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사용, 글쓰기, 글 읽기는 이미 철저하게 우리의 생활방식에 속속들이 스며들어있다. 그때의 문화를 지칭하기 위해 무문자문화(無文字文化)라는 말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다. 어떤 학자는 구술문화(口述文化)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무문자문화의 생활방식도 가늠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사고방식이나 세계관, 가치관이 과연 어떠했을지는 정말 짐작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문자문화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 가치관과는 아마도 다른 점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월터 옹(Walter J. ong)이라는 학자가 그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그 연구결과를 담은 저술 는 우리나라에서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이기우, 임명진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5). 월터 옹에 따르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는 서로 매우 다른 ‘정신역학’이 작용한다. 쉽게 말하자면 사고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월터 옹은 두 문화의 여러 가지 특징적인 차이점을 매우 전문적인 차원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우리의 주제, 즉 고전문화 태동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왜 글을 쓰지 않고 오히려 글쓰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눈에 뜨이는 사항들만 골라서 거론하기로 한다. 월터 옹도 그 사상가들이 글쓰기, 문자문화에 대해 비판한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는 소크라테스가 글쓰기를 비판하는 이유가 서술되어있다. 첫째로, 글쓰기는 인간 정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정신 밖에다가 설정하는 짓, 즉 사물화하는 짓이라는 점에서 비인간적으로 만들어낸 제품이다. 둘째로, 쓰기는 기억을 파괴한다. 외적인 수단에 의지하기 때문에 내면의 일을 정신 속에 각인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씌어진 텍스트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넷째로, 실제의 말과 사고는 언제나 실제 인간끼리 주고받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는데, 쓰기는 그러한 맥락을 떠나서 비현실적이고 비자연적인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글쓰기가 인간 정신활동의 중요한 무엇인가를 파괴한다고 본 것이다. 다른 사상가들은 무엇이라고 했는지, 다음 회의 글에서 이야기를 더 잇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우리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인류 문화사에는 분명히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자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이전에도,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말과 문자가 결탁하기 이전에도 인류는 존재하고 삶을 꾸려왔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조건을 보면 대단히 약한 동물이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생존하여 마침내 지구라는 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옛날에도 생존과 발전을 가능하게 한 지혜가 있었고, 여느 동물과는 달리 대대로 내려오는 경험의 전수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과 같이 말과 문자가 결탁한 언어가 없었어도 인간 노릇을 하고 생명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질서니 아름다움이니 참이니 하고 표현하는 그런 가치가 문자가 없던 때라고 해서 없었을 리가 없다. 인류의 전체 역사 가운데 문자와 결탁된 언어의 역사는 지극히 짧다. 문자 없이도 문화를 가꾸었고 지혜를 전수해온 세월이 훨씬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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