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만유를 다 포용하고 수렴하는 그 어떤 하나의 궁극적인 원리, 진리를 천명한 것이 고전사상과 고전종교 태두들의 공통점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의 이른바 원시종교나 고대문명의 종교와 비교해보면 매우 혁명적인 변화였다. 원시나 고대의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이 세상에는 사람을 포함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안 보이는 존재들과 사람의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 힘이 온갖 곳에 잔뜩 활동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고전종교에서는 모든 문제가 그런 바깥의 존재와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더 궁극적인 세상의 진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개개인이 그 궁극적인 진상을 모르고 이에 어긋나게 사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개개인이 세상 전체의 궁극적인 진상을 깨닫고 체득하여 그에 부합되게 사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전종교에서는 모든 문제와 해결이 개개인에게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니, 원시나 고대 종교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전문화의 태동은 문자문화의 태동과 시기와 현장을 같이 한다. 그리고 고전 사상과 종교의 태두들은 문자문화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여겼다. 문자는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 진상을 내면화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만사 전체를 궁극적으로 수렴하는 것은 앞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를테면 불이적(不二的)인 원리이다. 각양각색의 현상과 사물을 각자 낱낱이 쪼개진 채로, 즉물적(卽物的)으로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모두가 하나로 수렴되는 통합성을 깨닫고 내면화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 고전 사상이요 종교인데, 가만히 보니까 문자문화는 통합성의 자각과 내면화에 장애가 되더라는 것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은 그 궁극적인 원리를 개개인이 내면화할 것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적어도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문제가 결국에는 스스로 세상만사의 궁극적인 원리를 체득하고 내면화하여 그에 부합되게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런 존재를 학술적인 용어로는 정령(精靈)이라고 한다. 우리 민속의 용어로는 천지신명이니 신령이니 하는 것과 또 갖은 잡귀가 그런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에도 중요한 것이 있고 좀 덜 중요한 것도 있다. 중요하다 아니다 하는 것은 세상의 일, 특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끼치는 영향력이 크고 힘이 센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 그러니까 원시나 고대 종교에서는 그런 존재와 힘을 잘 이용하거나 잘 달래서 사람에게 유리하게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이에 관해 월터 옹은 시각과 청각의 차이를 거론한다. 말은 청각적이고 글은 시각적인데, 시각은 토막 나는 감각임에 반해서 소리는 통합하는 감각이다. 시각은 분리하고 청각은 합체시킨다. 시각의 전형적인 이상은 명확성과 명료성, 즉 나누어 보는 일인데 반해서 청각의 이상은 하모니, 즉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내면성과 하모니는 이미 인간 의식의 특징인데, 글이라는 시각적인 장치는 의식을 분절화(分節化)시키고 타자화(他者化)해서 내면성과 통합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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