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34. 불립문자(不立文字) 7

수선님 2018. 8. 19. 12:22


그러니까 글쓰기, 문자문화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보면, 우선 글쓰기는 인간 정신 내면의 일을 외부에다가 사물화(事物化), 객체화(客體化)시킨다는 점을 못마땅해 한다.
 
그리고 말은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의 소통이어서 그나마 좀 나은데, 글은 그러한 대면의 현장을 떠나 저 홀로 고착되어 있다는 점, 그래서 비현실적이며 자연스럽지 못하고 조작적이라는 점을 비판한다. 즉, 문자는 인간 정신활동의 내면성과 현실성, 자연스러움을 파괴한다고 본 셈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중시한 인간 정신활동의 본령은 무엇일까?

 

플라톤이 소개하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보면, 글쓰기에 대한 그의 비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도 정리할 수 있다. 글은 말의 복사물이다. 말은 사유 속 개념의 복사물이고, 개념은 사물의 복사물이다. 모든 사물은 각자의 본질(idea)이 지각 또는 감각되는 형태로 복사된 것이고, 그 각 사물의 본질은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원리(Idea)가 복사된 것이다. 그러니 글이라는 것은 세상 전체의 궁극적인 원리로부터 몇 단계나 멀리,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것이어서 문제가 많다는 얘기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원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인간 정신활동의 궁극적인 본령이라고 여겼다. 그 이데아란 평이한 말로 달리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을 일이관지하며 모든 것을 수렴하는 원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리이다. 삼라만상의 개체성이 다 그 하나로 수렴되므로, 오직 하나이면서도 보편적인 원리이다.

 

개체성 너머 그런 궁극적이고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하나의 원리를 찾는 것이 고전사상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인도 우파니샤드 사상의 일자(一者), 중국의 천(天)과 도(道), 유대·기독교 전통의 야훼, 그리고 불교의 정법(正法)이 다 그런 것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것을 종교학에서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개념이라고 일컫는다.

 

그런 포괄적이며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어떤 하나의 실재를 바라보는 사상에서는 삼라만상의 개체성에 얽매인 사고방식이 큰 문제 거리로 여겨진다. 서로 다르고 구별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하나에 다 들어가는 그 궁극적인 실재를 체득하려면, 모든 것을 구별하고 분류해야지만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고방식의 틀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다 서로 다르게 보이고 구별되지만, 그런 차별성, 개체성만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그 뒤의 일체성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상을 편의상 불교의 용어를 빌어 불이(不二)의 입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고전종교들을 보면, 하나 같이 불이의 원리를 실생활의 현장에다가 그대로 적용하는 윤리규범을 강조한다.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관련해서 유명한 예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이다.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사랑하라는 얘기인데, 그런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남과 자신의 구별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있다. 똑 같은 얘기로, 불교에서도 동체자비(同體慈悲)를 말한다. 그런 불이적 입장에 대해, 왜 문자나 글쓰기는 장애가 된다는 것일까? 이미 짐작은 되겠지만 다음 글에서 더 이야기를 끌어가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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