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空, 돈오, 깨달음을 쉽게 얻는 세가지 비유에 대한 설명

수선님 2018. 8. 12. 12:34

 

 

 

깨달음을 쉽고 빠르게 얻게 하는데 좋은 세가지 비유가 있다.

 

첫째, 허공과 먼지

둘째, 바다와 파도

셋째, 주인과 손님

 

위 세가지 모두가 바로 진제와 속제에 대한 설명이다.

깨달음의 본질이 바로 진제이다.

 

진제가 곧 공이다.

왜냐면 제법실상이 곧 공이기 때문이다.

 

허공/바다/주인은 진제=진여심이고

먼지/파도/손님은 속제=생멸심이다.

 

진여심이란 부동심을 말한다.

진여, 불성도 다 마음이며 부동의 마음을 뜻한다.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런 움직이는 생멸심만이 있는게 아니다.

부동심도 있다. 그게 바로 불생불멸의 불성이다.

 

이 부동심이 곧 깨달음이다.

空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無가 아니다.

 

그럼 아무것도 없으면 뭐가 있냐?

그냥 부동의 마음일 뿐이다. 부동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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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공과 먼지의 비유

 

돈오, 즉 제법실상인 공을 깨닫게 하기 위한 비유중에 허공과 먼지에 대한 비유를 쓰는 이유는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결국 깨달음이란 마음 속에서의 일이다.

마음 밖에서 찾으면 안된다.

 

무명으로 인한 윤회도 마음에서의 일이고,

지혜로 인한 해탈/열반도 또한 마음에서의 일이다.

 

허공은 부동심이고, 먼지는 생멸심이다.

생멸심이 곧 생각이다.

 

인간은 이 생각을 진정한 나, 참나로 여긴다.

그래서 생각에 구속되는 것이고,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깨달으려면 생각이 쉬어야 한다.

 

먼지가 가라앉으면 저절로 허공이 드러나듯이,

생각이 가라앉으면 저절로 부동심, 즉 진여심이 드러난다. 그때 문득 깨달으면 된다.

 

이 부동심을 살펴보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뭐가 있을 수가 없다.

그저 고요할 뿐이다.

 

이 허공과 먼지에 대한 비유는

먼지 즉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혀야 허공이 드러나고

그 허공 자체엔 아무것도 없음을 알리기 위한 비유이다.

 

또한 먼지 즉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한,

절대로 허공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음도 알려준다.

 

번뇌의 실체가 뭐던가?

바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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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다와 파도의 비유

 

바다는 진제이고, 파도는 속제이다.

바다는 부동심/진여심이고, 파도는 찰라생 찰라멸하는 생멸심이다.

 

고요한 부동의 마음의 바다에

인연이라는 바람이 불어 생각이라는 파도가 친다.

 

중생은 이 생각을 나라고 여기므로,

생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지므로 언제나 번뇌의 파도가 출렁인다.

 

언제나 파도가 출렁이니, 바다 그 자체를 보지 못한다.

파도만 볼 뿐이다.

 

그러므로 바다 그 자체를 보려면, 파도가 쉬어야 한다.

생각의 파도가 쉬면 고요한 바다 그 자체가 드러난다.

 

이 바다와 파도의 비유는,

공하다고 해서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空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이고,

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無는 단멸론이고, 空은 중도이다.

 

생각의 파도가 가라앉으면 그 때 저절로 진여심의 바다가 드러난다.

그때는 오로지 고요한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깨달으려면, 돈오하려면...

생각의 파도를 쉬게해야 한다.

 

또한

바다와 파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파도는 어디에서 왔는가?

바다에서 왔다.

 

생멸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부동심/진여심으로 인해 그런 작용을 할 수가 있다.

 

부동심/진여심이 없고 생멸심만이 있다면,

인간이 기절해서 생멸심이 끊어졌다면 다시는 깨어날 수가 없어야 한다. 그냥 그대로 소멸..

그러나 생멸심이 끊겼다가도 다시 이어질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동심 때문이다.

 

부동심/진여심/불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찰라생 찰라멸하는 생멸심만이 있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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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인과 손님의 비유

 

중생은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 생멸심만 있는 줄 안다.

그래서 그 생멸심을 자기, 즉 주인으로 여긴다.

 

이게 바로 전도몽상이며,

모래로 밥을 짓는다는 비유이며,

손님이 주인행세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없는 한,

손님이 주인행세를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원히 주인은 될 수가 없다.

 

주인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무는 게 주인이고,

손님은 항상 왔다갔다 떠도는게 손님이다.

 

부동심은 주인이고,

생멸심은 손님이다.

 

그러므로 이 주인과 손님의 비유는

생각이 나/주체가 아님을 명확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손님을 주인으로 알지 말라는 뜻이다.

결국 손님을 주인으로 여기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의 무명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손님이 주인행세를 하게 내버려 둔다면, 영원히 주인이 될 수 없다.

또한 손님행세만 하면 그만인데, 도적행세까지 한다.

 

생각은 나, 즉 주인이 아니다.

생각은 허상이다. 가짜다.

이걸 알려주기 위한 비유가 바로 주인과 손님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실제 주인이나 주인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동심과 생멸심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주인은 항상 머문다는 것이고,

손님은 계속 움직이며 왔다갔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걸 의미하는 것이지,

실제 물건을 파는 그런 인격적인 주인/주인공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에고/자아라는 놈은 끝없이 자신으로 여길 대상을 찾아 헤멘다.

생멸심을 자기로 여기다가 이젠 부동심을 자기로 여기고 집착하려 한다면 그건 바보짓이다.

다만 집착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니까....

 

부동심인 진여불성에도 또한 나라고 여길만한 실체는 그 무엇도 없다.

깨달음이란 집착을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집착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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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세가지 비유는 모두가 다 똑같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두 다 깨달음/돈오로 이끄는 좋은 비유이다.

 

그러나 비유는 그저 비유일 뿐이다.

진제/깨달음/공은 그 어떤 비유로도 표현해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저 마음 속에서 깨닫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깨닫는 방법은 쉽다.

 

그저 생각을 쉬면 된다.

생각을 멈추면 된다.

 

생각은 끊임없이 일(一)자처럼 쭉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뚝뚝 끊어지면서 이어진다.

 

그래서 소걀린포체의 티벳트의 지혜라는 책에 보면 아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해놓은 내용이 있다.

바로 생각과 생각의 그 틈...그걸 바라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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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주제는 뭔가?

바로 과거와 미래이다.

 

과거 : 과거에 겪었었던 온갖 잡다한 일들을 떠올리며,

미래 : 미래에 어떤 일을 계획하는 일들을 떠올린다.

 

이게 바로 생각이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일들이다.

 

과거에 겪었었던 온갖 일들이 떠오르고,

또 앞으로 난 뭘해야지 하면서 계획을 짠다.

 

이렇듯 생각이란 마음이 과거에 떠올리거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좌선/명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수행이란 바로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알아차림이란 바로 이 현재에 머물러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현재에 머물면, 생멸심(생각)은 사라진다.

 

생멸심이란 바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인데,

마음이 현재를 바라보면 이 생멸심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쉽게 돈오/깨닫는 방법이 현재에 머물러 이 마음 자체를 관하는 방법이다.

 

마음이 마음 자체를 관하게 되면,

이 생각 즉 생멸심이 요리조리 자리를 피해서 도망가게 된다.

 

그때 청정한 부동의 진여심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저 텅비어 있다.

텅빈 마음이다.

이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생멸심이 아니고 불생불멸심이다.

이것이 불성이다.

 

이 불생불멸심은 그 누구도 파괴할 수가 없다.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

 

중생은 누구나가 다 이 불생불멸의 불성, 즉 진여심이 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먼지에 가려져 있다.

 

먼지를 잘 털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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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심 & 부동심

왜 하나는 마음이 움직이며, 또 하나는 부동의 마음인가?

 

생멸심은 바깥을 본다.

온갖 것들을 비교하며 분별한다. 그래서 생각이 계속 출렁이면서 이어진다.

 

진여심은 안 즉 제법실상인 空만을 향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진여심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이다.

 

 

 

 

 

 

 

 

空, 돈오, 깨달음을 쉽게 얻는 세가지 비유에 대한 설명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반야바라밀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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