이 妄心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自性을 믿어서183) 마음이 妄靈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184) 무명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이리하여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185) 여러 가지 方便으로 隨順行을 일으켜 取著하지도 아니하고 妄念을 일으키지도 아니하며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으로186)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無明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境界가 따라서 멸한다. 因과 緣이 다 멸하기 때문에 心相이 다 없어지니, 이를 涅槃을 얻어187) 自然業188)을 이룬다고 말한다.189)
이 부분의 『신역대승기신론』을 보기로 한다.
무엇이 淨法을 훈습하여 끊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기 때문이며, 훈습의 인연의 힘 때문에 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苦를 싫어하고 열반의 樂을 구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망심의 厭求하는 인연으로서 또한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바로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의 法이 있으며 그 본성이 청청함을 믿고, 일체의 경계가 다만 마음의 妄動인 것일 뿐으로 畢竟은 없는 것임을 안다. 능히 이와 같은 것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遠離法을 수행하고, 가지가지로 여러 隨順行을 일으켜서, 분별하는 바가 없이 取著하는 바도 없어서, 무량한 아승지겁을 수행하여온 慣習의 힘 때문에 무명이 바로 滅하는 것이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心相이 일어나지 않으며,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의 相이 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染因과 染緣 및 染果인 心相이, 모두가 다 멸하는 것을, 열반을 얻어 가지가지의 자유자재한 業用을 성취함을 얻었다고 이름한다.190)
고 한다.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淨法熏習을 菩薩道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淨法熏習에 眞如熏習과 妄心熏習 두 가지가 있다고 하고, 이 가운 데 5가지의 수행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十信位의 信修行이고, 두 번째는 三賢位의 遠離法 수행이며, 세 번째는 初地의 見道에서 唯識觀을 이루고, 네 번째로 十地의 修道位 중에서 萬行을 닦고 그 결과 다섯 번째 果地에서 열반을 증득한다191)고 『대승기신론』을 해석하고 있다.
현수법장도 그의『大乘起信論義記』에서 원효와 같은 맥락을 취하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먼저 진여가 무명에 內熏하여 무명으로 하여금 淨業을 성취하게 하고, 淨用이 반대로 진여를 훈습하여 진여의 세력을 증장한다. 앞의 것은 本熏이라 하고 뒤의 것은 新熏이라고 한다. 十信位 中에 信行하여 자기의 自性을 믿고, 三賢位 中 수행하여 마음이 妄動하는 것을 알고 앞의 경계가 없는 이치를 이해하며, 遠離法을 수행하고 唯識無塵 등을 觀行하여 初地 見道에서 唯識의 理를 증득하고 十地修道位의 만행으로 久遠熏習力을 나타내어 不取 不念의 果를 밝힌다. 먼저 惑을 滅하고 理를 證한다. 惑을 멸한다는 것은 根本無明을 멸한 것이고, 근본 무명이 멸한 것은 妄心, 妄境界, 染心의 心相이 모두 멸하여서 心體가 轉依하여 열반을 증득하고 불사의한 自然業이 일어난다192)라고 요약된다.
이를 정리하여 보면, "진여법이 있어 능히 무명을 훈습한다. 훈습하는 인연의 힘이 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한다"고 정법훈습의 근본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本性은 眞如이고 진여는 곧 自性淸淨心이기 때문이다. 自性淸淨心은 理와 智를 同時에 가지고 있는 法身이기 때문에 淨化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중생즉불관이다.
衆生自身에게 이 法身이 있기 때문에 斷絶됨이 없이 무명에 훈습한다. 이것에 의하여 무명에 청정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이 無明에 대하여 진여의 훈습이라고 하는 因과 緣의 힘에 의하여 妄心으로 하여금 生死의 苦를 싫어하고 열반의 樂을 구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眞如(法身)가 能熏이며 因이 되고, 無明은 所熏이며 緣(무명에 일어난 淨用)이다. 이 결과로 생긴 것이 厭求心이다. 厭求心은 妄心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眞如熏習」혹은 「體熏習」이라고 한다. 이는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이 厭求心은 반대로 진여를 훈습하여 진여의 힘이 漸增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믿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게된다. 이 경우 厭求心은 능훈이고 진여가 소훈이며 그 결과 수행이다.
妄心에 대하여 일어난 수행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러한 인연으로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의 法(法身)이 있으며 그 本性이 淸淨함을 믿는다. 이것은 「信」이므로 十信位이고, 스스로 衆生卽佛임을 믿는 것이다. 둘째는 三賢位의 수행으로 일체의 경계가 다만 마음의 妄動인 것일 뿐, 畢竟은 없는 이치를 이해한다. 이것은 報身 즉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셋째는 修遠離法이다. 四尋伺觀, 四如實之觀 等 唯識無境의 理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如實知로서 진실한 지혜에 의하여 證悟하는 것으로서 初地의 見道位이다. 이것은 報身 즉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다음은 이로서 唯識觀을 성취하여 앞의 경계가 如實히 없음을 깨닫고 無取無念하게 되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방편을 수행하고, 진여의 이에 수순하는 수행을 행하며, 所取의 집착은 無相이 되고 能取의 망념은 不生한다. 이와 같이 十地修道位중에 萬行을 한 결과 慣習의 힘으로 根本無明을 바로 滅한다. 이것은 十地의 滿位인 金剛喩定에 의하여 根本無明이 멸하여 진 것이고, 이 때 成佛의 行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報身佛의 작용이 法身佛과 일치한 것이며 중생즉불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근본무명이 멸하였으므로 染心이 일어나지 않으며, 染心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일체의 染因과 染緣 및 染果인 心相이 모두가 다 멸한다.
이와 같이 마음의 생멸이 소실되면 마음은 적정을 실현하여 마음의 본성인 청정성이 나타나 참된 지혜가 발휘되고 중생즉불을 성취한 것이다.
이 理智佛이 곧 중생즉불이며 法身佛이고 이 法身이 불생불멸의 세계가 果地로 증득된 열반이다. 이 열반에 안주하는 심성, 즉 불타는 자연히 중생을 구제하는 움직임을 일으킨다. 이것이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이것을 불가사의한 自然業을 성취한다고 한다.
이 때 法身의 熏習作用을 眞如熏習이라고 하고,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고자하는 마음이 妄心에서 보리심이 일어나 수행하므로써 일어나는 훈습을 妄心熏習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 범부들에게 내재하여 있는 법신인 진여가 현재에도 훈습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용을 중생즉불의 用이라고 한다. 이들에 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 妄心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妄心熏習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分別事識熏習이다. 모든 凡夫나 二乘의 사람들이 生死苦를 싫어하여 그가 할 수 있는 力量에 따라 점차로 無上道에 趣向하기 때문에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둘째는 意熏習이다. 이른바 모든 보살이 발심하여 용맹하고 신속하게 열반으로 趣向하는 까닭에 의훈습이라고 한다.193)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망심의 훈습의 뜻에 두 가지의 구별이 있다. 하나는 分別事識熏이다. 일체의 범부나 二乘으로 하여금, 生死苦를 싫어하고 자기의 堪能에 따라서 無上道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둘은, 意熏인데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발심하고 용맹하여 신속하게 無住涅槃으로 향하여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194)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妄心이 훈습한다는 것은 第六과 七識이다. 분별사식은 범부와 二乘이 生死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취향하는 것이다. 이 六識 가운데서 방편을 수행하고 진여를 훈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意熏習은 모든 보살이 모든 法이 허망하여 貪欲하고 取著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眞如法이 寂靜하고 安隱함을 알아 발심하여 용맹하게 大涅槃에 趣向하는 것이다. 이것은 第七識 가운데서 방편을 수행하고 진여를 훈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說은 七識을 意로 삼는 것이지 六識 중에 있는 意識이 아니다."라고 하여 망심훈습중 분별사식을 제육식, 意熏習을 제칠식으로 설명한다.
『起信論疏』』에서, 원효는 우선,
통털어서 말하면 七種識195)이 모두 분별사식이고 그리고 五種識196)은 모두 意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七種識 중에서 분별작용이 강한 쪽으로 취하면 意識이 諸般事에 緣이 통하므로 본문에서 이 識을 설한다. 그러나 이 식은 모든 물질이 오직 마음 뿐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경계가 있다고 집착한다. 범부와 二乘은 비록 無上道를 趣向하지만 生死에는 싫어 할 것이 있고 열반에는 기뻐할 것이 있다고 오히려 計度하므로 分別事識의 집착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이름한다. 意熏習은 또한 業識熏習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五種識 가운데 業識을 취하는 것은 가장 微細하고 모든 識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業識을 意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業識은 見分과 相分이 나누어지기 전이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마음이 妄動하는 것이고 경계에 차별이 없음을 안다. 그리고 일체법은 오직 識의 思量임을 안다. 目前의 밖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業識의 뜻에 수순하므로 業識熏習 또는 意熏習이라고 한다. 이는 무명이 일으키는 바 업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히 발심하여 諸行을 닦는 業識이다.197)
라고 한다. 이로서 원효는 망심훈습을 七種識과 第八識으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칠종식을 분별사식 훈습을 대표로, 제팔식을 업식훈습을 대표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大乘起信論義記』에서 법장은,
분별사식은 곧 의식이다.198)
唯心의 道理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作意力으로 오랜 세월이 걸려 菩提를 얻기 때문에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하고 乃至 無上道를 점진적으로 趣向 한다.199)
意熏習은 業識이라고 하고,200) 唯心의 道理를 이미 了達하여 理致를 趣向하여 速疾하므로 앞의 漸悟와 다르기 때문에 速趣涅槃이라고 한다.201)
그리고 범부 二乘은 梨耶를 不覺하고 단지 분별사식의 資持力에 의하여 發心修行하므로 근본을 요달하지 못하여 대보리를 趣向함이 疏遠하여 漸悟라고 한다.202)
意熏을 하는 보살은 이미 梨耶本識을 요달하였다. 즉, 이 識(梨耶)의 資持力에 의하여 바야흐로 발심수행하여 本識을 요달하였기 때문에 대보리에 趣向함이 親近하여 速得菩提한다고 한다.203)
라고 한다. 법장이 분별사식은 곧 意識, 意熏習은 業識이라고 단정함이 원효의 포괄적인 표현과 다른 점이다. 그리고 위에서 八識을 깨달은 보살은 意熏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分別事識熏習을 하는 것으로 기준을 세우고 있고, 분별사식훈습은 漸悟로 가는 수행이고, 의훈습은 速悟로 가는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위의 疏들을 정리해 보면, 망심훈습은 망심에 진여의 淨用이 나타나 작용하는 것이나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미혹한 중생이 그 미혹한 마음 가운데서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하여 「轉迷開悟」하는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 즉 始覺의 활동을 妄心의 측면에서 記述하고 있다.
망심을 七種識과 五種識으로 分類하여 칠종식 중에서 意識을 분별사식의 대표로 五種識 중에서 業識을 意熏習의 대표로 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제팔식을 의훈습으로 그리고 그 외를 분별사식훈습으로 설명하기도 하며, 또 분별사식훈습을 漸悟的 수행으로 의훈습을 速悟的 수행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방식이 원효와 법장 사이에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이나 의식과 아리야식을 논리의 근거로 한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혜원은 六識과 七識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2) 眞如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기신론」에서 진여는 법신 응신 보신 三身을 의미하고 三身은 衆生卽佛임을 위에서 이미 논한바 있다. 그리고 중생심 생멸문의 三大는 自體.相.用이고, 自體.相大은 법신이며, 用大는 應身과 報身에 해당하므로 진여훈습에 自體相熏習과 用熏習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체상훈습과 용훈습은 중생즉불의 용이라고 할 수 있다.
(1) 自體相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眞如熏習의 뜻에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自體相熏習이고 둘째는 用熏習이다. '自體相熏習'이라는 것은 無始의 過去世부터 이때까지 無漏法을 갖추고 不思議業을 몸에 갖추어서204) 境界의 自性을 짓는 것이다.205) 이 두 가지 뜻에 의하여 항상 熏習하여 熏習의 힘이 있기 때문에206)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眞如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207)
라고 설한다. "스스로 자기의 몸에 眞如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衆生卽佛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중생들이 진여(중생즉불)를 믿고 믿지 않는 것은 중생에게 존재하는 진여에 차별이 있음이 아니라 중생에게 있는 무량 무변한 무명이 있어서 원래부터 이때까지 자성이 차별되어서 그 厚薄이 不同하기 때문이다.208) 항하의 모랫수보다도 더 많은 上煩惱209)는 무명에 의하여 일어나되 차별이 있고, 我見愛染煩惱210)도 무명에 의하여 일어나서 차별이 생긴 것이다. 사람마다 차별이 있고 厚薄이 不同한 무명에 의하여 일어나는 번뇌에도 그와 같은 차별이 있음으로 사람마다 믿음에도 차별이 있다고 설명하여 믿음에 대한 의심을 제거한다. 그리고 모든 불법에는 因과 緣211)이 있는데 因과 緣이 구족하여야 法(事)이 成辦된다. 중생의 내면에 眞如熏習力이 因力이고, 여러 佛菩薩 등의 善知識이 緣212)力이 된다. 이 因緣의 合의 결과로 厭苦心을 일으켜 열반이 있음을 믿고 여러 善根을 씨 뿌리니 修習이 성숙한다. 修習이 성숙함에 따라서 만나게 되는 모든 불보살이 가르침과 이익과 기쁨을 보이시고 드디어 능히 열반으로 가는 길을 향하여 進趣하게 한다213)고 『대승기신론』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진여는 衆生卽佛이고 진여훈습은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진여훈습의 뜻에 역시 두가지 구별이 있다. 하나는 體熏이고, 둘은 用熏이다. 體熏이라는 것은 이른바, 진여는 無始以來 일체의 무량한 無漏를 具足하고 또한 불가사의한 殊勝한 경계의 작용을 갖추어서, 항상 간단함이 없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한다. 이 힘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生死苦를 싫어하고 涅槃樂을 求하여 스스로 자기 몸에 眞實한 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214)
라고 설하고, 이어서 진여에 대한 의심과 인연법에 대한 설명을 한다.
『大乘起信論』에서 自體相熏習이라고 한 것과 달리 『新譯大乘起信論』에서는 體熏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 『大乘起信論』의 相에 해당하는 부분(無漏性功德 不思議 境界 등)이 『新譯大乘起信論』의 體에 포함되어 있으므로『新譯大乘起信論』의 體에는 理와 智가 함께 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大乘起信論』에서는 "항상 훈습하고"라고 하여 자체상훈습이 항상 이어지고 있음을 표하고 있지만 『新譯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는 無始以來 일체의 무량한 無漏를 具足하고 또한 불가사의한 殊勝한 경계의 작용을 갖추어서, 항상 간단함이 없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한다"고 하여 "간단함이 없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는 『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本覺不空門의 智215)와 如實空門의 境216)의 힘에 의하여 妄心을 冥熏하여서 厭樂 등을 일으키게 한다. 眞如法의 無知로 생기는 번뇌는 所知障이고 我見愛染煩惱는 煩惱障이라고 하고 그 외는 글의 相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217)
라고 하였다. 本覺不空門의 智는 本覺을 能證하는 智慧의 門이다. 원효는 "具無漏法하고 備有不思議業"한 것은 곧 本覺을 能證하는 智慧를 갖춘 것이고 그 業은 그 지혜를 소유한 자의 行으로 보았다고 생각 된다. 본각을 능증하는 지혜를 갖춘 究竟의 결과는 곧 報身佛이고, 그 佛의 不思議한 작용을 하는 자는 應身佛 혹은 化身佛 혹은 化身이다라고 하는 뜻이 원효가 말하는 本覺不空門이라고 해석된다. 그리고 本覺不空門의 智는 곧 衆生卽佛의 智이다.
如實空門의 境 중 如實한 것은 眞如이고 空門은 無漏法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을 모두 여의면 純粹하고 淸淨한 寂滅을 이룬다. 이것이 곧 自身이 本具한 自性淸淨心을 회복한 것이고, 性淨本覺이라고 한다. 性淨本覺은 곧 衆生卽佛이다. 『기신논』에서 설한 「境界之性」은 범부가 「如實空門」즉 「性淨本覺」을 이루기 위하여 眞如를 觀察의 대상으로 할 때 眞如는 所觀의 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의 수행하고자 하는 願과 行에 진여의 內熏(진여의 自體相熏習)과 外緣으로 佛이 작용할 때는 眞如가 能觀의 智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무루법을 구족하고 불가사의 업이 작용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境界之性」은 진여가 能觀 의 智로 작용하거나 진여가 所觀의 境으로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屬性이다. 이때에 菩提心을 일어킨 凡夫의 智가 始覺의 智이고 중생즉불의 용이다.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오직 진여가 妄心을 熏習함을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所熏되는 妄이 所顯되는 뜻을 밝혔고 둘째는 眞如自體相者 이하는 理體平等을 所表하는 것을 밝혔다. 所顯과 所表는 어떻게 다른가. 所顯은 이 진리 중에 修習의 緣을 따르므로 可顯된다는 뜻이 있다. 즉, 理를 돌려서 修行을 성취한다. 緣으로서 解을 비추고 疑惑을 끊어 나타나는 바이기 때문에 所顯이라고 이름한다. 所言表者는 眞理의 理體가 平等 一味하고 絶言離相한 것이다. 그러나 理는 自顯할 수 없어 法에 의지하여 表하기 때문에 所表라고 이름한다. 法은 自成하지 못하므로 理로써 熏習하기 때문에 眞如法이 바야흐로 이루어진다.218)
無漏法이라고 하는 것은 法身의 法體法佛의 性이고, 不思議 作業性이라는 것은 報佛性이다. 이 두 가지 성질의 熏習力이 있기 때문에 妄解가 일어나 斷惑하게 한 후 轉理成行한다. 地前에는 性種習種이라고 이름하고 地上에서는 證敎二道가 된다. 佛果는 法報二佛이 되고 허망한 법을 言名하는 것은 性淨方便涅槃이 된다.219)
고 한다. 그리고 賢首는 그의 『大乘起信論義記』에서,
진여훈습에는 먼저 體相 뒤에 用大가 있다. 앞에 것 가운데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正이 나타내는 것이고 뒤에 疑心을 제거하는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먼저 훈습을 분별한다. 진여훈습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체상훈습이고 둘째는 용훈습이다. 자체상 훈습은 무시이래로 무루법을 구족하여 몸에 不思議業을 구비하고 있다. 作境界之性은 이 두 가지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진여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한다. 무시로부터 내지 不思議業이라는 것은 不空本覺으로 無漏法이라고 한다. 이 法은 중생을 冥熏하나 중생이 능히 요달 할 수 없으므로 不思議業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業은 冥熏作用이다. 作境界性이라는 것은 直熏은 아니나 그 妄心이 그 厭求로 하여금 能觀智를 이루게하고 또 역시 그 觀智와 더불어 所觀境界를 짓는다. 이 두 法 等은 아래 훈습하는 功能을 나타낸다. 이는 心境二法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이 體相二法이 중생을 冥熏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厭求를 일으켜 수행한다. 自信等은 훈습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다.220)
고 한다. 이상의 論과 疏들을 정리하여 보면, "本覺不空門의 智와 如實空門의境의 힘에 의하여 妄心을 冥熏하여서 厭樂 등을 일으키게 한다."고 하는 "本覺不空門의 智와 如實空門의 境의 힘"은 곧 衆生卽佛의 능력이고, "이에 의하여 妄心을 冥熏하여서 厭樂 등을 일으키게 한다."는 중생즉불의 용이다.
"이 體相二法이 중생을 冥熏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厭求를 일으켜 수행한다."고 하는 "體相二法"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법신불이고 중생즉불이다. 그리고 "自信等은 훈습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하는 "自信等"은 스스로 진여법 즉 중생즉불임을 믿음으로서 중생즉불의 용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眞如自體相의 훈습은 곧 중생즉불의 용이다.
(2) 用熏習과 衆生卽佛의 用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外緣의 힘이니,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差別緣이고 둘째는 平等緣이다. 差別緣221)이라는 것은 이 사람이 부처님이나 보살 등에 의하여 처음에 뜻을 발하여 求道를 시작해서부터 나아가서 성불하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서 혹은 보기도하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眷屬, 부모, 친척이 되기도 하며, 혹은 給使가 되기도 하며, 혹은 잘 아는 벗으로 되기도 하고, 혹은 怨家가 되기도 하고, 四攝事을 일으키기도 하며, 내지 일체의 짓은 무량한 修行의 緣이 있는 것이다. 이는 大悲를 일으킨 熏習力으로써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善根을 增長할 수 있게 하여 보거나 듣거나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差別緣은 近緣과 遠緣이 있고 近과 遠의 緣을 분별하는 두 가지 연이 있다. 첫째는 增長行緣222)이고, 둘째는 受道緣223)이다. '平等緣'이란224) 一切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度脫시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熏習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同體智力으로써 見聞하는 것에 따라 응하여 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은 三昧에 의하여야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볼 수가 있기225) 때문이다.226)
라고 한다. 그리고『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用熏이라는 것은 바로 중생의 外緣의 힘으로서 무량한 뜻이 있다. 간략하게 설하여 두 가지인데 하나는 差別緣이고 둘은 平等緣이다. 差別緣이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중생이 처음에 發心하여서부터 나아가서 成佛에 이르기까지 불, 보살 등 여러 선지식들이 應化하시는 것에 따라서 現身을 이루되, 혹은 부모로 되고, 혹은 처자로 되고, 혹은 권속으로 되고, 혹은 머슴으로 되고, 혹은 아는 벗으로 되고, 혹은 怨家로 되고, 혹은 또 天王 등의 모습을 나타내고 혹은 四攝事로 하고, 혹은 六婆羅密 내지 일체의 보리의 行緣으로 하고, 대비의 柔軟心으로써 하는 등의 광대한 福智藏을 받아서, 應化되어지는 일체중생을 훈습하여, 如來 등의 모습을 見聞하게 하고 憶念하게 하여 善根을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이 緣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近緣인데 조속히 보리를 얻기 때문이며 둘은 遠緣으로서 오랜 세월이 걸려 바야흐로 얻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增行緣이고 둘은 入道緣이다.227)
平等緣이라는 것은, 이른바 一切諸佛 및 제보살이 平等智慧와 平等志願으로써 널리 일체중생을 拔濟하려고 하여, 任運으로 상속하여 항상 斷絶함이 없이, 이 智願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에 그것들로 하여금 제불, 보살을 憶念하고 혹은 보고, 혹은 듣고서 이익을 얻게 하며, 청정한 삼매에 들어가서 단멸된 장애에 따라서 無 眼을 얻게 하고 순간순간(또는 한 생각 한 생각) 속에서 일체의 세계를 평등하게 나타내고서 무량한 諸佛 및 諸菩薩을 보는 것이다.228)
라고 한다. 우리 범부들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들에 대하여 쉽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悲觀하기도 하고 絶望하기도 하고 때로는 滯念하기도 하는 등 괴로워 하는 예들이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用熏習에 의하면 중생의 外緣은 중생 각자에 내재하는 진여 즉 衆生卽佛이 중생의 外緣의 힘이 된다고 한다. 衆生卽佛은 이른바 모든 중생이 처음에 發心하여서부터 나아가서 成佛에 이르기까지 불, 보살 등 여러 선지식으로 應化하시어 現身하시기도 하고, 혹은 부모로, 혹은 처자로, 혹은 권속으로, 혹은 머슴으로, 혹은 아는 벗으로, 혹은 怨家로, 혹은 또 天王 등의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四攝事로 하고, 혹은 六婆羅密 내지 일체의 보리의 行緣으로 하고, 대비의 柔軟心으로써 하는 등의 광대한 福智藏을 받아서, 應化되어지는 일체중생을 훈습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 범부들로 하여금 衆生卽佛임을 믿고 이를 신앙하면 일체 외연의 조건들은 불타가 응화하시는 것들이고 불타가 나 자신을 위하여 훈습하시는 것이니 모든 것에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思考하고 발심하여 나가라고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衆生卽佛은 如來 등의 모습을 見聞하게 하고 憶念하게 하여 四攝事, 혹은 六婆羅密 내지 일체의 보리의 行緣으로 善根을 증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근의 증장과 본인의 업에 따라 조속히 보리를 얻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 걸려 바야흐로 얻게 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우리 범부들이 자신의 집착과 邪見을 버리도록 하면 중생즉불이 자유자재하게 작용하여 범부들의 무명은 정화되고 자연업은 성사된다고 하는 것이다.
衆生卽佛에는 平等緣이 있다. 행자가 중생즉불의 지원을 받아 수행을 증진하는 가운데 수행의 단계가 十解(住)위 이상이 되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어229) 선정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체험에서 報身佛의 무량한 상호와 分齊相을 완전히 여읜 佛을 만나 볼 수 있게 된다.230)
平等緣의 諸佛과 菩薩은 중생즉불이 一切와 同體인 것을 깨달아 同體智力에 住持하고 있으므로 行者의 見聞하고자 하는 願에 應하여 行者의 앞에 化現하여 행자를 위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즉, 중생은 觀佛三昧에서 평등하게 제불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231) 그러므로 觀佛三昧의 힘을 증득한 사람은 완전히 평등하게 이익을 얻는다고 하여 平等緣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등연에 접한 행자의 중생즉불이 報身佛이 된 것이다.232)
3) 衆生卽佛의 示現
자체상훈습과 용훈습이 지혜를 완성하여 衆生卽佛을 示現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여의 무분별지와 상응하여야 한다. 상응하지 못한 것을 未相應이라고 하고233) 상응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을 已相應이라고 한다.234)
未相應이라고 하는 것은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意意識熏習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意識熏習은 유식의 이치를 요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계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凡夫와 二乘의 分別事識熏習이며 意熏習은 初發意菩薩 등 十解(住) 이상 唯心의 도리를 아는 모든 三賢位의 業識熏習이라고 한다.235) 이는 이직 진여의 用熏과 상응하지 못하여 自在業의 수행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원효는 그의 『대승기신론별기』에서, 法身菩薩이 法身을 證得할 때 能見相을 여의어야 하는 고로 十地 以前의 보살을 意熏習이라고 하고, 이는 業識에 의하여 能見相이 있는 緣故이라고 하였다.236)
已相應이라는 것은 이른바 法身菩薩이 眞如體와 더불어 상응하는 正體智인 無分別心을 얻고,237) 일체의 如來의 自體와 상응하기 때문에 自在業을 얻어, 보신 응신이 작용하는 佛의 後得智의 用인 일체여래의 智用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오직 法力에 의하여 任運으로 수행하여, 진여에 훈습하고 無明을 滅하기 때문이다.238)
이상과 같이 『기신론』에서는 相應과 不相應의 용어를 취하여 진여의 체에 접근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相應이라는 것은 진여를 인식하는 수단이다. 마음이 진여와 相應하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즉, 相應하면 진여를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응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相이 있는 것은 아니다. 心과 眞如가 相應하는 것에 의하여 그 相應을 곧 超越하는 것이다. 상응이 深化되어 감에 의하여 마음은 진여 그 自體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때 그것은 相應이라고 더 이상 할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 때 본인은 완전한 法身 즉 衆生卽佛의 진여의 理智가 되어 중생을 위하여 용훈습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행자 스스로 이제 중생즉불을 시현하여 法身으로서 자유자재하게 내외로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정법훈습과 중생즉불관을 아래 表4에 나타내었다.
┌───分別事識熏習 -------+---應身---+
┌─ 妄心熏習─┤ | |
淨法熏習────────┤ └───意熏習--------------+---報身---+
└─ 眞如熏習─┐ | |
┌───────────────────┘ | |
│ | |
│┌─ 自體相熏習────────────────────┐┌未相應-+ |
└┤ ┌ 近緣─┐┌─ 增長行緣 ─┐ ││ |
│ ┌差別緣 ─┤ ├┤ ├┐├┤ |
└─ 用熏習─┤ └ 遠緣─┘└─ 修道緣─ ─┘├┘│ +法身─-+
└平等緣────────────────┘ └─已相應─+報身─-+
|
衆生卽佛─────-+
<表 4> 淨法熏習과 衆生卽佛
4. 覺과 衆生卽佛
중생은 미오하고 무명하다. 무명한 중생이지만 淨法熏習이 있기에 구경에 미오한 중생이 진여와 상응하여 중생즉불을 시현하게 됨을 위에서 알게 되었다. 이제 不覺의 위에 있는 중생이 자신을 깨닫아 가는 과정과 중생즉불의 상관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중생이 진여와 상응하여 중생즉불을 시현"한다고 하는 「眞如」는 心眞如이므로 마음을 떠나는 것은 아니나 진리를 표현하는 용어로 쓰이므로 理의 면이 강하다. 우주 전체에 편만하고 있는 진리를 唯心論의 차원에서 표현하여 心眞如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心眞如를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하는 데「自性淸淨心」이라고 표현 할 때는 진여를 인격화하여 개인적인 면에서 본 것이다. 개인의 인격에 나타난 진여가 自性淸淨心이다.
心眞如는 心의 本性이므로 그것을 개인적인 마음의 차원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個人의 心 차원에서 진여를 생각하면 心의 本性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진여라고 하면 法界의 理의 의미가 강하지만 自性淸淨心이라고 하면 個人의 智의 의미가 강하게 된다.
『기신론』에서는 진여를 理만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智는 理의 발현이므로 理智不二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智는 깨달음에서 나타나는 智, 즉 佛智이고 여래의 法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理가 智가 되어 활동한다고 하는 것이 『기신론』의 큰 특색이다. 따라서, 理는 법신이 本具하고 있는 것이므로 常存하고 理에서 나오는 智도 따라서 중생에게 現存하는 것이므로 이는 『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식설에서는 개인의 마음에 처음부터 번뇌가 있는 것을 큰 문제로 삼아 왔기 때문에 마음이 理이고 理의 본성이 청정하고 청정한 곳에 智가 있다고 하는 『기신론』의 교리의 骨格과 다소 차이가 있다. 진여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성청정심으로 進展하는 것은 개인의 마음의 차원이다. 마음의 본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번뇌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는 자성청정심을 「여래의 법신」이라고 한다. 純粹淸淨한 형태가 마음의 본성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여래장」은 자성청정심이 번뇌와 관계된 것으로 인하여 주어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勝 經』에도 「여래의 법신이 번뇌장을 여의지 못한 것을 여래장이라고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래장은 번뇌에 덮혀 있는 상태의 자성청정심이지만 번뇌와 자성청정심이 二元論的으로 나누어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범부에게 자성청정심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唯識說에서는 처음부터 번뇌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에 아리야식은 妄識 또는 妄念이라고 하지만 『기신론』에서는 本性은 자성청정심인 眞妄和合識이라고 하고 또 二元論이 아니라고 한다. 전체가 妄識이지만 동시에 그 전체의 心性은 淸淨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야식은 「識」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같이 主體的이다. 自覺的인 認識으로 생활하는 主體가 마음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에서 자성청정심이나 여래장이라고 할 때 인격적이기는 하지만 아직 주체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를 주체적으로 생각할 때는 心性보다는 煩惱가 표면에 나타나 我執이나 我見을 중심으로 한 醜한 자기가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는 자성청정심이 아리야식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주체의 입장에서 心性을 고찰 할 때 覺과 不覺의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覺과 不覺은 自覺的이고 主體的이다. 자기의 認識 문제, 자기의 迷한 문제, 그 迷로부터 脫却하는 관점에서부터 자성청정심 곧 중생즉불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가를 문제로 하는 것이 覺不覺의 문제이다.
현실적 자기의 迷는 不覺에 존재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그 不覺 가운데서 不覺한 자신을 否定하는 覺의 활동이 自覺된다. 그 곳에 發菩提心과 修行의 문제로서 始覺을 설명할 必然性이 있다. 그래서 이 始覺의 根低에 本覺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覺은 主體的인 존재 方式을 취하는 진여의 智的活動 곧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여기에서『기신론』이 가진 衆生卽佛觀의 기초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眞如, 自性淸淨心, 如來藏, 覺을 眞如의 理가 존재하는 방식에 따라 人格的, 人間的(煩惱와 관계), 主體的이라고 하는 순서로 중생즉불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보았다. 이제 『대승기신론』에 설한 바를 참고하고자 한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覺이란 心體가 妄念을 여읜 것을 말한다. 妄念을 여읜 相이란 虛空界와 같아서 두루 다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이것은 곧 法界一相이며 여래의 평등한 法身이다. 이 法身에 의거하여 설하되 本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本覺의 뜻이란 始覺의 뜻에 상대시켜서 설하는 것이니 始覺으로써 바로 本覺과 같아지는 것이다. 始覺의 뜻은 本覺에 의거하기 때문에 不覺이 있으며, 不覺에 의거하므로 始覺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239)
라고 설한다. 이에 대한 『新譯大乘起信論』에서는,
깨달음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른바 마음의 第一義의 自性이 일체의 허망한 想念의 相을 여읜 것이다. 일체의 허망한 想念의 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虛空界와 같고, 두루 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法界의 一相이 바로 일체 여래의 평등한 法身이다. 이 법신에 의거하여 일체 여래를 설하여서 本覺이라고 하지만 始覺에 의지함으로써 본각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始覺일 때가 바로 이것이 本覺인 것이지, 별다른 覺이 일어남이 없다. 始覺을 세우는 것은 이른바 본각에 의지하여 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지하여 始覺이 있음을 설하는 것이다.240)
라고 설한다. 이에 대하여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一切中에는 覺과 不覺의 두 뜻이 相返되어 있기 때문에 第三의 料簡同異가 있다. 覺의 뜻을 요약하여 해석하면 不生不滅이고 不覺의 뜻은 生滅和合句 가운데 生滅의 뜻이다. 同異라고 말하는 것은 非一非異이다.241)
라고 한다. 『기신론소』에서, 원효는,
먼저 本覺의 體를 밝히고 뒤에 本覺의 뜻을 해석하였다. (『대승기신론』에서 本覺의 體에 관하여) 「心體離念者」라는 것은 妄念을 여의어서 不覺이 없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本覺의 義) 「等虛空界者」라는 것은 단지 어두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智慧의 광명이 두루 비추임이 평등하여 둘이 없다.242)
고 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그의 『대승기신론별기』에서,
覺義라고 말하는 것에는 바로 두 가지가 있다. 本覺과 始覺을 말한다. 「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心性에 不覺相을 여읜 것을 말한다. 이것은 覺照의 성질이 있어 本覺이라고 이름한다. 아래글에서243) 말한 바와 같이 「自體에 大智慧 光明의 뜻이 있는 까닭이다.」 「始覺」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이 心體가 無明緣을 따라서 망념을 동작하다가 본각의 熏習力 때문에 조금 깨달음의 작용이 있게 되고, 나아가서 구경에는 도리어 본각과 같아진다. 이것을 始覺이라고 이름한다. 「不覺義」라고 말하는 것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根本不覺이고 둘째는 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은 아리야식내에 있는 근본무명을 이름하여 不覺이라고 한다. 아래 글에서244) 말한 바와 같이 「아리야식에 의거하여 무명이 있어 不覺이 일어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지말불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나는 一切染法을 말한다. 이들을 모두 不覺이라고 이름한다. 아래 글에서245) 말한 바와 같이 「일체 染法이 모두 不覺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과 같다. 만일 識相의 차별로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차이를 가려내는 뜻의 법문에 의한다면, 바로 아리야식 속에는 오직 本覺과 根本不覺이 있을 뿐이다. 만약 識體가 둘이 아니므로 枝末불각을 섭수하여 근본불각에 귀결시키는 뜻의 법문에 관계시킨다면 곧 그 始覺과 枝末不覺 역시 阿梨耶識內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이 아리야식에 두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은 통털어서 이와 같이 두 가지 뜻이 포함되기 때문에 아래 해석 가운데서, 本覺과 始覺의 두 覺과 두 不覺의 뜻을 통털어 든 것이다.246)
라고 설한다. 그리고 법장은 『大乘起信論義記』에서,
어떠한 것이 두 가지 인가? 하나는 覺義 이고 두 번째는 不覺義이다. 第三은 이름에 의거하여 개별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먼저 覺을 분명히 하는 것이고, 다음은 不覺을 밝히는 것이다. 그 뒤에는 雙을 同異로 분별하는 것이다. 覺이라는 것은 淨法을 가지고 心生滅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간략히 분별하면 始覺과 本覺 二覺이다. 本覺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本覺의 體를 나타내는 것이요, 두 번째는 本覺의 이름을 해석하는 것이다. 覺義라고 말하는 것은 心體에서 想念을 여읜 것을 말한다. 상념을 여읜 상이라는 것은 허공계와 같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으므로 法界一相 즉 이것이 如來平等法身이다. 이 법신에 의거하여 이름하여 본각이라고 설한다. 처음에 상념을 여읜다고 하는 것은 망념을 여의어서 不覺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虛空等과 같다는 것은 단지 不覺의 어두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大智慧光明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오히려 본각에서도 하나는 「周 」의 뜻으로 이른바 橫的으로 三際에 두루한 것이요 세로로 범부와 聖賢에게 (걸림 없이)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無差別의 뜻이다. 이른바 얽매임 속에서 모든 장애를 벗어 나오면 自性의 恒常함이 둘이 없기 때문에 法界一相이라고 한다.
覺義를 밝히기를 원하면 얽매인 相에서 벗어나옴이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如來平等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이것은 法身의 覺이다. 理는 새로 造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法身에 의거하여서 이름하여 本覺이라고 부른 것이다. 無性의 攝論에서 無垢 無 智는 이름하여 法身이 된다고 하고, 金光明經에서는 大圓鏡智를 이름하여 法身 等이 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이 뜻이다.247)
라고 설한다. 이상의 說을 定理하여 本『論』에 각주하여 보면,
覺248)이란 心體249)가 妄念을 여읜 것250)을 말한다. 妄念을 여읜 相이란 虛空界251)와 같아서 두루 다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이것은 곧 法界一相이며 여래의 평등한 法身이다. 이 法身에 의거하여 설하되 本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本覺의 뜻이란 始覺의 뜻에 상대시켜서 설하는 것이니 始覺으로써 바로 本覺과 같아지는 것이다. 始覺의 뜻은 本覺에 의거하기 때문에 不覺이 있으며, 不覺에 의거하므로 始覺이 있다252)고 말하는 것이다.253)
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야식은 染淨二元을 포함하고 있는데 淨法의 입장에서 마음의 生滅을 바라보면 그 生滅은 妄念의 작용이므로 不覺이다. 그 不覺을 설명하려면 그것은 覺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覺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向上的 性格, 즉 眞理를 求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마음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本具되어 있는 本覺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眞理를 求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本具되어 있는 중생즉불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기신론』의 설이 곧 恒存하는 본각의 작용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의하여 앞에서 일으난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뒤의 생각에서 잘못 되었음을 깨달은 것도 초보적인 깨달음이다. 이와 같은 覺을 凡夫覺이라고 하나 不覺이다. 不覺이기는 하지만 이 不覺은 覺의 시발이 되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現實的인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覺은 깨달음에서 오는 智慧인 것이다. 깨달음에서 오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心體離念」254)을 말한다. 「離念」은 妄念을 여읜다는 뜻으로 바로 始覺義가 있고 「心體」에는 곧 지혜의 뜻이 있다. 마음이 本覺의 작용을 받아 진리를 求하고자 하는 향상적인 마음으로 「離念」을 조금이라도 시작하면 그만한 分의 진여가 顯現하는 것이다. 이는 聖者의 段階인 初地의 修行階位에 오르는 시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始覺의 第一步라고 할 수 있다.
始覺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아리야식에서 구경에 모든 妄念을 완전히 여의면 수행이 완성되어 始覺이 本覺과 合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行者가 十地에 이르러 覺行이 窮滿하여 覺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始覺의 初에서 終까지는 번뇌와 共存하고 있으면서 차례로 번뇌를 끊어 覺이 獨存 할 때 始覺은 本覺과 合致되어 같아지는 것이다. 本論의 後段에 始覺을 隨染本覺이라고 하고 本覺을 性淨本覺이라고 하는 것은 兩者의 本性은 같으나 存在하는 樣相이 다르기 때문에 붙인 이름도 다르다. 이 本覺이 바로 不生不滅의 眞如가 성취된 단계이다.
이 本覺은 우주에 편만한 理의 門에서 볼 때 不生不滅의 心眞如가 되는 것이며, 智의 門에서 볼 때 理에서 發顯된 智의 작용이며, 人格化 되고 人間化 되었을 때 自性淸淨心, 如來藏, 등으로 불리운다. 이는 心生滅門에 속하는 것이다. 本覺의 지혜의 門은 覺照性이 있고,255) 覺照性이 있기 때문에 明照의 作用이 있는 것이며, 明照의 作用이 있기 때문에 또한 번뇌의 작용도 끊음이 있는 것이다.256) 本覺의 智의 門에 이와 같은 뜻이 있으므로 이를 大智慧光明의 뜻과 遍照法界의 뜻이 있다257)고도 하고, 法界一相으로 如來平等法身의 뜻이 있다258)고 하고, 無 智와 大圓鏡智259)의 뜻이 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의 心生滅門에 自體相이 바로 本覺의 理智不二의 法門인 동시에 無 智와 大圓鏡智는 法身佛의 相이다. 본각이 法界一相으로 如來平等法身의 뜻이 있고, 大圓鏡智의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라고 하겠다.
「不覺義」라고 말하는 것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根本不覺이고 둘째는 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은 아리야식내에 있는 근본무명을 이름하여 不覺이라고 한다. 이 아리야식에 의거하여 무명이 있어 알지 못하는 사이에 能見, 能現, 能取境界가 일어난다.260) 枝末不覺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나는 一切染法을 말한다. 이들을 모두 不覺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染法이 모두 不覺相이기 때문이다.261) 만일 識相의 차별로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차이를 가려내고자 하면, 아리야식 속에는 오직 本覺과 根本不覺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識體에 의하여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차이를 가려내고자 한다면, 識體가 둘이 아니므로 枝末불각을 섭수하여 근본불각에 귀결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枝末不覺은 역시 阿梨耶識內의 뜻이 된다.
지금까지 本覺, 始覺, 不覺에 대한 大意와 중생즉불과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不覺에서 本覺을 성취하기 위하여 수행 정진하는 중 始覺이 시작되는 찰나 本體에서 離念하기 시작하여 極小分이나마 覺의 相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점차 分齊를 여의기 시작하는 聖位에 오르게 된다. 이 聖位를 地上菩薩 혹은 法身菩薩 혹은 報身佛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始覺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本覺이 곧 중생즉불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 各各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중에 먼저 始覺을 풀이하고 다음에 本覺을 논하겠다.
1) 始覺에 작용하는 衆生卽佛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始覺의 뜻은 (마음이) 本覺에 依支하므로 不覺이 있고, 不覺에 依支하기 때문에 始覺이 있다262)고 설한다. 그리고 (마음이) 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고 하고 心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究竟覺이 아니라263)고 한다. 이것은 어떠한 뜻인가? 범부들은 한 순간 앞에 일어난 악한 생각을 알기 때문에 다음 순간에 그 악한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것을) 비록 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바르게 깨달은 것은 아니다.264) 二乘의 觀智와 初發意菩薩과 같은 사람들은 念異를 깨달아서 無異相을 想念함으로써 分別執著相을 버렸기 때문에 相似覺이라고 이름한다. 法身菩薩과 같은 사람들은 念住를 깨달아 無住相을 想念함으로써 分別 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隨分覺이라 이름한다. 菩薩地盡에서 방편을 만족하여서 一念一念에 覺心과 相應하여 無初相한 마음을 처음으로 일으킨다. 이로써 微細한 妄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常住하니 이름하여 구경각이라고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經에서 "만약 어떠한 중생이 능히 無念을 觀할 수 있다면 바로 佛智를 向함이 된다"고 설하였다.265)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初相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初相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하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念念이 상속하여 아직 妄念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無念을 얻게 되면 心相이 生住異滅임을 알게 되니 無念과 같기 때문이며 실로 始覺의 차별이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四相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모두 다 自立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覺과 같기 때문이다.266)
라고 설하였다. 이제 『大乘起信論義疏』 『기신론소』『원효별기』와 『大乘起信論義記』에서 이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석을 알아 보고자 한다.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대승기신론』의)「以覺心源」이하는 究竟과 非究竟을 밝히는 것이다. 究竟은 그(心源을 깨달은) 진실이 비추는 行이고 非究竟은 그 진실의 緣이 비추는 행이다.267) (『대승기신론』에서) 「心原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하게 비추이는 理解이다. 修行하여 成佛하였기 때문에 구경각이라고 한다. 「心原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緣의 智解이기 때문에 끝내 마음 가운데 滅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268)
구경각을 해석하는 가운데 네 가지 단계로 수행계위를 분별한다. 第一位는 비록 覺이지만 覺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범부가 앞의 생각에서 일어난 惡心이 뒤의 생각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앞의 생각에서 일어난 四相이 뒤의 생각에 이르러 바야흐로 깨달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解가 없는 고로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는다.269)
第二位는 二乘과 初發心菩薩과 같이 念異相와 念無異相을 깨달은 사람이다. 四相 가운데 異相을 깨달았으나 조금밖에 理解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覺이라고 하지 않는다.270) 이들이 닦는 觀行에는 三種이 있다. 하나는 生空觀이다. 단지 五陰의 無我를 관찰한다. 둘째는 法空觀이다. 法이 虛妄하고 假有이며 無自性함을 관찰한다. 셋째는 諸法이 如如한 것임을 관찰한다. 이것은 제법이 非有非無임을 관찰하는 것이다.271) 이들 중 我空과 法空觀은 二乘의 所觀이고 如觀은 보살의 所觀이다. 이와 같은 觀行으로 말미암아 分別執著相을 버리게 된다.272)
第三位는 法身菩薩과 같이 念住相과 念無住相을 하는 初地 以上의 보살이다. 四相 가운데 住相을 염할 때 일체제법의 주상과 무주상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에도 삼종관이 있다. 첫째는 妄相觀이다. 三界를 관찰하여 虛僞之相이 오직 마음에 따라 일어난다. 이는 마치 有無有想이 보이는 바가 꿈과 같아 마음밖에는 필경 얻을 수 있는 법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273) 둘째는 妄想觀이다. 妄想心이 虛構이라 自體가 없으므로 眞實에 의지하여야만 세워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파도가 물에 의지하는 것과 같이 迷妄이 方便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다.274) 셋째는 眞實觀이다. 一切法이 오직 진실한 緣起로 集成된 것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진실한 것 외는 필경에는 한 법도 일어 날 수 있는 妄想이 없다. 이와 같이 觀하는 고로 分別 念相을 여읜다. 이른바 分別事識解脫이다. 初地 가운데 六識이 惑을 모두 완벽하게 滅盡하여 해탈한 것이다.275)
第四位는 菩薩地盡의 보살과 같이 方便을 만족한 보살이다. 이것은 곧 第十地의 滿心이다. 처음에 마음이 일어날 때 初相이 없다는 것은 四相 가운데 처음에 生相이 生할 때 일체법이 從本以來 本來 生이 있음이 없다고 깨닫는 것이다. 이 계위의 觀行法에 息相觀과 實性觀 두 가지가 있다. 息相觀은 妄念을 쉬게 하는 觀이다. 生死涅槃은 本來 眞識에 妄念이 따라 일어난 것이다. 진실로 本源에 돌아가 本來 妄念이 없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妄想이 이미 없으니 어찌 妄念에 따라 生死涅槃相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관하는 것이 息相觀이다.276) 實性觀은 그 眞識의 如來藏體를 觀하는 것이다. 오직 이 법계에 항하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佛法이 同體緣의 集이다. 서로 相成하여 不離 不脫 不斷 不異하다. 훌륭하게 諸法이 同體 緣集하여 서로 相成하므로 한 법도 특별히 自性을 지키지 않는다. 비록 一性이 없어 不性이 없고 守性이 있지 않다.277) 體性은 항상 古今을 통하여 불변이므로 實性觀이라고 한다. 微細念을 멀리 여읜 것을 七識緣智라고 하고, 無明이 滅하면 緣智도 바로 멸한다.278) 心性을 볼 수 있는 것을 眞識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곧 常住하는 始覺이다. 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은 心源을 깨달은 것이므로 修行하여 원만한 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279)
라고 한다.『기신론소』에서 원효는,
「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은 佛地에 있다는 것이고, 「心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非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은 金剛喩定 이하이다.280) 저 心性에는 본래 生滅相을 여의었으나 무명이 있어서 자기의 心性을 모르는 것이며, 心性을 어김에 의하여 寂靜을 여의기 때문에 動念의 四相을 일으켜 내는 것이니, 四相은 無明의 화합하는 힘에 의하여 心體로 하여금 生住異滅케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小乘의 論議中에 '마음이 미래에 있을 때는 아직 생멸을 하지 않다가 業力에 의하여 四相을 끌어서 心法으로 하여금, 生住異滅하게한다'281)고 하는 것과 같다. 大乘經인 『不增不減經』에서 '곧 이 法身이 모든 번뇌에 의하여 요동하게 되어 生死에 왕래함을 중생이라 이름한다282)'고 한 말과 같으며, 이 『기신론』 아래의 글에서 '自性淸淨心이 無明風에 의하여 움직인다'283)라고 한 말도 바로 이를 이르는 것이다.284) 四相안에 각각 차별이 있다. 生三, 住四, 異六, 滅七을 말한다. 이들은 각각 다음과 같다.
ⓛ生三: 첫째는 業相이니, 무명에 의하여 불각의 망념이 움직여 비록 생멸이 있지만 見分과 相分이 아직 나뉘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는 아직 오지 않은 生相이 장차 곧 작용하려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둘째는 轉相이니, 動念에 의하여 다음에 能見을 이루는 것을 말함이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生相이 막 작용하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셋째는 現相이니, 能見에 의하여 境相을 나타내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生相이 現在時에 이른 것과 같다. 무명이 이 三相과 화합하여 일심의 體를 움직여 轉相을 따라 現相에 이르는 것이, 마치 소승의 未來藏心이 그 生相을 따라서 전전하여 현재에 이른 것과 같으며, 이제 大乘 중에서 여래장심이 生相을 따라 현재에 이르는 것 또한 그 뜻이 이와 같다. 이 셋은 모두 아라야식 자리에서 가지는 차별이며, 이를 매우 깊은 세 가지 生相이라 이름한다.285)
②住四: 무명이 生相과 화합함에 의하여 住相을 일으키는 마음에 我와 我所가 없는 것임을 모르는 까닭에 我痴, 我見, 我慢, 我愛 등 네 가지 住相을 일으킨다. 住四가 生相에 의지하여 能相인 心體를 일으켜, 住相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에 住相이라 이름하며, 이 넷은 모두 第七識의 자리에 있다.286)
③異六: 무명이 住相과 화합하여 計度하는 바, 我와 我所가 공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六異相을 일으킨다. 六異相은 貪瞋癡慢疑見이다. 이는 新論에서 "번뇌의 自性이 오직 여섯 가지가 있다287)"고 한 말과 같다. 無明이 이 六異相과 화합하여 能相인 住心을 異相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밖으로 향하여 반연케 하기 때문에 異相이라 이름하니, 이 여섯은 生起識288)의 자리에 있다.289)
④滅七: 무명이 異相과 화합하여, 바깥 경계는 違順의 성격을 떠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의 滅相을 일으키니, 이른바 身三口四 일곱 가지의 악업이다. 이와 같은 惡業과 能滅하는 異心을 惡趣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滅相이라 이름한다.290)
이러하기 때문에 四相이 生起하는 것은 一心이 流轉하는 것이니, 이는 근본무명으로 因한 것이다. 이는 『勝 經』에서 "無明住地가 그 힘이 가장 크다"291)고 말한 것과 같고, 이 논에서 "무명의 힘이 일체의 染法을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292)고 말한 것과 같다. 또 四相이 所依로 하는 마음이란 일심에서 오는 것이며, 그 四相을 일으키게 하는 마음인 能相은 無明이 일으킨 바이다. 무명이 일으킨 바의 相은 무명 따라 이르는 곳에 따라 그 작용에 차별이 있어서, 그 차별에 取着하는 번뇌는 別相이 된다. 차별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의 別相은 그 번뇌에 따라 心所가 있으므로 이를 心所有法, 心數法, 혹은 數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근본 이유는 근본무명이 평등한 自性을 어기었기 때문이다.293)
그 四相을 짓는 마음이 이르게 되는 곳마다 總主가 되어 모든 번뇌의 通相을 요별함을 心王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본래 일심이 모든 법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中邊論』294)에서 "오직 경계만을 아는 것을 心이라 하고, 차별하는 것을 心法이라 한다295)"고 하고, 長行(散文)에서 이를 해석하여 "만약 경계의 通相을 요달한다면 이를 心이라 하며, 경계의 別相을 취하는 것을 心法이라 한다296)"고 한 말과 같다. 『유가론』중에도 이 설297)과 똑같다. 이리하여 모든 외도들이 흔히 心王을 宰主니, 짓는 者니, 받는 者니라고 計度하는데 이는 그것(心王)이 自性이 없이 緣을 따라 유전하는 것임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298)
이 四相을 총괄하여 一念이라 하며, 이 一念과 四相에 의하여 四位(滅異住生)의 단계적인 降下를 밝혔다. 이는 본래 無明不覺의 힘에 의하여 生相 등 여러 가지 夢念을 일으켜 그 心源을 움직이고 점차로 滅相에 이르러, 오래도록 三界에 잠들어 六趣에 流轉하다가, 이제 本覺의 부사의한 훈습에 의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찾는 마음을 일으켜 점점 本源으로 향하여 비로소 滅相과 나아가 生相까지 모두 끊고 분명하고 크게 깨달아 自心이 본래 동요한 바가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고요한 바도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한결같은(一如) 자리에 머물게 됨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金光明經』에서 말한 꿈에 河水를 건너는 비유와도 같은 것이다. 이 중에서 자세한 대의도 이와 같다.299)
四相의 四位중에는 각각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能覺人이요, 둘째는 所覺相이요, 셋째는 覺利益이요, 넷째는 覺分齊이다. (1) 第一位 滅相: 能覺人은 '범부 정도의 사람'으로 지위가 十信에 해당한다. 所覺相은 '앞의 생각에서 惡이 일어남을 알았다'이다. 아직 十信에 들어가기 전에는 身三口四(殺偸 妄奇兩惡)의 일곱 가지 악업이 실로 나쁜 것임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나쁜 것임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앞의 생각에서 악이 일어남을 깨달았다'고 말한 것이며, 이는 滅相을 깨달은 뜻을 밝힌 것이다. 覺利益은 '뒤의 생각을 그쳐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이다. 앞에서는 不覺으로 인하여 일곱 가지 악한 마음(惡念)을 일으켰다가 여기에서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滅相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覺分齊는 '비록 覺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바로 不覺이다'라고 한 것은 滅相이 실로 나쁜 것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滅相이 꿈이라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300)
(2) 第二位 異相: 能覺人은 '二乘의 觀智와 初發意菩薩 정도의 사람들'이다. 이는 十解(十住와 같음)의 初心인 發心住 이상의 三賢菩薩을 뜻한다. 所覺相은 '異相을 妄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이다. 내외를 분별하여 我와 我所를 계탁하며 貪瞋癡慢疑見으로 집착하다가 '나'라는 것이 분명히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는 所相인 심체가 무명에 잠든 바 되어 異相을 꿈꾸어서 모든 번뇌를 일으키다가 이제 점차 지혜와 상응하여 이상의 꿈으로부터 조금 깨닫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覺利益은 '異相 때문에 일어나는 妄念이 없다'이다. 이미 '異相'의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異六이 영구히 없어진 것이다. 覺分齊는 ' 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에 相似覺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이다. 逆境界와 順境界를 분별하여 貪瞋 등을 일으킴을 分別執着相이라 이름하며, 비록 이와 같은 執着想을 버리기는 하였으나 아직 無分別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相似覺이라 하는 것이다.301)
(3) 第三位 住相: 能覺人은 '法身菩薩 等'302)이라고 하여 初地이상 十地의 보살을 뜻한다. 所覺相은 '住相을 妄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이다. 住相중에서는 마음밖에 경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人法을 고집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렀으나, 法身菩薩이 되어서는 二空을 통달하게 된 것이다. 이는 所相의 心體가 이미 異相을 깨달았으나 아직도 住相의 꿈에 잠들어 있다가, 이제 無分別智와 상응하여 住相의 꿈으로부터 깨닫게 되었음을 밝히려 하기 때문에 '住相을 妄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覺利益은 '住相의 妄念이 없다'이다. 我痴, 我慢, 我見, 我愛 등 네 가지 住相(제7식)이 없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覺分齊는 '分別 念相을 떠났다'이다. 이는 이미 분별추념상을 떠나 무분별각을 얻었지만 아직도 生相의 微細念을 떠나지 못하고 꿈에 잠들어 있기 때문에 隨分覺이라 이름한다.303)
(4) 第四位 生相: 能覺人은 '菩薩盡地'란 無垢地를 말한다. '방편을 만족하게 했다'는 것은 方便道이며, '일념이 상응한다'는 것은 無間道이다. 이는 『對法論』에서 "究竟道란 金剛喩定을 말하며, 여기에 두 종류가 있으니 方便道攝과 無間道攝이다304)"라고 한 말과 같다. 所覺相은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닫는다'이다.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無明에 의하여 業相 轉相 現相의 生相이 있어 心體를 미혹하여 생각을 움직이게 하다가, 이제 本覺을 떠나서는 不覺이 없으며 바로 動念이 靜心임을 증득하여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 것이다. 覺利益이란 '마음에 初相이 없다'이다. 본래 不覺에 의하여 마음이 원래 일어난 것인데,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바가 없으니, 그러므로 마음에 初相이 없다고 한 것이다. 覺分齊는 '微細念을 멀리 여의었다'이다. 業相의 動하는 생각은 생각 중에 가장 微細하므로 微細念이라 하였으며, 이 相이 모두 없어져서 영구히 남는 바가 없기 때문에 멀리 여의었다고 말하였다. 멀리 여의었을 때가 바로 佛地에 있는 것이니, 앞의 세 자리에서는 心源에 아직 이르지 못하여 生相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오히려 無常하였으나, 이제 이 究竟位의 자리에 와서는 무명이 영구히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다시는 동념을 일으킴이 없게 되었으므로 '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常住한다'고 말하며, 다시 나아갈 바가 없는 것을 究竟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始覺이 本覺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이런 도리에 의하여 구경각이라 이름하니 이는 바로 覺의 分齊를 밝힌 것이다.305)
인용하여 증명하는 중에, 「無念을 잘 볼 수 있다면 佛智에 향함이 된다」라고 한 것은 因地에 있을 때에 비록 微細念은 아직 여의지 못했으나 無念의 도리를 잘 보는 것이니, 이 잘 보는 것이 佛地에 향함이 된다고 하는 것이며, 이로써 佛地에는 妄念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는 因을 들어 果를 증명한 것이다. 만일 因果를 통틀어 설명한 글을 인용하여 증명한다면, 『金鼓經』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즉, "모든 伏道에 의하여 起事心이 멸하고, 法斷道에 의하여 근본에 의지하는 마음이 멸하며, 勝拔道에 의하여 根本心이 다 없어진다306)"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伏道라는 것은 三十心(十住, 十行, 十廻向心.)을 말하며, 起事心이 멸한다는 것은 『기신론』중의 分別執着相(貪瞋癡慢疑見)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바로 異相이 멸하는 것이다. 法斷道는 法身의 자리에 있는 것이며, 근본에 의지하는 마음이 멸한다는 것은 이 『기신론』중의 分別 念相(我痴我見我慢我愛)을 버린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바로 住相이 멸하는 것이다. 勝拔道란 金剛喩定이며 근본심이 다 없어진다는 것은 『기신론』 중의 微細念(業相轉相現相)을 멀리 여읜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生相이 다 없어진 것을 말한다. 이상으로 始覺의 차별을 하나씩 밝혔다.307)
『大乘起信論別記』에서 원효는,
만약 始覺이 本覺과 같아서 생멸을 여의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이 어떻게 통할 것인가? 『攝論』에서는 '本(본각)은 이미 常住하지만, 末(시각)이 本을 의지해서 상속하여 항상 있다'고 하고 내지 널리 설명하고 있다.308)" 답하기를, "두 뜻(기신론과 섭론)이 다르지만 이치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니, 왜인가? 이 『기신론』논주의 뜻은, 본래 不覺에 의하여 靜心을 동요시키지만 이제 불각을 그쳐서 다시 본래의 고요함에 돌아가게 됨을 나타내려 했기 때문에 '常住'라고 하였으며, 저 『攝論』의 뜻은, 법신은 본래 常住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저 법신에 의하여 福.慧의 두 가지 행동을 일으켜 만덕의 과보를 감득할 수 있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니, 이미 인연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생멸을 여의지 않으며 그러므로 '相續'이라 말한 것이다. 뜻을 갖추어서 설명하자면 비로소 만덕을 이루는 것에는 두 뜻을 갖추어야 한다.309) 앞(기신론)의 뜻에 의하므로 常住하며, 뒤(섭론)의 뜻에 의하므로 생멸하는 것이니 생멸과 상주가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 하나의 생각이 迷惑하여 三世를 두루하지만 일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나 하나의 털구멍이 모두 시방에 두루함과 같으니, 비록 시방에 두루하지만 한 털구멍도 더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부처와 부처가 이처럼 장애가 없는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치우치게 집착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이는 『화엄경』의 게송310)에서 "모니(牟尼)는 삼세(三世)를 떠나셨으나 상호(相好)는 완벽하게 구족하고 계시고, 머무는데 머무는바 없으시니 이 법계가 모두 다 청정하도다. 인연(因緣)이 있으므로 법(法)이 생기고 인연이 있으므로 법(法)이 없어지는 것이니, 이와 같이 여래(如來)를 볼 줄 알면 구경에 어리석은 유혹을 모두 멀리 여의게 되느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두 논주가 각각 하나의 뜻을 서술하였으니 어찌 서로 방해됨이 있겠는가?"311)
또한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을 이름하여 파도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波濤는 그 스스로의 體가 없다. 따라서 파도의 움직임은 없고 물은 스스로의 體가 있으므로 물의 움직임은 있다. 마음과 四相은 그 뜻이 또한 이것과 같다.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으로 『四卷經』에서 이르기를 "大慧여, 七識은 流轉하지 않으며, 苦樂을 感受하지 않고, 열반의 因이 아니다. 여래장은 苦樂을 감수하여 因과 더불어 같이 生을 따르고, 滅을 따른다"고 하였다.312) 이 經에서 여래장이 生死界를 유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生死의 근본은 그 스스로의 體가 없는 것이며, 體가 없는 까닭으로 따로 流轉한다는 것이 없는 것이다. 相에 이미 流轉이 없다면 體가 어찌 움직임을 말미암을 것인가. 따라서 "여래장에 삶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뜻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四相은 오직 이것이 한 마음인 것이며 不覺이 바로 本覺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원래가 평등하여 동일한 覺이다"라고 말한 것이다.313)
『大乘起信論義記』에서 현수법장은,
(『대승기신론』에서)「心源을 깨달았다」는 것은 染心의 根源이 性淨이라는 것을 말하고, 또 相의 根源이 生相이라는 것을 말한다. 始覺의 道가 원만하여 本覺과 같아지기 때문에 究竟覺이라고 한다. 이것은 佛地에 있다. 그 根源을 요달하지 못하고 시각이 본각과 아직 같아지지 못하였을 때 非究竟이라고 한다. 이것은 金剛喩定이하에 있다.314)
이제 이 뜻에 관계되는 四相을 밝힌다.315)
生相에는 하나가 있고, 住相은 네 개가 있으며, 異相은 두개, 滅相에는 하나가 있다. 生相에 하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름하여 業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無明이 不覺하여 마음을 動하게 하기 때문에 비록 일어나고 滅함이 있기는 하나 아직 相分과 見分으로 나누어지지는 않았으나 無明의 힘 때문에 그 淨心이 展轉하여 가장 微細한 分에 이르렀으므로 이름하여 生相이라고 한다. (生相의 微細分은) 매우 深히 微細하여 오직 佛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316)
住相에 넷이 있다라는 것은 첫째는 轉相이라고 하는데 이른바 無明力 때문에 앞에서 움직이는 相이 곧 無動임을 알지 못하고 展轉하여 能見을 形成한다. 둘째는 現相이라고 한다. 이른바 무명 때문에 앞의 能見에 의지하므로 無相에 요달하지 못하여 마침내 境界로 하여금 妄念을 나타내게 한다. 이 轉相과 現相 그리고 業相은 나란히 아뢰야식 가운데 속해 있고 不相應心이다. 셋째는 智相이다. 이른바 無明으로 말미암아 앞에서 스스로의 마음에 나타난 경계에 대하여 迷惑하는 것이다. 妄念은 染淨의 相에 대한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智라고 한다. 넷째는 相續相이다. 이른바 무명 때문에 앞에서 空無所有를 분별한 것을 요달하지 못하고 더욱이 妄念의 相應이 不斷하게 일어난다. 이 智相과 相續相이 함께 分別事識細分之位에 있으며 相應心에 속한다.317)
異相에 두 가지는 첫째 執取相이요 둘째는 計名字相이다. 이른바 이 무명은 앞의 染淨의 違順之法에 미혹하다. 더욱이 貪瞋人我見愛執相과 計名取著이 轉深함이 일어난다. 이것은 事識 分之位에 있다. 무명과 더불어 앞의 住相과 和合하여 그 淨心이 展轉하게 하여 (事識으로 하여금) 이(住相) 位의 行相이 점점 더 相에 이르게 하고 身口業이 점점 더 산란하게 움직여 그(事識으로 하여금) 業을 짓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異相이라고 한다.318)
滅相이라고 하는 것 한가지는 起業相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이 무명은 善惡의 두 業에 요달하지 못하여 반드시 苦樂의 두 가지 과보를 불러온다. 따라서 모든 緣을 널리 상대하는 것이 모든 業을 짓는 원인이 된다. 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것이니 滅相은 앞의 異相의 마음을 모든 六趣에 떨어지게 한다. 이 無明力이 그 淨心을 展轉하게 하여 以後의 時際에 行相을 가장 하게 함에 이르고 이것이 가장 極에 달하게 되어 두루 다함이 끝나는 것이니 이름하여 滅相이라고 한다.319)
法身菩薩들과 같이 念住相과 念無住相을 깨달아서 分別 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隨分覺이라고 이름한다. 第三位中 能觀人은 初地菩薩이 法身遍滿의 뜻을 證得하고 내지 九地까지 모두 다 같은 증득을 하는 것(보살들)이다. 이들을 다 法身菩薩이라고 이름한다. 念住를 깨달았다는 것은 앞의 四種의 住相을 깨달은 것이다. 비록 일체법이 오직 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밖에 (있는 대상에게) 妄靈되게 매인 한 집착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지만 (그 唯識의) 관찰에서 나온 후에 자기 마음이 나타나게 되는 法上에 오히려 染淨法執分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그 淨心이 無明으로 하여금 꿈의 住相을 쉬도록 하게 되어 이제 (淨心이) 無分別智와 더불어 相應하게 되니 住相의 꿈으로부터 覺悟를 얻는 것이다. (覺悟는) 住相을 돌이켜 비추어서 究竟에는 (住相이) 實有하는 바가 없다고 비추기 때문에 念住相과 念無住相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分別 念相을 여읜다는 것」은 利益을 관찰하는 것이 나타남이다. ( 念相을 여읜다는 것은) 앞의 人我執과 執著外境과 다르기 때문에 이제 마음을 가지고 다만 분별한다고 말한다. ( 念相을 여읜다는 것은) 또 뒤의 根本無明生相細念과 다르기 때문에 念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四種住相 가운데 初地 七地 八地 九地는 각각 一相을 여의는 것이다. 아래 글에서 자연히 나타날 것이다. 비록 念住相이지만 覺悟를 증득한 것이다. 오히려 生相의 꿈 가운데 道를 깨달았으나 아직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隨分覺이라고 말한다. 곧 觀分齊를 맺는다.320)
菩薩地盡과 같이 방편을 만족하여 一念에 初起心을 깨닫는 마음과 相應하여 初相이 없어 微細한 念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心性을 得見한 마음은 곧 常住하니 究竟覺이라고 이름한다. 第四位 가운데 「菩薩地盡」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十地의 覺이 窮極에 달하였기 때문에 盡이라고 한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들어 다음 二句로 辨別하여 밝힌다. 「方便滿足」은 方便道이다. 「一念相應」이라는 것은 無間道이다. 『對法論』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究竟道」라는 것은 金剛喩定을 말한다. 여기에 二種이 있다. 이른바 方便道攝과 無間道攝이다. 바로 이 가운데 能觀人이 있다. 「覺心初起者」라는 것은 所觀境을 든 것이고, 「心初起者」는 根本無明이 本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迷惑함이 그 淨心을 움직여 微細한 妄念이 일어나게 한다. 그 때 바로 本覺을 떠남을 깨달아 앎으로 不覺은 없다. 즉, 動心이 본래 寂靜한 것이다. 마치 방향에 迷한 것(사람)과 같다. 이른바 동쪽이 서쪽이 되었으나 깨달았을 때는 곧 서쪽이 동쪽이다. 더욱이 (이 때) 서쪽의 相은 없는 것이니 無初相인 마음이라고 한다.321)
지금 이 生相의 꿈이 다하고 無明의 風이 멈추고 性海의 파도가 쉬니 湛然하게 常住하기 때문에 心性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마음이 곧 常住하는 것이다. 「究竟覺」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미처 心源에 이르지 못하고, 꿈 같은 妄念이 다 멸하지 않아, 이 動하는 妄念을 滅盡하기를 求하고, 저 海岸에 도달하기를 희망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꿈 같은 망념을 모두 완전히 멸진하여, 心源은 본래 流轉하는 것이 아님을 완전히 깨달았다. 이제 비롯함이 없는 寂靜이 항상하고 一心으로부터 평등하고, 평등함은 처음부터 근본과 다르지 않으니 구경각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分齊를 終結한다.322)
또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알 수 있을 만한 初相이 없는 것이니 初相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거듭 해석하는 가운데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위 覺心이 初起하였다는 말에 대조한 것이지 깨달았을 때 初相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初相은 없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初相이 없는데 어찌 初相을 안다고 말하리요. 해석하여 말하기를 初相을 안다는 것은 곧 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방향을 깨달았을 때 서쪽으로 알았던 것이 곧 동쪽이니 도리어 서쪽의 相은 알 수 없다. 서쪽이라고 알았던 것이 곧 동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깨달았을 때 처음에 움직이는 망념을 아는 것이 곧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곧 無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323)
以上의 說을 종합하여 본논에 각주하여 보면,
始覺의 뜻은 (마음이) 本覺에 依支하므로 不覺이 있고, 不覺에 依支하기 때무에 始覺이 있다324)고 설한다. 그리고 (마음이) 心源325)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고 하고 心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究竟覺이 아니라326)고 한다. 이것은 어떠한 뜻인가? 범부들은 한 순간 앞에 일어난 악한 생각을 알기 때문에 다음 순간에 그 악한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것을) 비록 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바르게 깨달은 것은 아니다. 二乘의 觀智와 初發意菩薩과 같은 사람들은 念異를 깨달아서 無異相을 想念함으로써 分別執著相을 버렸기 때문에 相似覺이라고 이름한다. 法身菩薩327)과 같은 사람들은 念住328)를 깨달아 無住相을 想念함으로써 分別 念相329)을 여의었기 때문에 隨分覺330)이라 이름한다. 菩薩地盡331)에서 (보살은) 방편을 만족하여서 一念一念에 覺心과 相應하여 無初相한 마음을 처음으로 일으킨다. 이로써 微細한 妄念332)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心性을 보게 되어 (오직 청정한)마음이 곧 常住하니 이름하여 구경각이라고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經333)에서 "만약 어떠한 중생이 능히 無念을 觀할 수 있다면 바로 佛智를 向함이 된다"고 설하였다.334) 또 (佛智를 향하는)마음이 일어난다335)는 것은 初相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初相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無念을 말하는 것336)이다. 이러하므로337)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念念이 상속하여 아직 妄念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無念을 얻게 되면338) 心相이 生住異滅임을 알게 되니 無念과 같기 때문이며339) 실로 始覺의 차별이 없어지게 된다.340) 왜냐하면 四相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모두 다 自立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覺과 같기 때문이다.341)
라고 설한다. 다시 해석하여 보면, 始覺은 眞妄和合識인 아리야식에 覺과 不覺의 뜻이 있고 覺의 뜻에 本覺과 始覺의 二種으로 구별함에 의한 것이다. 始覺은 깨닫는 작용에 대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心源을 깨닫는 것」을 究竟覺이라고 하고 究竟覺 以前의 始覺을 非究竟覺이라고 한다. 이 非究竟覺에서 究竟覺까지의 始覺의 修行段階를 四位로 나누어 설명한다. 즉, 不覺 相似覺 隨分覺 究竟覺의 차례이다. 이 修行段階를 끊어야 할 번뇌의 입장에서 滅相, 異相, 住相, 生相의 四相으로 나누어 위의 차례대로 배대하고 있다. 이 生住異滅의 四相은 소승불교에서 有爲法이 一刹那에 경과하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유위법의 相으로 설명하는 것이나 本論에서 이것을 借用하여 번뇌를 끊는 位로 표시하고 있다.
第一段階는 「不覺」이다. 이는 凡夫 中에 佛敎內의 범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十信의 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三寶에 대하여 믿음을 확립하고 因果의 도리를 확실히 믿기 때문에 앞의 찰나에서 일어난 마음이 멸한 후에 그 마음이 身三 口四 일곱 가지의 滅相인 惡이었음을 깨달아 다음 생각에 같은 惡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것을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과 비교하여 보면 外部人은 因果를 믿지 않으므로 惡을 지어도 반성이 없기 때문에 惡한 마음이 깊어지게 되는 것에 비교하면 三寶를 믿고 因果法則을 믿는 佛子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惡을 抑制하기는 하였지만 惡이 일어나는 原因인 煩惱를 끊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第一段階는 아직 「不覺」이라고 한다.
第一段階의「不覺」의 계위에서는 분별사식이 작용한다. 分別事識이라고 하는 것은 意識(六識)을 말하는 것342)으로 外界가 보는 바대로 존재한다고 認識하는 작용이다.343) 凡夫의 일상적인 인식작용이다. 이 인식작용을 제6식인 分別事識이라고 하고 이 분별사식에 의하여 자기의 인식내용을 결정하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佛을 應身佛이라고 한다. 이러한 凡夫 중생은 唯識의 理致를 조금도 모르는 까닭에344) 자기가 인식한 대상이 마음의 深層의 작용인 轉識이 나타난 것인 줄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345) 그래서 물질세계에 대한 차별을 취하기 때문에 참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346)
물질세계에 대한 차별을 취한다는 것은 외계에 보는 바대로 사물이 존재한다고 분별사식(六識)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별사식의 인식은 32相 80種好를 갖춘 應身佛이 외계에서 자기에게 와서 加被를 준다고 믿는 것이다.347) 이것은 자기의 주관적인 인식작용에 의하여 불타가 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348) 그 불타에 의하여 자기가 引導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범부 이승이 보는 것에는 分齊의 色이 있지만 사실은 分齊의 相을 떠나야 함349)을 깨닫지 못하여 "色의 分齊를 취하여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350)라고 말한 것이다. 이 『기신론』중에서는 六道의 차별의 相이 있는 것으로 아는 범부와 二乘이 보고 느끼는 불타를 應身이라 하고 十解 이상의 보살이 보는 分齊를 여읜상을 報身이라고 한다.351) 그리고 이는 性淨本覺의 始覺의 지혜이다. 이 지혜의 힘은 '眞如의 無量功德相'에 의하여 應身과 化身을 나타내는 것이다.352) 그리고 이 진여의 무량성공덕은 常住하므로 이에 의한 응신과 화신은 중생즉불의 用이다.
第二段階는 身三口四의 滅相을 멀리 여의고 얻은 깨달음이 「相似覺」이다. 相似覺을 얻은 聲聞乘과 緣覺乘을 異相位에 있는 三賢菩薩이라고 한다. 이 삼현보살은 제6식인 분별사식을 여의고, 제7식의 작용인 貪欲, 瞋 , 愚痴, 驕慢, 疑心, 邪見 등의 번뇌를 끊기 위한 수행을 한다. 따라서 이 수행은「妄念의 異相을 깨닫기」위한 것이다. 삼현보살은 수행을 통하여 貪欲이나 瞋 등의 추한 번뇌와 自我의 執著을 떠나 我空은 깨달았으므로 覺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살은 아직 法空을 알지 못하므로 覺은 覺이지만 참된 覺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相似覺이라고 한다.
十解에서 菩薩盡地까지의 보살은 완전히 唯心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353) 자기가 보는 것은 唯識의 所現이라고 통달하고 있기 때문에 轉識과 現識이 작용하기 以前에 業識에 의하여 佛身를 보는 것이다.354) 唯識의 도리를 아는 이 보살은 바로 色分齊가 無分齊임을 아는 것이다.355) 無色分齊인고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 가(邊)가 없고, 毁損되지도 않고 損失되지도 않는 것이다.356)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은 모두 보살의 육바라밀의 깊은 수행 공덕에 의한 熏習과, 또 진여의 불가사의한 熏習이 성취하는 바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이름하여 「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살은 "무량한 樂의 相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報身이라고 한다."357) 十解(住) 이상의 보살이 보는 分齊를 여읜상을 報身이라고 하고358) 十住 十行 十廻向을 수행하는 보살을 삼현보살이라고 한다. 이 삼현보살이 十住 十行 十廻向을 지나 얻은 覺을 隨分覺이라고 한다.
第三段階는 「隨分覺」이다. 本覺의 작용을 받아 진리를 求하고자 하는 향상적인 마음이 일체법은 空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체법의 相은 완전히 唯心의 顯現이라고 깨달아 我癡 我見 我愛 我慢 등 法我見의 住相의 妄念을 조금이라도「離念」 하기 시작하면 그만한 分의 진여가 顯現하는 것이다. 이는 聖者인 法身보살의 段階인 初地의 修行階位에 오르는 것이고, 이것을 참된 始覺의 第一步라고 할 수 있다. 始覺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初地에서 第十地에 이르는 사이에 住相을 완전히 깨달아 멸하게 된다. 住相을 깨달아 滅하는 것은 唯心을 깨달은 참다운 覺은 覺이지만 완전히 성숙한 覺은 아니므로 부분적인 覺이라고 하여 隨分覺이라고 한다.
그러나 地上菩薩은 淸淨心을 증득한 보살이다. 청정심을 증득하는 보살은 業識을 점차 떠나기 때문에 畢竟 아무른 相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初地에서 十地에 이르기까지 業識이 점차 소멸되기 때문이다. "淨心菩薩은 初地에서 미세한 작용을 보지만 점차 더욱 수승하게 되어 보살의 究竟의 境地 속에서는 미세한 것을 보는 일이 바야흐로 없어진다. 이 미세한 것이 보일 때의 작용이 受用身인 것이다. 業識이 있음으로서 受用身을 보지만, 만일 業識을 여의면 바로 보여짐이 없는 것이다. 일체의 여래는 모두가 法身으로서 피차의 차별적 色相을 서로간에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359)라고 하고 있다. 초지보살은 차례로 정진하여 第十地에 이르게 됨에 따라 業識은 점점 미세하여 져, 보살 究竟地인 金剛喩定에 이르러 究極의 法身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究極의 法身을 본다는 뜻은 菩薩盡地에서 業識이 완전히 消滅되어 心源에 돌아와 佛을 이루어 보는 물건도 보여지는 물건도 없는 평등한 진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러心이 受用身(報身)이 되었을 때(多佛) 受用身과 所住處가 각각 다르지만 서로 장애됨이 없고 단절함이 없는 이치(多佛卽一佛)는 진여의 자유자재한 작용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第四段階는 최후의 菩薩地의 最後段階인 十地 혹은 無垢地(菩薩盡地)의 滿心은 金剛喩定에서 가장 미세한 번뇌를 끊기 위하여 완전한 방편을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번뇌를 끊을 無間道의 一刹那에서 始覺은 本覺에 歸入하는 것이다. 이것을 「一念相應」이라고 한다. 일념상응은 망심이 일어나는 初相을 즉시 覺知하여 斷絶하는 一念이 상속하는 것이다. 初相이 단절되는 찰나 곧 無念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初相을 단절하는 一念의 상속은 곧 無念의 一心이 상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때 始覺은 本覺과 合一 되는 것이다. 本覺과 合一된 始覺을 心의 根源에 돌아간 것이라고도 표현하고, 自性淸淨心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때 發現된 自性淸淨心은 自然業力을 發揮하여 心性을 나타나게 한다. 이 때 心性은 마음의 無分別智를 가리키는 것이며, 無分別智에 이른 마음에는 生滅하는 마음은 없어지고 常住하는 마음만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始覺은 완성된 시각으로 本覺과 합일 된 것이므로 究竟覺이라고 하고, 隨分覺位의 行者는 報身佛이며 구경각은 법신불이다. 究竟覺을 성취한 行者는 법신불로서 법신 응신 報身佛로 자유자재로 화하여 중생구제를 하는 것이다.
佛智(法身佛)의 세계에서는 主客이 分裂되지 않음으로 何等의 先入見이 없으며, 偏見이 없는 無分別智로 法이 있는 그대로 응하여 바른 지혜의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 佛의 세계를 大海의 海面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이는 것과 같다고 하여 『화엄경』에서 이것을 海印三昧라고 부른다.
覺과 不覺, 無念과 有念, 四相과 本覺, 始覺과 本覺의 本性은 마치 파도와 바닷물의 本性이 같은 것처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다고 한다. 이것은 현실의 범부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佛의 立場 혹은 本性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므로 煩惱卽菩提 地獄卽涅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와 같이 범부의 본성과 佛의 本性이 평등함을 믿고 범부로 하여금 발심하여 始覺의 수행을 一念으로 行하여 자기의 本性으로 還歸할 것을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義疏』, 『기신론소』『大乘起信論別記』, 『大乘起信論義記』에서 한결 같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生相의 業識이 소멸하면 湛然하게 常住하는 心性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마음이 常住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究竟覺」이전에는 미처 心源에 이르지 못하고, 妄念을 다 멸하지 못하였지만 이 망념을 모두 완전히 멸진하여, 心源에 이르고 보면 心源은 본래 流轉하는 것이 아님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심원은 유전하는 것이 아니므로 상주하는 것이다. 상주하므로 중생의 업식이 작용하고 분별사식이 작용하더라도 상주하는 법신은 그에 응하여 항상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대승기신론』은 衆生卽佛觀을 세우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始覺을 마치고 本覺을 알아보기로 한다.
2) 衆生卽佛로서의 本覺
本覺은 개인의 自性淸淨心의 本性의 智慧를 의미한다. 여래장은 번뇌에 매인 법신이라고 하나 心性은 법신이다. 『대승기신론』의 法身은「理智不二」이다. 본각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理智中 智의 면에 重點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망화합식인 아리야식에는 覺과 不覺 혹은 不生不滅과 生滅이 화합하고 있으므로 覺은 아리야식을 여의지 못한다. 그러나 本覺은 아리야식이 불생불멸과 생멸과 화합한 것을 破하여 不生不滅에 歸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本覺의 이러한 면에서는 本覺은 아리야식을 破할 수도 있고 여의고도 存續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本覺을 본논에서는 隨染本覺과 性淨本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衆生卽佛로서의 隨染本覺
本覺이 染을 따라 작용하는 것을 분별하여 붙인 이름이 隨染本覺이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또한 다음으로 本覺이 染을 따르는 것을 분별하면 두 가지 相이 생긴다. 그렇지만 그 본각과는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는다. 그 두 가지 相은 첫째는 智淨相이고 두 번째는 不可思議한 業相이다. 智淨相이라는 것은 이른바 法力의 熏習에 의하여 진실 그대로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和合識의 相을 破하고 相續心의 相을 滅하여 법신을 나타내어 지혜가 淳朴하고 淸淨하기 때문이다.360) 이 뜻은 일체의 心識의 相은 모두 無明이고 無明의 相은 覺性을 떠나지 않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큰 바다의 물처럼 바람에 因하여 물결이 움직이니, 물의 相과 바람의 相은 서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은 動性이 아니다. 만일 바람이 멎고 없어지면 動相이 바로 멸하지만 습성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근본 성품인 청정심은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인다. 마음과 무명은 함께 形相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動性이 아니므로, 만약 무명이 멸하면 상속이 바로 멸하고 智性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361)
不可思議한 業相이라는 것은, 이 智淨相에 의지하여, 능히 일체의 勝妙한 경계를 만들고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相은 항상 단절함이 없으며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362)
라고 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그의『기신론소』에서 隨染本覺의 染相은 智淨相에 의하여 淨化되고 染相이 완전히 淨化되면 隨染本覺이 性淨本覺이 되며 不可思議業相이 작용하게 된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의 뜻에 따라 먼저 智淨相의 작용을 法喩合의 논리로 설명한 다음 不可思議 業相을 설명하고 있다.
①法: 「法力의 훈습」이란 진여법의 內熏하는 힘을 이른 것이다. 이 熏習하는 힘에 의하여 資糧을 수습하여 地上(初地 이상)의 여실한 수행을 내게 되며, 無垢地에 이르러 방편을 만족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和合識 내의 생멸상을 깨뜨리고 그것의 불생불멸의 본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和合識相을 깨뜨리고 법신을 밝혀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에 상속심 가운데의 業相.轉相을 없애어 그 隨染本覺의 마음으로 하여금 드디어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여 맑고 깨끗한 지혜를 이루게 하기 때문에 '相續心相을 없애어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相續心의 體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속심의 相을 없애는 것이라고 하며『십권능가경』의 구절을 인용하였다.363) 그리고 '일체 心識의 相이 모두 무명이다'라는 것은 業識.轉識 등의 모든 識의 상이 무명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라 모두 불각임을 이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모두 무명이다'라고 말한 것이며, 이와 같은 모든 識의 不覺의 相이 隨染本覺의 성질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覺性을 여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이 무명의 相이 本覺의 성질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다르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같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뜻에 의하여 말한다면 無明이 바뀌어 곧 明이 될 것이며, 만일 같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아닌 뜻에 의하여 말한다면 無明은 없어지더라도 본각의 성질은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글 가운데에는 같지 않다는 쪽에 의하기 때문에 '相續心의 相을 없앤다'라고 말한 것이다.
②譬喩 가운데에서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다'라는 것은, 지금 움직이는 것이 자성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것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자성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움직이는 상이 없어질 때에 젖는 성질도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다른 것(바람)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상은 비록 없어지더라도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③合중에 '無明이 없어진다'라고 말한 것은 본래의 무명이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바람이 없어진다'는 비유에 합한 것이고, '상속이 곧 없어진다'는 것은 업식 등이 없어지는 것이니 '움직이는 상이 없어진다'는 비유에 합한 것이며, '지혜의 본성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은 隨染本覺의 神解한 성질을 智性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비유에 합한 것이다.
不思議業相. 智淨相의 작용에 의하여 隨染本覺의 神解한 智性을 回復하게 되면 性淨本覺의 業用인 不思議業相의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相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利益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깨끗함에 의한다'는 것은 앞서 隨染本覺의 마음이 비로소 맑고 깨끗하여짐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始覺의 지혜이며, 이 지혜의 힘에 의하여 應身과 化身을 나타내기 때문에 '無量功德의 相'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金鼓經』에서 "應身이란 것은 無始로부터 생사가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의 不共의 法이 攝持할 수 있기 때문이며, 중생이 다하지 아니하는 지라 業用도 다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常住한다고 말한다"364)라고 하며, 『보성론』에서 "무엇이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인가? 해탈을 얻은 것을 말함이니, 煩惱障과 智障을 멀리 여의고 장애가 없는 깨끗한 법신을 얻는 것을 자신의 이익을 성취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이 他身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미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고 나서는 무시의 때로부터 자연히 저 두 종류의 佛身에 의하여 세간의 자재한 위력과 행위를 나타내는 것을 他身의 이익을 성취한다고 이름한다"365)라고 한 것과 같다.
묻기를, "비로소 자신의 이익을 얻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으면서, 어째서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을 無始라고 말했는가?" 설명하기를, "여래는 一念에 삼세를 두루 응하시니 所應이 시초가 없기 때문에 能應도 곧 시초가 없다. 이는 마치 일념의 원만한 지혜가 한없는 삼세의 경계에 두루 이르는 것과 같으니, 경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지혜도 한이 없고, 한없는 지혜가 나타내는 상이기 때문에 시작도 없게 되며 끝도 없게 되니, 이것은 心識의 思量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不思議業'이라고 이르는 것이다"366)라고 하였다.
『大乘起信論義記』에서 法藏은 『대승기신론』에서 「一切心識의 相은 모두 무명이다. 무명의 相은 覺性을 여의지 않아서 깨뜨릴 수 도 없고 깨뜨리지 못할 것도 없다」367)고 한 것을 法喩合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①法의 뜻은 業 等 染心을 諸識相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모두 不覺의 相이다. 그러므로 識의 相은 모두 無明이라고 한다. 그러나 心體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368) 이미 識相은 모두 무명이기 때문에 滅한다고 하는 것은 곧 別個로 있는 體性에 응하여 진여를 떠나는 것이므로 眞妄 別體가 되니 難解하다.369) 答하여 말하되 이 모든 識의 不覺의 相은 隨染本覺의 성질을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覺性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무명의 相은 그 본각의 本性과 더불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다르지도 아니하므로 깨뜨릴 수 없고, 같은 것이 아니므로 깨뜨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다르지 아니하여 깨뜨리지 않는 뜻에 의하면 無明이 곧 明이 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370) 『涅槃經』에서 설하기를 明은 無明과 더불어 그 本性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닌 性品은 곧 實性이다. 만약 같지 않기 때문에 깨뜨리지 않을 수 없는 뜻에 의하면 무명은 滅하고 覺의 본성은 깨뜨려지지 않는다. 迷惑을 滅하는 뜻도 이것에 준하여 알 수 있다.371)
②譬喩하면, 「大海와 같이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波動하는 것은 水相과 風相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에는 動性이 없기 때문에 바람이 멈추어 멸하면, (물의) 動相도 곧 사라지지만 (물의) 濕性은 깨뜨려지지 않는다.」372) 처음 句는 진여가 妄念에 따라 流轉하는 비유이다. 다음 물과 바람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진여와 망념이 서로 의존하는 비유이다. 물에는 動性이 없다는 것은 진여의 體는 不變하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自性(體)이 동하는 것은 아니나 단지 남을 따라 動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373) 「만약 바람이 멈추어 멸하면」이하는 妄念이 쉬면 眞如가 나타난다는 비유이다. 이것은 만약 (물의) 自性(體)이 動한다면 (물의)動相이 滅할 때 (물의)습성도 따라 멸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다른 것(바람)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므로 (물의)動相이 멸할 때 (물의)습성은 깨뜨려지지 않는 것이다.374)
③合에 관하여는 『대승기신론』에서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도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일 때 마음 더불어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앉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375)라고 하였다.
위『대승기신론』중에, 처음의 「自性淸淨心」은 바다에 會合한 것이다. 「무명의 움직임으로 인하여」는 바람이 물을 일으켜 물결을 이루게 하는 것과 그 의미가 회합한다. 이 물은 스스로 물결일 수가 없고 반드시 바람으로 인하여 물결이 일어난다. 바람은 스스로 動相을 나타낼 수 없고 반드시 물을 의지하여야 바야흐로 (바람의)動相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이 곧 물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이 別個의 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狀況은 다 알 수 있을 것이다.376)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의지한다는 뜻에 회합한다. 濕氣가 완전히 動하기 때문에 水相이 없는 것이요 움직이는 것이 완전히 濕氣 이기 때문에 風相이 없는 것이다. 心法도 역시 이와 같다. 眞心의 熏習에 따라서 완전히 識의 波浪을 짓기 때문에 心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識의 波浪이 眞如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無明의 相이 없다.377)
그러므로 『섭론』에서 이것을 보면 저것을 못 본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分을 보면 나머지 分性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 生死 때문에 열반을 보지 못하고, 열반 때문에 생사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378)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물에 動性이 없다고 하는 비유와 회합한다. 「무명이 멸한다」는 것은 근본무명이 멸한다는 것으로 바람이 멸한다는 비유에 회합한다. 「상속이 멸한다」는 것은 業識 등이 멸한다는 것으로 動相이 멸한다는 비유와 회합하는 것이다. 「智性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隨染本覺이 비추어 관찰하는 성품으로 물의 습성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 비유에 회합된다.379)
「不思議業相이라는 것은 智淨相에 의지하여 능히 일체 수승하고 교묘한 경계를 짓는 것이다」380) 이른바 중생과 더불어 六根境界를 짓기 때문이다. 『寶性論』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의 如來身은 虛空과 같이 無相하여 모든 殊勝한 智者가 짓는 六根境界가 되어 미묘한 물질의 色을 나타내고 미묘한 音聲을 나오게 하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붓다의 戒香의 냄새를 맡게 하고 더불어 붓다의 미묘한 法의 맛을 보게 하여 三昧의 觸을 깨닫게 함으로서 깊고 미묘한 法을 알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묘한 경계」라고 이름한다.381)
「소위 무량한 공덕의 상은 항상 단절함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여러 가지로 상응하여 이익을 얻도록 나타난다」382) 여기에 四句가 있다. 첫째 가로로 業德이 광대하고 무량함을 나타내고, 둘째 세로로 業根이 未來際가 다하도록 깊음을 나타내고, 셋째 業이 殊勝하여 자연히 중생의 근기에 응함을 나타내며, 넷째 業이 殊勝하여 그 利益이 潤澤함이 허망하지 않음을 나타낸다.383)
이와 같은즉 이 報身과 化身 二身의 眞如 大用은 無始無終 상속하여 不絶하기 때문에 『金光明經』에서 설한 바와 같이 應身은 無始로부터 生死의 相續을 不斷하게 하기 때문에 일체 諸佛이 不共法을 능히 攝持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業用을 다하지 아니하고 또 다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常住한다고 설한다.384)
『寶性論』에서 설하기를 어떤 것이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른바 해탈을 얻는 것이고, 煩惱障과 所知障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障 가 없는 淸淨法身을 증득하는 것을 이름하여 자신의 利益을 성취한다고 한다. 어떠한 것을 他身의 利益을 성취한다고 하는가. 이미 자신의 이익을 성취함을 마치고 無始로부터 세상에 와서 자연히 그 二種의 佛身에 의지하여 세간에 自在力行을 示現하니 이름하여 他身의 利益을 成就한다고 한다.385)
묻는다, 먼저 자신의 이익을 얻고 난 다음 비로소 利他業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利他도 無始로부터라고 설하는가. 答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여래는 一念에 三世를 두루 應한다. 그 所應處가 無始이기 때문에 能應者도 곧 無始이다. 마치 一念에 원만한 지혜가 無邊한 三世之境에 遍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지혜 또한 無邊하고 無邊한 지혜로 나타나는 相이기 때문에 無始에 得한 것이고 또 능히 無終이다. 이것은 心識이 사량하여 測定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不思議業」이라고 이름한다.386)
둘째, 이 無明이 다하기 때문에 始覺이 곧 本覺이다. 그러나 그 本覺은 無始이래 세상에 와서 항상 業用을 일으켜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始覺은 그것(本覺)과 같다. 그러므로 無始이다. 이로서 一切佛이 無差別이기 때문에 新舊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始覺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본각은 평등하여 無始無終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항상 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이 진여의 業用이기 때문에 「不思議業」이라고 한다387)고 賢首法藏은 설한다.
이상 원효의 『기신론소』와 현수의 『大乘起信論義記』를 대조하여보면 현수의 것이 원효의 것과 대단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정리하여 본면 隨染本覺은 本覺이 染을 따라 작용하는 것을 분별하여 붙인 이름이다. 『대승기신론』의 원문을 살리기 위하여 각주로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다음으로 本覺이 染을 따르는 것(本覺隨染)을 분별하면 두 가지 相이 생긴다. 그렇지만 그 본각과는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는다. 그 두 가지 相은 첫째는 智淨相388)이고 두 번째는 不可思議한 業相389)이다. 智淨相이라는 것은 이른바 法力의 熏習390)에 의하여 진실 그대로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和合識의 相을 破하고391) 相續心의 相을 滅하여392) 법신을 나타내어393) 지혜가 淳朴하고 淸淨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일체의 心識의 相은 모두 無明이고394) 無明의 相은 覺性을 떠나지 않아395)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396) 이는 마치 큰 바다의 물처럼 바람에 因하여 물결이 움직이니, 물의 相과 바람의 相은 서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은 動性이 아니다.397) 만일 바람이 멎고 없어지면 (물의) 動相이 바로 멸하지만 습성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근본 성품인 청정심은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인다. 마음과 무명은 함께 形相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動性이 아니므로, 만약 무명이 멸398)하면 상속이 바로 멸399)하고 (마음의 動性은 멸하나) 智性은 무너지지 않기400) 때문이다. 不可思議한 業相이라는 것은, 이 智淨相에 의지하여401), 능히 일체의 勝妙한 경계를 만들고402)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相은 항상 단절함이 없으며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403)
이상 원효의 疏와 현수의 義記를 정리하여 보면, 隨染本覺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에 따르는 본각이라고 하지만 실은 번뇌에 따르는 본각이라기 보다 번뇌에 본각의 힘을 발휘하여 본각이 번뇌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隨染本覺에는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이 있다. 智淨相은 本覺의 智에 의하여 染이 淸淨해 지는 相이다. 즉, 智淨相은 번뇌를 離脫하여 成佛하고자 하는 上向的인 작용을 하는 本覺이고, 不思議業相은 여래의 법신이 응신·화신으로 나타나 衆生救濟를 위하여 下向的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相이다. 이는 自然業이 발휘하는 것이므로 범부에게는 不思議한 것이다. 智淨相은 始覺의 智가 不覺 가운데 나타나 漸次로 智의 작용을 增加하여 결국 本覺과 合一하는 것과 똑 같은 形相을 보인다.
먼저 智淨相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면 인간에게는 「向上하고자 하는 本性」이 있다. 이 本性이 「向上하고자 하는 願」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本覺(法身佛 衆生卽佛)의 작용이다. 이것을 眞如의 內熏이라고 한다. 더욱이 밖으로부터는 佛菩薩 등이 善知識이 되어 중생을 가리키고 指導하여 外部로부터 覺의 作用을 誘發한다. 이것이 眞如의 외부의 힘이다. 이 內熏力과 外熏力을 法力熏習이라고 한다.
이 「法力熏習」은 本覺의 힘이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는 불교 내의 범부나 二乘 三賢位의 보살 등 地前의 단계의 行者의 本覺의 활동을 말한다. 이로부터 더욱이 進展하여 初地以上의 行者의 本覺을 「如實修行」이라고 한다.
「如實修行」은 진리에 합치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은 無垢地의 滿位까지를 말한다. 無垢地의 滿心에서 일체의 방편이 완전히 충만하여 진다. 이것을 「方便滿足」이라고 한다. 이 滿心의 金剛喩定에서 최후의 번뇌를 끊으므로 이 때 妄念의 根源 즉 心源을 達觀하여 아리야식이라고 하는 和合識의 相을 破하여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하고 있는 상태가 없어지고 不生不滅의 性을 나타낸다. 이것에 의하여 根本無明이 끊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根本無明으로부터 轉依하여 業識·轉識·現識 등 迷惑한 생활을 展開하게 하는 「相續心」의 相이 멸한다. 즉, 「方便滿足」까지는 本覺의 向上門이고, 「相續心을 滅하는 것」은 下向門이다. 이것에 의하여 心性은 번뇌로부터 離脫하여 法身의 작용이 현현하여져 迷惑한 생활이 解消되고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어 智가 淳淨하게 된다. 이것이 本覺의 智淨相이고 報身佛 즉 중생즉불의 業用이다.
和合識에 불생불멸과 生滅이 화합하고 있는 것을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本覺은 如來藏으로부터 나타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아리야식 내의 生滅心을 否定한다. 이 생멸심은 무명의 작용으로 생긴 相續心 등과 같이 일체의 心識이다. 이들은 아리야식의 일체 心識의 相으로 妄分別이 나타나는 無明의 相이다. 이 무명의 相은 不生不滅心의 性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相과 性이 구별된다는 것은 무명의 相이 본각의 性에 의지하여 유지하고 繁盛하는 것이지 本覺과 無明의 體가 따로 있거나 혹은 同一한 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멸하면 心識의 작용이 멸하므로 생멸심이 멸하지만 생멸심이 멸하기 때문에 동시에 不生滅心이 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본론에서 「無明의 相은 覺性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覺性은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각과 무명의 관계를 覺과 不覺의 관계로 볼 때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始覺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입과 몸으로 짓는 滅相을 아는 첫단계의 內凡夫는 外凡夫에 비하여 覺이지만 번뇌를 끊은 것은 아니므로 不覺이라고 불렀다.
第二 相似覺은 내범부가 身三口四 滅相을 깨달아 앞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을 알아 뒤에 다시 잘 못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 覺은 覺이지만 탐진치로 인한 번뇌를 끊은 것은 아니므로 相似覺이라고 한다. 이 相似覺을 이룬 보살은 十信을 성취하고 十住의 初位에서 시작하여 十住 十行 十廻向의 30계위를 성만할 때 까지 貪瞋癡慢疑見 六異相을 소멸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三賢菩薩이다.
智淨相은 소멸해야할 대상인 번뇌와 본성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번뇌와 본성의 관계에 대하여 일반 범부들은 煩惱가 自己自身이라고 생각한다. 그 以外에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체험에서 자기의 本性은 佛性이라고 하는 것을 肯定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覺(本性)과 不覺(번뇌)의 관계는 번뇌가 멸하여 覺으로 變化해 가고 轉化해 가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本『論』에서 "無明이 覺性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 것을 『기신론소』에서 「무명의 相이 본각의 性과 非一非異」의 관계에 있으며, 非一非異의 관계에 있으므로 「非異故非可壞 而非一故非不可壞」라고 한다. 그리고 왜 깨뜨리고 혹은 왜 깨뜨려지지 않는가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기신론소』에서는 이것은 無明과 覺性의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無明과 明의 사이에서는 無明卽明이라고 하는 관계와 無明과 明은 다르다는 二種(非一非異)의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表像的으로 분별하여 아는 것이지만 實際는 非一非異의관계도 초월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無明과 本覺과 阿梨耶識의 관계를 本論에서는 風과 海水와 波濤의 관계로 나타낸다. 『기신론소』에 의하면, 大海의 水가 風에 의하여 波動하는 것에 眞如가 妄念에 따라 展轉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다음 「水相과 風相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眞如와 妄念이 相依관계에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다음 「水에 動性이 없다」고 하는 것은 眞如의 體가 不變함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 바람이 止滅하면 海水의 動相은 멸하지만 그 濕性이 깨뜨려지지 않는 것은 妄念이 止息하면 진여가 顯現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本覺이 無明의 風에 의하여 아리야식이 된 점을 水와 風과 波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 波는 水와 風이 하나가 된 상태이다. 이것에 의하여 無明과 本覺이 非異인 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水는 動性이 아니라고 하여 無明과 本覺은 非一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아리야식에 있어서 본각의 작용은 遺失되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무명이 멸하면 業識 등의 相續識이 滅하여 智性만이 顯現함을 뜻한다. 즉 智性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성청정심의 존재는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자성청정심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론에도 「마음과 무명은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설하였다. 우리가 자기의 아리야식을 반성하여 보면 그 곳에 형상이 없는 무명과 자성청정심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에 가면 자성청정심은 볼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무명도 궁극에는 보여지는 것이다. 무명이 궁극에 보여지면 동시에 자성청정심도 궁극에는 보여지는 것이다. 궁극에 본다는 뜻은 밝음을 얻는다는 뜻이므로 그 곳에는 무명은 없는 것이다. 반면에 隱隱하게 있는 자성청정심이 밝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契機가 眞如(法身佛)의 內熏과 佛菩薩의 外熏인 法力熏習이다. 이상이 智淨相에 관한 설명이다.
다음 不思議業相은 本覺의 智가 淸淨하여졌음으로 不思議 業相이 나타난다. 法身의 智, 智淨相에 근거한 應身佛 報身佛의 중생 구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大乘起信論義記』에는 이것을 「還淨本覺業用의 相」이라고 표현하고, 『기신론소』에는 「始覺의 智」라고 표현하고, 本論에서는 「能作一切勝妙境界」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불타의 작용에 있어 佛이 구족한 무량의 공덕은 단절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중생의 機根과 能力에 應하여 佛이 하는 敎化의 作用은 自然任運하여 相對의 能力에 적합한 방법으로 實施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變化身을 나타내어 중생에게 이익되게 한다. 이 不思議業相은 진여의 外熏의 業相이다.
「소위 무량한 공덕의 상은 항상 단절함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여러 가지로 상응하여 이익을 얻도록 나타난다」404)고 하는 것은 法身은 항상 단절함이 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상응하여 이익을 얻도록 나타난다는 것은 곧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다. 「여래는 一念에 三世를 두루 應한다. 그 所應處가 無始이기 때문에 能應者도 곧 無始이다. 마치 一念에 원만한 지혜가 無邊한 三世之境에 遍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지혜 또한 無邊하고 無邊한 지혜로 나타나는 相이기 때문에 無始에 得한 것이고 또 능히 無終이다. 이것은 心識이 사량하여 測定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不思議業」이라고 이름한다.」405)고 하는 것은 법신은 一念에 三世를 두루 應하고, 이 일념에 원만한 지혜가 무변한 삼세지경에 편달한다. 무변한 지혜는 중생이 無始에 득한 것이고 또 능히 無終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중생즉불관을 세우고 있다. 「無明이 다하기 때문에 始覺이 곧 本覺이다. 그러나 그 本覺은 無始이래 세상에 와서 항상 業用을 일으켜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始覺은 그것(本覺)과 같다. 본각은 평등하여 無始無終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항상 중생을 교화한다.」406)고 하는 설도 결국 중생즉불이 중생을 교화한다는 觀이다. 이제 隨染本覺의 설명을 마쳤음으로 性淨本覺을 살펴보고자 한다.
(2) 衆生卽佛로서의 性淨本覺
앞에서 "智淨相이라는 것은 이른바 法力의 熏習에 의하여 진실 그대로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和合識의 相을 破하고 相續心의 相을 滅하여 법신을 나타내어 지혜가 淳朴하고 淸淨하기 때문이다."407)라고 하여 지혜가 순박하고 청정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수행을 하여야 하고 진실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수행자 생각대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법력훈습에 의한 수행이어야 함을 설하고 있다. 이제 법력훈습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覺體相이라는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①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法이 없는지라 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②因熏習鏡이니, 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다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타나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染法이 능히 더럽힐 수 없으니 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無漏를 구족해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③法出離鏡이니, 不空法이 煩惱 와 智 를 벗어나고 和合相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④緣熏習鏡이니, 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善根을 닦도록 하여 念에 따라서 나타내기 때문이다.408)
라고 설한다. 이 부분의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또한 다음으로 깨달음의 상에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으며, 청정함이 허공처럼 밝은 거울이다. 첫째는 진실의 공의 큰 뜻이되, 허공처럼 밝은 거울로서, 이른바 일체의 마음과 경계의 상 및 깨달음의 상이 모두 다 파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실의 不空의 큰 뜻이되, 허공처럼 밝은 거울로서 일체의 법은 원만히 성취되고 능히 자성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일체 세간의 경계의 상이 모두 그 속에 나타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상주하는 한마음인 것으로 일체의 염법이 능히 오염시킬 수 없는 바인 것이다. 지혜의 체는 가(끝) 없는 무루의 공덕을 다 갖추어서 因으로 되어 일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진실의 不空이 障 를 여읜 큰 뜻이되, 허공처럼 밝은 거울로서 이른바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를 영원히 단절하고 화합식을 멸하여 본성이 청정하고 항상 安住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진실의 불공이 示現하는 큰 뜻이되, 허공처럼 밝은 거울로서, 이른바 장애법을 여읨에 의하여 모든 곳에 응화하고 여래 등의 여러 가지 색과 소리를 나타내어 그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수행하게 하기 때문이다.409)
라고 설하였다. 『대승기신론』의 「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 與虛空等 猶如淨鏡」에 대하여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셋째로 총괄하여 理體를 標하였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간략하게 표한 것이고 둘째는 무엇이 네 가지인가를 별석하였다. 그리고 또 각체상이라는 것은 마치 앞의 본각상이라는 것, 즉 체상이다. 相中에 相이 아니다. 四大義가 있다고 하는 것은 同一體 中에 뜻을 따라 넷으로 나눈 것이다. 체를 넷으로 별석하는 것은 아니다. 「허공과 더불어 같다 與虛空等」는 것은 이 법성이 허공이다. 이 네 가지로 표현한 것은 殊勝하고 劣等한 差異가 없는 것이 같다. 「청정한 거울과 같다 如淨鏡」는 것은 청정하여 汚染이 없는 것에 비유한 것이고, 또 無障 한 것에 相入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410)
『대승기신론』의 「云何爲四 一者如實空鏡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 非覺照義故」에 대하여 혜원은,
다음에 別釋한다. 이 四種 가운데 하나하나 中 이름을 세워 바로 解釋한다. 「如實空鏡」이라는 것은 마치 앞의 眞如와 같다. 「遠離心鏡無法現」이라는 것은 진여에 대하여 오직 진여를 바라보고 마치 본래 망념이 없는 것 같이 세우기 때문이다. 經에서 說하기를 부처가 중생을 濟渡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非覺照義故」는 비록 一體이지만 心法은 같지 않다. 마음을 가리키어 法不生이라고 말하는 것은 眞諦의 理致를 알기 때문이다. 覺照上에 法性이 空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곧 말한다.411)
『대승기신론』의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不出不入不失不壞 常住一心以一切法 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 具足無漏熏衆生故」에 대하여 혜원은,
「因熏習鏡」이라는 것은 眞心을 말한다. 因에 의하여 이 마음이 연하여 비추이는 熏習이므로 因熏習이다. 「一切世間悉中現」은 일체제법은 마음이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근본 가운데서 나타나지만 나타나는 것은 곧 體속에서 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不出」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 無邊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不出」밖에 나타나는 體 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雜多한 散亂心은 一相이기 때문에 「不入」이라고 한다. 이 「不入」 때문에 妄法이 敗亡한다. 그러므로 「不失不壞」라고 말한다. 어떤이는 眞法에 관하여 설하기를 絶言 離相 超外衆物 하니 有無를 여의지 아니하기 때문에 「不出」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有無를 여의지 아니하니 有無가 아니기 때문에「不入」이라고 한다. 따라서, 經에서 설하기를 비록 陰界에 들어가 있더라도 陰界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지 않다. 이 萬像밖에 잃을 것도 깨뜨려 질것도 없기 때문에 「不失壞」라고 한다. 이것이 어떠한 물건인가? 「常住一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고? 일체는 「眞實性」이기 때문에 無法 不眞이다. 또 「一切染法不能」이라는 것은 心體가 常住하기 때문에 汚染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용의 뜻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智體不動」이라는 것은 汚染하지 않는 理由를 해석한 것이다. 「具足無漏熏衆生」이라는 것은 淨法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暗暗裡에 중생을 도와 중생으로 하여금 善行을 닦도록 하는 것이다.412)
『대승기신론』의 「三者法出離鏡謂不空法 出煩惱 智 離和合相淳淨明故」에 대하여 『大乘起信論義疏』에서 慧遠은,
「法出離鏡」이라는 것은 智淨相과 같은 것이다. 진법이 번뇌와 의혹의 장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出離」라고 한다. 「不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하강의 모래알처럼 淨法이 湛然하고 圓滿하기 때문이다. 「煩惱 」는 번뇌장과 같고, 「智 」라고 하는 것은 智障과 같다. 모든 의혹은 비록 많지만 二障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뜻은 아래 二障 중에 상세하게 분별하였다. 「離和合相淳淨明」은 六七識의 心相을 여의는 것이다.413)
『대승기신론』의 「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 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에 대하여 혜원은,
「緣熏習鏡」은 위에서 說한 不思議業相과 같다. 智慧에 緣하여 修習하기 때문에 「緣熏習」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依法出離」는 體에 依持하여 相과 用이 일어나는 것이다. 「遍照衆生心令修善」은 報佛이다. 「隨念示現」은 應佛이다. 이 넷 중 앞의 둘은 理이고 뒤의 둘은 行이다. 理行이 모두 밝음을 갖추므로 無餘無上이다.414)
이라고 하였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이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다음에는 자성의 청정한 본각의 相을 밝힌다. 그 속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풀이다. 처음것 속에서 "虛空과 같다 與虛空等"라는 것은 두루 다 미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청정한 거울과도 같다 猶如淨鏡"라는 것은 때(垢)를 여의고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四種義 中에서 ①如實空鏡과 ③法出離鏡은 때를 여의었다는 뜻에 의거하여 맑은 거울에 비유하였고, ②因熏習鏡(如實不空)과 ④緣熏習鏡은 現像을 나타낸다는 뜻에 의거하여 역시 맑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415)
個別的인 解釋 중에는 개별적으로 네 가지를 나타냈다. 그 속에서 앞의 두 가지는 因性을 살폈으며 그 나중의 두 가지는 果地를 살핀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空과 智慧를 밝혔으니, 이는 『열반경』에서416) 말한 것과 같다. "佛性이라는 것은 第一義空이며, 第一義空을 智慧라고 이른다. 지혜 있는 사람은 空과 더불어 不空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空과 더불어 不空을 모른다"라고 하고 나아가서 자세히 설하였는데 지금 이 처음 것 속에서, 「모든 마음의 境界相을 멀리 여의었다 遠離一切心境界相」고 말한 것은 곧 『열반경』의 第一義空을 나타낸 것이다.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覺照의 뜻이 아니다 無法可現 非覺照義」라고 한 것은 "空과 더불어 不空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417)
두 번째 속에서 「一切世間의 경계가 모두 다 그 속에 나타난다 一切世間境界悉於中現」고 말한 것은 이것이 저 『열반경』의 "지혜 있는 자는 空과 더불어 不空을 안다"고 한 것을 풀이한 것이니, 이는 『열반경』에서 "空이라는 것은 일체의 生死이고, 不空이라는 것은 대열반을 이르기 때문이다"418)라고 한 것과 같다. 이 (『기신론』)중에서는 다만 生死의 경계를 나타낼 뿐으로 이미 거울에 나타났으니 "거울을 「나오지 않으며 不出」 또한 汚染하지도 않는다 不染"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들어가지 않는다 不入」고 말했다. 모든 곳에 모습을 나타내고 똑같이 本覺을 헤아려서 허공계와 같고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두루 다 미치는 것이니 따라서 순간 순간이 없어짐이 없고, 또한 다 멸하여 버리는 무너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없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不失不壞 상주하는 한마음이다 常住一心」등으로 말한 것이다. 이때까지 그 청정한 거울의 뜻을 밝혔다.419)
세 번째 것속에서 「두 障碍에서 벗어나 순박하고 청정하고 밝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앞에서 설한 因熏習鏡을 밝힌 것인데 纏縛에서 벗어났을 때에 法身이 된다는 것이다.420)
네 번째 중에서 「法에 의지하여 出離하는 까닭으로 두루 중생의 마음에 다 비춘다 依法出離故 照衆生心」고 말한 것은, 곧 저 本覺이 나타날 때에 중생의 근기를 똑같이 비추어 온갖 교화를 나타내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중생의 생각에 따라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다.421) 이것은 앞에서 설한 「不思議業」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면, 그(不思議業)것은 應身의 始覺의 業을 밝힌 것이며, 이것(性淨本覺)은 본각으로서의 法身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의 敎化가 일어남에 따라 이 두가지 뜻이 있게 된다. 총괄하여 말하면 그러하지만 그 속을 분별하여 본다면 만일 始覺이 일어나는 쪽으로 논한다면 緣의 상속에 따라서 利益을 얻게 하니, 그 근본인 隨染本覺은 종래 서로 관계되어서 親疎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本覺이 나타낸 쪽으로 논하면 널리 모든 중생의 機根의 成熟한 정도에 따라 널리 利益되게 하여 (연의)상속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그 본래의 性淨本覺은 일체에 똑같이 통하여서 親疎가 없기 때문이다. 覺의 뜻을 널리 설하는 것을 마친다.422)
고 하였다. 『大乘起信論別記』에 의하면,
네가지 거울 중에서 두 번째의 因熏習鏡이라는 것은 性功德이 바른 인연을 능히 지어서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厭樂 및 모든 加行을 일으켜 나아가서 佛果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因熏習'이라고 말한 것이고,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 '거울(鏡)'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비유하자면 깊고 큰 바다에 珍貴한 寶貨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이 많으며, 그 가운데 중생의 形·部類·形像을 모두 나타내는 것과 같이, 매우 깊은 인연의 바다에 공덕의 보배가 無盡藏하여서 맑고 깨끗한 法身 가운데 어떤 형상이든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423)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424)
네 번째의 緣熏習鏡이라는 것은 비로소 圓智를 일으켜서 增上緣을 지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厭樂과 모든 加行을 일으키도록 하여 나아가서 佛果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緣熏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러한 모든 行德이 大圓鏡智을 여의지 않으니 이는 저 지혜의 그림자이다. 따라서 '거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佛地經』에서 "大圓鏡智가 일체중생의 모든 善法의 그림자를 일으킨다"425)고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의 鏡은 뜻이 드러나니 알 수 있을 것이다.426)
『大乘起信論義記』에서는 『대승기신론』의 「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 與虛空等猶如淨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둘째로 性淨本覺을 밝히고 또 가이 體와 相을 합하여 밝히는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總標와 別釋이다. 앞의 가운데 空과 鏡 모두 네 가지 뜻이 있다. 따라서 뜻을 취하여 비유를 삼았다. 첫째는 空鏡이다. 일체 밖의 물건을 여읜 體를 말한다. 둘째는 不空鏡이다. 이른바 鏡의 體는 萬象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없다. 셋째는 淨鏡이다. 말하자면 갈고 바로 잡아서 때를 여의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受用鏡이다. 高臺須에 安置한다는 것은 受用이다. 넷 중 앞의 둘은 自性이 淸淨한 것이고, 뒤의 둘은 때(垢)를 여의서 淸淨한 것이다. 또 앞의 둘은 因이 隱隱한 때에 이에 대하여 설한 것이고, 뒤의 둘은 果가 顯現할 때에 이에 관하여 설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는 空과 不空을 가지고 둘을 삼았고, 뒤의 것 가운데는 體와 用을 가지고 둘을 삼았다. 또 처음의 二의 體와 뒤의 二의 相 때문에 覺體相이라고 한다. 또 처음 하나와 第三은 空의 뜻이 있고, 第二와 第四는 鏡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들어 비유한 것이다.427)
『대승기신론』의 「云何爲四 一者如實空鏡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 非覺照義故」에 대하여 賢首는 아래와 같이 설한다.
「云何爲四」의 첫째는 如實空鏡이다. 처음의 「如實空鏡」안에 있는 眞如 가운데 妄法은 본래 없는 것이다. (망법이) 먼저 있는 것이 뒤에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如實空」이라고 한다.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 非覺照義故」라고 하는 것은 아래에 空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뒤바뀐 마음의 妄境界는 본래 不相應이기 때문에 遠離 等이라고 하는 것이지, 있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妄法에는 眞理가 없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거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단지 토끼에 뿔이 없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428)
「非覺照」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妄念이 眞智를 바라보는 것으로 覺照의 功이 없는 것이다. 情으로써 執著함이 理致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에 비추이지 아니한 것은 곧 밖의 물건인 것과 같다. 그 外物이 비추이는 작용의 뜻이 없기 때문에 곧 거울 가운데 外部의 물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本覺이 妄法을 바라보는 것인데 역시 覺照의 공능이 없다. 妄法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淨眼이 空華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비추어 자세히 보는 功能이 없다. 이것 역시 거울에 토끼 뿔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429)
『대승기신론』의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 不出不入 不失不壞 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具足無漏 熏衆生故」에 대하여, 法藏은,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은 第二 因熏習 중 內部에 二因義가 있다고 해석한다. 처음에 現行法의 원인을 능히 지을 수 있다. 둘째 內熏의 因을 능히 지을 수 있다. 또 역시 처음 것이 因의 뜻일 수 있고 뒤의 것은 熏習의 뜻일 수 있다. 그러므로 因熏習이라고 한 것이다. 「如實不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因熏習法體를 나타내는 것이다. 自體와 性功德을 의미하기 때문이다.430)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 不出不入 不失不壞 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에서 처음 가운데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은 一切法이 이 마음을 떠나 마음밖에 別個의 體性이 없음을 밝혔다. 마치 거울 가운데 능히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不出」은 마음이 훈습을 의지하는 고로 현재의 제법이 變轉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훈습에 의지하지 않고 自出하는 것은 아니다. 「不入」은 마음을 여의고 훈습할 수 없으므로 밖에서부터 들어올 수 없다. 「不失」은 비록 다시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와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緣起法이 顯現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不失이라고 한다. 「不壞」는 제법의 緣의 원인이 일어나는 것은 따라 나오는 바가 없으므로 眞如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不可壞이다. 마치 거울 가운데 그림자를 칼이 상처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거울과 같기 때문에 불가괴이다. 「常住一心」은 같은 體가 서로 모인 것이다. 「以一切法」이하는 같은 거울이 이루어지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이 마음 가운데 出入이 없는 것 等이 顯現 하기 때문에 곧 體性이 없는 것이다. 體性이 없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고 眞如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常住一心 나아가서 眞實性이라고 하기 때문이다.431)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具足無漏 熏衆生故」는 「又一切染法」이하는 뒤의 因義를 해석한 것이다. 「染法不能染」은 性淨 때문에 비록 染法이 나타나지만 汚染이 아니고, 汚染 되는 바가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汚染될 때에 汚染하고 汚染되는 것이 아니다. 또 나아가서 汚染이 나타나기 때문에 반대로 本淨이 顯現한다. 마치 거울이 밝고 깨끗하면 더러운 물질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穢物이 나타날 때 반대로 거울이 깨끗함이 顯現한다. 어찌 이 穢物이 능히 거울을 汚染하리오. 만약에 汚染이 나타나지 않으면 곧 汚染이 아닌 것이 나타날 것이 없는 것이다. 「智體不動」은 본래 오염이 없는 것이다. 지금 무시로부터 깨끗하기 때문에 本覺의 智慧이다. 아직 일찍이 移動하지 않았다. 또 비록 染法이 나타나지만 所染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不動이라고 한다. 마치 거울 가운데 像이 質을 따라 轉變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거울의 體가 일찍이 動한 바가 없다. 「具足無漏等」은 이 本覺 가운데 恒河江의 모래알처럼 많은 性功德이 적은바가 아니다. 또 중생과 더불어 內熏의 因을 지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한다. 그러므로 『勝 經』에서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능히 生死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佛性論』에서는 自性淸淨心은 道諦라고 이름한다. 또 十種佛性 가운데 業性이다.432)
『대승기신론』의 「三者法出離鏡謂不空法 出煩惱 智 離和合相淳淨明故」에 대하여 『大乘起信論義記』에서는,
제삼 가운데 처음에 표시하고 다음에 해석한다. 「法出離」는 眞如法을 말한다. 二障을 벗어나 和合識을 여의기 때문에 「出離」라고 한다. 앞에서는 纏縛되어 있는 性淨不空如來藏을 밝혔고 지금은 性淨不空如來藏이 纏縛에서 나와 때(垢)를 여읜 法身임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寶性論』에서 두 가지 淨이 있다. 하나는 自性淨이다. 이것은 同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離垢淨이다. 이것은 勝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不空法」은 나타난 법체이다. 이른바 앞에서 설한 因熏習이다. 「出煩惱等」은 細染心을 煩惱 라고 하고, 無明에 의하는 바를 智 라고 한다. 「離和合等」은 淨心이 障 를 벗어나와 業識 等 和合識을 破滅하는 것이다. 和合識의 雜相을 여의는 고로 淳이라고 하고, 迷惑과 汚染이 없으므로 淨이라고 하고, 無明에서 벗어 나왔으므로 明이라고 한다. 이른바 大智慧光明等이므로 淳淨明이라고 한다.433)
『대승기신론』의 「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 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에 대하여 法藏은,
第四 가운데 처음에 標示하고 뒤에 분별한다. 이른바 저 本覺이 障 에서 벗어나올 때 중생의 機根을 비추임에 따라 만가지 化身으로 示現한다. 그 중생과 더불어 外緣의 熏習力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法에 의하여 나아가서 示現한다고 한다.434)
이상의 주석들을 종합하여 보면 性淨本覺은 다음과 같다. 먼저 『대승기신론』의 원문의 뜻을 살리기 위하여 각주로서 의미를 부각하여 본 다음 그 뜻을 다시 종합 정리하고자 한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覺體相435)이라는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436)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437) 무엇이 네 가지 인가? ①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法이 없는지라 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②因熏習鏡438)이니, 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다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타나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染法이 능히 더럽힐 수 없으니 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③法出離鏡439)이니, 不空法이 煩惱 와 智 를 벗어나고 和合相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④緣熏習鏡440)이니, 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善根을 닦도록하여 念에 따라서 나타내기 때문이다.441)
라고 설하였다. 이 뜻을 다시 정리하면 性淨本覺은 본각의 본성이 청정한 것을 말한다. 이 本覺의 本性을 明鏡에 비유한 것이다. 거울은 外界의 사물이 어떠한 것이던 있는 그대로 좋고 나쁜 것 없이 바르게 비치는 점은 本覺의 智의 眞理性을 비유함에 적합한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물건이라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아무리 많아도 비추어 나타낼 수 있다. 이 점은 眞如의 無念과 一念으로 無限이 풍부한 性功德이 있는 점을 비유함에 잘 어울린다. 이와 같은 이유로 本覺의 智를 明鏡에 비유한다.
本論에서는 本覺을 空鏡, 不空鏡, 淨鏡, 受用鏡의 四種의 明鏡에 비유하고 있다. 본론에 의하면 本覺의 體大와 相大는 四種의 위대한 의미가 있다. 위에서 상세히 밝힌바와 같이 體大는 眞如이고 相大는 體大의 무량한 공덕이다. 兩者가 합하여 佛의 法身을 形成한다. 따라서, 本覺이 곧 法身佛이다. 本覺은 虛空과 같이 널리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本覺의 智는 淸淨하여 거울과 같다.
이 本覺의 四種의 意味 중 第一은 如實空鏡이다. 如實은 眞如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여에는 妄念이 空無라는 點을 空鏡이라고 부른 것이다. 본각은 在纏位의 번뇌의 가운데 있을 수도 있지만 煩惱에 汚染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心中에 있으면서도 중생의 心에는 喜怒哀樂의 能緣의 心相과 그에 응하는 千差萬別의 對象의 世界가 있지만 그러나 本覺은 그와 같은 일체의 마음의 경계의 相을 遠離하고 있다. 이 경우 마음의 경계는 妄念이 일어나는 遍計所執性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遍計所執性의 事物은 主觀의 自我도 客觀의 諸法도 완전히 妄心의 所産이므로 虛妄한 것이다. 마치 龜毛兎角과 같이 實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虛妄性은 本覺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非覺照義」라고 설한 것이다.
중생의 마음이 아무리 汚濁하다고 하더라도 오탁한 것은 龜毛兎角과 같이 實體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마음이 汚染된 것은 아니다. 마음이 오염된 것은 아니므로 如實하여 空境하다. 如實하여 空境한 마음은 진여이므로 衆生卽佛觀의 第一을 如實空鏡이라고 설하고 있다.
第二의 性淨本覺의 性格은 因熏習鏡이라고 하는 것이다. 因이라는 것은 진여가 因이 되어 緣起의 세계의 諸法을 現出하는 것이다. 熏習이라는 것은 진여가 중생의 內部로부터 內熏이라고 하는 것이 중생에게 작용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佛의 道를 求하고자 하게 하고 始覺의 智를 완성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은 본각이 번뇌의 가운데 있더라도 그것에 오염되지 않고 무량의 성공덕을 구족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眞如는 萬法이 現出하는 因이므로 진여는 法界의 一相이다. 法界一相은 一心無念이지만 眞如만에 의하여서는 萬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점을 「일체세간의 境界가 모두 다가 그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依他起의 諸法은 無明의 熏習을 의지하여 生한 것이기 때문에 진여에서 직접 生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不出」이라고 설하고, 그러나 無明은 唯心의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萬法이 外部에서 온 것은 아니므로 「不入」이라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諸法은 緣起에 의하여 成立된 範圍內에서는 實在하고 있는 것이므로 「不失」이라고 하고, 緣生의 諸法은 진여가 變現하여 있는 것들이므로 이 點에서는 진여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不壞」라고 한다. 本覺眞如 가운데 顯現하는 諸法은 本覺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眞如와 別個의 體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別個의 體性이 없으므로 본래 평등한 것이다. 諸法은 諸法으로서 成立하면서도 本性은 하나인 것이다. 常住一心밖에 아무 것도 없다. 一切의 法은 있는 그대로 眞如와 같이 眞實한 것이다. 이와 같이 本覺은 一切諸法을 顯現하지만 本覺은 顯現된 제법에 의하여 汚染되는 일은 없다. 마치 청정한 거울에 더러운 물건을 비추어 나타내도 거울이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다. 왜 染法에 汚染되지 않는가 하면 本覺의 智體는 不動하여 본성이 항상 淸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해지는 성질을 구족하고 있다. 衆生의 내부로부터 항상 중생에게 훈습하여 菩提心을 일어나게 한다. 이와 같은 本覺의 性格을 因熏習鏡이라고 부른다. 이상의 因熏習鏡은 在纏位에 있어서의 本覺의「常住一心」과 性淨을 나타낸다.
중생의 마음에 如實不空한 물건이 있다. 이 여실불공한 물건을 因熏習鏡이라고 한다. 「因」은 이 물건이 만법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因'이라고 하고 「熏習」이라는 것은 이 물건이 중생의 內部로부터 중생을 훈습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惡을 싫어하고 善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나아가 佛道를 求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始覺의 智를 완성하게 한다.
이 물건이 만법의 원인이므로 일체 세간의 경계가 이 물건 가운데 나타나지않음이 없고, 이 물건의 훈습에 의지하지 않고 나가는 것이 없으며, 이 물건이 훈습할 수 있는 힘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그 물건은 훈습을 끊임 없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잠시도 잃는 것도 아니고 찰나라는 순간도 깨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그 물건의 常住하는 法體性을 설명하는 것이다. 法體性이란 自體와 無漏性功德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건에서 나온 일체법이므로 一切法은 眞實性이 있다. 일체법에 진실성이 있으므로 일체법은 이 물건에 의하여 훈습되는 것이다. 이 물건이 바로 衆生卽佛이다.
如實하여 不空한 마음은 진여이므로 衆生卽佛觀의 第二을 因熏習鏡이라고 하여 설하고 있다.
第三의 本覺은 法出離鏡이라고 한다. "法"은 本覺眞如로서 법신불을 의미한다. 無明煩惱로부터 出離한 本覺을 鏡에 譬喩한 것이다. 즉, 無漏의 性功德을 具足한 不空의 本覺(法身佛)은 六染 등의 번뇌장과 그 根據인 無明이라고 하는 智障을 出離하여 業識, 轉識 등의 阿梨耶識의 和合相을 여읨에 의하여 본각의 德이 나타나 純粹淸淨한 智慧가 밝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隨染本覺의 智淨相을 性淨本覺의 입장에서 나타낸 것이며, 본각에 의하여 無明煩惱로부터 出離한다는『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라고 본다.
한 '法'이 있다. 그 法을 不空法이라고 한다. 이 '法'에는 무루성공덕이 구족되어 있어 훈습하는 힘이 있고 '空'에는 淨化하여 空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空法이란 모든 異物을 淨化하여 空하게 하는 法이고, 異物이란 모든 煩惱障과 所知障이다.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이 空하니 和合識과 모든 業識이 空해진다. 이 空法은 轉勝하여 不空法이 된다. 不空法이란 법이 모든 雜相을 여의게 하고 眞相을 累積하게 하므로 이것을 淳이라고 하고, 迷惑과 汚染을 없애고 밝고 청정함을 加行하게 하므로 이것을 淨이라고 하고, 無明에서 벗어나 한 층 더 높은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므로 이것을 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을 空하게 하는 法을 空法이라고 하고 淳淨明을 加行하는 法을 不空法이라고 하였다. 이 法이 바로 중생의 마음에 있으므로 衆生卽佛이다.
이 不空法은 眞如自體相이고 우리들의 마음에 있으므로 衆生卽佛觀의 第三을 法出離鏡이라고 하여 설하고 있다.
+--法力熏習----十信·三賢 ---+
+--智淨相--+---因--+--如實修行---初地∼第十地---+
| | +--方便滿足----無垢地滿足----|
| | +--破和合相--------法身------|
+-隨染本覺(二相)--+ +---果--+ |
| | +--滅相續相---+ |
| | +--- 應身------+
+--本覺-+ +--不思議業相-----+---他受用身---+ |
| | | |
| | +-------------------報身 -----+
| +-性淨本覺(四鏡)---+----如實空鏡--法身---+ |
| | |---- 在纏位·有垢眞如 --+
| +---因熏習鏡---法身---+ |
| +---法出離鏡---報身---+ |
| | |---- 出纏位·無垢眞如 -+
| +---緣熏習鏡-+-應身-+-+ |
| +-報身-+ |
| |
覺--+ +-不覺 (十信)----滅相·前念의 起惡을 知覺한다.----------凡夫-----+
| +-相似覺(三賢)----異相·貪瞋, 人我見을 斷함.-------初發意菩薩-----+
+--始覺-+-隨分覺(十地)----住相·法執을 斷함------------------法身菩薩-----|
+-究竟覺(佛果)----生相·微細念을 遠離함.---------+ |
+-------------------------------------------------------+ |
| +--自性身----法身---------+
| +-智淨相---成就自身利益相--▶上求菩提--+ |
+-究竟覺-+ +--自受用身--法身 --------+
+-不思議業相--成就他身利益相--▶下化衆生--他受用身-+-應身--------+
+---報身------+
|
衆生卽佛--------------------+
<表 5> 衆生卽佛로서의 覺
第四에 本覺은 緣熏習鏡이라고 한다. 緣이라는 것은 本覺으로서의 佛陀가 중생을 위하여 緣(應身 報身)이 되어서 始覺의 智를 일어나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點을 熏習(應身 報身의 業用)이라고 하는 것이다. 本覺이 이와 같은 外緣의 힘이 되는 점을 緣熏習鏡(自然業)이라고 부른다. 本覺에 의하여 始覺의 智를 일으키는 것이 緣이 되어 응신과 보신으로서 外緣을 맺는다고 하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라고 생각한다.
앞 절에서 설한 不空法은 중생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法이고, 不空法에는 중생의 외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法도 있다. 이 외면 세계의 法이 중생에게 緣에 따라(소질과 능력) 應身 報身 등 만가지 化身으로 일어난다고 하여 緣熏習鏡이라고 하였다. 法이 大智慧光明 等으로 外緣에 의하여 번뇌장과 소지장을 멸하고 淳淨明을 더욱 밝히기 위하여 시현하는 것이다.
이 不空法은 眞如이고 우리들의 마음에 있으므로 衆生卽佛觀의 第四를 緣熏習鏡이라고 하여 설하고 있다.
如實空鏡과 因熏習鏡은 在纏位의 本覺(有垢眞如 如來藏)을 나타내고, 法出離鏡과 緣熏習鏡은 出纏位의 本覺(無垢眞如 법신불)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써, 本覺은 常住佛이며 淳淨明佛이고 無垢佛이며 救濟佛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佛의 작용은 이 찰나에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대승기신론』의 입장이므로『대승기신론』은 衆生卽佛觀을 설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상 진망화합식인 아리야식의 覺의 義를 始覺과 本覺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것을 위 表5에서 다시 정리하여 갈무리하였다.
5. 序分의 衆生卽佛觀
이상과 같이『대승기신론』의 三大와 熏習論과 覺不覺論에서 法身 報身 應身佛의 定義와 그 작용이 衆生卽佛임을 알아보았다. 본론의 序分에서는 귀경게와 造論의 大意를 밝히고 있다. 원효는「귀경게」주석에서 그가 본『대승기신론』전체의 뜻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마명의「귀경게」는 단지 五字 八句의 偈頌으로 되어 있지만, 그 40字에서 원효는 『대승기신론』 전체의 의미를 佛法僧 三寶에 대한 그의 佛陀觀을 풀이하여 놓았다. 大乘과 깨침 등이 불법승 삼보와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지 「귀경게」에 대한 원효의 주석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大乘起信論』冒頭의 게송은 歸敬偈라고 하여 本論을 전개함에 論主인 馬鳴이 삼보에 귀의함을 五言十二句의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442)
이 序分의 偈가운데 처음의 八句는 馬鳴443)이 本『論』을 전개함에 있어 三寶에 귀의함을 표명한 것이고 나머지 四句는 造論의 大意를 술하여 본론을 제작하는 의도 중 가장 근본 핵심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부처님께 본론을 저술하는 이유를 고하고 있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本章에서는 序分 十二句中 처음 八句와 나머지 四句를 나누어서 원효의 衆生卽佛觀과 다른 註釋家의 卽佛觀을 비교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대승기신론』의「 歸敬偈」에 의하면,
목숨을 걸고 귀의하나이다.
시방 삼세가 다하도록 그 업이 가장 수승하시고
일체의 모든 진리를 두루 아시며
몸의 작용이 걸림이 없어 자유자재하셔서
세간 중생을 다 구제하시는 대자 대비하신 분과
그리고 그 몸의 體와 相인 法性은 진실하여 바다와 같고
무량한 功德을 갖춘 진실 그대로의 수행자 등에게!444)
라고 설하였다. 이에 대한 『新譯大乘起信論』 부분은 다음과 같다.
歸命하나이다. 모든 시방 삼세가 다하도록
위대하고 풍요로운 이익을 널리 지으시고
지혜가 무한하여 자유자재하게
세간을 救護하시는 세존과
또한 그 體와 相의 바다인 無我句의 義와 法과
無邊 德藏한 僧이 正覺을 부지런히 구하는 者에게!445)
라고 설하였다. 이 偈頌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을 알아보고자 한다.
1) 歸敬偈의 衆生卽佛觀
먼저 「歸命」에 대한 『大乘起信論義疏』의 주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歸命」이라는 뜻 가운데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論의 머리말에서 극진하게 恭敬하는 것이 다 같지 않다. 둘째는 『대승기신론』의 머리말의 歸敬의 뜻이다. 셋째는 글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논의 머리말의 歸敬은 같지 않다 論首歸敬不同」라고 말하는 것은 혹은 三寶를 恭敬하는 것을 갖춘 것은 『大智度論』과 같이 지금 이 『대승기신론』도 같다고 하고 혹은 오직 佛法만이 十地論 등과 같다고 하고, 혹은 단지 佛를 공경하는 것이 地持論 등과 같다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각기 뜻이 있다. 왜냐하면 恭敬을 갖추면 福田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但只 人法을 尊敬하는 것은 法을 빌어 成人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禮佛을 하는 것이다.446)
「恭敬의 뜻」이라고 하는 것에는 六種의 뜻이 있다. ①『대승기신론』을 지음에 입은 무거운 은혜에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고, ②계속 이어지는 加護를 청하는 것이고, ③중생이 信心을 나게 하는 것이고, ④마땅히 공경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⑤殊勝한 모습을 표하는 것이 되며, ⑥중생에게 佛法僧의 생각을 열게 하는 것이다.447)
「第三, 글에 따라 해석한다 第三隨文解釋」라는 것은 文 가운데 둘이 있다. 하나는 처음에 두 줄의 偈頌은 三寶를 지극하게 공경하는 것을 바르게 밝힌 것이다. 둘째는 「爲欲令」이하의 한 줄의 게송은 『대승기신론』을 짓게 된 뜻을 밝힌 것이다. 第一에 대하여는 세 가지가 있다. 첫줄의 나머지 一句는 佛寶를 밝힌 것이고, 둘째 「法性眞」이하 이구는 法寶를 밝힌 것이다. 셋째 「如實修行等」一句는 僧寶를 밝힌 것이다. 第一 중에 二句가 있는 것에 관하여 첫째는 첫줄 偈頌은 應身을 밝힌 것이고 둘째 한 句는 法身을 밝힌 것이다.448)
「귀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주의 존경심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다. 안으로 正報 가운데 命根이 가장 緊要한 것이므로 긴요한 命을 들어 삼보에 속하게 하니 이름하여 「歸」라고 한다.449)
『大乘起信論義記』에 의하면,
이제 단지 初門에 의하여 먼저 序分 내에 三頌을 해석하여 歸敬偈을 밝히고 그 述意分을 분별한다.450)
지금 이 序文을 해석하기 위하여 요약하면 五門을 짓는다. ①諸論의 有無를 밝히고, ②귀경게의 뜻, ③能歸儀式, ④所歸의 勝相 등을 밝히고, ⑤文을 해석한다.451)
①「諸論」가운데는 大智度論, 攝大乘論 等과 같이 三寶에 禮敬하는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이 있고, 혹은 地持論과 같이 오직 佛寶에만 歸依하는 것도 있고, 혹은 十地論과 같이 단지 人法에 歸依하는 것도 있고, 혹은 十二門論과 같이 歸依함이 없이 바로 說하는 것도 있다. 이 『대승기신론』에서는 著作者의 뜻이 있는 것과 겸하여 廣略說에는 없다. 이는 마치 龍樹의 廣論에는 歸依함을 갖추고 있으나 十二門略論에는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특별하게 분별되지 않는다.452)
②「敬意」는 첫째 恩惠를 입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약 佛陀가 法을 설하지 않았다면 法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고, 만약 그 法이 없었다면 生을 理解할 바가 없었고, 만약 僧이 傳하는 것이 없었다면 바로 들(聞)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은혜로 말미암아 慧悟를 성취할 수 있다. 지금 이 法理를 전하므로 반드시 은혜를 생각하고 지극히 敬禮하는 것이다. 둘째, 加護를 請하기 때문이다. 미래 어려운 때에 轉化함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만약 三寶에게 우러러 請하지 아니하면 三寶의 威力이 스스로 通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지극하게 敬禮하여야 한다. 셋째는 믿음을 生하게 하기 위함이다. 논주 스스로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輕率하게 논을 지은 사람은 믿음을 받지 못한다. 삼보에게 귀의하고 宗이 이어받아 짐이 있음을 나타냄으로서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이 생하게 함이 긴요하다 … .453)
③「能歸異相」이라고 하는 것은 三業을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佛陀의 天眼이 그의 몸에 禮敬하는 것을 보는 것을 표현하고, 불타의 天耳가 그에게 말로 찬탄하는 것을 듣는 것을 표현하며, 불타가 他心을 알고 뜻을 관찰하고 또 존재물이 그의 의지처를 보고 또 듣고서 三業의 禮敬를 갖추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안다는 것을 표하는 것이다. … .454)
④「所敬勝相을 나타낸다」는 것은 三寶의 뜻을 상세히 밝힌 것은 別章과 같다.455)
⑤「文을 해석한다」는 것은 三頌分의 二 中에 처음 둘은 삼보에 歸敬을 밝힌 것이고 뒤의 하나는 그 공경하는 뜻을 편 것이다.456)
이상의 法藏의 『大乘起信論義記』를 慧遠의『大乘起信論義疏』와 비교하여 보면 『大乘起信論義記』가『大乘起信論義疏』보다 좀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특히 삼보를 주석함에 있어 法藏은 『大乘起信論義疏』를 따르면서 『기신론소』의 내용을 加味하였다는 느낌도 준다. 歸敬偈頌은 「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이다. 이 게송을 『大乘起信論義疏』에서는 佛寶를 「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까지, 法寶를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까지, 僧寶를 「如實修行等」으로 분류하여457) 주석하고 있다.
『기신론소』에서는, 佛寶를「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까지, 法寶를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까지458), 僧寶를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으로 분류하여459) 주석하고 있다. 『大乘起信論義記』에서는, 佛寶를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까지, 法寶를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까지, 僧寶를 「如實修行等」으로 분류하여460) 주석하고 있다. 이점에서 法藏의 『義記』는 慧遠의 『大乘起信論義疏』와 같다.
「僧寶」에 대하여 『大乘起信論義疏』에서는,
아래 一句는 僧寶를 찬탄한다. 「如實」이라고 말하는 것은 邪見을 버리고 正見을 取하는 것이기 때문에 「如實」이라고 말한다. 「修行」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족한 위치에 있으면서 硏習하고 勝進하기 때문에 「修行」이라고 말한다. 「等」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종류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等」이라고 말한다.461)
라고 설한다. 「僧寶」에 대하여 『大乘起信論義記』에서는,
第三 「僧寶」라는 「僧」은 凡聖을 通하나 「寶」는 오직 聖位이다. 「聖」은 大小菩薩을 通하나 殊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가운데 오직 地上大菩薩僧에게만 歸依하는 것이다. 이른바 理致를 證得하여 修行을 일으키므로 「如實修」라고 이름한다. 아래 글에서 말하기를 法力熏習에 의하여 地前菩薩이 修行하고, 「如實修行」은 地上菩薩이 수행하는 것이며, 滿足方便은 十地를 만족하는 계위에 있다. 이 가운데 「等」은 가운데를 들어서 前後를 取하는 것이다. 또 『寶性論』에 의하면 地上菩薩에 관하여 正體와 後得을 가지고 두 가지 수행을 설한다. 그 論에서 설하기를, 첫째 「如實修行」은 「如」의 理는 一味임을 了達하고, 둘째 修行을 두루하여 一心이 恒沙法界에 있음을 갖추어 안다. 이제 이 文 가운데 五體을 들어서 等은 後得을 취하기 때문에 「等」이라고 한다. 『法集經』에 의하면 總括하여 萬行은 두 가지 수행이 된다. 그 經에서 설하되 「如實修行」은 發菩提願을 하는 것이고 「不放逸修」는 菩提願을 만족한 것을 말한다. 또 다음은 「如實修行」은 布施를 수행함을 말하고 「不放逸修」는 報償等을 求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또 처음을 들어서 等은 뒤를 取하니 알 수 있을 것이다. 歸敬 三寶를 마친다.462)
라고 설하고 있다. 法藏은 「僧」은 범부와 성인이 될 수 있으나,「寶」는 오직 聖位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寶」에도 대소보살이 있지만 오직 지상대보살승에게만 귀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이치를 증득하여 수행을 일으키므로 「如實修行」이라고 이름하고 「等」은 後得智를 취한다고 한다. 그리고 地前菩薩은 法力熏習에 의하여 修行하고, 地上菩薩은「如實修行」에 의하여 수행하는 것이며, 十地를 만족하는 계위에서는 滿足方便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歸敬偈」를 佛·法·僧에 分類하는 形式은 『大乘起信論義疏』와 같이 「如實修行等」을 승보로 나누었으나 그 내용은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을 승보로 하는『기신론소』를 따르고 있다. 『기신론소』는 아래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佛·法·僧 三寶 각각에 調和 있게 비중을 두고 있고 또 현세에 地上菩薩이 되어 法身佛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철저한 신앙심을 가질 것과 바른 修行法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大乘起信論義記』가 세상에 나온 후에 飜譯된 新譯 『기신론』에 의하면,
歸命하나이다. 모든 시방 삼세가 다하도록
위대하고 풍요로운 이익을 널리 지으시고
지혜가 무한하여 자유자재하게
세간을 救護하시는 세존과
또한 그 體와 相의 바다인 無我句의 義와 法과
無邊 德藏한 僧이 부지런히 正覺을 구하는 者에게!463)
라고 설하고 있다. 『新譯大乘起信論』에서도 『기신론소』에서와 같이「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을 僧寶로 하고 있다.
이제 『기신론소』에 나타난 원효의 주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글을 풀이한다. 『대승기신론』의 글에는 三分이 있다. 처음은 三行으로 된 偈頌인데 歸命 敬禮와 造論의 뜻을 말하고 있다. 「論曰」이하에서 바로 『대승기신론』의 體를 세우고 제일 마지막의 一頌은 總體的으로 맺고 廻向하고 있다. 처음의 三偈 중에는 바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앞의 두 偈頌은 바로 三寶에 歸依한 것이고 그 후의 一偈는 論을 만든 뜻을 말하고 있다.464)
처음의 두 가지 중에 두 가지가 있다. 「歸命」의 두 글자는 이것이 能歸의 相이며, 「盡十方」이하는 所歸의 德을 나타낸다. 「能歸의 相」이라는 것은 恭敬 隨順하는 相이다. 이것이 歸依의 뜻이며, 趣向의 뜻이 歸依의 뜻이다. 「命」은 命根을 말하며, 몸의 모든 기관을 統御하므로 一身의 要體이다. 오직 「命」이 主人이 되므로 온갖 산 생명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이 둘도 없는 「命」을 들어서 더 위없는 世尊을 받들어 信心465)의 지극함을 표시하였기 때문에 「歸命」이라고 말한 것이다.466) 또한 「歸命」이란 '근원에 돌아간다(還源)'는 뜻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六根이 一心에서부터 나왔으나 스스로의 根原을 알지 못하고 六塵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제 달아난 六情을 둘도 없는 命을 들어서 모두 남김 없이 포섭하여 그 본래의 一心의 根源에 還歸하기 때문에 「歸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六情이 돌아 가야할 根源은 一心이요, 一心은 곧 三寶이다.467)
라고 한다. 이 元曉聖師의 疏를 다시 정리하면 一心으로부터 眼耳鼻舌身意 六根인 感覺器官이 나왔다. 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意識이 작용한다. 그렇지만 이 意識은 오히려 스스로의 근원을 망각하고 色聲香味觸法, 六塵에 馳散하여 착각을 일어켜 六塵에 집착하므로 모든 苦痛의 과보를 받게 된다. 모든 고통의 원인을 消滅하기 위해서는 六塵에 집착하는 마음을 三寶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는 신앙심을 내어서 굳은 願力을 세워 수행하여야 한다. 목숨을 들어 육진에 흩어진 마음, 이 마음을 삼보에게 집중하게 되면, 목숨을 들어 삼보에게 바치는 마음, 흩어진 마음, 삼보에로 환귀하는 마음이 모두 일심밖에 따로 각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一心이 源泉이요, 一心으로 돌아 가야할 바요, 「一心이 곧 三寶이다.」라고 했다. 원효는 마명의「歸命」의 뜻을 열어서 還歸로, 「還歸處」를 根原으로, 「根原」을 一心으로, 「還歸시킬 물건」을 六情으로, 「六情」을 三寶에게 歸依하게 하고, 「歸依하는 방법」을 '三寶'에게 목숨을 들어 歸依한다는 신앙심이 「歸命」이라고 하여 「歸命」의 뜻을 맺는다. 이 과정은 모두 「一心」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원효가 삼보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불법승 삼보는 불법승 삼보를 바라보는 사람의 외적인 존재이다. 외적인 존재는 마음에서 비롯된 眼耳鼻舌身意 六識의 대상으로서 色聲香味觸法 六塵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外形的이고 객관적인 존재에 대하여 六情이 馳散된 산란한 마음을 불법승 삼보를 향한 신앙심으로 삼보로 집결시키고, 삼보로 結集된 그 마음을 自己의 내면 세계에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근원적 주체와 일치시킴으로서 主客 혹은 內外가 따로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一心이 즉 三寶라고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보는 有情에게 일심을 보여주고 보게 하는 방편이면서 일심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원효의 뜻을 조금 더 열어보자. 원효가「六根이 원래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마음을 배반하여 六塵으로 馳散한다」 함은 고통받는 중생의 流轉的인 타락상을 표현하고 있고,「목숨을 다하여 六情을 삼보에 歸一시키면 본래의 根原인 一心으로 돌아간다」 함은 非倫理的인 墮落像을 목숨을 건 신앙심에 의하여 還滅시키는 佛道이다. 그러므로 一心은 倫理的으로 타락의 길로 흐르는 流轉하는 마음을 삼보를 향하는 목숨을 건 신앙심으로 還滅하여 궁극적으로 涅槃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涅槃은 곧 根原이며, 大乘이며, 一心이요, 삼보이다. 六情이 涅槃 혹은 大乘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삼보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남으로서 비로소 생긴다는 뜻이 起信이다. 원효의 「歸命」에 대한 주석을 一心, 還源, 不覺, 始覺, 三寶의 순으로 『기신론』상에서 보이는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1) 一心
우리는 원효의 佛陀觀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신론소』의 원문에, "「歸命」이란 '근원에 돌아간다(還源)'는 뜻이며, '根源'이란 곧 一心이며 三寶의 正義이다"468)라고 해설하였다. 이것은 『대승기신론』「立義分」에서 一心469)은 衆生心이고, 중생심의 自體를 法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修行信心分」에서 "信根本"이란 "진여의 법이 모든 부처가 귀의할 바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이기 때문에 근본이라 한 것이다470)"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法의 自體, 혹은 근본은 오직 一心이기 때문에 小乘의 別體說과 다르며, 이 마음의 體가 하나이므로 마음이 모든 법을 通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一心을 大乘法이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효는 "法의 自體"를 모든 현상의 '根源'이라고 인정하여, 「歸命」을 修行者가 하나밖에 없는 그의 '命根'을 스스로 들어서 三寶를 받드는 지극한 信心으로 모든 생명의 '根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還源'의 뜻이며, 還源하는 根源이 곧 삼보이므로 귀명의 대상은 곧 삼보이고, 삼보에게 귀명하는 방법은 목숨걸어 信仰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2) 還源
"還源"의 뜻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根源' 혹은 '根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므로 不覺에서 本覺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와 같다. 왜냐하면 '本覺'이란 "심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며, 이는 不覺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471)"라고 하고 "시각이란 바로 이 心體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에 의하여 차츰 각의 작용이 있으며, 究竟에 가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始覺이라 말하는 것이다472)"고 하기 때문이다. 원효가 「歸命」을 해설하는 주석에서 "중생의 六根이 一心에서부터 나왔으나 스스로의 根源을 알지 못하고 六塵으로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 것은 곧 不覺相473)이다. 이제 달아난 六情을 둘도 없는 命을 들어서 모두 남김 없이 포섭하여 그 본래의 一心의 根源에 還歸하기 때문에 「歸命」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명을 들어서 근원에 환귀한다"고 하는 것은 곧 삼보에 대한 신앙심이며, 이 신앙심에 의한 還源이다. 그러므로 「還源」의 뜻에는 信仰心에 의한 大誓願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不覺
원효가 「歸命」을 해설하는 주석에서 "중생의 六根이 一心에서부터 나왔으나 스스로의 根源을 알지 못하고 六塵으로 흩어져 달아났다.474)"고 설하였다. 이것은 心體가 무명의 연을 따라 망념을 일으켰다는 것이므로 곧 不覺相을 나타내며, 이는 또 人我見과 法我見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因緣分」의 對治邪執에 의하면 人我見이란 허공이 체가 없어 여실하지 못하나 볼만한 相을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色法이 본래 마음이요 실로 밖의 色이 없는 것이니, 만약 밖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상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 소위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여래의 광대한 性智의 구경의 뜻을 말한 것이요, 虛空相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475)라고 한다.
즉, 人我見이란 중생의 六根이 인식하는 대상이 밖에 있는 六塵이라고 착각하여 邪見을 내는 것이다. 法我見이란 五蘊이 實體가 있어 생멸하는 것으로 邪見을 일으키는 것이다476)라고 한다. 이와 같이 人我見과 法我見으로 중생의 육근이 밖의 경계에 邪見을 일으키는 원인은「解釋分」 顯示正義 生滅門에 의하면, 眼識은 無始以來로 허망하게 색경계를 분별하고 집착하는 근본 무명이 있기 때문에 色境界를 自心이 나타낸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色을 外界에서 攝受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스스로 攝受한 色境界는 相이어서 自身의 現識에 나타난 것이며 자신의 識밖에 있는 것은 아니나, 眼識이 능히 現識에 의하여 識안에 色塵을 내어서 取하여 識밖에 있는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 原因이다. 이는 現識이 본래 色塵에 집착함을 말하며 이러한 습기로 말미암아 眼識을 내어 色塵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의 모든 識도 이와 같다477)고 설명하고 있다. 원효가 "중생의 六根이 一心에서부터 나왔으나 스스로의 根源을 알지 못하고 六塵으로 흩어져 달아났다."라고 요약한 不覺의 뜻을 밝혔다.
(4) 始覺
원효가 「歸命」을 해설하는 주석에서 "이제 달아난 六情을 둘도 없는 命을 들어서 모두 남김 없이 포섭하여 그 본래의 一心의 根源에 還歸하기 때문에 「歸命」이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목숨을 건 信仰心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六情이 돌아 가야할 根源은 一心이요, 一心은 곧 三寶이다"478)라고 설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허망한 不覺에 의한 妄執을 끝까지 다 여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는 染法과 淨法이 모두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自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色도, 心도, 智도, 識도, 有도, 無도 아니어서 필경에 그 모양을 말로 써 표현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말을 여읜 道理가 있으나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하는 취지는 모두 妄念을 떠나 眞如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일체법을 妄念으로 생각하면 마음을 生滅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479)라고 논하였다. 이는 달아난 六情을 모두 남김 없이 포섭하여 그 본래의 一心의 根源에 還歸하는 수행이 삼보에 의지하지 아니하고는 실로 어려운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始覺으로 나아가는 道는 모든 부처가 증득한 道와 다른 것이 없다. 보살이 부처가 증득한 道에 發心, 修行하여 나아가는 뜻을 가진 "分別發趣道相"480)을 닦아야 한다. "分別發心"이란 발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信成就發心, 解行發心, 證發心이다.481)
信成就發心의 修行階位는 十住에 있으나, 十信의 자리 중에서 信心을 닦아 익혀서 信心이 성취되어 決定心을 일으켜 곧 十住의 제일 發心住에 들어가기 때문에 신성취발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解行發心이란 十廻向의 수행계위에 있으나, 十住(十行이라고도 함)의 계위에서 法空을 알고 法界를 수순하여 육바라밀을 닦아서 六度行이 순결해지고 성숙되어 회향심을 일으켜 회향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解行發心이라고 한다. 證發心이란 初地 이상에서 내지 十地의 자리에 있으니, 앞서 두 가지의 相似한 발심에 의하여 法身을 증득하여 眞心을 일으키는 것이다.482) 위와 같은 발심으로 지극히 어려운 수행을 하여야만 證發心을 성취할 수 있으므로 命을 들어서 三寶에 대한 지극한 信心에 의지 하지 않고는 달아난 六情을 모두 남김 없이 포섭하여 그 본래의 一心의 根源에 還歸(始覺483))할 수 없을 것이므로 원효는 「歸命」을 「起信」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命題로 삼았다고 본다.
(5) 三寶
"六情이 돌아 가야할 根源은 一心이요, 一心은 곧 三寶이다"484)라고 하였다. 一心이 곧 三寶라고 원효가 正義하였음을 위에서 밝혔다. 이것은 오직 마음밖에 없고,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위에서 설명한 唯識說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佛法僧 三寶는 佛法僧 三寶를 바라보는 사람의 외적인 존재이다. 외적인 존재는 마음에서 비롯된 眼耳鼻舌身意 六根의 대상으로서 色聲香味觸法 六塵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外形的이고 객관적인 존재에 대하여 六情이 馳散된 산란한 마음을 佛法僧 三寶에 대한 지극한 信仰心으로 三寶로 집결시키고, 삼보로 結集된 그 馳散되었던 마음을 自己의 내면 세계로 還源시키면,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근원적 주체성과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일치에 의하여 主客 혹은 內外가 明徹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三寶는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곧 一心임이 증명된다. 이 일심은 중생의 一心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생즉불이다. 처음에 三寶는 有情에게 妄念을 버리고 一心을 찾아보게 하고, 다음은 三寶는 有情으로 하여금 有情의 本性, 즉 一心을 보게 하는 乘이 되는 방편이 되며(즉 三寶를 타고 本性으로 들어간다), 최후에는 本性이 곧 三寶요 一心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원효의 三寶觀 이다. 佛法僧 三寶는 一心으로서 常住하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고, 중생구제의 원인이기도 하며, 방편이기도 하고, 중생의 理想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佛法僧 삼보는『대승기신론』의 根幹을 이루는 衆生卽佛觀을 세우고 있다.
能歸인「歸命」의 所歸로서의 佛.法.僧 삼보와 能歸로서의 불법승 삼보에 관하여 원효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겠다.
(1) 衆生卽佛로서의 佛寶
『대승기신론』의 序分 三偈485) 중에 앞의 두 偈頌은 바로 三寶에 歸依한다는 信仰的인 의미가 있다.486) 이 두 게송 중 「歸命」은 能歸의 相이며, 「盡十方」이하는 所歸의 德을 나타낸다.487) 그리고 所歸의 대상인 一心은 곧 三寶이다.488) 三寶란 佛法僧을 말한다.489) 寶의 內에는 心德, 色德, 그리고 人品 등 세 가지를 찬탄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490) 이 세 가지를 찬탄하는 뜻에 의하여 三寶에 관한 두 게송491)을 원효는 풀이하고 있다. 이 三寶를 佛.法.僧의 순서로 해설한다. 먼저 佛寶를 讚歎하는 第一 偈는 "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이다. 이 中 心德을 찬탄하는 부분은 "盡十方 最勝業 知"이다.
가. 佛의 心德
『기신론소』에 의하면,
心德을 찬탄하는 가운데 用과 體를 찬탄한다. 「盡十方最勝業」이라고 하는 것은 業用을 찬탄한 것이다. 이른바 불타의 八相聖道 等을 나타내시고, 중생을 교화하시는 업은 모든 十方三世에 두루하여 교화 할 수 있는 중생을 모두 교화하는 佛事를 모두 짓기 때문에 「시방삼세가 다하도록 가장 殊勝한 業을 짓는다 盡十方最勝業」고 했다.492) 이는 『對法論』에서 "業 偉大性이란 生死가 다할 때까지 一切 菩提 等을 모두 이루어서 광대한 모든 佛事를 건립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493)라고 말한 것과 같다.494) 다음 「 知」라고 하는 것은 智體를 찬탄한 것이다. 왜냐하면 「業用이 시방에 두루하다」는 것은 그 智體가 두루 하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智體가 두루 하기 때문에 「 知」라고 말한 것이다.495) 이는 『攝大乘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허공이 일체의 물질 세계에 두루 미쳐 있으되 生住滅의 變異가 없는 것처럼, 如來의 지혜도 그러하여 일체 아는 바가 두루 하여 顚倒됨도 없고 變異됨도 없기 때문이다"496)라고 한 것과 같다. 心德을 찬탄함을 마치다.497)
나. 佛의 色德
第一 偈, "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中 色德을 찬탄하는 부분은 「色無 自在」이다. 『기신론소』에 의하면,
이 中에서도 體와 用 두 가지 뜻이 있다. 「色無 」라는 것은 色 體의 奇妙함을 찬탄하는 것이고, 「自在」라고 말하는 것은 色의 作用의 殊勝함을 찬탄하는 것이다. 먼저 「色體」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의 色身이 萬行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또 不可思議한 熏習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神妙한 色이 있다고 하더라도 障 되는 것이 없어서 一相一好가 끝이 없고 한이 없어(無際無限) 아무런 障碍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色을 이끌어 나가는데 장애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허공 끝에서 구하는 것은 오히려 얻을 수 있지만, 불타의 하나의 털구멍은 그 끝이 한이 없는 것이다. 불타의 德은 이와 같이 不可思議하므로, 이것이 여래의 청정한 知見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다."498)라고 한 것과 같다.499) 비록 質 는 없지만 方所에 나타나는 뜻이 있기 때문에 色이면서 無 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自在」라고 말하는 것은 色의 作用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른바, 五根이 相互 작용하는 것이나, 十身이 서로 작용하는 등 때문이다. 「色自在가 五根이 相互 작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涅槃經』의 八自在500) 중에서 말한 것과 같고, 「十身이 서로 작용한다」는 것은 『華嚴經』의 十地品501)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것으로 色德을 讚歎하는 것을 마친다.502)
다. 佛陀의 人間性
第一 偈, "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中에 「救世大悲者」가 불타의 인간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원효의 『기신론소』에 의하면,
「救世大悲者」는 第三句인데 끝맺음으로 사람을 들어 찬탄한다. 불타는 마치 大長子와 같아서 중생을 자식으로 삼는다. 그는 三界의 火宅503)에 들어가 불에 타는 고통을 받는 모든 중생을 救濟하는 고로 「救世者」라고 말한다. 이 救世者의 德이 바로 大悲이며, 自他를 떠난 大悲이며, 無緣의 慈悲이다. 모든 慈悲 中에서 가장 殊勝한 자비인 고로 「大悲」라고 말한다. 佛地에서만 소유할 수 있는 萬德 중에서 여래는 오직 大悲를 힘으로 삼아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만을 들어서 불타의 인간성을 나타낸다.504) 이것은 『增一阿含經』에서, "凡人과 聖人의 힘에 여섯 가지가 있다. 어린아이는 우는 것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말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운다. 여인은 성내는 것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성질을 낸 후에 말하며, 沙門과 婆羅門은 참는 것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항상 남보다 아래(下)라는 것을 생각하고 난 후에 스스로 말하고, 국왕은 慢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세력을 크게 부리고 나서 스스로 말하고, 阿羅漢은 精進에 전념하는 것으로서 힘을 삼고서 스스로 말하며, 모든 佛世尊은 大悲로서 힘을 삼아 중생을 널리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이것으로 모든 불타께서 한결같이 「大悲」를 그 힘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을 표현하고자 할 때 「大悲者」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때까지 세 가지 句로써 佛寶를 讚歎하는 것을 마친다.505)
원효의 해설을 다시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佛의 心德」을 해석하는 곳에서 원효는 「眞如熏習」論을 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眞如熏習에는 自體相熏習과 用熏習이 있는데,506) 眞如의 體에는 無始以來 無漏法을 갖추고 있어 不思議한 業을 境界에 작용할 수 있는 性功德을 具備하고 있다.507) 이 두 가지 뜻에 의하여 眞如에는 항상 熏習하는 힘이 있다. 이것을 「眞如自體相」이라고 한다. 진여에 이와 같은 「自體相」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內熏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眞如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508) 그리고 또 「自體相」의 不思議業 境界性의 作用을 「用熏習」이라고 한다. 用熏習은 外緣의 무량한 뜻이 있으나 要略하면 平等緣과 差別緣으로 중생이 得佛할 때까지 모든 佛菩薩이 殊勝하고 神妙한 佛事를 이룩하는 것이다.509) 內熏과 用熏習은 佛의 心德의 「最勝業」에 해당하고 眞如自體相은 「 知」에 해당한다. 眞如自體相은 곧 體相 二大이다.510) 大智慧光明의 뜻이 있고,511) 自性淸淨心의 뜻이 있고512), 常樂我淨의 뜻이 있고,513) 不思議한 佛法을 구족하고 내지 滿足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뜻이기 때문에 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如來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다.514)
眞如自體相은 중생에게 구족된 德이고 여래법신이므로 衆生卽佛觀을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對法論』에서 "業 偉大性이란 生死가 다할 때까지 一切 菩提 等을 모두 이루어서 광대한 모든 佛事를 건립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業 偉大性이란 生死가 다할 때까지 一切 菩提 等을 모두 이루어서」와 「業 偉大性은 광대한 모든 佛事를 건립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전자는 隨染本覺의 相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生死가 다할 때까지 發菩提心하여 지극한 신앙심으로 모든 業識 등을 소멸하면 완전한 智淨相이 나타난다고 하여 생명을 건 지극한 신앙심의 필연성을 설하고 이렇게 얻어진 결과는 法身515)이다. 이것은 始覺이 本覺과 合一 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보신불이 法身佛을 이룩한 것이다. 法身佛은 報身佛 혹은 應身佛로 나타나 不思議業을 건립하는 것이다.516)
불사의업은 衆生卽佛의 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신론소』에서 해설한 「佛의 色德」中에서 「色體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의 色身이 萬行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또 不可思議한 熏習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眞如의 用大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用大의 "이러한 障 없는 不思議한 일이 모두 六度의 深行의 熏習과 眞如 즉 중생즉불의 不思議熏으로 말미암아 成就한 것이므로 이런 뜻에 의하여 報身이라 이름하며, 그러므로 '내지 한량없는 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報身이라 한다'고 말하였다."517)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 法身의 色相이 自在하다는 것은, "곧 이 法身은 色의 體이기 때문에 色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色心不二이기 때문에 色의 本性은 곧 智이다. 그런 까닭에 色의 體에 형체가 없는 것을 智身이라 하며, 智性은 곧 色인 까닭에 法身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色이 分齊가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法身과 무량한 莊嚴을 나타냄에 각각 差別이 되지만 모두 分齊가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아니한다. 이는 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眞如 즉 중생즉불의 自在한 用의 뜻이기 때문이다"518)라고 설하고 있다.
범부에게 이와 같이 자재한 진여(중생즉불)의 작용이 있기 위하여는 如來의 色身이 上向的으로는 「萬行」과 下向的으로는 「不可思議한 熏習」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同時的인 두 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고, 相互補完的인 두 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대승기신론』상의 「萬行」은 두 가지로 述하고 있다.
첫째는 불타가 본래 因地에서 大慈悲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攝化하며, 크나큰 誓願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度脫시키고자 하여 劫의 數를 한정함이 없이 미래에까지519) 닦아 大方便智를 구족하여 무명을 제멸하고 본래의 法身을 보아서 자연히 不思議業이 있게 되는 것이다.520)
둘째는 現世에 佛敎 信者가 十信位521)에서 衆生卽佛의 內熏과 外熏을 받아 身口 7가지인 滅相七522)이 惡業임을 깨달아 身口 惡業을 그치게 하면 凡夫覺(不覺)523)을 이루었다고 한다. 不覺인 凡夫覺을 이룬 行者가 衆生卽佛의 內外熏을 받아 더욱 發心하여 初住에서 시작하는 初發意菩薩524)이 되어 十住, 十行, 十廻向 등 30階位의 三賢位525) 수행을 한다. 이 과정에서 貪瞋癡慢疑見 등 異相六526)이 본래 없음을 깨달아 멀리 여의어 영원히 滅한즉 이를 相似覺527)이라고 하고 상사각을 이룬 보살에게서 報身佛528)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행자가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六異相이 업식에 의하여 나타난 것임을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므로 相似覺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현위를 성위(聖位)로 보아 보신불이 된다고 원효는 한다.
相似覺을 이룬 보살이 제 십회향위를 만족하면 初發意菩薩이 初地에 安住하여 法身菩薩이 된다. 法身菩薩529)은 初地에서 第十地까지 10地의 階位를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法執 我執으로 分別하는 念을 점차로 멀이 여의어530) 가는 동시 我癡 我見 我愛 我慢 住相四531)를 멸하여532) 가는 열단계의 隨分覺을 거쳐 第十地에 이르러 住相四를 滅盡하면 隨分覺533) 을 만족한다. 法身菩薩이 隨分覺을 만족하면 菩薩盡地인 無垢地534)에 이른다.
無垢地에서 動念이 처음에 생기는(初相) 찰나 인식535)할 수 있는 金剛喩定536)을 이룰 때 業相 轉相 現相 등 生相三537)을 滅盡한다538)고 한다. 이 때 自性淸淨한 心源으로 還歸한 것이며 見性成佛 한 것이다.539) 이것을 始覺이라고 하고, 이 始覺은 本覺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究竟覺540)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究竟覺은 곧 本覺이고 本覺은 곧 法身佛이다. 凡夫 行者가 十信에서 發心 修行하여 究竟覺을 만족하는 단계까지 행하는 모든 修行을 因의 쪽에서 보면 萬行이면서 衆生卽佛에 의한 것이고, 果의 쪽에서 보면 法身佛 곧 중생즉불이고, 本體 쪽에서 보아도 法身佛 즉 중생즉불이며, 作用面에서 보면 應(報)身佛 즉 중생즉불이다. 應(報)身佛은 중생즉불에 의한 修行 功德과 중생즉불의 不可思議熏의 힘을 입어 不可思議한 業을 行할 수 있는 性功德을 가지고 있고, 또 현실에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應(報)身佛의 이와 같은 작용을 「不可思議한 熏習」이라고 하고, 또 앞의 「佛의 心德」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衆生卽佛의 內緣과 外緣의 작용이 범부에게는 不可思議한 훈습이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衆生卽佛의 작용은 중생에게 항상 현재 일어나고 있으므로 衆生卽佛로서의 佛寶이다.
(2) 衆生卽佛로서의 法寶
本論 歸敬偈의 第二偈는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541)이다. 이 중 원효는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를 法寶라고 하고, 이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及彼身體相」은 앞에서 설한 如來의 몸을 말한다. 바로 報身佛이다. 직접 법계에 작용하는 것을 自體로 한다. 그러므로 「그 몸의 體와 相, 彼身之體相」이라고 한다. 이것은 불타를 들어 그 법을 취한 것이다.542) 그 아래의 句(法性眞如海)에서 직접 法寶의 體相을 나타내고 있다. 「法性」이라고 말한 것은 涅槃을 말하는 것이다. 涅槃은 法의 本性이기 때문에 「法性」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법을 열반이라고 한다. 戱論이 없는 法性을 本分種543)이라고 한다. 마치 黃石에는 金性이 있고, 흰 돌에는 銀性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一切法 중에는 涅槃性이 있기 때문에 法性이라고 한다"544)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에 「法性」이라고 말한 것이다.545) 「眞如」라고 말하는 것은 보낼 것이 없음으로 「眞」이라고 하고, 세울 것이 없음으로 「如」라고 하니, 아래 글546)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진여의 체는 버려야 할 것이 없는데,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眞)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세워야 할 것이 없는데 일체의 법이 모두 있는 그대로인 것(如)과 같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法(存在)은 說할 수가 없는 것이며, 생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니 따라서 「眞如」라고 이름하는 것이다.547) 「바다 海」라고 말하는 것은 비유에 붙여서 法을 나타낸 것인데 간략하게 이것을 설하면 「바다」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매우 깊다는 것이고, 둘째는 廣大하다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보배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고, 넷째는 萬像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眞如의 大海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非理를 영원히 끊기 때문이며, 萬物을 다 苞容하기 때문이며, 具備하지 않은 德이 없기 때문이며, 나타나지 않는 像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法性眞如海」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華嚴經』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저 깊은 大海에 온갖 진기한 보배가 다함이 없고, 갖가지 중생들의 모든 형상을 그 가운데 다 나타내는 것처럼. 깊고도 깊은 인연 바다에 功德의 보배 다함이 없고, 그 청정한 法身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548)라고 한 것과 같다. 법보를 찬탄함을 마치다.549)
고 한다. 원효는 第二偈中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는 불타의 몸을 들어 법을 삼아, 法寶를 나타낸다.550) 그 法寶를 眞如門에 준하여 설명하고 있다. 眞如海는 깊고 깊으며 廣大無邊한 大海이며, 大圓鏡과 같이 萬像을 있는 그대로 비추며 무량한 性功德을 갖추어 모든 非理를 淨化하고 萬像을 포용한다고 하고 이를 眞如, 如來, 法身으로 표현하고 있다.551) 이것은 佛陀의 無量한 威力과 無邊한 慈悲性을 여실히 묘사한 것으로 法寶가 나타내는 眞如 體相의 불타관이다.
위의 『기신론소』중에 「言眞如者 無遣曰眞 無立曰如」552)라고 하는 文句는 本論의 眞如門에 유사한 글이 나온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眞如」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 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言說의 極은 말로 말미암아 말을 버리(因言遣言)지만 이 진여의 體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없다(此眞如體 無有可遣). 일체의 法(存在)이 모두 가 다 참(眞)되기 때문이며, 또한 내세울 것도 없다. 일체의 法이 모두 똑같이 참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以一切法皆同如故).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법은 설할 수가 없고 생각되어질 수가 없다(一切法不可說不可念). 따라서 이름하여 眞如라 한다"553)고 「眞如門」에서 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기신론소』에서, "이른바 「말로 말미암아 말을 버린다(因言遣言)」는 것은 마치 소리로써 소리를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
다음에는 바로 이름을 풀이하는 것이니, 「이 眞如의 體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없다(此眞如體 無有可遣者)」는 것은 진여의 體라 하여 俗世의 法을 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일체의 법이 참(眞)되기 때문이다(以一切法 悉皆眞故)」라고 하는 것은 依他起性의 일체의 모든 법은 임시적인 언설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다 이것이 참이다. 「모두 다 참이다(悉是眞)」라는 것은 차별을 무너뜨리지 않으니 바로 이것이 평등이다. 이것이 평등인 까닭에 별도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일체가 모두 같이 참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一切皆同如故)」라고 말한다"554)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리고 「귀경게」의 法寶 해석에서 나타나는 佛陀觀에서 불타의 무량한 위력과 무변한 자비성을 眞如 大海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555) 이 眞如大海의 무량한 性功德은 『대승기신론』의 「진여문」에서 "또 다음으로 이 眞如라는 것은 言說에 의하여 분별하면 두 종류의 뜻이 있다. 첫째는 如實空인데 능히 구경에 이르러 진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둘째로 如實不空으로서 자체에 無漏性功德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556)라고 설한 것과 같다. 따라서 「귀경게」의 法寶는 眞如의 體相이고 眞如의 體와 相은 理佛과 智佛을 합한 法身佛이며 중생즉불이다.
(3) 衆生卽佛로서의 僧寶
지금까지 歸敬偈,「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557) 중 「法性眞如海」까지 마치었다. 다음은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을 원효는 僧寶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석하고 있다. 『기신론소』에서,
이 아래 두 句(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는 僧寶를 찬탄한 것이다. 「無量功德藏」이라고 말하는 것은 德을 들어 사람을 취하는 것이다. 이른바 地上菩薩은 하나의 行을 닦음에 따라서 萬가지 行이 集成된다. 그 하나 하나의 修行이 모두 법계와 같아서 한량이 없는 것이며 그 功德을 쌓아서 얻는 바가 이와 같으므로 「無量功德」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功德이 모두 다 보살에게 속하므로 修行者는 능히 德을 攝할 수 있다. 그 功德을 包攝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藏」이라고 한다.558)
다음에 「如實修行等」이라 말하는 것은 修行의 德을 찬탄한 것이다. 『寶性論』559)에 의하면 正體智에 관련 시켜서 如實行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後得智를 이름하여 遍行이라고 한다. 지금 이 가운데 「如實修行」이라고 말하는 것은 「正體智」를 든 것이고, 그 다음에 「等」이라고 말하는 것은 「後得智」를 취한 것이다.560) 만일 『法集經』561)에서 설한 바에 의하며, 萬行의 始終을 總括한다면, 통털어서 두 구절에 所攝할 수 있으니 如實修行과 不放逸을 말하는 것이다. 그 經(法集經)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如實修行」이란 菩提願을 發함을 말하며, 「不放逸」이란 菩提願을 만족시킴을 말한다"라고 하고 다시, "「如實修行」이란 布施를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不放逸」이라는 것은 報答을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不退를 성취하며, 혹은 忍辱行을 닦아 無生忍을 얻으며, 일체의 善根을 求하되 피로하거나 倦怠하지 아니하며, 일체의 이룬 바를 다 버리며, 禪定을 수행하되 禪定에 머물지 아니하며, 智慧를 원만하게 구족하되 모든 法에 대하여 戱論하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如實修行」하고 「不放逸」하여야 하며 … "562)라고 하고 그밖에 널리 설명하고 있다. 이제 (本論에서) 「如實修行」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發菩提願에서 滿足智慧까지를 다 포섭하는 것이며, 「等」이라는 것은 「不放逸」을 취하는 것이니 곧 滿足菩提願에서 모든 법을 戱論하지 않는 것까지이다. 三寶에 歸敬함을 앞에서 마치다.563)
원효는 「無量功德藏」과 「如實修行等」을 註釋함에 있어 修行上에 문제 될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구별하여 그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본다. 먼저 「無量功德藏」을 「이른바 地上菩薩은 하나의 行을 닦음에 따라서 萬가지 行이 集成된다. 그 하나 하나의 修行이 모두 법계와 같아서 한량이 없는 것이며 그 功德을 쌓아서 얻는 바가 이와 같으므로 「無量功德」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功德이 모두 다 보살에게 속하므로 修行者는 능히 德을 攝할 수 있다. 그 功德을 包攝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藏」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이 설명에서 그가 찬탄하고자 하는 僧寶는 첫째 중생이고 둘째 地上菩薩임을 알 수 있고, 地上菩薩은 初地 이상의 菩薩이다. 初地 以上의 보살을 法身菩薩이라고 한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地上菩薩이 한 가지 行을 닦음에 따라서 萬가지 行이 集成된다. … 그 공덕을 포섭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藏」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것은 法身菩薩의 行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行 하나 하나가 功德이 되어 구경에 「無量功德藏」이 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하는 「無量功德藏」을 本『論』에 비추어 보면 「無量功德藏」은 證發心을 포함한다.
發心에는 信成就發心과 解行發心과 證發心 三種이 있다.564) 信成就發心은 十住에 있으며 겸하여 十信을 취하고, 解行發心은 十廻向의 자리에 있으며 겸하여 十行을 취한다. 證發心은 初地 이상에서 내지 十地의 자리에 있다. 앞의 둘은 相似發心이라고 하고 뒤의 것은 法身을 證得하는 眞心發心이라고 한다.565)
「無量功德藏」의 行者를 「地上菩薩」이라고 부르고 있고, 證發心을 하는 行者를 初地 이상의 보살이라고 하므로 이것은 같은 法身菩薩을 의미한다.
「證發心」이란 淨心地로부터 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轉識에 의하여 증득하는 경계는 能所가 있는 경계이므로 實은 증득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오직 眞如智뿐이므로 法身이라 하는 것이다.566)
또 이 보살은 功德이 다 이루어져서 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一念 相應하는 지혜로써 無明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一切種智라 하며 자연히 不可思議한 작용이 있어 十方에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567) 위에서「이 보살은 功德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第十地에서 因行이 다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色究竟處에서 높고 큰 몸을 보이며 …, 一切種智라 한다」 등은 만약 十王568)의 果報別門에 의한다면 十地菩薩은 第四禪王569)이며 色究竟天에서 成道하는 것이니, 곧 이는 報身佛의 他受用身이다.570) 즉,「無量功德藏」은 他受用身인 報身佛이 발현하는 源泉이 성립되는 因과 果를 뜻하게 된다.
다음 「如實修行等」에 관하여 원효는 「如實修行」과 「等」으로 나누어 「如實修行」은 無分別智에 「等」은 後得智 혹은 不放逸에 배대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 점에 관하여 『寶性論』571)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眞理에 契合하여 能緣과 所緣의 차별이 없는 절대의 참 지혜를 根本無分別智라고 하기도 하고 正體智라고도 한다.
地上菩薩은 眞如를 證得한 보살이므로 이 正體智를 가지고 보살행을 일으키는 如實修行을 한다. 正體智는 能緣과 所緣의 차별이 없는 절대의 참 지혜이므로 지혜의 대상이 없으므로 正體智만으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보살이 정체지를 가지고 여실수행을 할 때, 正體智인 根本無分別智에 의존하여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분별하는 지혜를 後得智라고 한다. 이 후득지를 가지고 初地에서 강력한 번뇌를 끊는 遍行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여실수행은 정체지에 의지하고, 遍行은 後得智에 의지한다.
그리고「等」은 後得智를 취하기 위하여서이다. 그리고 원효는 『法集經』572)을 인용하여 正體智와 後得智와의 관계를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만가지 修行의 처음과 끝을 총괄하여 보면 통틀어 두 구절에 포섭할 수 있다. 말하자면, 眞如를 증득하고 대상에 대하여 분별심을 초월하여 보살행을 일으키는 「如實修行」과 善과 惡을 분별하여 착한 일을 닦는 「不放逸」이다.」 예를 들면,
①깨달음을 구하기를 원하는 菩提願을 「如實修行」이 發願하면, 「不放逸」이 이를 만족시킨다.
②재물을 남에게 주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에게 전하여 그 사람을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한다든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布施를 「여실수행」하면, 「不放逸」은 無住相 보시를 하기 위하여 報答을 구하지 아니한다. 무주상 보시란 보시를 하였다는 생각이나 相을 마음속에 머무름이 없게 하는 것이다. 보시는 남을 이롭게 하고 자기의 煩惱障과 所知障을 소멸하여 我空 法空을 증득하여 初期의 眞如性을 얻어 初地573)인 極喜地菩薩(聖人의 位임)이 된다.
③淸淨한 戒行을 「여실수행」이 지키면, 「불방일」은 정진하여 모든 邪行障을 끊고 最勝眞如를 얻어 제2地인 離垢地菩薩574)이 된다.
④혹은 인욕바라밀을 수행하여 사람들이 욕하고 꾸짖고 때리고 침뱉는 등 온갖 凌辱을 하여도 참고 견디는 生忍과, 춥고 덥고 비바람의 고통과 배고프고 목마르고 늙고 병드는 고통을 능히 참고 견디는 法忍을 「여실수행」하면, 「불방일」은 「여실수행」이 닦은 生忍과 法忍으로 모든 凌辱과 고통을 平安히 不動하게 한다. 평안히 부동하게 함은 곧 不生不滅의 이치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無生忍 혹은 無生法忍을 증득하였다고 한다. 無生忍의 수행은 內心의 闇鈍障(無明의 一種으로 俱生起煩惱인 所知障의 일부에 속한다)을 단절하고 勝流眞如를 증득하여 제3地인 發光地菩薩575)이 된다.
⑤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보호하고, 재물을 중하게 생각하여 낭비나 사치를 하지 아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어려운 때를 대비하여 저축하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재물로 도와주고, 정직한 말, 남이 바르게 살 수 있는 말, 남이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스스로 어리석지 않으려고 원을 세운대로 열심히 정진하는 善根을 「여실수행」이 求하되 피로하거나 싫증을 내지 아니하면, 「불방일」은 나는 어느 생명을 살렸다, 나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나는 말을 잘한다, 나는 현명하다는 등의 相이나, 自慢心이나, 우월감에 자기 스스로 집착되거나 잘못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다는 일체의 相이나 생각을 마음에서 씻어 버린다. 精進修行은 微細煩惱現行障을 끊고 無攝受眞如를 증득하여 제4地인 焰慧地菩薩576)이 된다.
⑥조용히 앉아 善惡을 생각하지 않고 是非에 관계하지 않고 有無를 간섭하지 않으며, 생각을 고요히 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며,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게 하는 선정(禪定)을 「여실수행」이 하면, 「불방일」은 '내'가 선정에 들었다는 자부심에 집착하여 초기의 선정으로 선정을 완성 한 것으로 착각하여 「여실수행」이 더 이상 禪定을 할 필요가 없다고 중단시키는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게 생각하여 마음속에서 '내'가 선정에 들었다는 相이나 생각이 머물지 못하게 씻어 버린다. 禪定수행으로 眞諦(무분별지)와 俗諦(분별지)의 차별이 없는 理法의 경지에 올라 無差別眞如를 증득하여 제5地인 極難勝地577)보살이 된다.
⑦모든 지혜를 만족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인 正覺, 無上正等覺, 妙覺에서 오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十地 중 제6 現前地보살은 智慧바라밀을 수행하여 無分別加行慧, 無分別慧 그리고 無分別後得慧로 相現行障을 斷滅하여 無染淨眞如를 증득한다.
⑧제7 遠行地보살은 方便바라밀을 수행하여 俱生起의 일부이며 細相의 現行인 細相現行障을 단멸하여 法無別眞如를 증득한다.
⑨제8 不動智보살은 願바라밀을 수행하여 無分別智가 상속하며 純無漏만이 계속 되어 純無相觀에 住한다. 無相中加行障이라는 번뇌를 단절하여 自由自在하게 身相과 國土相을 出現할 수 있는 自在力을 구비하여 不增減진여를 증득하고.
⑩제9 善慧地보살은 力바라밀을 수행하여 四無碍智 또는 四無 辯을 성취하여 俱生起의 所知障의 一分인 利他中不欲行障을 단멸하여 智自在所依眞如를 증득한다.
⑪제10 法雲地보살578)은 智바라밀을 수행하여 諸法中未得自在障이 단멸되어 業自在等依所眞如를 증득하여 大智를 成立시키며 自利와 利他行으로 有情을 饒益하게 한다.
제10 法雲地는 수행계위 52위 중 제50위에 해당한다. 제51위가 等覺, 제52위가 妙覺이다. 이러한 수행 계위를 완성하게 되면 '大圓鏡智'의 지혜를 만족한다. 대원경지는 大圓鏡에 모든 像이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눈앞에 나타나게 하는 佛智를 말하는 것이다. 거울과 같이 모든 形像을 비추는 지혜이다. 이와 같은 지혜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사마타', '지(止)' 혹은 '정(定)'의 수행과 진리를 추구하는 '비바사나', '觀' 혹은 '慧'의 수행을 雙修하므로써 증득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여실수행」이 만족하면, 「불방일」은 대원경지의 지혜에서 나타나는 모든 법을 알게 되었다고 하여,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한 쪽으로 쏠리거나 하여 中道를 잃거나, 形而上學에 빠져 가치 없는 논의를 하지 않게 하고, 중생에게 이익 되는 일을 하게 한다. 이와 같은 수행에 관하여 『寶性論』579)에 의하면 「地上菩薩이 일체 중생을 보되 다 진여의 본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初地의 보살 마하살이 일체 진여의 법계를 두루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게송에 "거리낌이 없는 청정한 지혜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성품을 보는 것이 한량없는 경계에 두루 하네"라고 말한 것은 곧 중생즉불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衆生卽佛임을 깨닫고, 漏 없는 법계를 스스로가 깨달아 알아서 장애가 없고 거리낌이 없는 것은 이 두 가지 법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중생즉불의 내외훈습에 의지하여 첫째는 如實修行하고 둘째는 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중생즉불을 신앙하므서 진여의 힘에 의지하여 이른바 세간을 뛰어나서 여실히 眞如의 法을 안으로 證得하는 그 지혜는 二乘과 범부 사람들과 더불어 같지 않음이니 알아 두라. 또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보살 마하살의 세간을 뛰어나서 淸淨하게 證하는 智慧를 밝힘이라」고 한 것에서 「地上菩薩」은 진여법과 세간법을 증득한 보살임을 알 수 있고 또 그러함으로 無量功德藏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와 같이 「여실수행」과 「불방일」수행을 하는 승보(僧寶)를 찬탄한다.
(4) 歸敬偈 衆生卽佛觀의 結辭
佛法僧 三寶에 대한 마명의 게송에 대한 원효의 주석에서 ①歸命, ②佛, ③法, ④僧이 담고 있는 衆生卽佛觀을 인식함으로서 종교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衆生卽佛觀이 성립하지 않으면, 신앙적 의미를 잃게 되고, 『 대승기신론』은 佛書로서의 생명을 잃어, 독자의 본의 아니게 하나의 思想書로 만들어 버리기 쉽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대승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을 바로 밝혀야 한다고 본다.
①歸命: 원효는 마명의 「歸命」이라는 두 字에서 다음과 같은 뜻을 찾아내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단 하나 있으니 그것은 佛法僧 三寶이다. 이 목숨을 들어 三寶에게 歸依한다는 信仰心은 자기를 찾는 수행에 必須이다. 목숨을 들어 三寶에 대한 信仰心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만이 산란하고 번뇌로운 마음을 모두 쉬게 하여 一心의 根原에 돌아 갈 수 있다. 즉 成佛한다. 산란하고 번뇌로운 마음은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가는 流轉하는 마음이고, 목숨 들어 삼보에게 귀의하는 신앙심은 비윤리적으로 유전하는 마음을 還滅하여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一心이라고도 하고, 불법승 삼보라고도 한다.
一心과 佛法僧 三寶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 될 뿐이다. 불법승 삼보는 유전하는 마음을 환멸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방편이 되기도 한다. 流轉하는 마음을 완전히 還滅하고 나면 佛法僧 三寶는 一心의 근원, 그 자체가 된다. 「歸命」하지 아니하고 하는 공부, 大奮心 없는 공부, 남이 『大乘起信論』을 공부하니까 하는 공부는 누구에게나 유익하지 않는 放逸이라는 뜻인 동시에, 「歸命」하는 信仰心은 『大乘起信論』공부에 요체가 된다는 뜻이다.
②佛: 원효는 마명의 ㉠「盡十方 最勝業 知」를 報身佛의 용으로, 報身佛의 용 중 最勝業을 用으로, 知를 그 體(法身)로 설명하는 奇拔한 지혜를 보인다. 佛은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法身佛로서 중생즉불이다. 十方三世, 광대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도 化現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가장 수승한 업을 지으신다. 중생을 구제하는 업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은 知(最勝業의 體)가 있기 때문이며, 知는 허공과 같고, 如來智와 같아서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있으며 變異가 없기 때문이다. ㉡「色無碍自在」에서 色身을 報身佛로, 色無碍를 色體로, 色自在를 色用으로 원효는 해설하고 있다. 이는 衆生卽佛의 用이다. 중생즉불의 용이므로 色無 는 色體로서 妙하여 色身이 萬行(色用)을 하는 원인이 되고 보조가 되어 무한한 공덕을 쌓은 결과 보신불의 一相一好가 無際無限한 自在力을 갖는 것이다. 중생은 누구나 色體를 가지고 있으므로 스스로 중생즉불이고, 報身佛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아울러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救世大悲者」를 붓다의 人間性이라고 표현하여 구제를 받기 위하여 중생이 救世者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구세자는 구세하는 사람과 구세 받는 사람이 따로 구별되는 상대적 개념이 아닌 同體로서의 대비한 지혜, 無緣한 관계로서의 대비한 지혜로 구제 받을 사람에게 찾아오는 구세자로 원효는 해설하고 있다. 人無我와 法無我, 無分別智 後得智 등을 도입하여「救世大悲者」를 해설하고 있다. 知와 最勝業과 救世大悲는 體와 用으로써 현재 작용하고 있는 중생즉불이다.
③法: 원효는 마명보살의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라고 한 게송을 위 "法寶"에서 해설하였다. 요약하면 報身佛이 萬行을 시작하기 이전의 상태는 중생즉불의 理法인 體이고, 理法의 體는 붓다의 깨침의 자체이므로 法身佛이라고 부른다. 法身佛은 彼身體에 해당하고, 그 법신불이 만행을 통하여 쌓은 한량없는 무루성공덕을 구족하고 있다. 이것을 眞性 혹은 법성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彼身相이라고 부른다. 이 眞性을 表出하여 인격화 한 것을 報身佛이라고 하고 彼身用 곧 중생즉불의 用이다. 法性은 涅槃을 말하고, 眞如의 體는 보낼 것도 없고 빼낼 것도 없는 참된 것이라,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체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眞如는 法身佛 혹은 대승의 체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眞如性은 바다와 같다고 하여, 法性 또는 涅槃性과 같은 개념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앞에서 원효가 해설한 化身佛의 知의 智體와 報身佛의 色身의 色體도 모두 중생즉불 法身佛의 異名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 法界에 두 개의 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효가 해설한 佛陀觀에 의하면 十方三世에 法身佛과 報身佛의 體와 用이 두루 하지 않은 때와 장소가 없으며, 이를 깨달을 때 중생즉불이며, 중생즉불의 本源과 作用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절에 가고 싶어하는 것, 불법을 바르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업장을 소멸하여 청정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 우리들은 무한한 지혜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을 베풀 수 있다는 자신을 갖는 것 등 우리들이 갖는 모든 善한 생각은 우리들 자신의 의지작용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우리들에게 內在한 중생즉불 곧 법신 응신 보신의 훈습작용에 의하여 우리들이 善德을 쌓고자 하는 의식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하는 종교적인 깊은 뜻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은 불타관을 가지게 되면,『大乘起信論.疏.別記』전체가 불법승 삼보를 설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어, 자연히 『대승기신론』이 목적하는「起信」과 「還滅」을 위한 실천에 비중을 두게 된다. 이와 같은 실천은 중생즉불인 법신의 용에 의한 것이므로 『대승기신론』은 중생즉불관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④僧: 원효는 萬行을 集成하여 無量功德藏을 이룬 地上菩薩이 如實修行하고 不放逸하는 後得智를 겸한 僧을 僧寶라고 한다고 하고, 賢首法藏은「僧寶」는 오직 地上大菩薩僧에게만 歸依하는 것이라고 한다. 衆生卽佛의 法力熏習에 의하여 地前菩薩이 修行하고, 唯心의 理致를 證得하여 修行하는 것을「如實修」라고 이름한다.「如實修行」은 地上菩薩이 수행하는 것이며, 滿足方便은 十地를 만족하는 방편이며, 「等」은「不放逸修」를 말한다고 한다.
원효와 현수법장은 공히 승보는 地上菩薩이상이라고 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無量功德藏」은 地上菩薩이 一行 一行을 모아 萬行을 이루고, 萬行이 하나하나가 모여 「無量功德藏」이 되며, 이 「무량공덕장」은 보살의 無分別智인 正體智의 源泉이 되어, 僧이 如實修行을 하게되고, 또 僧이 무분별지에 의지하여 後得智인 分別智로 不放逸이 원만하게 성취되도록 세간사를 바르게 처리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효가 설정한 이 僧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僧은 無量功德藏을 이룰 수 없고, 무량공덕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無分別智가 이루어질 수 없고, 무분별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분별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後得智가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원효와 법장의 주석에서 僧寶는 地上菩薩 이상의 수행계위에 속하고, 地上菩薩은 初地에서 시작하는 隨分覺을 이룬 보살이며, 隨分覺을 이룬 보살을 報身佛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의 僧寶觀은 현세에 살아 있는 衆生卽佛을 現世에 示現하고자하는 『대승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을 세우고 있다고 하겠다.
2) 述意의 衆生卽佛觀
『대승기신론』을 撰述한 뜻은 序分의 第三 偈頌,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을 제거하게 하고
그릇된 집착들을 버리게 하며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키어
불타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580)
라고 한 데서 표현하고 있다. 이 게송에서 표현되는 전체적인 뜻과 개별적으로 疑心, 邪執, 大乘, 正信, 佛種 등에 관하여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대승기신론』을 지은 大意는 上半은 下化衆生이고 下半은 上弘佛道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중생이 生死苦에서 고통 받고 涅槃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疑惑과 邪執 때문이다. 그러므로 下化衆生의 要體는 疑惑을 除去하고 邪執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581)
疑心을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大乘의 法을 疑心하여 발심에 障 가 되고, 둘째는 大乘의 敎門에 의심하여 수행에 障碍가 된다.582) 大乘의 法을 의심한다는 것은 만약 大乘의 法體가 하나이라면 다른 法이 없는 것이요, 다른 法이 없다면 중생이 없는 것이다. 중생이 없다면 누구를 위하여 넓은 誓願을 發할 것인가. 만약 法이 여럿이라면 이는 一切가 아닌 것이요. 일체가 아니면 너와 내가 각기 다를 것인데 어떻게 同體大悲를 일으키게 되겠는가? 이러한 疑惑 때문에 發心하지 못하는 것이다.583) 즉, 너와 내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서 본질과 현상의 차별에서 생기는 의문이다.
두 번째로 敎門을 의심한다고 하는 것은 여래가 세운 敎門이 많으니, 어느 문에 의하여 처음 수행을 시작할 것인가? 만일 다 함께 그 많은 門들을 의거해야 한다면 한꺼번에 그 문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며, 만일 한 두 門에 의거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에 나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의심 때문에 수행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584)
그러므로 이제 『기신론』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疑心을 제거하기 위하여 一心法을 세워서 두 가지 門을 열었다.585) 一心이란 곧 大乘을 의미하는 것이다. 一心法을 세운 것은 저 大乘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는 大乘法엔 오직 一心만이 있으니 일심밖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無明이 자기의 一心을 迷惑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켜서 六道에 流轉하게 됨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아니하니, 진실로 一心을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六道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널리 (중생을) 救濟하는 서원을 발하게 되는 것이요, 六道가 一心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同體大悲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疑心을 제거해야만 큰마음을 발하게 된다.586)
고 한다. 이 『기신론소』에서 一心을 물에 비유한 것은 본질을 의미한 것이고 六道를 물결에 비유한 것은 現象을 의미한 것이다. 現象의 본질이 一心이요 大乘法이다. 이것은 파도(現象)는 파도(現象)마다 파도(현상)의 모습이 다르지만 파도(現象)가 독립하여 존재하는 實體인 것이 아니고 물(一心)이라는 같은 하나의 물(一心)에서 비롯하여 파도(현상)라는 모습이 각기 다른 물결(현상)이 생긴 것이다. 각기 모습이 다른 물결(現象)이 생기는 원인은 바람(無明)이 千差萬別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大乘法에 의심을 갖지 말고 同體大悲心으로 發心하여 중생을 구제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는 위의 「歸敬偈」중 佛法僧 三寶를 중생이 疑心을 하는 것에 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신론소』에서 一心法 다음에,
두 가지 門을 연 것은 敎門에 대한 疑心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는 여러 敎門이 많이 있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감에는 두 門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眞如門에 의하여 止行을 닦고 生滅門에 의하여 觀行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止行과 觀行을 雙으로 돌리므로서 萬行이 곧 갖추어진다. 이 두 門에 들어가면 모든 敎門에 모두 通達하는 것이니, 이렇게 疑心을 놓아 보내고 修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587)
邪執을 버린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邪執이 있으니 人執과 法執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을 버리는 것은 아래 글588)에서 말할 것이다. 下化衆生은 앞에서 마치다.589)
라고 설한다. 내용은 自明하다. 이는 위 「귀경게」중 僧寶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즉 僧寶는 法身佛이 되는 길이므로 원효는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의 사집(邪執)을 버리고 하화중생 할 것을 설한다. 이제 正信과 佛種에 관하여 다음 『기신론소』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아래 두 구절(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은 (위 두 구절,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에서) 위로 佛道를 넓혀서 저 二邊의 疑心을 제거하여 결정적인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니, 大乘이 오직 一心뿐이라는 것을 解悟하여 믿기 때문에 大乘의 正信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앞의 두 가지 執著으로 인한 分別心을 버리고 無分別智를 證得하여 如來家에 나서 부처의 地位를 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佛種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논에서 말하기를, "佛法의 큰 바다를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써 건널 수 있다"590)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혜를 들어 佛道를 넓힐 것을 밝혔다. 이 偈頌의 첫머리에서 「爲」라고 하고 아래 맺음에서 「故」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뜻(下化衆生과 上弘佛道)을 밝히기 위하기 때문에 이 『대승기신론』을 짓는다고 한 것이다. 귀경게와 술의를 마치다.591)
라고 하면서 佛種을 이어가기 위하여 僧寶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人執과 法執 두 가지 執著으로 인한 分別心을 버리고 無分別智를 證得하여 如來家에 나서 부처의 地位를 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佛種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佛種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라"고 하는 것은 곧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佛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대승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이다. 즉 한량없이 많은 현재 살아 있는 報身佛을 이룸으로서 佛種이 不斷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法身佛이 우리에게 내재하여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信仰하고 信行함에 의하여 지혜를 쌓아 감으로서 구경에 믿은바가 顯現하게 되어 진다고 하여 正信을 강조하고 있다. 이 正信에 관하여 『대승기신론』에서는,
논에서 말하기를 어떤 法이 있어 능히 大乘의 信根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이것을 마땅히 설할 것이다.592)
라고 한 이 『대승기신론』의 大乘의 信根에 관하여 『기신론소』에서는,
「어떤 법이 있다 (有法)」고 하는 것은 一心法을 이른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능히 解悟할 수 있으면 반드시 廣大한 信根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大乘의 信根을 능히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信根의 相은 題名에서 설한 것과 같다.593) 信根이 이미 섰다면 곧 佛道에 들어가며, 佛道에 들어가고 나서는 무궁한 보배를 얻는데, 이러한 큰 이익은 『대승기신론』에 의하여 얻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땅히 설명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594)
라고 설한다. "이 법을 능히 解悟할 수 있으면"이라고 하는 것은 衆生卽佛觀을 解悟할 수 있음이다.
중생심이 六塵에 馳散하는 것은 탐진치에 의한 것이고 탐진치는 業識에 의한 것이며 업식은 근본무명에 의한 것이다. 근본무명은 모든 마음의 작용은 업식과 眞如法의 상관 과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중생즉불인 진여법이 구족한 무량한 무루성공덕은 모든 업식을 멸진할 수 있음을 깨닫고 믿고 수행을 정진하면 大乘의 信根에 의하여 법신불 중생즉불의 훈습으로 구경에 모든 무명을 멸하고 報身佛을 이룬다는 것이다. 題名을 解說하는 『기신론소』중에서 「信根의 相」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起信」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대승기신론』의 글에 의거하여 중생에게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起信」이라고 말한 것이다.595)
「信」은 결정된 뜻으로써 "그렇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①理法이 진실로 있음을 믿는 것이요, ②수행을 하면 그것(理法)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요, ③수행하여 그것을 얻었을 때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596)
이 가운데 「(理法이)진실로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중생즉불을 믿는다는 것이고, 體의 위대함을 믿는 것이다. 體大를 믿는다는 것은 一切法(은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存在性)을 認得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즉, 진실로 평등한 (理)法界가 (認得할 수는 없지만)있음을 믿는 것이다.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相大를 믿는 것이다. 「이 相大를 믿는다」는 것은 갖추고 있는 本性의 功德(중생즉불)이 중생을 熏習하기 때문이다. 즉, 相大가 熏習하므로서 반드시 그 根源으로 돌아 갈 수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무궁한 功德의 작용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중생즉불의 用大를 믿는 것이다. 「用大를 믿는다」면 하지 못함이 없는 까닭이다.597)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이 세 가지 믿음을 일으킨다면 능히 불법에 들어가서 모든 공덕을 낳으며 모든 魔境을 벗어나 無上道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화엄)경의 게송에서598) 이르기를, 「믿음은 佛道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다. 일체의 여러 선근을 증장시키고, 일체의 여러 의혹을 제멸해버리며 무상도를 개발하여 나타낸다.」 「믿음은 능히 뭇 魔境을 超出하고, 무상의 해탈도를 시현하며, 일체의 공덕 씨는 무너지지 않고 無上菩提樹를 出生하노라」라고 한 것과 같으니, 믿음은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논」에 의해 發心하게 되므로 「起信」이라고 말하는 것이다.599)
라고 설한다. 원효의 三大信은 ①理法이 있음을 믿는 것은 衆生卽佛 法身佛이 있음을 믿는 것이요, ②수행을 하면 그것(理法)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은 報身佛이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요, ③수행하여 그것을 얻었을 때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은 중생즉불의 용인 應身佛로 중생을 구제하는 無窮한 性功德을 구족함을 믿는 것이다. 「根源으로 돌아 갈 수가 있음을 믿는 다」는 것은 수행하여 모든 존재의 근원인 중생즉불 즉 법신불이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원효는 여기에서도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僧寶를 위한 三大信과 『화엄경』의 信에 관한 구절을 설하고 있다.
이제 원효가 설하는 「大乘」을 살펴보고자 한다. 원효는 「大乘」은 넓은 의미에서 『대승기신론』의 「宗體」라고 하며 아래와 같이 「大乘」을 밝히고 있다.
제일 「宗體를 標한다」는 것은 무릇, 大乘의 體는 텅 비어서 고요하고 적막하며 맑고 깊고 玄妙하다. 玄妙하고 또 현묘하니 어찌 森羅萬象의 表面에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지만 百家의 論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萬像위에 나타난 것이지만 五眼으로 그 本體를 볼 수 없고, 言論속에 있는 것이지만 四辯으로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하자니 안이 없[極微한 粒子, 워낙 작은 것인지라 안(內)이 없다]어 들어가도 남은 것이 없고, 작다고 하자니 밖이 없[宇宙, 無限한 공간이므로 밖(外)이 없다]어 둘러싸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있다고 하자니 一如는 그것을 쓰되 空하였고, 없다고 하자니 萬物은 그것을 타고 나왔으니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몰라서 억지로 大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600)
大乘의 근본은 텅비어, 넓음이 끝없는 허공과 같아서 私私로움이 없으며, 그 바탕은 蕩蕩함이 巨大한 바다와 같아서 지극히 公平하다. 지극히 공평하기 때문에 動과 靜이 서로 어우러져 이루어지며, 私私로움이 없기 때문에 染과 淨이 이 大乘의 바탕에서 서로 원만하게 융합한다. 染과 淨이 서로 원만히 융합하므로 부처의 세계(眞)와 중생의 세계(俗)가 평등하다. 眞과 俗이 공평하므로 動과 靜이 이루어지고, 오르고(昇) 내림(降)의 차별이 있다. 오르고 내림의 差別이 있기 때문에 衆生이 부처로 향하고자 하는 感應의 길이 通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평등하기 때문에 중생이 중생의 근기로서는 헤아리고(思) 論議하는 길이 끊어지는 것이다. 중생으로서는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기 때문에 「大乘」의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 「大乘」의 근본을 깨달은 사람은 그림자와 메아리를 타(乘)고 있으므로 일정한 方向이나, 方所나, 方法이 없이도 부처의 감응의 길을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大乘」을 祈願하는 사람이 名과 相을 초월하여도 돌아갈 곳이 있다. 그리고 그림자와 메아리를 탄(乘)다는 것은 形像도 아니고 言說도 아니다. 이미 名과 相을 초월하였으니 무엇을 초월할 것이 있고, 어디로 돌아갈 곳이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理致없는 지극한 이치며, 그렇지 않으면서 크게 그러한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601)
스스로 杜口大士와 目擊丈夫가 아닐진대 누가 말을 떠나 대승을 논할 수 있으며, 생각이 끊어진 데서 깊은 믿음을 일으킬 것인가? 그러므로 馬鳴菩薩이 無緣大悲로써 저 無明의 헛된 바람이 마음 바다를 요동시켜 떠다니기 쉬움을 불쌍히 여기고, 이 本覺의 참된 성품이 긴 꿈에 잠들어 깨어나기 어려움을 가엾게 여기어, 이에 同體智力으로 이 논을 짓고 如來의 깊은 (뜻을 담은) 經의 오묘한 뜻을 찬술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한 두루말이의 책을 잠시 열어서 三藏의 뜻을 두루 탐구하게 하고, 道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경계를 길이 쉬어서 드디어 一心의 根原에 돌아가게 하고자 하려는 것이다.602)
라고 하였다. "衆生이 부처로 향하고자 하는 感應의 길이 通하는" 이치는 法身佛(중생즉불)의 끊임없는 훈습이고, "이 「大乘」을 祈願하는 사람이 名과 相을 초월하여도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한 것은 「大乘」에 대한 간절한 祈願 즉 信仰하는 사람이 현상의 이름과 모양을 떠나도 如實不空法(중생즉불)에 의하여 中道를 구현할 수 있음을 示辭한 것이다. "생각이 끊어진 데서 깊은 믿음을 일으킬 것인가?"라고 한 것은 위와 같은 「大乘」의 생각이 끊어진 깊은 진리를 중생이 신앙하면 道를 求할 수 있지만 중생이 중생이기 때문에 믿음을 일으킬 수 없는 까닭에 마명이 『대승기신론』을 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명이 造論의 동기를 중생의 허약한 信仰 혹은 신앙에 대한 무지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道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경계를 길이 쉬어서 드디어 一心의 根原에 돌아가게 하고자 하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造論의 목적이「僧寶」를 바로 세우고자 함에 있다고 하겠다. "일심의 근원"은 法身佛(중생즉불)을 표현한 것이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게 하고자 하려는 것"은 마명이 修行僧으로 하여금 報身佛(중생즉불)이 되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제 衆生卽佛과 僧寶와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IV. 僧寶와 衆生卽佛
1. 歸敬의 三寶와 衆生卽佛
마명보살은『起信論』冒頭의 게송에서 「三寶에 귀의한다」는 그의 뜻을 五言十二句의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歸命盡十方 最勝業 知 色無 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603)
이 게송에 대하여 원효는 그의『기신론소』에서 "앞의 두 偈頌은 바로 三寶에 歸依하는 것이고 그 후의 一偈는 論을 만든 뜻을 말하고 있다."604) 그리고 "一心은 곧 三寶이다"605)라고 풀이하여 『대승기신론』의 一心 二門 三大說은 곧 佛法僧 삼보에 관한 설법과 同一한 것이라고 풀이하게 된다. 그리고 佛身인 법신 보신 응신 三身은 一心인 三大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심은 곧 중생심이므로 삼보는 곧 중생즉불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설하는 三身中 報身과 三寶中 僧寶는 사용 방법은 다르지만 사실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믿어진다. 먼저 報身佛과 衆生卽佛과의 관계를 연구한 후, 승보와 중생즉불과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2. 報身佛과 衆生卽佛
보신불은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眞如用大에서 전개되는 佛이다. 진여의 用大는 중생을 구제하는 작용이고 『대승기신론』에서 報身과 應身으로 나타난다. 먼저 응신불을 알아보고자 한다.
應身佛은 범부가 32相 80種好를 갖춘 佛이 외계에서 자기에게 와서 加被를 준다고 인식하고606) 믿을 때 범부에게 인식된 그 佛을 응신불이라고 한다. 이 때 그 凡夫는 分別事識인 意識(六識)607)으로 外界가 보는 바대로 존재한다고 認識한다.608) 이것은 자기의 주관적인 인식작용에 의하여 불타가 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609) 그 불타에 의하여 자기가 引導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凡夫는 唯識의 理致를 조금도 모르는 까닭에610) 자기가 인식한 대상이 마음의 深層의 작용인 轉識이 나타난 것인 줄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611) 그래서 물질세계에 대한 차별을 취하게 된다.612) 이러한 중생은 자신의 본심이 자성청정심이고,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體相二大를 구족한 法身佛이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음(중생즉불)을 알지 못한다. 體相二大를 구족한 法身佛이 자신의 본질로서 끊임 없이 내재하고 있음(중생즉불)을 알지는 못하나 실재하고 있음으로 應身이 외계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대승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이다.
이와 같은 범부 이승이 보는 것에는 分齊의 色이 있지만 사실은 分齊의 相을 떠나야 함613)을 깨닫지 못하여 "色의 分齊를 취하여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614)라고 말한다. 이『대승기신론』중에서는 六道의 차별의 相이 있는 것으로 아는 범부와 二乘이 보고 느끼는 불타를 應身佛이라 하고 十解 이상의 보살에게 分齊色을 여읜 것으로 보이는 것을 報身이라고 한다.615) 報身佛은 業識의 뜻을 따르므로써 보는 佛陀이기 때문에 업식에 의하여 본다616)고 한다. 業識은 業으로 말미암은 無明이 일심에 동하여 생기는 가장 미세한 식이다. 거기에는 아직 轉識과 現識이라고 하는 主客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이 分化 이전의 業識에서 경험하는 식이다. 이와 같이 색의 분제를 여의어 주객이 미분한 보살을 報身佛이라고 한다.617) 報身은 十解 이상의 보살에서 이루어진다.618)
唯識의 도리를 아는 이 보살은 바로 色分齊가 無分齊임을 아는 것이다.619) 無色分齊인고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 가(邊)가 없고, 毁損되지도 않고 損失되지도 않는 것이다.620)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은 모두 보살의 육바라밀의 깊은 수행에 응하여 법신불(중생즉불)의 內熏과 외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여(중생즉불)의 내훈과 외훈의 뜻으로 이름하여 「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살은 무량한 樂의 相을 갖춘다."621)
보고 듣는 경계가 보고 듣는 바대로 있다고 보는 것이 色分齊이고, 이를 分別智라고 하고, 이는 分別事識의 작용이다. 이 분별사식의 작용은 唯識의 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이유로 생기는 현상이다. 이러한 단계에 있는 범부에게 느껴지거나 보여지거나 들려지는 佛을 應身이라고 한다. 이 응신은 범부가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 믿고 공양하고 찬양하고 염불하고 보살행을 함에서 감응하여 그 범부에게 나투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나투시는 응신은 범부가 분별사식의 눈이나 귀나 몸으로 느끼고 인식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밖에 계시는 佛이라고 느끼지만 깨닫고 보면 마음밖에 있는 佛을 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 안에 항상 있고 작용하는 중생즉불(법신불)의 용임을 알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대승기신론』의 입장이다. 이 깨달음에서 唯識의 도리를 알게 된다. 이 유식의 도리는 마음밖에 있는 모든 물건에 대한 분별심을 여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智이다. 보고 듣는 경계에 대한 분별심을 여의므로 無分別智라고 하고, 無分別智를 얻었으므로 色分齊를 여의고 無分齊임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무분제를 얻어 무분별지를 증득한 행자는 三賢位의 수행계위를 성취한 聖位의 보살이고 원효는 이를 報身佛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用大로 작용하는 佛身의 號는 經에 따라 차이가 있다. 『同性經』에서는 "더러운 穢土에서의 成佛을 이름하여 化身이라고 하고, 깨끗한 淨土에서의 成佛을 이름하여 報身이라 한다."622)라고 하고, 『金鼓經』에서는 "三十二相과 八十種好의 相을 이름하여 應身이라 하고, 六道의 相을 따라서 나타내시는 몸을 이름하여 化身이라고 한다"623)고 설하고 있다.『攝論』의 설에 의하면 "十地이전에 보는 바를 變化身이라 이름하고, 十地 이상에서 보는 바는 受用身이라 이름한다"624)고 설한다. 이와 같이 經論에 따라 그 시설하고자 하는 뜻에 따라 佛身의 호칭은 다르지만 佛身으로 인정하는 점에서는 공통성이 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佛身으로 인정하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에서 현재 상존하고 작용하는 중생즉불관을 세우고자 함을 이해 할 수 있다.
이상의 諸論에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攝論』에서 十地 以前, 즉 十解 이상 十地이하의 三賢菩薩을 化身에 속한다고 하고 地上보살을 受用身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점이다. 그러나 『기신논』에서는 十解 이상의 보살은 分齊相을 떠났기 때문에 報身이라고 한다625)고 한다.
그리고『대승기신론』상의 報身中에 三賢菩薩과 地上菩薩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삼현보살은 我空(人空)법문에 통달하여 진여의 이치를 깨달았지만 법공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것은 相似解에 불과하다.626) 그리고 覺의 義에서도 相似覺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신불이지만 유사한 보신불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地上菩薩은 淸淨心을 증득한 보살이다. 청정심을 증득한 보살은 모든 業識을 떠났기 때문에 어떠한 相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業識에 의하여 轉相과 現相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業識을 여의면 轉相과 現相은 그 근원을 여의게 되어 業識과 더불어 소멸된다. 그러므로 아무런 상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627)라고 원효는 설명한다.
『新譯大乘起信論』에서는 初地에서 十地에 이르기까지 業識이 점차 소멸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淨心菩薩은 初地에서 미세한 작용을 보지만 점차 더욱 미세하게 되어 보살의 究竟의 境地 속에서는 미세한 것을 보는 일이 바야흐로 없어진다. 이 미세한 것이 보일 때의 작용이 受用身인 것이다. 業識이 있음으로서 受用身을 보지만, 만일 業識을 여의면 보여짐이 없다. 일체의 여래는 모두가 法身으로서 피차의 차별적 色相을 서로간에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628)라고 하고 있다.
이상으로서 『대승기신론』에서는 十解 이상의 보살을 報身이라고 하고, 三賢菩薩은 相似報身이고 十地보살은 舊譯에서는 報身이라고 하고, 新譯에서는 受用身이라고 하며, 業識마저 멸진한 第十地를 다한(盡) 보살은 法身이라고 한다. 報身은 法 혹은 理致로 볼 때 붙인 이름이고 人格化 하여 부를 때는 報身佛이라고 한다. 報身을 성취한 보살은 轉識과 現識이 未分된 業識으로 보는 것이므로 分齊色을 여의었다고 한다. 報身에서 분제색을 여의었다고 하지만 主客은 없으나 業識은 남아 있는 것이다. 보살이 이 業識마저 여읠 때 究竟覺을 이루는 것이고, 이 찰나 報身이 法身과 일치하는 것이다. 報身이 법신에 일치하므로 법신의 용이 보신이다. 따라서 보신은 중생심의 용이므로 衆生卽佛의 용이다.
3. 寶로서의 僧과 衆生卽佛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僧寶를 주석함에 初地 이상의 보살을 의미하는 地上菩薩629)을 거명함으로서 地上菩薩 이상의 修行階位에 있는 보살이 僧寶라고 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初發意菩薩은 貪瞋癡慢疑見의 異相을 여읜 無異相을 想念함으로써 分別執著相을 버렸기 때문에 相似覺을 이루었다고 하는 三賢位菩薩이고 分別執著相을 여읨으로서 色分齊를 여의었다고 하여 報身佛이라고 한다.
法身菩薩은 我癡 我慢 我見 我愛의 住相을 깨달아 無住相을 想念함으로써 分別 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隨分覺을 이루었다고 하여 법신보살이라고 하고, 無分別 念相을 하여 無分齊의 法身을 볼 수 있으므로 報身佛이라고 한다630)고 한다.
초발의보살은 삼현보살이고 法身菩薩은 隨分覺을 이룬 보살이고 수분각을 이룬 보살은 初地 이상의 地上菩薩이다. 그리고 삼현보살과 법신보살을 『기신론소』에서 報身佛이라고 한다.
『大乘起信論義記』에서 법장은 "「僧寶」라는 「僧」은 凡聖을 通하나 「寶」는 오직 聖位이다. 「聖」은 大小菩薩을 通하나 殊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가운데 오직 地上大菩薩僧에게만 歸依하는 것이다"631)라고 한다. 현수는 마명보살이 귀의하는 僧寶는 地上菩薩僧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分別發趣道相에서 發心에는 信成就發心, 解行發心과 證發心 三種이 있다.632) 信成就發心은 十住에 있으며 겸하여 十信을 취하고, 이는 凡夫覺 즉 不覺 應身에 해당하고, 解行發心은 十廻向의 자리에 있으며 겸하여 十行을 취한다. 이는 三賢位의 相似覺 無分齊 報身에 해당하고, 證發心은 初地 이상에서 내지 十地의 자리에 있다. 이는 法身菩薩의 隨分覺 無分齊 報身에 해당한다. 앞의 둘은 相似發心이라고 하고 뒤의 것은 法身을 證得하는 眞心發心이라고 한다.633) 증발심은 初地 이상에서 하는 것이며 법신을 증득하는 眞心發心이라고 하여 證發心者는 法身菩薩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十地菩薩은 第四禪王634)이며 色究竟天에서 成道하는 것이니, 곧 이는 報身佛의 他受用身이다635)라고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初地 이상의 修行僧이 法身菩薩이며 「寶로서의 僧이다.」 初地 이상의 修行僧은 곧 隨分覺을 증득한 報身佛이며, 마명이 귀의하는 바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중생들이 현재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寶로서의 僧이다. 이 寶로서의 僧이『대승기신론』에서 설하는 報身佛이고 衆生卽佛의 用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대승기신론』은 寶로서의 僧을 얻고자 述하여 졌다고 볼 수 있을 만큼 僧寶는 『대승기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科目이다. 그러나 寶로서의 僧은 大乘의 이치 이해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行 하나 하나로 무량공덕장을 원만히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寶로서의 僧을 이룩할 수가 없다.636) 이러한 이유에서 『대승기신론』에서 「起信」의 부분에서 법신보살의 佛道를 설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유로 佛道와 衆生卽佛과의 관계를 겸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V. 佛道와 衆生卽佛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僧寶를 극히 중요하게 취급하여왔다. 그것은 無邊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무량하게 많은 生佛 즉 現在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佛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원효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양하게 佛이 되는 길을 제시하여 왔다. 이 佛이 되는 現在의 길을 佛道라고 정의한다. 『대승기신론』상에서 佛道로서 설하고 있는 항목은 對治邪執, 分別發趣道相, 修行信心分, 勸修利益分이다. 본 논문에서는 對治邪執, 分別發趣道相 그리고 勸修利益分과 衆生卽佛과의 관계를 연구하고 修行信心分에 대한 연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修行信心分에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修行信心分과 衆生卽佛과의 관계를 분별발취도상에서 취하도록 하였다. 먼저 對治邪執부터 연구한다.
1 對治邪執과 衆生卽佛
먼저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對治邪執」은 一切 그릇된 執著이 모두 我見에 의한 것으로서, 만약 나를 여의면 곧 邪執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人我見이고 둘째는 法我見이다.637)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對治邪執」이란 일체의 邪執은 모두 다 我見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음이 없다. 만일 我見을 떠나면 바로 邪執이 없어진다. 我見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人我見이고, 둘은 法我見이다.638)
『기신론소』에 의하면,
「對治邪執」이란 글에 또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數를 들었고, 둘째는 數에 의하여 이름을 열거하였고, 세 번째는 이름에 의하여 모양을 분별하였으며, 네 번째는 究竟에 執著의 여읨을 전체적으로 나타내었다.639) 처음에 전체적으로 표시하여 수를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명칭을 나열한 것 중에서 「人我見」이라고 말한 것은 總相의 宰主가 있다고 計度하는 것을 人我執이라고 하며, 「法我見」640)이란 일체법이 각각 體性이 있다고 계탁하기 때문에 法執이라 한다. 法執은 곧 二乘이 일으키는 것이며, 이 중에 人執은 오직 佛法을 취하는 안에서 처음 대승을 배우는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다.641)
라고 설한다. 「對治邪執」이라는 것은 誤解 혹은 事理에 어긋나는 것을 指摘하여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邪執」, 즉 그릇된 見解는 我見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에 대한 執著을 여의면 일체의 邪執은 없어지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집착이 근거하는 「我見」은 固定的인 實體가 있다고 믿는 見解가 있기 때문이다. 이 見解는 執著을 낳는다. 이 집착이 일체 고통의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我見」이라고 하면 自己에 대한 집착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넓게 해석해서 固定的인 見解를 我見이라고 하고 이것을 둘로 나누어 人我見과 法我見으로 설명한다.
人我見은 일반적으로는 自我를 固定的인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우리들의 自我가 斷絶되지 않고 변화해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확하게 보인다. 모든 사람이 自我의 向上을 바라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自我가 변한다는 見解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見解에 관계없이 自我에 愛著하고 있기 때문에 一方的으로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愛著 혹은 執著에 근거한 固定的 自我觀이 「人我見」이다. 그러나 本『論』에서 「人我見」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本性인 法身, 如來藏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의미한다. 『기신론소』에서 이점이 더욱 확실하여 진다. 원효는 『기신론』에서의 「自我」를 전 우주 즉, 법계 자체로 확대하고 있다. 그는 「人我見」을 森羅萬象의 總相을 主宰하는 主體者가 있다고 計度하는 것을 人我執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人我執은 佛敎徒 중 大乘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의 「法我見」은 일반적으로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법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고정적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기신론소』에서는 「法我見」은 일체법이 각기 體性이 있다고 계탁하기 때문에 法執이라 한다고 하고, 이 法執은 二乘鈍根의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人我見 法我見을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설하는 것은 『대승기신론』의 독특한 설이다. 이와 같은 我執과 法執을 소멸하는 방편을 연구하고자 한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또한 다음으로 妄執을 궁극적으로 떠난다는 것은 응당, 染法과 淨法은 모두 相待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自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은 원래부터 지금까지, 色도 아니고 心도 아니며, 智도 아니고 識도 아니며,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니, 결국은 그 相을 說할 수 없는데도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훌륭하고도 교묘한 방편으로써 임시로 언설을 가지고 중생을 인도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근본 뜻은, 모두가 다 妄念을 여의고 眞如에 歸依시키기 위한 것이다. 일체법을 想念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642)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만일 궁극적으로 분별과 집착을 떠난다면 바로 일체의 染法과 淨法이 모두 相待하여 성립하고 있는 것을 안다.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諸法은 원래부터 이때까지 色도 아니고 心도 아니며, 智도 아니고 識도 아니며, 無도 아니고 有도 아니니 결국은 모두가 설할 수가 없는 相인 것이다. 그러나 言說이 있어서 이것을 示敎하신 것은 모두가 다 여래의 훌륭하고도 교묘한 방편인 것으로서, 임시로 言語로써 중생을 인도하시되, 文字를 버리고 진실로 들게 한 것이다. 만일 말을 따라서 뜻을 執著한다면, 妄分別을 증가시키고 진실한 지혜를 낳지 못하여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643)
『기신론소』에 의하면,
네 번째는 구경에 집착을 여의는 뜻이니,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모든 법이 말을 여읜 도리를 밝혔고, 뒤에는 언설을 빌어 가르치는 뜻을 나타내었으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644)
라고 설하였다. 對治에 急하여 對治하기 위한 설명에 집착하면, 그 집착도 또한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이것은 마치 「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空」을 가지고 그 집착을 여의게 하고, 또 그 「空」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空도 또 空하다」고 경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點을 나타내기 위하여 「究竟離執」을 설하는 것이다. 즉, 일체는 상호의존에 의하여 성립하여 있음을 다시 밝히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면, 敵이 있음으로 그 敵에게 지지않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자기의 진보가 있었다면 敵은 오히려 자기에게 좋은 스승이 되었다고 하지 않으면 않될 것이다.
이와 같은 넓은 입장에서 自覺하는 것이 大乘의 空의 思想이다. 여기에 競爭과 對立을 解消할 수 있는 中道, 즉 화합의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구경에 망집을 여읜다(究竟離執)」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망집의 가운데는 人法二執을 포함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同時에 破邪의 立場에 집착하면 그 집착도 本節에서 설하는 집착에 포함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려는 것이다.
染法과 淨法, 즉 美와 醜, 善과 惡, 迷와 悟 等은 모두 「相待」의 원리로 성립하는 것이다. 惡을 除하면 善만으로 獨存할 수 없으므로, 惡에 비교하여 이것이 善이다라고 하여 善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더 수승한 善이 나타나면 앞의 善은 참된 善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絶對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相待」하여 성립하는 것은 「自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즉, 美의 가운데에도 어떠한 醜가 포함되어 있고, 光의 가운데에도 어떠한 闇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相待」를 緣起라고 한다. 그러나, 緣起에 있어서 연기를 성립하는 物에는 本性이 「空」이다. 즉, 善은 惡을 待하여 善이 되는 것이다. 만일, 惡은 善을 待하여 惡이 되는 것이라면, 實은 그 어느 쪽도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善惡을 성립시키는 넓은 全體者가 流動的인 힘이 되어 存在하여 그 활동의 가운데서부터 相互依存하는 相對的存在者가 成立한다. 이 流動的全體者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眞如」이다.
『반야경』에서는 이것을 「法界」 혹은 「法性」 등으로 부르고, 龍樹는 「諸法의 實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일체가 「相待」에 의해서 성립할 때, 자기의 가운데는 他者를 포함하는 形으로 成立하여 있으므로 「自相을 說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他者를 排除한 자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物과 心」도 상호 의존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은 唯心論의 입장에 서 있으므로, 心의 優位를 주장하는 입장에 있지만 心의 優位의 主張도 상대적인 것이다. 第一義諦에 의하면, 「一切法은 從本已來 色도 아니고 心도 아니다」라고 한다. 肉體에 의하여 心이 있고 心에 의하여 肉體가 있다. 心이 죽으면 肉體도 멸한다. 色도 心과 상호 의존하여 성립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智와 識도 相互依存하여 성립한다. 智는 洞察이고 直觀的이다. 그리고 全體를 아는 것이지 만, 識은 分析的이고, 分別하고 判斷하는 것이다. 즉, 차별을 아는 것이다. 兩者는 機能이 다르므로 相互 補助하여 和合하여 여러 가지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만일 「識에 依支하지 않는 智가 있다」면, 이것은 智를 識에 의존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전체를 아는 것과 共히 부분을 아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번뇌를 멸하여 無執着이 되었을 때도 識의 활동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識과 智가 여러 가지로 독립하여 自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한 識과 智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같은 입장에서,「일체의 法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다」라고 설한다. 有라고 하는 것은 一邊이고 無라고 하는 것도 一邊이다. 諸行은 無常하므로 이 세상에서는 「有」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눈앞에 있는 有도 항상 자기 崩壞를 하여 되돌아가고 있다. 卽, 有의 가운데는 無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有와 無 어느 邊에도 치우치지 않게 하는 원리이다. 이를 통달할 때 「有無中道」라고 한다.
그러나 本『論』에서는 「中道」라고 하지 않고,「畢竟不可說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無分別」을 顯示하는 것이고, 「可說」은 분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은 「妄念」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妄念」에 의하여서는 現實의 眞相, 즉 眞如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不可說」이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불은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지만 그 설법은 분별의 일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론에서는 「필경에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는데도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645)라고 술하고 있다.
諸佛의 說法은 世俗諦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말에 의지하지 아니하고는 가르침을 전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말이나 글이 불완전하더라도 말이나 글에 의존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의 선교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불이 어떠한 가르침을 설하여도 말이나 글의 한계를 항상 알고 있으므로 가르침에 집착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즉 중생을 無念으로 引導하기 위하여 言說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법의 목적은 「그 旨趣는 念을 여의어서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646)라고 설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진리를 思念하더라도 그 思念은 망념이다. 왜냐하면, 思念하는 곳에는 心의 生滅이 있고, 心의 생멸이 있는 곳에는 心의 主客이 分裂하여 妄境界가 생겨 마음에 暗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법을 念한다는 것은 心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647)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本節은 「破邪」를 맺음에 있어 思念 뿐만이 아니라 自說에도 執著함이 없도록 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緣起의 「相依」와 「相待」에 의거하여야만 참다운 진여에 귀의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은 문제를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이지만, 인식하는 것으로 思念과 自說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므로 「破邪」를 이룩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편을 "分別發趣道相과 衆生卽佛의 작용"이라는 題下에서 설명하고 있다.
2. 分別發趣道相과 衆生卽佛
「破邪」를 이룩하기 위한 방편으로 佛道에 發趣하는 相을 분별한다. 이를 分別發趣道相이라고 한다. 이 道相과 중생즉불과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大乘起信論』에 의하면,
「分別發趣道相」이란 일체 모든 부처가 증득한 道에 모든 보살이 발심,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 발심을 간략히 설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解行發心이요, 셋째는 證發心이다.648)
라고 설하였다. 이에 대한 『기신론소』에 의하면,
처음 중에 「一切諸佛所證之道」라고 한 것은 나아 가야할 道(목표)를 든 것이며, 「일체 보살」以下는 능동적으로 실천하여야할 行을 나타낸 것이니, 보살이 부처가 증득한 道에 발심하여 나아감을 밝히려고 하기 때문에 「佛道에 發心하여 수행하는 모습을 분별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아래는 두 번째 분별을 각각 연 것이니,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數를 들어 章을 여는 것이고, 둘째는 數에 의하여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름에 의하여 相을 분별하는 것이다.649)
첫 번째, 「數를 들어 章을 연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중에 「信成就發心」이라고 하는 것은 位置가 十住에 있으며 겸하여 十信을 취한다. 十信의 자리 중에서 信心을 닦아 익혀서 신심이 성취되어 決定心을 일으켜 곧 十住에 들어가기 때문에 信成就發心650)이라고 하는 것이다. 「解行發心」이란 十廻向의 자리에 있으며 겸하여 十行을 취하니, 十行의 자리 중에서 法空을 잘 알고 法界를 수순하여 六度行을 닦아서 六度行이 純潔해지고 成熟되어 廻向心을 일으켜 회향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解行發心651)이라 한다. 「證發心」이란 初地 이상에서 내지 十地의 자리에 있으니, 앞서 두 가지의 相似한 발심에 의하여 法身을 증득하여 眞心을 일으키는 것을 證發心652)이라고 한다.653)
세 번째는 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글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앞의 차례대로 세 가지의 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초발심 내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信成就行을 밝혔고, 둘째는 成就發心하여 行하는 相을 나타내었으며, 셋째는 發心하여 얻은 공덕을 찬탄하였다.654)
+--- 十 信--+
①信成就發心------------捨邪 信因果法 得正定聚----+ +----+
+--- 十 住--+ |
+--- 十 行---+ +----相似發心
②解行發心--捨生 解悟眞如法 六度行 得法空熟發心---+ +---+
+--- 十廻向--+
③證發心----捨比 得眞心 方便心 報身佛------------------十 地 -----------眞實發心
<表 6> 三種發心
라고 설하였다. 「顯示正義」에서 본『대승기신론』의 주장을 나타내었다. 「對治邪執」에서 본『대승기신론』의 주장에 반대설을 破斥하고, 本章에서는 眞如의 理를 증득하기 위하여 보리심을 얻겠다고 결심을 일으키는 것을 설한다. 「발심」을 「一切諸佛所證의 道에 일체의 보살이 발심하고 수행하고, 趣向하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諸佛所證의 道」는 불타가 증득한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보살이 그 불의 깨달음의 境涯를 목표로 하여 발심하고 수행하고 목표를 향하여 前進해 가는 것이다. 이 수행을 유지하여 가는 힘은 출발점의 결심이다. 그것이 發心이다. 그러나 발심에 의하여 수행이 진행되어 가기 위해서는 發心에 수행의 「行」이 필연적으로 加味되어야 한다. 더욱이 修行의 결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證』도 발심에 융합되어야 한다. 本『論』은 이와 같이 넓은 입장에서 발심을 설명하고 있다. 보살은 初地에 들어가 法身을 증득하여 相似覺의 位를 초월한다. 이것은 본론의 證發心에 해당한다. 참된 발심은 이 「證」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發心이다. 그렇기 때문에 信成就發心과 解行發心의 둘을 「相似發心」이라고 한다. 發心은 보살을 迷에서 깨달음으로 운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로 大乘의 「乘」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 發心 중 信成就發心부터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1) 信成就發心과 衆生卽佛
신성취발심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信成就行이고, 둘째는 成就發心하여 行하는 相이며, 셋째는 發心하여 얻은 공덕이다. 이들을 차례로 알아보고자 한다.
(1) 信成就行과 衆生卽佛
『논』에 의하면,
「信成就發心」이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어떤 行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不定聚衆生에게 의지하는 것으로서 熏習의 힘과 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業의 果報를 믿고 十善을 능히 일으키며, 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를 구하고자 하며,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信心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一萬 劫을 지나서 信心이 成就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케 하니, 혹은 대비에 의하여 스스로 능히 발심케 하며, 혹은 正法이 없어지려 함에 의해서 護法의 인연으로 능히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信心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正定聚에 들어가 필경 퇴전하지 아니하니, 이를 如來種 中에 머물러 正因과 相應한다고 한다.655)
고 설하였다. 이 부분의 『新譯』에 의하면,
믿음이 성취된 발심(信成就發心)이라는 것은 어떤 位階에 의하여, 무슨 行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될 수 있어서 능히 발심할 수가 있는 것인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不定聚에 의하여 있으나, 法의 熏習과 善根의 힘 때문에 깊이 業의 果報를 믿어서 十善道를 행하고 生死의 苦를 싫어하여 無上의 깨달음을 구하고 여러 부처님과 여러 보살을 만나 承事하고 공양하여, 모든 행을 수행하면서 十千劫을 지나, 믿음이 바로 성취된다. 이때부터 이후는 혹은 여러 부처님과 보살의 가르치심의 힘으로써 혹은 대비심으로써, 혹은 正法이 장차 괴멸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법을 지키기 위하여서 능히 발심하는 것이다. 이미 발심하고 나면, 正定聚에 들어서 畢竟 退轉하지 않고, 부처님의 種性656)에 住하여 殊勝한 因이 相應하는 것이다.657)
혹은 어떤 중생이 久遠한 과거로부터, 善根이 微少하고 번뇌가 깊고 두터워서 그 마음을 덮기 때문에 여러 부처님 및 여러 보살들을 만나더라도 承事하고 공양하는 것이, 다만 人間界나 天上界의 生을 받을 종자를 심거나, 혹은 二乘의 깨달음의 종자를 심거나, 혹 위대한 깨달음의 道를 추구함이 있어도 그 機根이 安定되어 있지 않아서 나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한다. 혹은 부처님 및 여러 보살들을 만나서 공양하고 承事하여 모든 行을 수행하는 일이 아직 十千大劫을 만족하지 못하여도 중간에 緣을 만나서 마음을 일으킨다. 어떤 연을 만난다는 것인가. 이른바 혹은 부처님의 형상을 보거나, 혹은 많은 스님들을 공양하거나, 혹은 二乘이 가르침을 받거나, 혹은 남을 보고 발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발심은 모두가 다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惡緣을 만나면, 어떤 때는 二乘의 境地로 墮落하기 때문이다.658)
라고 설한다. 『원효소』에 의하면,
처음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묻고 뒤에는 답하였다. 묻는 중에 「어떤 사람에 의하여」라고 한 것은 닦는 사람을 물은 것이요, 「어떤 行을 닦아서」란 닦아야 할 행위를 물은 것이며,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을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은 발심의 결과에 대하여 그 행위의 이루어짐을 물은 것이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묻는 바에 바로 답한 것이고, 둘째는 劣惡한 者를 들어 殊勝한 자를 나타낸 것이다. 바로 답한 것 안에 앞서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것이 있다. 처음에 「不定聚衆生에게 의지하는 것으로서」라고 한 것은 처음 물음에 답한 것이니, 닦는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三聚를 분별한다면 여기에 여러 門이 있지만, 이제 이 글 중에서는 다만 보살의 十解 이상의 決定不退를 正定聚라 하고, 아직 十信에 들어가지 아니하여 因果를 믿지 않는 것을 邪定聚라 하며, 이 둘의 중간에 道에 나아가는 사람이 發心하여 無上菩提를 구하려고 하지만 마음이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서는 것을 十信이라 하고 不定聚라 함을 밝힌 것이다.659)
이제 이 사람에 의하여 닦을 바의 행위를 밝히는 것이다. 「熏習의 힘과 善根의 힘이 있으므로」以下는 그 다음에 두 번째 물음에 답한 것이니, 결정되지 않은 사람이 닦는 바의 행위를 밝힌 것이다. 「熏習의 힘과 善根의 힘이 있다」고 한 것은 如來藏 內의 熏習力에 의하고 또한 前世의 善根을 닦은 힘에 의하므로 이제 信心을 닦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며, 「業의 果報를 믿어서 十善을 일으킨다」고 한 것은 福分의 善을 일으키는 것이다. 「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無上道를 구한다」는 것은 道分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여러 부처를 만나 信心을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닦는 바의 道分의 善根을 밝힌 것이니, 이른바 열 가지 信心을 닦는 것이며, 이것의 갖추어진 모양은 『一道章』660)에서 말한 것과 같다. 「一萬 劫을 지나」以下는 세 번째 물음에 답한 것이니, 信心이 成就되는 모양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시기를 들어서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하는 연을 밝혔고, 두 번째는 聚를 기준으로 하여 발심해서 머무는 자리를 나타내었다. 처음 중에 「一萬 劫에 이르러서 신심이 성취된다」고 한 것은 十信에서 十千劫을 지나 信心이 성취되면 곧 十住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本業經』에서661) 「이 信想菩薩662)이 十千劫에 十戒法663)을 행하면 응당 十住心에 들어서 初住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한 말과 같다. 이를 풀이하면 이 중에서 들어가는 初住의 자리란 十住에서 처음 발심하여 머무는 자리(初發心住位)를 말하는 것이니, 이 자리라야 바야흐로 信心이 물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러므로 또한 믿어서 十心664)에 들어간다고 이름하는 것이지, 十解 以前의 十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그것이 그러함을 알게 되는가? 『仁王經』에서 「習種性665)에 十心이 있으니, 이미 二乘의 일체 善地를 초월하였으며,666) 이 習忍667) 이전에 十善을 행하는 보살은 물러남도 있고 나아감도 있어 마치 가벼운 털이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갔다가 하는 것과 같다. 비록 十千劫에 十正道668)를 행하지만 菩提心을 발하여야 이에 마땅히 習忍位에 들어간다」669)고 하였으니, 이 글로 증명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經에서 「十千」이라 한 것은 곧 이것이 一萬이다.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 발심케 하며」라고 한 것은 발심의 緣이 많이 있으나 여기서는 대략 세 가지 수승한 緣만을 낸 것이다. 「이와 같이(信心이 成就되어)」이하는 그 발심이 머무는 자리를 나타낸 것이고, 「신심이 성취되어 正定聚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곧 十解의 初發心住에 들어간 것이므로 「畢竟 退轉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며, 이 때 바로 習種性의 자리에 있는 것이므로 「如來種 중에 머문다고 한다」고 하였고, 그 닦는 행위가 佛性을 隨順하기 때문에 또한 「正因과 상응670)한다」고 말한 것이다. 위에서부터 앞서의 세 가지 물음에 바로 답하여 마쳤다.671)
라고 설하였다. 『賢首義記』에 의하면,
「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사람이 어떻게 수행하여 信成就를 하여 능히 발심하는가 고 묻는다. 이 물음 가운데는 세 가지 물음이 있다. 一問은 能修行人이고, 二問은 所修之行이고, 셋째는 信成就 等을 하였다는 것은 修行이 成就되고 어떻게 감히 능히 發心하는가고 묻는다. 答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바른 답은 앞의 물음에서 다음에 劣等한 사람들을 들어 殊勝한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앞의 믿음이 만족하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뒤의 믿음은 成熟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退轉하는 것이다. 正答 가운데 둘이다. 三問에 대하여 먼저 답하고 뒤에 階位의 成就로 結論한다.672)
이른바 「不定聚衆生을 의지한다」는 것은 처음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三聚를 분별함에는 많은 門이 있다. 지금 이 文 가운데서는 菩薩 十住以上 결정적으로 불퇴하는 것을 正定聚라고 이름하고, 十信에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果를 믿지 않는 것을 邪定聚라고 한다. 이 둘 중간에 十信位의 사람이 있다. 大果를 구하고자 하나 마음이 아직 결정적이지 못하여 혹은 앞으로 나가고 혹은 뒤로 물러나기 때문에 『本業經』 가운데 「十信菩薩은 空中에 털과 같아서 不定聚라고 한다.」지금 이 사람에 의하여 그 수행을 밝힌 것이다.673)
熏習하는 善根力이 있기 때문에 業의 果報를 믿고 능히 十善業을 일으키어 生死苦를 싫어하고 무상보리를 구하고자 하여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고 공양하며 信心을 수행한다. 「훈습이 있다」 이하는 둘째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먼저 수행의 원인을 밝힌다. 熏習과 本覺의 內熏의 힘을 듣고 나란히 前世에 닦은 善根力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業果를 믿는다. 따라서 惡을 버리고 善을 좇아 福德分을 수행하는 것이다. 「生死苦를 싫어하고 보리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菩提分과 解脫分의 善을 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 信心을 수행한다」는 것은 수행의 緣을 밝힌 것이다. 이 緣을 가지고 十種信心行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이다.674)
라고 설한다. 이들을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不定聚衆生에게 훈습의 힘과 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業의 果報를 믿고 十善을 능히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한다 … 대비에 의하여 스스로 능히 발심케 하며, 혹은 正法이 없어지려 함에 의해서 護法의 인연으로 능히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新譯大乘起信論』에서도 "不定聚에게 法의 훈습과 선근의 힘 때문에 깊이 業의 과보를 믿어서 十善道를 행하고 생사의 고를 싫어하여 無上의 깨달음을 구하고 … 이미 발심하고 나면, 正定聚에 들어서 필경 퇴전하지 않고, 부처님의 種性에 住하여 수승한 因이 相應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원효의 『기신론소』에서는 "「熏習의 힘과 善根의 힘이 있다」고 한 것은 여래장 內의 熏習力에 의하고 또한 前世의 善根을 닦은 힘에 의하므로 이제 信心을 닦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고, 현수의『大乘起信論義記』에 의하면, "훈습과 본각의 內熏의 힘을 듣고 나란히 전세에 닦은 선근력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업과를 믿는다. 따라서 악을 버리고 선을 좇아 福德分을 수행하는 것이다. 「생사고를 싫어하고 보리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菩提分과 解脫分의 善을 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 信心을 修行한다」는 것은 修行의 緣을 밝힌 것이다. 이 緣을 가지고 十種信心行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들이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不定聚衆生이 의지하는 것은 法의 훈습과 선근의 힘이다. 법의 훈습은 여래장 내의 훈습력이고 본각의 내훈의 힘이다. 이 本覺은 항상 편만하여 있고 內熏의 힘은 지금 이 찰나에도 중생의 마음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다.
信心을 닦고자 하는 의지가 일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그 의식은 자신에게 내재한 법신불의 熏習力의 작용과 前世의 善根을 닦은 힘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이 本覺의 熏習力과 善根의 힘은 중생의 마음에 있어 중생으로 하여금 生死苦를 싫어하고 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이제 의식이 信心을 닦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675) 근본적인 원인과 동기가 된다고 하는 관점이 『대승기신론』의 衆生卽佛觀이다. 이 점이 본 『논』의 중요한 불타관이 된다.
「信成就發心」은 信을 완성하여 그 信心에 입각하여 成佛을 하기 위하여 決意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信」은 raddh 의 譯語로 원 뜻은 「心을 淨하게 하는 힘(心澄淨)」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信의 대상은 佛法僧 三寶이다. 이것을 믿고 나아가 因果法을 믿는 것이다. 즉, 佛을 믿으면 그 佛의 淸淨性에 同化되어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게 되어 가는 것이 불교의 「信」이다. 法과 僧寶에 관하여도 같은 것이다. 因果의 道理를 믿는 것에는 謙虛한 기질, 진리에 대한 敬畏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 기질에 의하여 心澄淨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信」에 眞如를 믿는 것이 加味되어 있다. 진여는 범부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자기의 본성이 如來藏이고, 自性淸淨心이라고 가르침을 받아도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지만, 가름침대로 여래장인 자성청정심이 진여라고 믿고 오로지 수행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믿고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진여의 훈습이라는 것은 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하여 불타의 가르침을 믿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취발심」은 자기의 본성이 진여라는 것 그리고 진여가 자기를 위하여 항상 훈습하고 있음을 믿음으로서 발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이 진여를 신앙하는 것이지만 이 진여가 실은 중생즉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단계의 신앙이다. 이 깊은 신앙심에 의한 신행에 의지하여 결국 중생즉불의 도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다.
本節에서는 「信成就發心」을 세 가지 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이 발심하는가. 어떠한 행을 수행하는가. 발심할 때 어떻게 하여 발심이 가능한가 하는 三點이다. 第一의 「어떠한 사람이 발심하는가」에 관하여는 본론은 「不定聚衆生에 의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因果를 믿지 않는 「邪定聚」의 사람을 발심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因果法을 믿는 不定聚의 사람이 信心을 수행하여 그 결과 발심하여 正定聚에 前進해 가는 것이다.
다음에 「어떠한 수행을 하는가」는 먼저 熏習과 善根力에 의한다. 本覺의 內熏과 外緣의 聞熏習에 의하여 수행이 가능하여 진다. 다음은 前世의 善業에 의하여 善根力이 몸에 具有하고 있음이 조건이다. 이 두 가지의 도움을 받아 수행을 한다. 그래서 業의 因果를 믿고 十善을 행하고 윤회의 생존을 바라보지 않고 無上正覺을 증득하겠다고 희망하여 제불을 만나게 되어서 친히 받들어 모시고 공양하고 믿음을 수행한다. 이상은 특히 엄한 수행은 설하지 않았다. 다만 業의 因果를 믿고, 十善을 행하고, 諸佛을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을 本『論』에서 설하는 信心의 수행이다.
다음 第三에는 「信心을 成就한 보살이 어떠한 發心을 하는가」를 물었다. 우선 初信에서 十信까지 一萬劫이라고 하는 長期間의 수행을 한 다음에야 신심이 성취된다고 한다. 一萬劫의 信心修行이 끝날 때, 시기가 성숙되었음을 보고, 제불과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하게 된다. 그러나 無佛의 경우에도 자신에게 대비심이 있어 이 대비심에 의하여 자력으로 발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자비심으로 인한 발심은 중생즉불의 작용이다. 第三에는 正法이 멸하려고 할 때 護法하고자 하는 熱意로 자기 스스로 발심하는 것이다. 이 호법을 위한 발심은 중생즉불의 용이다. 初信에서 第十信까지는 十信位의 수행이니 本『論』에서는 일만겁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 機가 성숙하였을 때 信滿을 한 까닭에 諸佛과 菩薩이 가르쳐서 발심하게 한다. 이 제불과 보살에 의한 발심은 중생즉불의 外熏이다. 그외 다른 것에 의하여 발심하기도 하여 十住의 初位인 初發心住에 進入하게 된다. 즉, 發心은 十住의 初心이다. 十住이상은 正定聚의 位이다. 그 의미는 信이 확립하여 진여를 믿는 것 외에는 마음이 移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 「行」과 「證」으로부터 退墮는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信成就하여 발심한 사람은 正定聚에 들어가 필경 退墮하지 않으므로 如來種의 가운데 머무르게 되어 「正因에 相應한다」고 설한다. 「如來種」이라는 것은 여래의 種姓이다. 如來家에 태어나고자 하면 언제라도 如來가 될 수 있다. 成佛이라고 하는 바른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이 「발심」을 「正因相應」이라고 한다. 즉, 이 「發心」이 報身佛의 正因이 되는 것이고 중생즉불의 用이다. 이제 「信成就發心의 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信成就發心의 行相과 衆生卽佛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다음에 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深心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묻기를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相이며 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眞如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善行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가?」 답하기를, 비유컨대 큰 摩尼寶가 그 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사람이 마니보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다듬지 않으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그 체성이 텅비고 깨끗하나 한량없는 번뇌의 더러운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하지만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깨끗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모든 善法을 수행하면 절로 眞如法에 귀순하기 때문이다.676)
대략 방편을 설명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自性의 생김이 없음을 보고 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業果를 잃지 아니함을 보고 大悲를 일으켜 여러 가지 福德을 닦아 중생을 攝化하여 涅槃에 머물지 아니함을 말하니, 이는 法性의 住着함이 없음에 隨順하기 때문이다.677)
둘째는 能止方便이다.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허물을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法性에 隨順함으로써 모든 허물을 여의기 때문이다.678)
셋째는 善根을 일으켜 方便을 增長시키는 것(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에게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勸請하여 이와 같이 삼보를 愛敬하는 淳厚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增長되어 無上의 道를 구하는 데 뜻을 두며, 또 佛法僧의 힘으로 보호됨에 의하여 業障을 녹이고 善根이 퇴전하지 아니하니, 이는 法性에 수순함으로써 癡障을 여의기 때문이다.679)
넷째는 大願平等方便이다. 이른바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敎化하고 濟度하여 남음이 없게 하여 究竟에 모두 다 無餘涅槃을 이루도록 발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에 隨順함으로써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다. 법성이 廣大하여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여 平等無二하여 彼此를 생각하지 아니하니 구경에 寂滅하기 때문이다.680)
라고 설하였다.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또한 다음으로 믿음이 성취되어 일으키는 발심(信成就發心)이라는 것은 간략하게 설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정직한 마음을 발한다. 理法 그대로 진여법을 바르게 念하는 까닭이다. 둘째, 깊고 愼重한 마음을 발하여 일체 모든 善行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 大悲心을 발하여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빼버리고자 서원하기 때문이다. 묻기를, 일체 중생과 일체 제법은 모두 다 같은 법계로서 두 가지 상이 없으니, 그 理法에 의거하여 단지 응당 진여법을 바르게 염할 것이지, 어찌 임시로 또한 일체의 善行을 닦아서 일체 중생을 구하려고 하는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마니보주의 근본성품이 밝고도 청결하지만 廣穢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憶念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방편을 작용하지 않으면 功力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청정한 것을 구하려고 하더라도 결국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여의 법도 또한 역시 이것과 같다. 體가 밝고 청결하여 功德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가없이 넓은 客塵의 染汚하는 바를 받는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憶念을 더한다 하더라도 또한 방편을 작용하지 않으면 제행을 닦을 수가 없으니, 청정한 것을 구하고자 하여도 결국은 理法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요컨대, 마땅히 일체의 善行을 행하여 일체 중생을 救濟하여 그 가 없는 客塵의 때(垢)인 染汚를 떠나서 眞如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681)
그 方便行은 간략하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 行根本方便이다. 이른바, 일체법은 本性이 無生임을 관하여, 妄見을 떠나고 生死에 住하지 않게 하고, 또 일체법이 인연으로 화합한 것임을 관하여 業果을 잃지 않고, 대비심을 일으켜서 여러 善行을 닦아 중생을 포섭 교화하고 열반에 住하지 않는다. 진여는 생사 열반의 相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행을 수순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이 행을 根本方便이라고 이름한다.682)
둘째, 能止息方便이다. 이른바 慙愧하는 일 및 잘못을 뉘우치는 일인데, 이것이 능히 일체의 惡法을 止息하고 增長시키지 않는 일이다. 眞如는 일체의 過失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진여를 隨順하여 諸惡을 止息하는 것, 이것을 「能止息方便」이라고 이름한다.683)
셋째, 선근을 생장하는 방편(生長善根方便)인데 이른바 三寶가 있는 곳에서 愛敬心을 일으키고 尊重하고 供養과 頂禮를 올리고, 불타의 명칭을 찬탄하고, 隨喜하며, 법을 勸請하여서 바른 믿음을 증장하여 나아가서는 무상 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뜻을 세운다. 불법승의 위력이 守護하는 바 되어 業障이 청정하여지고 善根은 退轉하지 않는다. 진여는 일체의 장애를 떠나서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진여에 수순하여 선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生長善根方便」이라고 이름한다.684)
넷째, 大願平等方便이다. 이른바 誓願을 발하여 모든 未來際가 다하도록 일체 衆生苦를 평등하게 救拔하여 그들로 하여금 無餘涅槃에 安住하게 하는 것이다. 일체법의 근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彼此가 평등하고, 그렇기 때문에, 구경에 적멸한다. 진여의 이 세 가지 相에 수순하여 위대한 서원을 발하므로 이것을 「大願平等方便」이라고 이름한다.685)
라고 설하였다. 원효의 『기신론소』에 의하면,
두 번째는 발심한 모습을 나타내었다(顯發心之相).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로 밝혔고 둘째는 왕복하여 의심을 제거하였다. 처음 중에 「直心」이라고 한 것은 굽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진여를 생각하면 곧 마음이 평등하게 되어 다시 다른 갈래가 없을 것이니, 무슨 廻曲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여법을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곧 二行의 근본인 것이다. 「深心」이라고 한 것은 근원을 궁구한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의 善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根源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니, 근원에 돌아가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萬行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선행을 즐겨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며, 이는 곧 自利行의 근본이다. 「大悲心」이란 널리 제도한다는 뜻이니 그러므로 「중생의 고통을 빼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으며, 이는 곧 利他行의 근본이다. 이 세 마음을 내면 어떤 惡이든 여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떤 선이든 닦지 못할 것이 없으며, 한 중생이라도 제도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를 「無上菩提心」이라 한다. 「묻기를」이하는 왕복하여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니, 묻는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대답하는 것과 거듭 나타내는 것이다. 처음 바로 대답하는 것 중에 譬喩와 合이 있다. 「略說 方便」이하는 거듭 나타내는 것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686)
라고 설하였다. 이에 대한 『大乘起信論義記』에서는,
아래에서 「發心相」을 밝히는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三心을 바르게 밝혔고, 후에 問答으로 의심을 제거하였다. 앞의 가운데 둘은 먼저 묻고 뒤에 답하였다. 답 가운데 數를 標하고 別釋하였다. 다음에 「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마음을 發하는 것인가? 略說하면 세 가지가 있다. 어떠한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 直心은 眞如法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 深心은 일체 모든 善行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 大悲心은 一切衆生苦를 뽑아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해석 가운데 「直心」이라고 하는 것은 理致를 向하는 마음이 갈림길과 지름길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진여를 바르게 생각한다고 한다. 즉, 二行의 根本이다. 「深心」이라는 것은 萬德을 구비하여 心源으로 귀향하므로 「樂集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 二種은 自利行의 根本이다. 「大悲心」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고통을 널리 빼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얻도록 하기 때문에 「欲拔等」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利他行의 근본이다. 妙한 修行은 비록 넓으나 三行에 모두 收集되기 때문에 위에서 「略說三」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三聚戒687)이다. 그러므로 三德 三身이 모두 이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이것이 곧 그 三廻向이기 때문에 처음에 實際로 회향하고 다음에 菩提로 회향하고 그 다음은 중생에게 회향한다. 모두 응당 서로 배대하여 해석한 것이다.688)
라고 설하였다. 이들을 정리하여 보면, 무엇을「發心」하는 가? 그 발심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直心, 深心, 大悲心의 三心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발심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三心을 발하는 것을 「發心相」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直心」은 바르게 진여를 念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에는 屈曲됨이 없으므로 直心이라고 한다. 이 直心이 중생즉불의 모습이다. 발심한 보살은 항상 진여를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이 「直心」이 다음의 深心과 大悲心의 근본이 되고, 이 마음은 중생즉불의 用이다.
둘째는 深心이다. 根源을 궁구하는 깊은 마음이다. 이것은 일체의 善行을 즐거이 收集하는 마음이다. 진여는 무루의 性功德을 具有하고 있으므로 그것에 수순하여 大小의 善行을 실천함으로서 心源의 性德에 귀향하는 것이 「深心」이다. 따라서 「深心」은 自利行의 근본이고 중생즉불의 용이다. 이것은 항상 일체의 善을 실행하고자 하는 決心이다. 그러므로 「深心」은 「大悲心」의 근본이 된다.
第三은 「大悲心」이다. 일체중생의 苦를 뽑아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발한다. 이것은 利他行의 근본이고 중생즉불의 용이다.
이상을 三聚淨戒 혹은 三廻向 등에 대응하여 설명하면, 「直心」은 攝律儀戒로 惡을 여의는 마음이고, 「深心」은 攝善法戒로 善을 積集하는 것이고, 「大悲心」은 攝衆生戒로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三廻向에 배대하면,「直心」은 實際에 회향하는 것이고,「深心」은 菩提에 회향하는 것이고, 「大悲心」은 一切衆生에게 회향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까지 중생즉불의 훈습과 방편으로 진여법에 귀순하는 것에 대하여 설하였다. 다음은 귀순하는 방편에 四種方便이 있다고 설한다. 方便이란 法性에 隨順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法性이란 여기에서는 진여이고 진여는 곧 중생즉불이다. 이 「四種方便」은 제일「行根本方便」은 自利와 利他, 일체 행의 근본이 되는 方便이다. 이것은 어떠한 善을 행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不住」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세간의 일체법은 無常이다.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여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本性은 「空」이고, 空이므로 「自性無生」이다. 이것을 無爲인 진여법성에 수순한다고 한다.
제법을 生하였다거나 滅하였다고 보는 것은 보는 사람의 妄見이다. 自性이 있는 것은 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俳優가 舞臺에 나타나는 것을 生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善을 行할 때마다 善을 行하였다는 집착을 하지 않고 자성이 있다는 망견을 여의고 생사에 주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일체가 空」하다는 도리를 실천하는 方便이고 집착하지 않는 方便이다. 그리고, 이것이 「不住生死」의 의미이고 법성에 수순하는 것이다. 法性에 수순하는 것은 중생즉불의 진여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이 無自性인고로 諸法의 生起가 가능하다. 이 법의 생멸은 業의 因果法則의 기초가 된다. 보살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大悲心을 일으키어 善行을 實行하고, 중생을 구제하여 복덕을 닦고 중생을 攝化한다. 중생을 섭화하는 것은 중생즉불의 용이다.
중생을 교화하지만 중생은 無邊이므로 攝化衆生이 끝나는 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열반에 주하지 않는다. 즉, 생사의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專心을 다한다. 이것을 「無住處涅槃」이라고 한다.
第一의 行根本方便은 無住處涅槃에서 영원히 自利와 利他의 行을 진행하여 가는 것이다. 이것이 法性眞如의 「無住」라고 하는 성격에 수순하는 것이고 중생즉불의 용이다. 진여는 法界一相이므로 把握할 수 없는 것이지만 無住를 本性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第二의 방편은 「能止方便」이다. 「能止」는 일어나는 악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惡을 停止하는 힘은 의지적으로 행하는 慙과 愧이다. 慙愧하는 마음이 강할 때에 악을 여읠 수 있다. 無慙無愧할 때에 惡을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따라서 아비달마에서는 慙과 愧를 大善地法이라고 했다. 善의 根底라고 하여 중요시하고 있다.
本『論』에서는 慙과 愧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힘으로 惡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惡의 誘惑에 져 惡行을 하게되면 바로 그것을 告白하고 懺悔한다. 이것을 「悔過」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의 惡行을 隱匿하고자 한다. 그러나 악을 은닉하는 것은 違理하는 것이므로 고통이다. 犯한 惡을 다른 사람에게 告白하고자 하는 진여의 훈습이 順理的이다. 惡을 懺悔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懺悔에 의하여 마음은 安心한다.
本『論』은 이 慙愧와 悔過에 의하여 「능히 일체의 惡法을 停止하고 增長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慙愧는 惡法을 停止시키고 「悔過」는 악법을 증장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방편인 것은 法性眞如는 모든 過誤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內在하는 自性淸淨心인 진여의 훈습에 隨順하여 慙愧와 悔過로 諸惡을 止息하는 것, 이것을 「能止息方便」이라고 이름한다. 「能止方便」은 自利行이다. 이것이 身三口四 滅相 7을 소멸하는 행으로 凡夫覺 卽 不覺이고, 수행계위상으로는 十信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慙愧와 悔過로 모든 악을 소재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들에게 내재하는 자성청정심인 진여의 훈습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여의 훈습은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항상 잘못에 대한 慙愧와 悔過로 모든 악을 소재 하고 善業을 쌓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대승기신론』에서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여의 훈습에 의하여 「能止方便」이 이루러 진다고 설하는 것은 『대승기신론』이 衆生卽佛觀을 세우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第三은 「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이것은 善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강하게 하는 방편이다. 이것은 自利行의 「智德」이다. 十信의 보살이기 때문에 難行을 할 능력이 없다. 난행을 할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善行을 하여야 한다. 善行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三寶에게 愛敬心을 일으키고 尊重하고 供養과 頂禮를 올리고, 불타의 명칭을 찬탄하고, 隨喜하며, 법을 勸請하여서 바른 믿음을 증장하며 나아가서는 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하는 뜻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이 뜻은 삼보에 대한 깊은 신앙의 실천이, 善根增長方便의 因行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 因行의 果業으로 불법승의 위력이 守護하는 바 되어 業障이 청정하여지고 善根은 退轉하지 않는 것이다. 진여는 일체의 장애를 떠나서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깊은 신앙의 실천에 의하여 진여훈습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어 難行한 善業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生長善根方便」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신앙의 실천에 의하여 진여훈습의 세력을 강화한다. 이러한 진여훈습의 세력를 강화하는 신앙의 실천을 「發起善根增長方便」이라고 한다. 신앙의 실천을 하는 사람은 바로 중생이므로 『대승기신론』이 衆生卽佛觀을 세우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第四는 「大願平等方便」이다. 이른바 誓願을 발하여 모든 未來際가 다하도록 일체 衆生苦를 평등하게 救拔하여 그들로 하여금 無餘涅槃에 安住하게 하는 것이다. 일체법의 근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彼此가 평등하고, 그렇기 때문에, 구경에 적멸하다. 진여의 이 세 가지 相에 수순하여 위대한 서원을 발하므로 이것을 「大願平等方便」이라고 이름한다.689) 법성진여는 「無斷絶」을 本性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無餘涅槃」은 無斷絶한 영원한 세계이다. 이것은 利他行이다.
무상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衆生苦를 평등하게 救拔하고자 하는 마음들은 모두 本覺의 훈습과 前世의 善根力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이것은「大願平等方便」에서 중생의 서원이 평등한 것은 중생이 법성진여의 無斷絶 본성에 수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생의 서원도 법성진여도 모두 중생에게 있는 것이므로 『대승기신론』이 衆生卽佛觀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논』의 다음 句節에서는 發心의 이익에 대하여 설한다.
(3) 信成就發心의 功德과 衆生卽佛
『논』에 의하면,
보살이 발심한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곧 조금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며,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에 따라서 여덟 가지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른바 兜率天으로부터 나와서, 母胎에 들어가고, 母胎에 머물고, 母胎에서 나오고, 出家하고, 成道하고, 法輪을 굴리며, 열반에 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菩薩을 아직 法身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과거 한량없는 때로부터 有漏의 업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나는 바에 따라서 微細한 苦痛과 相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業의 繫縛이 아닌 것이니, 大願에 의하여 自在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다라 중에서 「혹 惡趣에 물러나 떨어짐이 있다(或說有退墮惡趣)」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실제로 물러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初學菩薩로서 아직 正位에 들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하여 두려워하게 하여 저로 하여금 勇猛케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이 한 번 발심한 후에는 怯弱한 마음을 멀리 여의어 二乘地에 떨어진다 해도 끝내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령 無量無邊한 阿僧祗劫에 어려운 행실을 부지런히 애써야만 열반을 얻는 다는 것을 듣더라도 怯弱하지 않는 것이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690)
라고 설한다. 『新譯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보살이 이와 같이 발심할 때에는 바로 少分으로 부처님의 법신을 볼 수 있어서, 능히 그 원력을 따라 여덟 가지 일을 나타낸다. 이른바 兜率天宮으로부터 아래에 내려오고, 胎에 들고, 胎에 住하고, 胎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불하고, 법륜을 굴리고, 반열반한다. 그러나 또한 아직도 이름하여 법신이라 할 수 없다. 그 과거의 무량한 世로부터의 有漏의 업이 아직도 제거 단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惡業으로 말미암아 미세한 苦를 받더라도 원력에 의지되어져서, 오랜 동안 그것에 묶여지지는 않는 것이다. 어떤 經가운데서는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한 보살이 혹시 惡趣 속에 퇴전 타락하는 자가 있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初學者의 마음이 대체로 게으르고 태만하여 正位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말함으로써 용맹을 증장시키는 것이지 진실 그대로 설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 보살은 한번 발심한 후는 自利 利他의 모든 고행을 닦아 믿음에 怯弱이 없으니 또한 二乘의 境地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물며 惡道에 있어서랴. 만약 無量阿僧祗劫동안 여러 가지 難行이나 苦行을 勤修하여야 바야흐로 비로소 成佛할 수가 있다고 들어도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니, 어찌 하물며 二乘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또 惡道에 떨어지는 일에 있어서랴. 이것은 결정적으로 일체의 모든 법은, 원래부터 계속 그 자성이 열반인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설한다. 그리고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세 번째는 그 발심의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수승한 德을 나타내었고 다음은 미세한 허물을 밝혔으며 세 번째는 權敎를 회통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實行을 찬탄하였다. 처음의 두 구절에서 「곧 조금이나마 法身을 보게 된다(則得少分見於法身)」는 것은 자리의 공덕을 밝힌 것이니, 十解菩薩이 人空門에 의하여 법계를 보는 것이며, 이는 相似見 이므로 「少分」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원력에 따라서」이하는 이타의 덕을 나타낸 것이다. 「여덟 가지로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는 것은 『화엄경』에서691) 十住 처음의 發心住를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發心菩薩이 여래의 一身 無量身을 얻어 모두 일체의 세간에 成佛하게 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보살을」이하는 미세한 허물을 나타낸 것이다. 「수다라 중에」이하는 세 번째 權敎를 會通한 것이다. 이는 『本業經』에서692) "七住693) 以前은 退分이 되므로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에 一劫 내지 十劫에 보리심이 退轉케 되는 것이니, 淨目天子694)와 法才王子와 舍利弗 등이 第七住에 들고자 하다가 그 사이에 惡知識의 인연을 만났기 때문에 범부의 不善한 惡中에 들어간 것과 같으며, 내지 널리 설한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여기서 이 뜻이 단지 權語일 뿐 실제로 퇴전함이 아님을 풀이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이」이하는 네 번째 그 실행을 찬탄한 것이다. 영구히 겁약함이 없게 되니, 이는 곧 저 經이 방편의 가르침일 뿐 실제의 가르침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695)
라고 설하였다. 『賢首義記』에 의하면,
第三, 發心의 이익을 밝히는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처음은 勝德을 나타내고, 다음은 微過를 밝히고, 三은 權敎를 通하고, 四는 實行을 讚歎한다. 보살이 發心한 이 마음이기 때문에 곧 少分의 法身을 보게 된다. 이 法身을 보는 것은 그 願力을 따라 능히 중생을 이익케 하는 八種을 나타낸다. 이른바 兜率天으로부터 내려와 入胎하고, 住胎하고, 出胎하고, 出家하고, 成道하고, 法輪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法身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過去無量한 世에서 와서 漏業이 있어 아직 決斷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所生하는 바에 따라 微細한 苦와 相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業의 繫苦는 아니다. 그것은 大願의 自在함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가운데 둘이 있다. 처음은 自利功德이다. 十解菩薩이 이 觀門에 의하여 法界를 보기 때문에 「少分」을 본다고 한다. 또 人空門에 의하여 法身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法身을 본다(見法身)」이하는 八相에 이익이 생기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즉, 利他功德이다. 十解 初發心住 중 이 일을 능히 지을 수 있다. 그러나 「是菩薩」以下는 그 微過 가운데 두 가지를 밝혔다. 먼저 이 地上과 다르고, 後에 凡愚와 다른 점이다. 먼저 가운데 「법신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未名法身)」은 아직 진여를 증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信力에 의지하여 보는 것이므로「少分」이라고 하기 때문에 地上과 다르다고 한 것이다. 「그 過去」이하는 다른 이유 중에 처음에 다시 業이 다 所亡하지 않았고, 다음은 「微細한 苦(微苦)가 오히려 相續한다」이하는 다른 범부가 이미 業苦가 다 亡하지 않았다고 듣고 곧 凡夫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지금 보살이 수행의 과보로 단지 自在를 얻어 誘惑의 業 때문이 아니므로 業에 繫縛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誘惑을 留保하고 衆生을 이익케 하는 悲願의 힘이기 때문에 「大願等力」이라고 한다.696)
라고 설하였다. 이들을 다시 정리하면, 本節은 원효의『기신론소』에서「發心의 功德」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十信의 修行에 의하여 信根이 성취되고 그것을 基底로 하여 발심을 하여 初發心住의 位에 들어가 보살이 구비한 수승한 공덕을 나타내고 있다. 이 보살은 比觀門에 의하여 法身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佛陀의 法身을 조금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법신을 보는 것에 의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大誓願을 일으키는 것이다. 發心에 의하여 이 大願力이 몸에 구비되는 것이다. 願力에 根據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生에 태어난 것이다. 願力이 基底가 되어 태어나게된 그 보살을 「願生身」이라고 한다.
혹은 아직 성불할 때까지 무한히 긴 세월이 걸리므로 무량무변한 阿僧祗劫의 勤苦難行을 경과하지 않으면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들어도 그것에 의하여 悲觀도 絶望도 하지 않는다. 발심한 때에 완전히 영원한 수행을 결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일체법은 自性不生이고 본성은 眞如이므로 본래열반에 들어가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체법은 從本以來 저절로 열반」이라고 설하는 것은 本來 自性淸淨涅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前節에서 無住處涅槃을 설하였고, 有餘 無餘의 두 열반은 초기에서부터 있었으므로 여기에 自性淸淨涅槃을 가하여 『대승기신론』時代에서는 드디어 四種涅槃이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97) 어떻게 되었던 眞諦가 譯한『攝大乘論釋』에서는 四種涅槃이 列擧되고 있으므로 眞諦가 四種涅槃을 알고 있었음은 명확하다.
이와 같이 중생은 四種涅盤을 本具하고 있으므로 중생즉불의 훈습에 의하여 信力에 의지한 발심으로 수행을 더욱 증진하여 少分의 법신을 보는 相似覺을 이룩한 報身佛이 된 것이다. 報身으로서 그 悲願의 힘에 의하여 능히 중생을 이익케 하는 八種의 聖道를 나타낸다고 하는 중생즉불관을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信成就發心과 중생즉불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마치고 이제 解行發心과 중생즉불과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한다.
2) 解行發心과 衆生卽佛
먼저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解行發心」이란 더욱 수승하게 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처음 正信으로부터 지금에 와서 第一 阿僧祗劫이 다 차려고 할 때이므로 眞如法에 대한 깊은 解悟가 現前한다. 修行하는 바가 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법성의 體는 貪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五欲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隨順하여 持戒波羅密을 수행하며, 法性은 苦가 없어 성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忍辱波羅密을 수행하며, 법성은 身心의 相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精進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安定하여 있어 그 體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禪定波羅密을 수행하며, 법성은 체가 밝아서 無明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般若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이다.698)
라고 설하였다.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解行發心이라는 것은 더욱 더 수승하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처음의 무수한 劫에서 圓滿하려고 하기 때문에, 진여 속에서 깊은 解悟를 얻기 때문에, 일체의 行을 닦아서 모두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이 보살은 法性이 貪의 相을 떠난 것임을 안다. 이것이 청정한 施度이니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이 五欲의 경계를 떠나서 破戒相이 없음을 안다. 이것이 청정한 戒度이니 隨順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이 苦惱가 없고 瞋 의 해치는 相을 떠난 것임을 안다. 이것이 청정한 忍度이니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이 身心의 相을 떠나서 게으르고 怠慢함이 없음을 안다. 이것이 청정한 進度이니 수순하여 精進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이 움직임이 없고 흐트러짐이 없음을 안다. 이것이 청정한 禪度이니 수순하여 禪定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이 모든 우치의 어두움을 떠났음을 안다. 이것이 청정한 慧度이니 수순하여 般若波羅蜜을 수행한다.699)
라고 설한다. 이에 대한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두 번째 解行發心700)중에 「第一 阿僧祗가 다 차려고 할 때이므로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난다(第一阿僧祗將欲滿故於眞如法深解現前)」고 말한 것은 十廻向자리에서 平等空을 얻었기 때문에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地前의 一阿僧祗가 차려고 하기 때문이며, 이는 解行에서 얻은 발심을 든 것이다. 다음 「법성에 貪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 등의 행을 수행한다(以知法性無 貪故隨順修行壇等行)」고 한 것은 十行位 중에 法空을 얻었기 때문에 법계에 수순하여 六度行을 닦는 것이니, 이는 발심이 의거한 解行을 나타내는 것이다.701)
라고 설한다. 이에 대한 『賢首義記』에 의하면,
第二 解行發心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歎勝을 總標하였다. 「解行發心」이란 마땅히 점점더 殊勝하게 되어 가는 것임을 알라. 앞의 階位에서 믿음이 원만하여져 解悟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금 이 修行이 圓滿하여 廻向에 들어가 더욱 깊은 발심을 하기 때문에 「轉勝」을 안다고 한다. 둘째, 轉勝의 相을 나타내는 가운데는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時를 들어 轉勝을 나타낸다. 이 보살이 처음부터 正信한 이래 第一阿僧祗劫에서 원만해 지려고 하기 때문에 十廻向位 가운데 있으면서 初地를 바라본다고 한다. 이웃에 있으나 아직 근처에 있기 때문에 「將欲滿」이라고 한다. 둘째는 그 修行의 轉勝을 밝혔다. 그 중에 둘이 있다. 先은 總體的이고 後는 個別的이다. 眞如法 가운데 깊은 解悟가 現前하여 수행하던 바의 相을 여읜다. 총체적인 것 가운데 「於眞如法中深解現前」이라고 하는 것은 解勝이 앞의 階位와 다른 것을 밝히기 때문에 「깊다(深)」라고 말한다. 뒤의 계위와 다르기 때문에 다만 「解」라고 한다. 「修行한바에 의하여 相을 여읜다(所修離相)」고 한 것은 修行의 轉勝을 밝힌 것이다.702)
라고 설하였다. 이들을 다시 정리하여보면, 발심의 第二는 「解行發心」이다. 信成就發心에 의하여 初發心住에 達한 보살이 그것을 基盤으로 수행하여 十住에서 十行位로 十行位에서 十廻向位로 前進하기 위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고, 十廻向자리에서 平等空을 얻었기 때문에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地前의 一阿僧祗가 차려고 하기 때문이며, 이는 解行에서 얻어지는 발심이다.
자신이 법신이고 진여라고 가르침을 받아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직 이 가르침을 신앙하고 진실하게 신행한 결과 앞에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법신의 法性을 少分이나마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法性에는 본래 貪心이 없음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지만 나에게 간탄심이 있음을 알고 법성에 수순하기 위하여 布施波羅蜜 등 육바라밀을 一阿僧祗劫 동안 행하여 善德을 하나하나 쌓으니 하나 하나 쌓을 때 마다 앞에서 알지 못하였던 이치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法性의 이치를 이해하여 그에 수순하려고 실천 할 때마다 더욱 큰 발심을 하고 그에 따른 더욱 큰 정진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더욱 깊은 解悟를 이룬다고 한다. 解.行을 반복하는 사이에 解.行이 轉勝하는 진여의 묘용이 있음을 설한다.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즉불관을 이해하는 단계를 세밀히 설하고 있다. 우리들이 중생즉불을 먼저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먼저 신앙하고 삼보에게 공양 올리고 찬탄하고 권청하는 데서 인과법을 이해하게 된다. 인과법을 이해하여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가행함으로서 인과법의 묘를 터덕하게 된다. 그 결과 중생즉불의 진여가 있음을 더욱 믿고 신앙하여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이 少分의 법성을 보고 이해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중생즉불의 진여를 소분이나마 解悟하게 되고 해오하였음으로 더욱 깊은 신앙을 실천하여 多分의 법성을 해오하게 된다고 하는 관계를 설하고 있다. 즉 先信仰과 信行 後解悟와 解悟卽信行을 설한다. 그리고 이 진여 법성을 보고 이해한 결과 진여 법성은 空하여 간탐심이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법성에 수순하기 위하여 보시바라밀을 실행하지 않으면 多分의 법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解悟한 진여 법성에 수순하기 위하여 자기의 간탐심을 완전히 제멸하고자 보시바라밀을 一阿僧祗劫동안 행하면 간탐심의 漏가 없는 법성을 비로소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생기는 발심이「解行發心」이다.
이 설에 의하면 중생즉불관을 『대승기신론』이 세우고자 하는 것은 물론이고 先信仰과 信行 後解悟 解悟卽信行說을 정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신앙과 신행 없이 『대승기신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한계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와 같이 解.行.發心을 轉勝하며 반복하는 사이에 이 보살은 十行의 위에 올라 육바라밀을 닦아 別體가 空하다는 法空의 理를 증득하고 육바라밀의 행을 계속 닦아 그 행이 완성하여 十廻向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때, 객진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던 행자의 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자기의 자성청정심과 상응하기 시작하는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는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法界一相 自他平等의 境地에 들어가 진여(자성청정심)법신의 無相을 解悟하는 것이다. 이러한 解.行.發心 轉勝은 중생즉불 진여의 用熏習인 報身佛의 묘용이다.
본절에서 수행하는 육바라밀과 眞如無相(자성청정심)의 理는 다음과 같다.
第一, 자성청정한 진여법성에는 인색하거나 탐욕이 없으므로 진여의 훈습으로 이 법성의 德에 수순하여 布施바라밀을 수행한다. 즉, 전혀 貪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布施이다 라고 하는 것까지도 여읜다. 이와 같이 空에 住하여 布施를 행하는 것을 보시바라밀을 완성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平等無相의 法性에 隨順하는 布施波羅密의 行이다.
第二, 眞如法性에는 번뇌가 전혀 없는 自性淸淨이다. 자성청정이라는 것은 五官의 快樂을 여읜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훈습에 의하여 無染無欲의 법성에 隨順하여 戒바라밀을 수행한다. 戒에는 惡의 행위를 制御하는 것이다. 殺生, 偸盜, 邪 은 身의 三惡이다. 이 三惡을 여의는 것과 妄語, 兩說, 綺語, 惡口의 口의 四惡을 여의는 것과 無貪, 無瞋, 正見의 意 三을 모두 합하여 이것을 十善이라고 한다. 法의 空에 住하여 이 十善戒를 行함에 의하여 허물 없는 法性에 隨順하는 것이다.
第三, 自性淸淨한 眞如法性은 진여훈습에 의하여 瞋 나 다른 煩惱를 모두 여의고 어떠한 苦惱도 품고 있지 않다. 이러한 眞如의 德에 수순하여 忍辱바라밀을 수행한다. 일체법은 空이라고 觀하고, 모든 侮辱과 苦惱를 堪忍하여 조금도 瞋 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第四, 자성청정한 眞如法性에는 身心의 差別의 相이 없다. 身心의 差別相이 없으므로 게으름을 피우거나 放心을 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진여훈습에 의하여 懈怠를 여의고 精進바라밀을 수행한다. 身心을 勉勵하고 노력을 中止하지 아니하는 것이 精進바라밀이다. 身心의 對立이라고 하는 相對的인 立場을 여의고 자기의 全體를 精進勞力에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여 수행에 專念한다. 어떠한 목표에 대한 노력이 아니라서 진여법성에 수순하기 위하여 空에 住하고, 노력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노력하는 것이 精進바라밀이다.
第五, 法性眞如는 항상 靜에 있다. 보살은 진여훈습에 의하여 無念으로 散亂함을 여의고 禪波羅密을 수행한다. 禪은 마음을 定하게 하고 정신을 集中하는 것이지만 眞如의 無想無念에 수순하여 禪바라밀을 수행한다. 마음의 無念에 隨順하는 禪을 實習하는 것이다.
第六, 法性眞如는 智慧의 밝음을 具有하고 있다. 그곳에는 無明이 없다. 진여훈습에 의하여 보살은 진여의 이 德을 알고 그것에 수순하여 般若바라밀을 수행한다. 般若바라밀의 實行이 本覺眞如의 開顯이 作用한다는 의미이다. 六波羅密의 行은 解行發心한 菩薩뿐만이 아니라 一切菩薩이 實行하는 것이나 특별히 이 보살은 六度의 行과 眞如의 知解와 相應하고 있는 것이므로 「解行發心」이라고 한다.
또 여기에 六婆羅密을 對應하여 진여의 六解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無 貪, 離五欲過, 離瞋惱, 離懈怠, 無亂, 離無明이다. 진여를 법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人格的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누구나 중생즉불로서 진여훈습 즉 법신불의 묘용으로 인하여 발심하여 육바라밀을 닦는 「解.行.發心」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 때(十住 十行 十廻向을 닦는 과정), 객진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던 행자의 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자기의 자성청정심과 상응하기 시작하는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 法界一相 自他平等의 境地에 들어가 진여(자성청정심)법신의 無相을 解悟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즉불인 진여의 用熏習 報身佛의 묘용으로 닦아 그 결과 진여와 상응하여 자신이 報身佛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중생즉불인 진여법성의 妙用에 의하여 스스로 卽佛을 이루어서 外緣의 묘용인 利他行을 나투게 되는 이치를 밝히는 중생즉불관을 설한다고 본다.
解.行.發心의 轉勝을 위하여 육바라밀을 닦아야 함을 『대승기신론』에서 설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三賢菩薩이 되기 위하여는 禪定만 닦아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바라밀을 선정바라밀과 겸수할 것을 설하고 또 定과 慧 바라밀을 合修할 것을 설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수행으로서 육바라밀을 설하는 것과 『대승기신론』의 構成을 감안하면『대승기신론』은 禪敎一致를 스스로 내 걸고 있다고 생각된다.
法空을 이해하였다고 하여도 十廻向位의 수준에서 이해 한 것이기 때문에 覺에 비유하면 相似覺에 해당된다. 相似覺이 滿成하면 隨分覺位에 진입하게 된다. 이는 證發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3) 證發心과 衆生卽佛
證發心에는 發心體, 發心相, 成滿功德이 있다. 먼저 發心體에서부터 알아 보기로 한다.
(1) 發心體와 衆生卽佛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證發心이란 淨心地로부터 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證得하는가? 所謂 진여니, 轉識에 의하여 경계가 된다고 설하지만 이 證得은 경계가 없는 것이다. 오직 眞如智를 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보살이 一念 사이에 시방의 남김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며 法輪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開導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文字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地를 초월하여 빨리 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怯弱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阿僧祗劫의 기간에 佛道를 이룬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게으르고 驕慢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無數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로 보살은 種性의 根이 같으며 發心이 곧 같고 증득한 것도 같아서 超過하는 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모두 다 세 아승지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 세계의 같지 않음을 따라 보는 바와 듣는 바의 根과 欲과 성질이 다르다. 따라서 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703)
라고 설하였다.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증득을 위한 발심(證發心)이라는 것은 淨心地부터 나아가서 보살의 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경계를 증득하는 것인가. 이른바 진여다. 轉識에 의하여 경계가 된다고 설하지만 實際 證得 속에는 境界相이 없는 것이다. 이 보살은 無分別智로써 言說을 떠난 眞如法身을 증득하는 까닭에 능히 一念동안에 두루 十方의 一切世界를 다 가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법륜을 굴리실 것을 請願한다. 오직 중생을 위하여 이익을 짓고, 아름답고도 奧妙한 소리로 표현한 말을 聽受할 것을 求하지 않고, 혹은 怯弱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위대한 정진을 나타내어 무량겁을 넘어서 신속하게 정각을 이룬다. 혹은 게으르고 태만한 중생을 위하여 무량한 아승지겁을 걸쳐 오랜 동안 고행을 닦아서 바야흐로 비로소 성불하여 이와 같이 나타낸다. 무수한 방편은 모두가 다 일체 중생을 饒益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실제 菩薩種性이다.704)
모든 根이 發心하여 作證하면 모두 다가 同等하여 超過하는 법이 없고, 결정적으로 모두 三無數劫을 지나 正覺을 이루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을 따라 세계가 같지 않고 보는바 듣는바와 근본적인 欲性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바가 여러 가지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705)
라고 설한다.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처음 중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位地를 나타내었고, 둘째는 證得의 뜻을 밝혔다. 「이 보살(是菩薩)」이하는 세 번째로 德을 讚歎한 것이고, 「發心相」이하는 네 번째로 相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중에 「轉識에 의하여 境界가 된다」고 한 것은 轉識의 相이 能見의 작용이다. 이 능견에 대하여 경계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諸地에서 證智를 일으키게 된다. 緊要하게 轉識을 의지하여서만 진여를 증득한다. 轉識을 依支하는 바에 대하여 境界를 假說하기 때문에 곧 바로 證智에 나아간다. 곧 能所가 없기 때문에 「이 증득은 경계가 없다(言證者無境界)」고 말한 것이다.706)
라고 설한다. 이들을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①證發心의 「證」은 진여를 증득한다는 의미이다. 보살이 初地 즉 淨心地에 들어감에 따라 自己自性이 곧 眞如智임을 解悟하게 되는 것을 證이라고 하고 이 「證」에 의하여 더욱 발심하게 되는 것을 證發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第十地의 究竟地까지의 보살이 진여를 證함이 점점 깊어져 결국 十地까지도 초월하는 證發心을 한다. 이상은 「발심의 體」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진여를 자기의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觀하는 것은 地前의 보살이다. 眼前의 진여를 세우는 것은 아직 唯心의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唯心의 도리를 요달하게 되면 자기자신이 진여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중생즉불을 참되게 이해하는 단계이다. 이것이 중생의 眞如의 智이므로 진여를 증득하였다고 한다.
②「眞如智와 轉識」. 그러나 증득한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되지 않으므로 便宜上 眞如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轉識에 依支한 境界라고 설한다」. 즉, 진여를 아는 경우에는 아는 智와 알려지는 진여와의 사이에 分裂은 없다. 그것은 전체적인 直觀이다. 이것을 「無分別智」라고 한다. 그러나 初地에 이른 보살에게 業識, 轉識, 現識 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초지로부터 十地에 이르는 사이에 순차적으로 무명을 멸하여 菩薩盡地에서 완전히 업식을 離脫한다. 따라서 法身의 보살에도 일면에서는 業, 轉, 現의 三相이 있다. 그러나 眞如智에는 주객의 구별과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 되지 않으므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迷妄의 認識인 轉識을 借用하여 證發心의 證의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轉識의 경계는 現識이다. 그러나 「實은 이 證에는 경계가 없고 오직 眞如智를 이름한 法身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眞如智가 동시에 「진여」이다. 眞如는 理이면서 本性은 智이다. 이것이 凡夫의 本性인 동시에 佛의 本性인 法身이기도 하므로 이것은 중생즉불의 自體相이다.
③「後得智」. 이 眞如智는 「理智合一」의 根本智, 根本無分別智이다. 그리고 이 根本智의 다음에 後得智가 일어난다. 法身菩薩의 후득지의 활동은 業識에 의존한 것이다. 後得智는 세계에 대한 差別知이다. 여기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다. 따라서 보살은 唯心의 道理에 了達하고 있지만 자기의 心外에 外界가 있다는 것을 認識하여 그에 대하여 작용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가 되면 佛 自身에는 業識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득지의 활동은 「無功用」이 된다. 바로 이 佛의 無功用의 작용은 중생의 業識을 借用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원래 法身佛은 應身佛과 같이 「有限의 形」이 있는 것은 아니다. 法身은 一切에 두루 미치고 있기 때문에 범부에게 法身의 작용은 眞如의 內熏이 되어 業識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더욱이 眞如의 用熏習으로서는 밖으로부터 現識을 媒介로 하여 작용한다.
④「發心의 勝用, 方便」. 이 「證發心」은 보살의 「發心의 勝用」을 나타낸다. 이 발심의 勝用을 後得智라고 한다. 이 증발심의 보살은 眞如를 證하는 것에 의하여 心生滅門을 超越하여 心眞如門을 실현하고 있다. 그것은 생멸을 초월한 세계이다. 생멸을 초월하면 時空을 초월한다. 시간을 초월하고 있으므로 「一念間에 능히 十方無餘의 세계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一念은 여기에서 一刹那이다. 一刹那에 十方의 완전한 세계에 미쳐서 諸佛을 공양하고, 청법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불의 설법에 의하여 중생을 開導하고 이익되게 함에 있어 불의 설법이 지닌 미묘한 음성을 듣고자 하지만 그 음성에 집착하는 일은 없다. 本論에서는 「문자에 의지하지 아니하고(不依文字)」라고 할뿐이므로 그 의미가 明瞭하지 않으나, 『新譯大乘起信論』에서 「微妙한 音詞를 聽受하는 것을 求하지 않는다」라고 하므로 이상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혹은 이 보살은 初地에서 三地에, 二地에서 四地로 등 「혹은 地를 초월하여 빨리 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인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보살이 成佛할 때까지 三阿僧祗劫이라고 하는 長遠의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설을 듣고 意旨가 「怯弱한 衆生」은 실망하여 발심을 중지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수행자를 위하여 성불을 容易하게 하는 방편이 있다고 하여 그러한 행자를 격려하기 위하여 「地를 超越할 수 있다(超地)」고 표현하고 있지만 또 逆으로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지겁의 기간에 불도를 이룬다」라고 하며 「나는 무량한 阿僧祗劫間 修行을 하고 그 후에 佛道를 이룬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佛道修行을 安逸하게 생각하거나 放心하는 중생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⑤「證發心菩薩의 不思議業」. 이상과 같이 증발심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수한 방편을 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不可思議한 自然業이다. 菩薩種性에 決定된 보살에는 利根과 鈍根에 차별이 없고, 완전히 평등한 능력(根)을 구족하고 發心도 동등하고 그 證도 같다. 일체의 보살이 同等하게 三阿僧祗劫間 수행하기 때문이다. 바르게 衆生敎化를 하는 경우 相對가 되는 중생의 세계는 여러 가지로 다르고 그와 같은 중생이 보고 듣고 하는 것과 能力, 意慾, 性格 등의 차이가 있어서 그에 대응하는 방편의 행도 相違가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이 證發心菩薩이 가진 後得智의 활동이고 眞如熏習의 妙用이다.
발심하여 육바라밀을 닦아 자기자신이 진여라고 하는 것(衆生卽佛)을 아는 것을 眞如智를 증득하였다고 하고 證發心이라고 한다. 初地에서 解.行.證을 轉勝하여 第十地를 지나 究竟覺을 이루어 發心體를 증득하면 그 속에는 業識이 완전히 離脫되었음으로 發心體(眞如體)라고 하는 境界相이 없다. 경계상이 없으므로 중생즉불은 無分別智에 진입한 진여법신이다. 무분별지를 증득한 중생즉불인 진여법신은 경계상이 완전히 멸하였음으로 일념에 두루 시방의 일체세계를 다 가고 중생의 원에 감응하여 중생에게 길을 보이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법륜을 굴리실 것을 청원하는 등 중생을 위하여 이익을 짓는 묘용을 행한다.
이제 發心體를 마치고 發心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發心相과 衆生卽佛
『대승기신론』에서는,
또 이 보살의 發心相이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相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707)
라고 설하였다.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이 證發心 가운데 三種心이 있다. 一은 眞心이니 分別이 없기 때문이고, 二는 方便心이라 利他行을 任意로 運轉하기 때문이고, 三은 業識心이니 微細한 業이 아직 生滅하기 때문이다.708)
라고 설한다.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네 번째중에 「眞心」이란 無分別智를 말하는 것이요, 「方便心」이란 後得智요, 「業識心」이란 아리야식을 의지하는 바의 두 가지 지혜709)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또한 轉識과 現識이 있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은 근본의 細相만을 대략 든 것이다. 그러나 이 業識은 發心의 德은 아니다. 다만 두 가지 지혜가 일어날 때를 나타내고자 할뿐이다. 어떤 미세한 번뇌가 생멸하는 허물이 일어나는 것은 佛地의 淳淨한 德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發心相을 합하여 설명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710)
라고 설한다. 이를 정리하여보면,「證發心의 相」에는 三種의 마음이 微細한 狀態로 활동하고 있다. 이 三種心은 眞心, 方便心과 業識心이다.
第一의 眞心이라고 하는 것은 眞如를 證한 智이다. 이것은 중생즉불의 根本智이다. 이 智의 特色은 「無分別」이다. 眞心은 眞如가 眞如를 아는 마음이지만 이 경우에는 主客의 分裂이 없이 直觀하는 것이므로 無分別이라고 한다.
第二의 方便心이라는 것은 後得智에 관한 것이다. 진여의 無分別智가 衆生救濟를 위하여 활동을 할 때 중생즉불의 方便心이 된다. 一切는 唯心이고 主客의 分別이 없지만 마음밖에 衆生界가 있으므로 그것에 작용하기 위해서는 主客의 分別을 認定하는 것을 借用하여 방편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중생구제를 위한 중생즉불의 방편심이다.
第三은 業識心이다. 이것은 根本智와 後得智의 「二智所依의 阿梨耶識」이다. 아리야식은 業識, 轉識, 現識의 三識으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業識이 있으면 당연히 轉識과 現識이 전개된다. 地前보살에게는 미세한 無明妄念을 근거로 한 아리야식이 있다. 地上보살의 根本智와 後得智가 활동할 때 중생즉불은 이 아리야식을 所依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佛陀에게는 業識이 완전히 滅盡되어 아리야식이 없으므로 佛의 二智의 활동과 菩薩의 二智의 활동이 이 點에서 다른 것이다.
그리고 業識은 妄念이므로 發心의 殊勝한 德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發心三相(三心)의 하나로 취급하는 것은 보살의 二智가 일어날 때에는 心에 微細한 生滅의 過失이 있어 佛智의 淳淨의 德과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이 業識心을 가하여 發心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3) 成滿功德과 衆生卽佛
『大乘起信論』에서는,
또 이 보살은 功德이 다 가득하게 이루어져서 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가장 큰 몸을 보이니, 이는 一念에 相應하는 지혜를 말한다. 無明이 단번에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一切種智라고 이름한다. 이 自然業이면서도 불가사의한 업이 十方에 능히 나타나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711)
묻기를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心行의 차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를 한계지을 수 없어서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무명이 단절된다면 心想이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능히 요달하기에 一切種智라 이름하는가?"712)
답하기를 "일체 경계는 본래 一心으로서 想念을 떠나 있는 것이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정됨이 있으며, 想念을 잘못 일으켜서 法性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妄見, 妄想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法의 本性인 것이다. 그 자체가 모든 妄法을 환하게 비추어 大智의 작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의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따라서 여러 가지 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一切種智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713)
또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에게 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혹은 그 부처의 몸을 보거나 혹은 신비한 변화를 보거나, 혹은 그 말씀을 들어 이익되지 않음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세간에서 보지 못하는 이가 많은가?"714)
답하기를 "모든 부처와 여래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며 作意가 없기 때문에 「自然」이라 한 것이니 다만 衆生心에 의하여 나타낸 것이다. 중생심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심에도 만약 때가 있으면 法身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715)
라고 설하였다.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또 이 보살은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장엄이 모두 다 원만하여지고 나서, 色究竟天에서 일체 세간 중의 가장 존귀하고 수승한 몸을 얻고서 一念相應의 지혜로써 문득 無明의 뿌리를 뽑아 一切種智를 갖추어 任運으로 不可思議한 業을 지니며,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서 널리 중생을 교화한다.716)
물음: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는 무변이다. 세계가 무변이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이다. 중생이 무변이기 때문에 心行의 차별도 역시 무변이다. 이와 같이 경계는 齊限이 없으니 알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만일 무명을 끊으면 영영 心相이 없어지니 어찌 능히 一切種을 깨달아 一切種智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717)
대답: 일체의 虛妄된 경계는 본래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오직 한마음을 그 自性으로 하는데, 일체중생은 그 妄境에 집착하여 일체의 모든 법의 第一義性을 능히 알 수가 없다. 모든 佛如來께서는 집착이 없으니 바로 능히 모든 法의 진실한 自性을 나타내 보이시며, 위대한 지혜가 있으니 일체의 染淨의 차별을 나타내 비춘다. 무량하고도 무변의 훌륭하고도 巧妙한 방편으로써 그 所應에 따라 중생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신다. 이런 까닭으로 망념의 마음이 멸하면 一切種을 了達하여 一切種智를 이룬다.718)
물음: 만일에 모든 부처님께서 무변의 방편이 있어서, 능히 十方에서 任運으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중생은 항상 부처님을 보거나, 또는 神變을 보거나 또는 說法을 듣거나 하지 못하는 것인가.719)
대답: 여래께서는 참으로 이와 같은 방편이 있으면서, 다만 요컨대 중생의 그 마음이 청정함에 의지하여 바로 몸을 나타내심을 이룬다. 거울에 때(垢)가 있으면, 色像이 나타나지 않고 때를 제거하면 바로 나타나는 것처럼, 중생도 역시 그러하여 마음이 아직 때를 떠나지 않으면 법신은 나타나지 않고, 때를 떠나면 바로 나타난다.720)
라고 설한다.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이 아래는 두 번째 成滿한 功德을 각각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殊勝한 德을 바로 나타냈으며, 둘째는 反復하여 疑心을 除去하였다.721)
처음 중에 「功德이 成滿하였다(功德成滿)」고 하는 것은 第十地에 因行이 圓滿하게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色究竟處722)에서 高大身을 나타내고 乃至 一切種智等이라고 한다(色究竟處示高大身 乃至名一切種智等)」는 만약 十王723)의 果報別門에 의하면, 十地菩薩인 第四禪王이 色究竟天에 있으면서 성도하는 것이다. 곧 이는 報身佛의 他受用身이다.724) 이는 『十地經』에서725) 「과보를 지니는 것(攝報果)」中에 "九地菩薩이 大梵王이 되어 二千世界를 맡으며, 十地菩薩은 摩醯首羅天王이 되어 三千世界를 맡는다"고 한 것과 같고, 『楞伽經』에서726) "비유하자면 阿賴耶識이 自心이 現身한 器世界等을 한꺼번에 분별함과 같으니, 報佛如來도 또한 이와 같아서 一時에 모든 衆生界를 성취시켜 究竟天의 淨妙宮殿을 수행하는 청정한 곳으로 둔다"고 하고, 또 아래의 게송에서 "欲界와 無色界에서는 부처가 성불하지 않고, 色界中의 上天에서 욕심을 여읜 중에서 得道한다"고 한다.727)
『梵網經』에서728) "그 때에 釋迦牟尼佛이 第四禪의 摩醯修羅天王宮에 한량없는 대범천왕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보살의 무리들과 더불어 있었다. (牟尼佛은)蓮華藏世界의 盧舍那佛이 설한 心地法門品을 설하시니, 이 때 석가의 몸에서 智慧光明이 放出하였다. (그 慧光이) 이 天王宮으로부터 蓮華臺藏世界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석가모니불이 곧 이 세계의 대중을 높이 받들고 연화대장세계의 百萬億 紫金光明宮 중에 이르니 盧舍那佛이 백만 연화의 밝고 밝은 光明座 위에 앉아 계셨다. 그 때 釋迦佛과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노사나불께 禮敬하였다. 그 때 노사나불이 곧 크게 기뻐하시어 '이 모든 불자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 수행하라. 나는 이미 백만 아승지겁 동안에 心地를 수행하여 이로써 因을 삼아 처음으로 凡夫를 버리고 等正覺을 이루어 盧舍那가 되어서 蓮華藏世界海에 머문 것이다.729) 그 臺의 둘레에 천 개의 잎이 있고, 한 개의 잎이 하나의 세계이어서 千 개의 세계가 되며, 내가 변화하여 千의 석가가 되어, 千의 세계에 웅거하였다. 다시 천 개의 잎의 세계에 나아가 다시 百億의 四天下와 百億의 보살 석가가 百億의 보리수 밑에 앉았으니, 이와 같은 千개 잎 위의 부처가 곧 나의 化身이며 千百億의 釋迦는 千의 석가의 化身인데 내가 本源이 되니 노사나라 이름하는 것이다'라 하시고, 게송에 이르기를 '나 이제 노사나가 바로 蓮華臺에 앉아 … ' "라고 하고 내지 널리 설하였다. 이들 여러 글들을 준거하여 풀이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730)
두 번째는 의심을 없애는 것이니, 두 번 문답하여 바로 두 가지 의심을 놓아 보낸다. 처음 답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도리를 세웠고 다음은 그른 것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옳은 것을 나타내었다.731)
처음 중에 「모든 경계는 본래 一心으로서 想念을 여읜 것」이라고 한 것은 도리를 세운 것이다. 이는 모든 경계는 비록 끝(邊)이 있지 않지만 끝이 없지도 않으니, 일심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이 없지 않기 때문에 다 알 수 있는 것이며, 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니, 이 때문에 「想念을 여의었다」고 한 것이다. 두 번째 그른 것을 든 것 중에 「중생이 잘못 경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정됨이 있으며」등이라고 한 것은 보는 바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 옳은 것을 나타내는 중에 「妄見, 妄想을 여의어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다」고 한 것은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모든 法의 本性이다」라고 한 것은 佛心은 妄想을 여의고, 一心의 本源의 體는 妄想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하다고 한 것이고 體가 一心이기 때문에 모든 法의 本性이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佛心이 모든 妄法의 體이며, 모든 妄法은 다 佛心의 相인지라 相은 自體를 나타내고 自體는 그 相을 비추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自體는 모든 妄法을 환하게 비춘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되는 이유를 말한 것이다.732)
다음은 두 번째의 의심을 놓아 보내는 것이다. 답 중에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중생심에도 때(垢)가 있으면 法身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法身은 본 바탕과 같고 化身은 影像과 같은 것이니, 이제 (거울에) 의거하여 나타날 수 있는 본질이 때(垢) 때문에 「법신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攝大乘論』에서 顯現의 甚深 中에 "過失이 있기 때문에 세존이 나타나지 않음은 마치 달의 모습이 깨어진 그릇에 있어서와 같다"고 하고, 『釋』에서 "모든 부처가 세간에 나타나지 않건마는 세간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의 몸이 常住한다고 하니,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비유하자면 깨어진 그릇 중에는 물이 머물 수가 없으며 물이 머물지 못하므로 깨어진 그릇 중에는 실로 달이 있어도 나타날 수가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중생도 사마타의 滑性이 상속되지 않고 다만 過失의 상속만이 있어, 저 중생에는 실로 諸佛이 있지만 또한 현현하지 못한다. 물은 사마타의 滑性에 비유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733)
이 두 논의 글이 똑같이 부처의 나타남과 나타나지 못함의 뜻을 말했으나 그 비유한 것은 조금 다른 것이 있다. 이제 이 『대승기신론』중에 「거울은 때가 있어 나타나지 않는다고 비유한 것」은 根機에 의하여 설한 것이니, 부처를 보는 機가 익은 것을 때가 없다고 말하고, 장애가 있어 아직 익지 않은 것을 때가 있다고 설한다. 그러나 이는 煩惱가 現行하는 것에 대하여 곧 때가 있어서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善星比丘와 調達 등은 煩惱心 중에서도 부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攝大乘論』중에서 깨어진 그릇을 비유로 삼아 사마타가 있어야 곧 부처를 볼 수 있음을 밝힌 것은 過去世에 念佛三昧를 수습하여 이를 今世에까지 상속하여 부처의 몸을 볼 수 있는 것임을 밝힌 것이지, 今世에 반드시 定心에서만 부처를 볼 수 있음을 말한 것은 아니니, 散亂心으로도 또한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彌勒所問經論』734)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經735)에서 諸禪이 修行處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禪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諸行을 잘 行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논』 중에서는 禪定을 하여 初發心을 내는 것을 必須로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한량없는 중생이 모두 발심하였어도 반드시 禪定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736)
라고 설한다. 이들을 정리하여 보면, 證發心의 功德成滿의 相을 色身最高最大身과 一切種智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證發心菩薩의 修行의 功德이 完成한 상태를 色身最高最大身이라고 나타낸다. 「功德成滿」이라는 것은 因의 立場에서 하는 말이고, 果의 입장에서 말하면 「功德成滿」은 成佛인 것이다. 보살의 因行에 대한 果報는 報身佛이고, 중생즉불인 法身은 常住하므로 因果의 관계는 없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에서는 報身은 他受用智만 가리키므로 自受用智의 報身은 法身의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보살의 因行이 完成하여 불타가 되었을 때 그 佛身은 「一切世間의 最高大身」을 나툰다. 色究竟天은 色界의 最高의 天이므로 이 天人이 이 세계에서 最高最大微妙한 色身을 가지고 있다. 無色界의 有情은 色身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행을 완성하였을 때는 이 色究竟天에서 그 色身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보살은 一切世間에 遍滿한 眞如法身에 隨順하고 眞如와 一如가 되는 것이므로 그 중생즉불의 법신이 일체세간에 편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色身도 最高最大身이 되는 것이다.
② 그리하여 始覺의 慧의 최후의 一刹那에서 心源을 覺하여 本覺眞如의 根本智와 상응한다. 이것을 「一念相應의 慧」라고도 한다. 이 때, 지금까지 持續하여온 無明의 최후의 一念이 드디어 滅盡한다. 이 무명이 멸진하고 중생즉불에 진여가 나타나는 곳을 「一切種智」라고 부른다. 이것은 일체의 差別相을 비추는 智이지만 동시에 「種智」이고, 一切諸相의 理에 達한 智이다. 一切諸法의 本質을 아는 点에서 根本智라고 하는 동시에 일체의 差別相을 비추어 보는 점에서 後得智이다. 즉, 중생즉불의 一切種智는 이 二智에 通하는 智이다. 또 「一念相應의 慧」는 因의 性格의 智慧인데 無間道라고 불리우고 一切種智는 證果로서 解脫道라고 한다.
이 중생즉불의 一切種智에는 노력을 要하지 않고 자연히 중생을 구제하는 不思議한 작용이 있다. 시방의 일체의 세간에 나타나 중생을 이롭게 한다. 앞에서 「隨染本覺」의 설명에서 始覺이 和合識의 相을 破하여 法身을 顯現한 것을 智淨相이라고 불으고, 중생의 根에 相應하여 利益을 얻게 하는 것을 不思議業相이라고 하였는데 一切種智는 이 兩者의 작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以上은 證發心의 功德成滿의 相을 나타내어 그 殊勝한 德을 밝혔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두 가지 疑問을 提示하여 一切種智와 不思議業의 兩者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第一의 疑問은 一切種智에 관한 것이다. 無明이 斷盡하면 一心이 되는데, 差別을 비추인다면 一切種智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하는 것이다. 여기에 답하기를 一切世界는 無邊際이므로 그것이 心想에 反映하는 인식의 경계도 무변이다. 그러나 이 경계는 본래 일심이다. 따라서 心의 본래의 相에는 妄想妄念의 차별이 없다. 그러나 중생은 無明의 妄念에 의하여 認識의 對象을 봄으로 마음에 區分이 생겨서 有限한 認識界가 된다. 有限한 인식계는 時間과 空間을 有限하게 하고, 이 有限性에 의하여 心에 區分이 되고 이 妄念에 의하여 마음이 制約을 받는다. 즉, 무한히 相應하는 힘을 喪失하고 妄想을 일으켜 차별의 세계를 인식한다. 이 認識은 본래 하나가 되는 마음의 本性이 法性에 합치하지 못한다. 心의 世界가 하나이라고 하는 것을 洞察하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諸佛如來는 差別的 有限한 妄見妄想을 여의고 있으므로 보는 작용이 마음의 전체에 미쳐 있다. 즉, 法性眞如의 全體가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眞實의 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凡夫에게는 이 本覺이 生滅門의 안에 있어서 妄法의 體로 되어 있다. 즉, 佛에게는 一心인 것이 중생에게는 一切의 妄法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일체의 妄法과 本覺佛心과는 別個의 것이 아니므로 佛智는 自體의 上에 중생의 일체의 망법을 나타내 비추어서 妄法을 妄法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佛의 後得智에는 중생의 일체의 妄法을 佛心上에 나타내어 큰 지혜의 작용으로 무량한 방편을 施行한다. 즉, 報身과 應身은 佛의 지혜가 중생의 妄心上에 나타나 佛身으로 하여금 작용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나, 중생즉불의 一切種智는 중생의 일체의 妄法이 佛心上에 나타나 비추이는 것이다. 이것을 「自體顯照」라고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의 妄法이 완전히 중생즉불의 佛心上에 顯照하여 佛智에 의하여 알게 됨으로 하나 하나의 중생의 疑惑과 要求에 응하고, 그들이 理解할 수 있도록 응하고, 적절하게 여러 가지 法義를 開示한다. 이 중생즉불의 佛智를 一切種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은 佛智의 自然業에 관하여 다음의 의문이 있다. 諸佛에는 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장소에 나타나서 중생을 유익하게 한다고 하나 그렇다면 一切衆生은 완전히 그 佛身을 보고 그 佛身의 神通神變을 注目하고 혹은 佛의 가르침을 듣고 이익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實際 世間에는 佛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은 어떠한 이유인가?
이것에 대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諸佛의 法身은 평등하다. 두루 一切處에 미치고 있고, 중생의 心中에도 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求하고자 하는 機가 있으면 반드시 중생즉불의 佛이 그것에 응하는 작용이 있다. 이 작용은 故意的으로 佛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므로 「自然業」이라고 한다. 또 그것은 그 自體로 나타나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중생즉불인 중생의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혹 중생의 마음이 佛을 感應하는 機가 없다면, 나타날 理가 없다. 예를 들면, 중생의 마음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거울에 혹 때(垢)가 묻어 있으면 그곳에 물건의 像이 反映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에 혹 번뇌의 때가 있으면 그곳에는 중생즉불인 法身이 報身과 應身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생즉불의 自然業은 間斷이 없이 중생에게 작용하고 있으므로 언제라도 중생이 이것에 주의하는 때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대승기신론』은 중생이 구하고자 하는 기가 있으면 자연적으로 감응하는 중생즉불로서의 묘용이 자재함을 설한다. 이것은 중생이 일체종지를 증득하였을 때의 중생즉불관을 세우고 있다.
+---- 依佛菩薩敎----+
+-發心緣--+---- 依自大悲心----+---衆生卽佛
| +---- 依護法因緣----+
+--信成就發心--+ +--- 直心----- 行根本方便 ------+
| | | +- 能止方便---------+
| +-發心相--+----深心---+ +-四方便
| | +- 發趣善根增長方便-+ |
| +--- 大悲心--- 大願平等方便-----+ |
分別發趣道相---+ +---------------------+
+--解行發心-------隨順法性, 行六度-----+--------------衆生卽佛
| +---發心體
| | +--眞 心 (根本智)-------+
+---證發心---+---發心相--+--方便心 (後得智)-------+--衆生卽佛
| +--業識心 (阿梨耶識)-----+
| +--色身最高最大--------------+
+---成滿德--+ +- 無分別智------+ 自及他
+- 一切種智-+ +- 受用身
+- 後得智 自然業-+ (法身佛)
(應身佛)
(報身佛)
(衆生卽佛)
<表 7> 發心의 次第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禪定을 하여 초발심을 내는 것을 必須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그 이유로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한량없는 중생이 모두 발심하였어도 반드시 禪定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737) 『대승기신론』에서도 止觀門이 適性에 맞지 않은 사람들의 信心을 攝護하기 위하여 一念으로 念佛하여 극낙왕생할 것을 권한다.738)
이상 發心의 次第와 중생즉불과의 관계를 위 表8에 나타내었다.
3. 勸修利益과 衆生卽佛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이미 修行信心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勸修利益分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의 諸佛의 秘藏을 내가 이미 모두 말하였다.739)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내어서 誹謗을 멀리 여의고 大乘道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가지고 思量 修習하면 究竟에 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法을 듣고 나서 怯弱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부처의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가 授記하는 바가 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740)
가령 어떤 사람이 三千大千世界中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러도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우월하여 그와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승기신론』을 받아 가지고 觀察하고 修行하기를 하루낮 하룻밤 동안 한다면 그가 가지는 공덕이 한량없고 가이 없어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니, 가령 시방의 일체의 모든 부처가 각기 무량무변한 아승지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또한 다할 수가 없다. 어째서인가? 이는 法性의 功德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功德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741)
어떤 중생이 이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毁謗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가 받는 罪의 과보는 無量劫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어야 할 것이요 誹謗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서 일체의 三寶의 종자를 단절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여래가 다 이 法에 의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이로 인하여 수행하여 佛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742)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하여 淨信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제 이 법에 의하여 淨信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淨信을 이루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743)
이러므로 중생이 부지런히 수학해야 할 것이다.744)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어떤 것이 이익분인가? 이와 같은 대승의 비밀적인 구의 뜻은 지금 이미 간략하게 설하였던 것이다.745)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와 그 광대한 법속에서, 청정한 믿음과 깨달음과 해탈하는 마음을 낳고 大乘의 길에 들어가 장애가 없을 것을 바란다면 마땅히 이 略論을 부지런히 聽受하고 思惟하며 修習하여야 한다. 이 사람은 당연히 결정적으로 속히 일체종지를 이룩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 법을 듣고도 놀라거나 무서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결정적으로 부처님의 종자를 계승하여 속히 수기를 얻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746)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의 중생을 교화하여 十善道에 住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잠시동안에 직접 이 법을 생각하는 것과 같지 못하다. 前者의 공덕을 넘기를 무량무변한 것이다. 만일에 하루 낮 하루 밤을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생기는 공덕은 무량무변하여 (무엇으로라도) 상당한 것을 施說할 수가 없다. 가령 十方에 일체 諸佛께서 각각 無量阿僧祗劫 동안 설한다고 하더라도 다 설할 수가 없다. 진여의 공덕은 邊際가 없기 때문에 수행의 功德도 또 역시 無邊한 것이다.747)
만약 이 法을 誹謗 하는 자는 무량한 죄를 얻어 아승지겁 동안, 큰 苦惱를 받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이것을 응당 결정적으로 믿음으로서 비방을 하지 않게 되고, 스스로를 해하거나 남을 해하지 않게 되고, 삼보의 씨를 끊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이 수행에 의하여 無上智를 이루고 일체의 보살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法身을 증득하였다.748)
과거의 보살은 이것에 의하여 大乘의 淸淨한 믿음을 이룰 수 있었고, 현재는 지금 이루고, 미래는 마땅히 이룰 것이다.749)
이런 까닭으로 자리이타의 수승한 行을 이루려고 원하는 자는 마땅히 이 논을 부지런히 더욱더 修學하여야 한다.750)
원효의『기신론소』에 의하면,
다섯 번째 권수분 가운데, 글이 여섯 있다.751)
첫째, 앞에서 말한 것을 총결하는 것이다.752)
두 번째는 이익을 들어 수행을 勸奬하는 것이다. 글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바로 수행을 권장하는 것이요, 「究竟에」이하는 그 수승한 이익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 두 구절이 있으니, 처음은 얻은 과보의 수승함을 나타내었고, 뒤에서는 닦는 사람의 수승함을 밝혔다.753)
세 번째는 믿고 受持하는 福이 수승한 것이다. 글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바로 생각하기만 하는 데서 받는 福의 수승함을 밝혔고, 뒤에서는 하루 낮 하룻밤의 수행의 공덕이 가이없음을 나타낸 것이다.754)
네 번째는 毁謗의 죄가 무거운 것이다. 글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훼방의 죄가 무거움을 밝혔고, 「그러므로」이하는 두 번째 勸奬해 보는 것이고, 「(스스로를)깊이 해치며」이하는 세 번째 죄가 무거운 뜻을 풀이하였으며, 「일체의 여래」이하는 네 번째 三寶의 種子를 단절하는 뜻을 더 풀이하였다.755)
다섯 번째는 증거를 드는 것이다.756)
여섯 번째는 勸奬함을 결론지었다.757)
이 한 권의 論의 三分中에 바로 論의 宗旨를 분별함을 앞에서 마쳤다.758)
『賢首義記』에 의하면,
둘째 「어떤 중생이」이하에서 信을 들어서 損害와 利益을 말하고, 「당연히 과거를 알라」이하에서 결론을 하고 修學을 권장하였다. 믿음과 비방 가운데 둘이 있다. 처음에 믿음을 받아 지녀 福이 수승하여 지고, 후에 「그 어떤 중생」이하에서 毁謗의 죄가 중함을 밝히고, 앞의 가운데서 優先 三慧를 모두 가지고 그 이익을 들었다. 뒤에 「만약 사람이 듣고」이하는 삼혜의 이익의 相을 나타내었다. 그 가운데 처음에 들었을 때 이익이고, 다음에 「가사 어떤 사람이」이하는 생각할 때 이익을 밝혔고, 뒤에 「또 다음에 만약 사람」이하는 修行할 때 이익을 밝혔다. 그 三句 가운데 둘은 시간은 적고 德은 많은 것이다. 둘째 「假令」이하는 校量이 많은 모습이고, 셋째 「무엇 때문인가」이하는 해석이 많다. 왜냐하면 第二는 誹謗하는 罪의 重함 가운데 四句가 있다. 첫째, 비방은 죄의 중함이 성립한다. 둘째,「이러함으로」이하에서 (대승을) 毁謗하는 것을 경계하고 防止할 것을 권장한다. 셋째는 「깊이 스스로 해롭게 하고」이하는 죄의 중한 뜻을 해석하고, 넷째는 「일체 여래」이하는 삼보의 뜻이 끊어지는 것을 상세히 해석하였다. 이 가운데 二句가 있다. 처음에 結果를 가지고 사람이 의지하여 涅槃을 얻는 것이고, 뒤에는 원인을 가지고 사람이 의지하여 菩提를 얻는 것이다. 菩提涅槃 즉시 法寶요, 佛과 僧은 알 수 있을 것이다. 毁謗으로 인하여 이것이 어긋나기 때문에 三寶를 끊는다. 결론에서 권장하는 가운데 三世菩薩은 이것을 똑 같이 행하여 法이 더욱이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응당 부지런히 수학할지니라. 正宗을 마치다.759)
라고 설하였다. 이들을 정리하여 보면, 「大乘道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가지고 思量 修習하면 究竟에 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一切種智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믿음으로『대승기신론』을 聞慧.思慧.修慧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三慧에 능히 들어가면 "大乘의 道"에 들어가 장애 없이 여래의 무변 광대하고 경계가 없는 法속에서 깨달음과 해탈하는 마음을 얻고 결정적으로 佛種을 이을 授記를 速得하는 이익이 있다.」760)고 한다. "大乘"은 衆生心이고 중생심은 佛이므로 衆生卽佛이다. 그러므로 "大乘의 道"는 "佛道"이고 衆生卽佛임을 깨치게 하는 "道"이다. "衆生卽佛임을 깨치게 하는 道"를 위해서 邪心이 없는 청정한 믿음 "衆生卽佛觀"에 대한 바른 믿음이 으뜸이라고 하고, 淨信으로 『대승기신론』을 지극 정성으로 믿고 聞思修 三慧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淨信"은 순수한 신앙과 信行을 의미하고 信行으로서 聞思修 三慧를 들고 있다.
三慧를 든 것은『대승기신론』을 聞.思하는 것만으로 혹은 修하는 것만으로 眞如의 大海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 聞.思.修 중 어느 쪽에도 偏重하지 않는 三慧를 修習함으로서 중생즉불의 진여 大海에 들어가 佛種을 계승할 授記를 速得하는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믿고 행함으로서 자신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우며, 더욱이 三寶의 씨를 끊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이 수행에 의하여 無上智를 이루고 일체의 보살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法身을 증득하였다.」761)고 하는 것은 위와 같이 함으로서 삼보의 종자를 끊임없이 이어가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이 수행하여 여래의 법신을 증득하였다고 위 설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여래의 법신을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衆生卽佛임을 깨치어" 법신을 증득하였다는 뜻이다.
「과거의 보살은 이러한 수행에 의하여 大乘의 淸淨한 믿음을 이루었고, 현재보살은 지금 이루고, 미래 보살은 마땅히 이룰 것이다.」762)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과거의 보살들이 淨信으로 "大乘"을 즉 衆生卽佛을 正信하고 『대승기신론』을 正信하여『대승기신론』에서 설한데로 聞.思.修 三慧를 수행함을 으뜸으로 하여 業識이 완전히 멸한 청정한 중생즉불을 성취하였고, 이와 같이 수행하는 현재 보살들도 그렇게 될 것이고 이와 같이 수행하는 미래 보살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그렇게 수행하는 行者들이 청정한 중생즉불을 성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一貫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行者들이 지금 淨信을 성취하여 청정한 승보를 이어가게 함에 있다.
이런 까닭으로 自利利他의 수승한 行을 이루려고 원하는 자는 마땅히 이 『논』을 부지런히 더욱더 修學하여야 한다.763)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즉불관을 육바라밀을 포함한 禪敎一致 思想과 善巧方便으로 그 이익을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總結廻向과 衆生卽佛
廻向頌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모든 부처의 매우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分에 따라 總持를 설하였으니, 法性과 같은 이 공덕을 廻向하여 널리 일체의 衆生界를 이롭게 하여지이다.764)
『新譯大乘起信論』에 의하면,
나는 이제 이미 해석하였다, 매우 깊고 廣大한 뜻을. 그 공덕을 중생들게 베풀어 진여법을 보게 하리라.765)
『원효소』에 의하면,
맨 끝의 一頌은 세 번째 총결이니, 이 중에서 위의 반은 앞의 五分을 결론지었고, 아래 두 句節은 六道에 회향한 것이다.766)
『賢首義記』에 의하면,
偈頌流通 가운데 처음 二句는 앞에서 설한 바를 결론 짓고, 이중 上句는 뜻을 맺고 下句는 글을 맺었다. 후 二句는 이익을 회향하였다. 上句는 덕의 광대함을 밝혔고 下句는 멀리까지 은혜를 입히는 것을 분별하였다.767)
라고 설하였다. 본 총결회향분은 流通分에 해당한다. 「모든 부처의 매우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分에 따라 總持를 설하였으니, 法性과 같은 이 공덕을 廻向하여 널리 일체의 衆生界를 이롭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이 論을 저술하여 諸佛이 설한 廣大한 가르침의 深奧한 意味와 그 가르침의 순서에 쫓아 그들을 간략하게 整理하여 그 깊은 뜻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명확하게 밝힘을 마쳤습니다. 이것에 의하여 얻은 功德은 眞如法性이 無盡한 것과 같이 그기에 基礎한 이 功德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공덕을 살아 있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완전히 廻向하오니 일체중생이 진여법을 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법성과 같은 이 공덕"이라 함은 진여법성이 무진한 것과 같이 그기에 기초한 이 공덕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뜻은 중생즉불의 진여 自體相의 무진한 무루성공덕이다. "이 공덕을 회향하여 널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게 하여지이다"는 "이 공덕을 회향하오니 일체 중생이 진여법을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이 뜻은 중생즉불의 진여의 自體相用의 훈습으로 일체중생이 스스로 자신이 부처임을 깨치게 하여지이다라고 기원하는 것으로 유통분을 마치고 있다.
VI. 結 論
『대승기신론』의 연구 중에 중생즉불관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그 결론은,
1. 西歐에 비치는 『대승기신론』
서양 학자들은『대승기신론』을 신앙과 신행에 의한 중생즉불을 깨치게 하기위한 종교서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한 형이상학적인 사상서나 철학서로 이해하는 듯 하다. 이렇게 보는 것은 번역서에 원인의 일부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예를 들면, Yoshito S. Hakeda가 1967년에 英譯한 『大乘起信論』『The Awakening of Faith』이다. 이를 검토하여 보면, Hakeda는 題名과 몇 가지 점에서 그가 『大乘起信論』의 내용을 바르게 소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 『大乘起信論』을 『The Awakening of Faith』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이라기 보다 Hakeda가 임의로 만던 이름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The Awakening of Faith』는『大乘起信論』이라고 번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Hakeda가 위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마하연"이라는 용어는 大乘 對 小乘 이라는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대승불교를 소승불교로부터 차별하는 의미로서의 大乘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에서 뜻하고자 하는 바는 대승과 소승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세우는 것이다. 곧 대승은 중생심이고 이 중생심은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一切를 總攝할 수 있지만 소승법에서는 別體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各體는 각체의 분야밖에 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승과 소승의 차별이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Hakeda는 스스로 五蘊 12處 18界에 각각 별개의 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하게 된다. 別體가 있다는 소승적 견해에서 Hakeda는 "대승"을 別體를 초월한 "Absolute"로 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승을 중생심"이라고 하고 "마음이 세간 출세간의 모든 법을 통섭한다"고 하는 마명의 설을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대승을 "形而上學"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Hakeda가 중생심을 "형이상학"적 안목으로 보는 것은 위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이 非有(空), 非無(不空), 不可說의 경계에 대한 解悟가 전혀 없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근거를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空 不空 不可說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그가 『대승기신론』을 연구하고 英譯하면서도 마명이 『대승기신론』을 설한 목적인 "起信"을 위한 수행 실천을 그 스스로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聞慧.思慧가 있었다고 해도 修慧가 결여되었다고 생각된다. 修慧가 결여된 상태에서 修慧가 결여된 만큼 思慧가 제한을 받으므로 인하여 空不空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승을 "形而上學的"이라고 규정하는 Hakeda는 본『론』을 번역하고 주석함에 있어 본『론』의 진여법성을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셋 째, Hakeda는 本論의 구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五分 中 修行信心分과 勸修利益分은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다. Hakeda는 『대승기신론』의 一心思想 면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심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 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인다.
여하간 필자가 본 논문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信仰과 信行이 따르지 않는 『대승기신론』의 해석은 오히려 본『론』을 歪曲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2. 三寶와 衆生卽佛觀
둘도 없는 命을 들어서 無上의 존귀함(三寶)을 받들어 信心의 지극함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歸命'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歸命'이란 근원에 돌아가는 뜻이니, 왜냐하면 중생의 六根이 一心에서부터 일어나 스스로의 근원을 등지고 六塵에 흩어져 달려나가는 것인데, 이제 목숨을 들어 六情을 總攝하여 그 본래의 一心의 根源에 돌아가기 때문에 '歸命'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歸命의 대상인 一心은 곧 三寶이기 때문이다라고 원효는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즉,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 신앙심만이 중생의 일심의 근원인 중생즉불의 자리에 還歸할 수 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의 "大乘"은 넓게 좁게 크게 작게 깊게 얕게 밝게 어둡게 어떻게 표현할 수도 있고 표현할 수 없기도 하지만, 결국 열면 一心二門이며 합하면 二門一心이다. 그리고 一心은 卽三寶이다라고 원효가 설하였다고 위에서 밝혔다. 뿐만 아니라 본『론』의 一心, 二門, 三大, 四信, 五行이 모두 佛法僧 三寶에 근거하고 있다. 一心思想을 비롯하여 三大 熏習論 覺不覺 등은 모두 佛寶와 法寶와 僧寶에 관계된 理論이며 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떻게 하면 하급 중생들까지도 불법에 귀의하게 하고, 불법을 믿고, 발심하게 하여, 자기 자신이 이미 부처(중생즉불)임을 깨달아 佛道를 닦아, 현재 지금 청정한 부처를 이루어 法身佛이 되어서 불법을 이어가게 하고자 함에 있다. 이렇게 불법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삼보에 대하여 목숨을 건 신앙과 그에 따르는 신행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이 스스로 佛(중생즉불)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佛法을 이어가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들 각자에게 無始以來로 내재하여 있는 중생즉불이 우리들에게서 내연 외연의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생즉불의 용의 힘으로 수행하여 업식을 제멸하고 우리들에게 내재하는 法身과 일치하게 되어 僧寶로서 報身佛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僧寶라야 중생구제업을 지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생즉불관이 『대승기신론』의 가장 위대한 특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승기신론』의 "大乘"은 중생심이고 중생심은 一心이고 一心은 곧 衆生卽佛이다. 그리고 一心은 곧 三寶라고 明記되어 있는 곳은 필자가 아는 한 위의 원효의『기신론소』한 곳밖에 없기 때문에 귀중한 一句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논문의 論旨를 唯一하게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받쳐 주고 있다.
3. 三身佛과 衆生卽佛
『대승기신론』에서 불교신앙의 대상인 三寶는 곧 一心이라고 하고, 일심은 곧 심진여문에서 體大, 심생멸문에서 自體相用으로 나누어 二門 三大로 그 뜻을 설명한다.
體大는 理, 實有, 不滅, 不增不減, 普遍平等, 眞如, 離言眞如, 혹은 如實空이라고 하고, 相大는 智, 有德, 如來藏, 無漏性功德, 依言眞如, 혹은 如實不空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 理(體)와 智(相)와의 관계는 眞如(體)에 의지하여 智慧(相)가 있고, 지혜의 본체는 진여이며 眞如의 本性은 智慧라고 한다. 그러므로 眞如와 智慧, 理와 智, 體大와 相大는 不離관계에 있다고 하여 眞如自體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眞如自體相을 法身이라고 하며, 이를 인격화하여 法身佛이라고 한다. 그리고 眞如自體相이 因位에 있을 때 如來藏이라고 하고 果位에 있을 때 如來法身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여자체상의 근본은 一心에 있고 一心은 곧 衆生心이므로 중생에게 진여자체상이 이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衆生卽佛이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의 "大乘"은 중생심이므로 『대승기신론』은 衆生卽佛觀을 설하고 「起信」을 세워 「중생즉불」을 圓熟하게 하고자 하는 「論」이라고 하겠다.
『대승기신론』에서의 用大는 有能하여 應身 혹은 報身으로서 救濟活動을 하는 것을 말한다.
善行을 닦기를 좋아하고, 生死의 苦를 싫어하고 열반의 樂을 구하고자 하고, 因果의 법을 믿고자 하는 것은 現存하는 內在佛인 중생즉불의 진여훈습으로 인하여 業識이 순화된 佛子에게 일어나고 느껴지는 일이다. 이러한 佛子에게 32相 80種好를 갖춘 佛이 외계에서 와서 加被를 주고 引導한다든지, 또는 行者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佛이 나타나 不思議한 業을 그에게 작용한다든지, 혹은 色의 分齊와 色心의 分齊 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인식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을 하는 分別事識하에 있는 행자에게 작용하는 衆生卽佛을 應身이라고 한다.
그러므로『대승기신론』에서는 누구에게나 중생즉불이 현재 작용하고 있는 이치를 밝히고 있다. 다만 두터운 無明으로 분별사식이 강한 중생은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는 중생즉불의 용은 항상 있지만 본인이 둔하여 느끼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둔한 감각이 점점 순화되어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응신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응신불은 불자가 처음 느끼는 佛이지만, 無始이래로 법신불이 자신에게 상주하므로 衆生卽佛로 존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위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즉불의 훈습작용에 의하여 殺偸 身三과 妄綺兩惡 口四 七滅이 옳지 않은 것을 깨닫고 다음 생각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凡夫覺이라고 하지만 아직 分別事識의 이치를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여 不覺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중생즉불의 진여훈습으로 모든 부처님께 참배하고 공양하며 찬탄하고 권청하는 등 신앙심을 일으킴으로서 인과법을 깨닫고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고 행하고자 한다.
分別事識은 우주만상의 總相의 主宰인 주체자가 있다고 계탁하는 의식이므로 自我가 있는 것으로 아는 동시에 삼라만상에 別體가 있다고 계탁하여 恒常하는 물건이 있다고 알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고자 하고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분별심이 강한 事識이다. 그리고 싫어하고 좋아하는 기준은 숙세에서 쌓아 온 본인의 業에 인한 것이다. 自我가 있고 別體가 존재한다고 아는 意識은 貪欲과 瞋 와 愚癡의 근원인 利己心이 강한 의식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근본무명에 의한 업식의 작용으로 인한 지말무명의 분별사식이다.
필자가 衆生卽佛이라고 하는 법신불은 우주만상의 총상의 宰主인 주체자는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하는 無我觀을 愛護하는 동시에 別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法無我觀과 無常觀을 愛護한다.
別體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一相이고 一相은 無相이다. 이를 本體라고 하고 본체는 一體이므로 無體이다. 이와 같은 본체에는 別體가 없으므로 걸림 없이 總相을 섭한다고 하는 것이다.
本體는 無盡한 無漏性功德을 本有하고 있으므로 理와 智를 겸비한 법신불이라고 하고 필자는 이 법신불이 중생에게 내재한 중생즉불이라고 생각한다.
본체는 一相이고 一相은 無相인고로 분별보다 평등을, 利己心보다 同體大悲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근본으로 한다는 것은 평등과 同體大悲의 正義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平等은 別體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無分別智라고 한다. 중생의 본심은 평등한 것이므로 중생즉불인 법신불의 훈습은 分別事識을 無分別智로 轉依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중생즉불의 법신불은 總相의 宰主는 아니므로 분별사식과 業識 그리고 무명을 一擊에 斷滅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分別事識과 能所의 관계로 교류하며 훈습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범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衆生卽佛이므로 자신이 스스로 보거나 느끼거나 알지는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衆生卽佛임을 보거나 느끼거나 자각할 때, 중생즉불의 힘을 한층 더 강하게 발휘하여 怯劣한 마음을 大勇猛心으로, 懈怠한 마음을 精進하는 마음으로 전환하며, 이기심을 동체대비심으로 轉依하여 大悲를 正義로 삼는다.
중생즉불로서의 대비심은 衆生救濟의 대서원을 세워 대서원을 성취하기 위한 勇猛精進하는 실천을 생활로 삼게 된다.
報身은 중생즉불인 법신불의 훈습에 의하여 分別事識이 無分別智로 轉依하기 시작하는 단계부터 중생즉불을 報身이라고 칭한다.
無分別智로 轉依하기 시작하는 단계는 色分齊를 無分齊로 인식하기 시작되는 단계이다. 色聲香味觸法이 感覺器官 밖에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을 色分齊가 있다고 하고, 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오직 識의 表像이라고 보는 것을 無分齊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貪瞋癡慢疑見 六異相을 여의어 分別執着相을 여의게 되는 것을 相似覺을 이루는 始覺이라고 한다. 相似覺은 十住 十行 十廻向의 수행 계위에 있는 三賢菩薩이 이루는 깨달음이다. 삼현보살은 人無我를 깨닫고 성취하여 分別執着相은 여의었다. 그러나 아직 別體는 있다고 봄으로 分別相을 완전히 여의지 못하여 아직 法無我를 증득하지 못하였으므로 삼현보살의 覺을 相似覺이라고 한다.
十廻向을 成滿하여 初地에 오르게 되면 法無我를 성취하기 위한 我癡 我慢 我見 我愛 四住相을 여의기 시작한다. 이 法無我 단계에서 부분적인 覺을 이루고 부분적으로 無分別智를 성취한다고 하여 隨分覺이라고 한다. 隨分覺을 이루는 보살을 地上菩薩 혹은 法身菩薩이라고 부르고 初地에서 第九地까지의 보살들이다. 이들을 眞如의 위에 오른 聖人으로 예우한다.
凡夫覺을 성취한 보살이 相似覺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살이 淨信으로『대승기신론』을 正信하고 이를 聞.思.修 三慧로 닦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止觀 육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聞.思慧에 편중하거나 修慧에 편중하여서도 안된다. 聞.思慧는 修慧를 증장시키고, 修慧는 聞.思慧를 증장시키는 相勝작용을 일으키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문.사혜에 발전이 없으면 수혜에도 발전이 있을 수 없고 修慧에 발전이 없으면 聞.思慧에도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또 施戒忍進이 없는 止觀이나 止觀 없는 施戒忍進이 아니라는 뜻이며, 止觀을 함께 묶은 것은 禪定 없는 智慧도 아니고 智慧 없는 禪定도 아니라는 뜻으로 止觀 合修를 요하는 것이다. 聞思修 三慧와 六波羅蜜 중 하나도 빠짐없는 수행을 一阿僧祗劫 修習하여 地上菩薩位에 오르게 된다고 『대승기신론』은 明示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수행 개념은 禪敎一致사상을 『대승기신론』에서 보이고 실행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대승기신론』에서는 止를 얻기 위하여 반드시 禪定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선정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선정대신 念佛을 善巧方便이라고 설한다.
地上에서 四住相을 여의게 되면 分別 念相을 멸하게 되어 이른바 分別事識에서 해탈하게 된다. 六識의 惑을 모두 완벽하게 멸진하여 分別事識에서 해탈하여 無分別智를 성취한 것이다. 이 단계를 成熟시킨 중생즉불을 報身佛이라고 한다.
地上菩薩도 삼현보살과 같이 육바라밀을 修習한다.
'菩薩盡地'에서 十地의 覺이 窮極에 달하기 때문에 盡이라고 한다. 이는 無垢地菩薩이 방편을 만족하여 一念에 初起心을 깨닫는 마음과 相應하여 初相이 없는 것이다. 初相이 없다고 하는 것은 微細한 念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心性을 得見하는 마음이 常住하니 究竟覺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념이 상응'하는 것은 無明에 의하여 業相 轉相 現相의 生相에 의한 微細念을 멀리 여읜 일념이 상응하는 것이다. 즉, 無間道, "究竟道, 金剛喩定의 方便道를 만족한 것이다. 初相을 멀리 여의었을 때가 바로 佛地에 있는 것이니 心源에 돌아와 究竟位에 달한 것이다. '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常住한다'고 말하며, 다시 나아갈 바가 없는 것을 究竟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衆生卽佛의 진여훈습에 의하여 心源에 돌아와 구경위에 달한 것은 중생즉불이 진여법성과 일치한 것이다. 이것은 衆生卽佛性이 圓熟하여 구경각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大乘起信論』의 불타관의 특색은 三寶는 곧 一心이며 一心의 體相用 삼대는 모두 불타로서 중생즉불의 용인 점이다. 體大와 相大를 합하여 法身이라고 하고, 用大를 報身과 應身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점이다. 이들은 現在常住하는 중생즉불이다.
이렇게 볼 때 본론에서는 衆生卽佛의 眞如法身을 三身 가운데 第一身으로 볼 뿐 아니라 三身의 基本으로 봄과 동시에, 나아가 成道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완성된 佛陀如來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총괄적인 法身이며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4. 四信과 衆生卽佛
『대승기신론』의 四信은 첫째는 佛寶中理法身, 둘째는 佛寶中智法身, 셋째는 法寶, 네 번째는 僧寶에 대한 信이다. 理法身 智法身 法寶 僧寶는 모두 『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의 異名이다. 그러므로 四信은 결국『대승기신론』의 중생즉불관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즉불의 異名인 삼보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중생즉불인 법신의 훈습이 있기 때문이다. 삼보를 신앙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이유도 삼보를 신앙함으로서 자기 완성을 성취하여 보신불이 되어 자타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중생즉불의 진여훈습이 있기 때문이다. 즉 중생즉불은 因位로서의 법신불이 되기도 하고 果位로서의 법신불이 되기도 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法身佛, 應身佛, 報身佛로서 용훈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三寶에게 禮敬하고 懺悔하고 供養하고 勸請하는 신앙심은 중생즉불의 진여훈습이 있음으로서 일어나는 것이고, 또 중생즉불의 훈습이 있음으로서 믿음으로 難行을 극복하는 수행도 가능하고, 믿음으로서 수행을 轉勝 할 수 있게 되고, 수행을 통하여 진리를 體得함으로서 더욱 발심하여 더 높은 차원의 信仰心을 成就하고, 나아가 중생즉불은 구경에 一切種智를 증득하여 중생즉불과 진여법신이 일치하여 성불(法身佛)하게 되는 것이다.
四信이 衆生卽佛에서 나오고 중생즉불에서 나온 四信이 중생즉불을 現世에 示現하게 하는 動力이 된다.
5. 僧寶와 衆生卽佛
근래에 와서 佛法僧 삼보중 僧寶에 대한 신뢰감이 매우 저하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는 기존 신도들의 信心을 잃게 하고 새로운 포교 활동에 크나큰 장애가 되는 문제이다. 『대승기신론』은 「起信」을 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함에 가장 좋은 귀감이 될 것이라고 본다.
『대승기신론』에서 信仰的으로 歸依 하는 대상은 僧이 아니라 僧寶이라고 하고, 僧寶는 初地 이상의 수행계위를 가진 法身菩薩이라고 한다. 법신보살은 스스로 衆生卽佛임을 이미 깨닫고 자신에서 진여법신을 볼 수 있는 계위에 있는 보살이다. 법신보살은 如實히 수행하고 不放逸하여 無量功德藏을 成滿해 가는 보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寶로서의 僧은 分齊相을 여읜 무분별지의 正體智를 얻고 分別智가 있는 後得智를 겸하여 法身을 볼 수 있는 報身이기도 하며, 스스로 부분적으로나마 眞如로서 聖位에 있다. 그리고 스스로 衆生卽佛임을 깨닫고 如實修行과 不放逸로 無量功德藏을 成滿하여서 구경에 스스로 法身佛이 되어 衆生卽佛로서 법신 응신 보신으로 자재하게 불사의한 업용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僧寶」가 되어야 함을 설하는 『대승기신론』의 입장을 현실에 놓인 僧寶가 나가야할 규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6. 勸修利益과 衆生卽佛
본『논』을 믿고 修學함으로서 佛智를 얻는 淨信을 성취하여 法身菩薩이 된다. 법신보살은 중생즉불로서 佛道를 圓滿하게 하여 일체 중생을 佛道로 인도하여 三寶의 종자를 번성하게 할 수 있는 이익이 있다는 중생즉불관이다.
7. 總結廻向과 衆生卽佛
마명이 이 論을 저술하여 얻은 功德은 眞如法性이 중생즉불의 본성이므로 不變한 것과 같이 여기에 基礎한 이 功德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덕을 살아 있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완전히 廻向하오니 이를 통하여 일체중생이 자기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는 진여법(중생즉불)을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
한없는 공덕과 무량한 자비로 모든 중생이 자신이 곧 부처임을 볼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마명과 원효의 중생즉불관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本『論』을 맺고 있다.
諸佛의 뜻을 馬鳴이 정리하여 요약하였으나 미혹한 중생에게 그 뜻이 미치지 못하였다. 다행하게도 원효가 마명이 造論한 뜻이 이상과 같이 三寶에 歸命하는 신앙심에 있다고 풀이함으로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대승기신론』을 一心을 분별하여 二門 三大로 설하는 것으로 보게 되면 『기신론』이 一心思想書 혹은 철학서로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思想書로서는 四信과 五行 二分이 가이 필요 없게 된다. 四信과 五行이 없는 『대승기신론』에서는 「起信」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 따라서 僧寶의 문제와 관계 없는 『대승기신론』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起信」을 성취함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一心은 곧 三寶이다라고 알고 信仰하게 되면 二門 三大는 三寶를 설명하는 것이 되고 四信은 三寶를 믿기 위함이요, 五行은 그 믿음을 성취하기 위함이 된다. 이러한 修行者는 五行을 닦아 四信을 성취하여 三寶인 一心에 還源시키기 위하여 二門과 三大를 설명한 것이라고 알게 된다.
자신의 근본이 중생즉불이라고 하는 경전의 말씀을 믿고 五行에 투철하여 四信을 성취하는 僧寶가 되는 것은 곧 중생즉불의 업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중생즉불로서의 승보는 한 불교신앙 단체의 일원으로서 지역사회의 정신문화 발전에 공헌 할 수 있고, 한국불교문화를 지역사회에 널리 보급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는 윤리와 도덕관이 명석하게 하며, 가장 생산적이고 봉사적인 일꾼을 培養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기 위하여 자신을 회향함으로서 心源에 沒入하여 중생즉불을 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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