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무아/空/진여/불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나는 무엇이며, 공은 무엇이며, 불성은 무엇인가?

수선님 2018. 8. 12. 12:34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중생들은 무엇을 "나"라고 여기는가?

 

인간에겐 몸과 마음이 있는데,

그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그런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게 바로 "나"이다.

 

그런 변치않는 "나"가 있어서, 그게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한다고 여긴다.

이게 바로 중생들이 여기는 자신으로 여기는 "나"이다.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 이외에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주체인 "나"라는게 있다는 것이다.

 

이건 자신 스스로를 되살펴 봐야 한다.

나 자신은 뭘 나라고 여기는가?

 

자신을 살펴보면, 위와 같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나라는 것은 불변의 실체라고 여긴다.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안그런가?

 

그러므로 중생들이 여기는 <나>라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불변의 주체/실체/주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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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라고 하셨다.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그런 "나"는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고 배워야 한다.

 

중생들은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그런 실체인 나라는게 있다고 여기고 있고,

부처님께서는 그런 주인/실체로써의 나는 없다고 하셨다.

 

완전 극과 극인 것이다.

 

중생들은 전혀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당연히 나라는게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아주 철저하게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살펴 보신 후에

나라는 것은 없다라고 천명하셨다.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전혀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있다고 주장하는 중생들과,

자세히 살펴보고 관찰한 후에 없다고 하신 부처님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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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대하신 부처님께서 나라는게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걸 덮어놓고 믿을 수도 없는 일이고,

설사 맹신한다고 해도 자신 스스로 살펴서 깨우치지 않는다면 <무아>라는 사실을 전혀 알수 없다.

 

무아[無我]인가?

나라는게 왜 아예 없는 것인가?

 

부처님 말씀은

중생들이 있다고 여기는 그런 나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그런 주인/주체/실체로써의 "나"는 아주 없다는 뜻이다.

 

이제 살펴봐야 한다.

과연 중생들은 뭘 나라고 여기는가를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몸을 나로 여긴다.

그래서 몸을 위협하거나 때리면 화가나서 같이 싸워댄다.

 

둘째, 마음을 나로 여긴다.

그래서 자존심을 건드리면 바로 분노가 폭팔한다.

 

부처님 말씀은

중생들이 실제 나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몸과 마음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도,

그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또 다른 "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생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고 있는 네가지를 <상락아정 4전도>라고 부른다.

 

상 : 항상하지 않은데 항상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항상=영원

락 : 괴로움인데 그걸 즐거움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아 : 나가 없는데 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정 : 더러운걸 깨끗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젠 나 자신이 스스로 나를 살펴봐야 한다.

나는 과연 뭘 나라고 여기는가?

 

나는 뭘 나로 여기지?

 

나는 몸을 나로 여기더라.

나도 내 몸을 나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다 자신의 몸을 자기로 여기고 있더라...

 

그래서 몸치장에 신경쓰고, 몸을 보호하고 아낀다.

이게 현실이다.

 

안 그런가?

이게 현실이다.

 

내 몸을 나로 여기는 것이다.

 

또 몸 이외에 뭘 나로 여기는가?

바로 내 마음을 나로 여긴다.

그래서 자존심 때문에 자살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한다.

 

중생들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이렇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이 몸과 마음이 바로 오온을 의미한다. 색수상행식.

 

색은 몸이요,

수상행식은 마음에 해당한다. 마음과 마음작용=심과 심소

 

정말 이걸 잘 따져보고 살펴봐야 한다.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나 자신을....

 

뭔가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나라는게 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내가 나로 여기는건 그게 아니고 내 몸과 마음인 것이다.

 

오온에서 마음은 수/상/행/식이다.

수는 느낌이며, 상은 기억/분별/생각이며, 행은 행위이며, 식은 앎이다.

 

진짜 난 뭘 나로 여기는지,

각자 정확히 살펴보고 정확히 판단해야만 한다. 남이 대신해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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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그런 나는 없는데,

중생들이 나라고 여기는 그 "나"는 무엇인가?

 

정말 그런 불변의, 즉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그런 주체가 있다면

딱 저게 바로 그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건 "나"가 될 수 없다.

왜냐면 중생들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바로 상[相]이기 때문이다. 즉 모습

 

독립적인 고유한 모습이 바로 자상[自相]이다.

자상[自相]이 있다면 그건 없다고 할 수 없다.

 

상[相]이란 단순하게 보여지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보여지고 들려지고 또 마음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의 특징을 의미한다.

 

識, 즉 의식은 형체가 없지만,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기에 아주 없는게 아니다.

의식의 특징(相)은 앎이다.

 

 

중생들은 왜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가?

바로 인식되어지고 인지되어지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식되어지지 않는 그런 대상을 어찌 나라고 여길 수 있겠는가?

또 그게 나와 뭔 상관이 있는가? 안그런가?

 

과연 중생들이 몸과 마음이 외에 나라고 여기는 그러한 대상이 있다면,

반드시 인식되어져야만 한다.

 

이제 그 나를 찾아볼 때다.

 

내 몸속에 나가 있는가?

내 마음 속에 나가 있는가?

내 몸가 마음과는 별도로 저 멀리에 나라는게 있는가?

 

있다면 그게 어떤 방식으로 인지되던가?

어떤 모습인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던가?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나는 어떤 모습이고, 나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뭐가 나던가?

 

스스로 찾아보라.

과연 찾아지나?

 

그런게 있나?

 

몸과 마음과 별개의 나..

그것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

 

나라는 걸 찾아봐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왜냐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적으로 중생들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오온이다.

즉 색수상행식이다.

색수상행식이 바로 몸과 마음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오온이며,

오온과 따로 떨어진 별개의 나가 있는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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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건 본래 없는데,

왜 몸과 마음 이외에 그걸 지배하고 통제하는 나라는게 있다는 착각이 생기는가?

 

그것은 의식, 즉 마음의 흐름 때문이다.

생각이 흘러갈 때 나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즉 "나"라는 건 생각 속에서만 있는 가상의 것이다.

즉 착각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 것은 실제 있는게 아니고,

그저 인간의 관념 속에만 있는 거짓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의식이 흘러갈 때, 나라는 고정관념이 생긴다.

 

중생들의 의식은 어리석임이 근본이고,

그 어리석임이 곧 나라는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관념속에서만, 즉 생각속에서만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이걸 제대로 각자 스스로가 분석하고 관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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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런 나는 과연 뭐냐?

 

그게 바로 마음이다.

그런게 바로 마음의 작용이다.

 

나라는게 있어서 그게 뭘 하는게 아니고,

전부 다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

 

마음이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다.

 

보는 자가 있는게 아니고,

마음이 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게 안식이다.

본걸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고 따지는게 바로 의식이다.

 

듣는 자가 있는게 아니고,

마음이 듣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게 이식이다.

들은 걸 좋다 싫다고 분별하고 따지는게 바로 의식이다.

 

의식이 하는 것이지, 나라는게 있어서 그게 하는게 아니다.

의식의 기능이 본래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다.

 

생각하는 자가 있는게 아니고,

마음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작용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 생각이란 바로 기억을 통해서 일어난다.

 

노력하고 뭘 의지적으로 하는 것은 뭐냐?

그게 바로 의식이다. 제6식

 

전부다 마음이 하는 것이지,

마음과 몸이 이외의 어떤 제3의 또다른 "나"가 있어서 그게 뭘 주체적으로 하는게 아니다.

 

이걸 터득해야 한다.

 

그러나 중생은 전부다 마음이 하는 걸 모르고,

나라는게 있어서 그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줄 착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마음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거짓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나라는 건 없는데,

중생의 마음은 어리석어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러므로 마음 이외에 어떤 불변의 주체/실체가 있어서 그걸 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중생이 가장 모르는 게 바로 자신의 마음 아니던가?

마음을 살펴보려고 하질 않는다. 또 그걸 두려워한다.

왜냐면 살펴봤을 때 나라는게 정말 없는게 들통날까봐서이다.

그래서 항상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정말 나라는게 있다는걸 명확히 안다면 두려움이 생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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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나라는게 없는데,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거짓이다.

이런 거짓된 나를 "에고"라고 부른다.

 

스스로의 마음에 속지 말라는게 무슨 뜻인가?

 

마음 속이건, 마음 밖에건 나라는게 없는데 나라는게 있다고 여기니,

자기 자신의 그 어리석은 마음에 속지 말라는 뜻이다.

 

"나"라는게 있다고 여겨서 그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던가?

 

 

사실상 중생은 나가 뭔지 마음이 뭔지 그런 걸 단 한번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그냥 산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은 언제나 바깥만을 바라보지, 자기 자신을 살펴보지 않느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는게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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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없다.

그래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냐?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가 가능하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나라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를 의미한다.

중생은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다고 여긴다.

또한 내생에 태어나는 것 역시 나와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상주불변의 전혀 변화없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이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영원성/불변성을 상징한다는 것.

 

만약 중생에게 나라는게 있고,

그 나라는 건 몸과 마음과는 별도의 것으로써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실체인데

중생이 죽으면 몸과 마음은 사라지고 실체인 나만 남아 있게 된다.

 

이때 나만 남아 있으면 그 나는 영원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나라는게 있다면

오히려 윤회가 불가능한 것이다.

 

윤회란 뭔가?

변화이다. 다시 태어나야하니까 변화이다.

 

그러므로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가 가능한 것이지,

영원한 나가 있다면 오히려 윤회가 불가능한 것이다.

 

중생들은 영원함과 영원하지 않음을 전혀 구분 못한다.

변하는 걸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실제 이렇게 알고 산다.

 

 

윤회에서 업보로써 고통당하는 것은 뭔가?

 

나인가?

아니다.

 

고통 당하는 것은 오온이다.

즉 몸과 마음이 고통당하는 것이다.

 

윤회에서 이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게 있어서 그게 영원히 이어지는게 아니고,

마음 속에 다만 업력이 이어져서 몸과 마음이 그걸 이어갈 뿐이다.

 

전생에 태어난 나와, 현생에 태어난 나와, 미래에 태어난 나는 동일한 하나의 나가 아니다.

동일한 하나의 나라고 주장하는게 바로 힌두교다.

 

불교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동일한 나는 없고, 또한 나라는 건 본래 없다고 가르치는게 불교이다.

 

다만 마음 속에서의 업력이 이어지고, 그 업력이 사라지면 해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이 가능한 것이다.

무아니까 해탈이 가능하다.

 

태어날 업력만 사라지면, 윤회는 끊어진다.

영원한 나가 있다면 어찌 윤회를 끊을 수 있겠는가? 영원히 윤회하는 수 밖에 방법이 없지....

 

본래 나는 없는데,

나라는게 있다고 여기니까 온갖 집착이 생기고 악업을 지어서

그 악업으로 인해 계속 윤회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가 있다고 여기는 한, 해탈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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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게 정말 있어서,

그 나라는 것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이라면

언제나 몸과 마음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과연 내 뜻대로 되던가?

 

몸아 늙지마라, 몸아 병들지 마라...라고 명령해도 그 말을 듣던가?

마음아, 괴로워하지 마라...라고 해도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던가?

 

내 말을 듣나?

물론 들을 때도 있지만, 결국 몸은 배신하고야 만다. 죽어버리니까..

마음도 배신한다. 수시로 배신하고 있지 않은가?

 

몸과 마음의 주인은 없다.

주인공은 없다.

 

그래서 무아다.

 

"나"라는 것은 없다.

그저 마음 속에서 있다고 여기는 착각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생각/관념속에만 있으며, 실제로는 없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찾지를 못하는 것이다.

 

딱 이게 나다..라고 지칭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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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이외에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실체/주체/나라는게 없어서 무아이다.

 

중생들이 실제로 나라고 여기는 것은 몸과 마음인데,

그 몸과 마음에는 내재된 실체가 없기에 무아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본질은 공한 것이다.

몸과 마음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공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존재방식이 곧 공이다.

이것이 바로 실상으로써의 공이다.

 

또 하나의 공은 공 그 자체로써의 공이다.

공 그 자체만을 가지고 논하는 것을 말한다.

 

공을 이해할 때, 실상으로써의 공과 공 그자체로써의 공이 있음을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이 둘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실상으로써의 공은 곧 환영/허깨비라고 설명되어지고,

공 그 자체로써의 공은 바로 열반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어 공하기에 여몽환포영이다. 이게 제법실상으로써의 공이며,

공 그 자체는 해탈이며 열반/멸성제이니 이게 바로 공 그 자체로써의 공이다.

 

 

공 그 자체만을 논할 때 그것은 여여하기에 <如>라고 부르고

진실하게에 진여라고 부른다.

 

공은 해탈의 문으로써 거짓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한다.

공도 공하며, 진여도 공하고, 불성도 공하다.

 

공에 뭔가 실체가 있으면 그걸 어찌 공이라 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중생은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기필코 뭔가 실체를 찾아 자기로 여기려고 한다.

그래서 공에 집착하는 것이다.

 

공이 진실하기에 진여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공 그 자체에 뭔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성도 마찬가지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성품이란 의미인데, 불성 역시 마음이다. 

 

공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無가 아닌데, 그럼 뭐가 있냐?

그냥 마음이다.

 

공도 마음이고,

진여도 마음이고,

불성도 마음이다.

 

마음은 두 종류가 있다.

생멸하는 생멸심과 부동의 진여심, 이 진여심을 불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하기에 부동이다.

부동이니 불생불멸심이다. 이 불생불멸심이 진여이며, 불성이다.

 

그러나 생멸심과 진여심을 별개의 것이 아니다.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마음의 본질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틀리다.

 

그렇다고 뭔가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의 실상, 본성이 텅비어 있는 것이다.

 

텅비어 고요하고 적멸하니, 그게 여여해서 참되니 진여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런 여여함을 닦으면 부처가 되니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안된다.

설명할 만한 실체가 없으니까...

 

그저 깨달아야 한다.

 

공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지만,

말이나 언어로써 설명해주지 않으면 어찌 깨닫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비유라는 방법으로써 공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공을 허공에 그래서 많이 비유한다. 

허공과 유사하고 쉽게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속제로 따지면 실체가 없어서 무아이고,

진제로 따지면 그 어떤 것도 따질게 없기에 무아도 아니고 유아도 아니라고 한다.

 

진제는 희론이 끊겼기에 그 뭐라고 주장해도 틀리는 것이다.

진제든 속제든 그 어디에도 영원성을 유지하는 실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공도 공하고, 진여도 공하고, 불성도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디에도 집착할 만한 대상이 없다.

이것이 대자유 아니던가?

 

 

만약 모든 것의 본질이 공하다면,

뭐하러 가르치냐?..라고 질문할 수 있다.

 

중생들은 본질이 공한걸 모르기에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자비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그저 너와 나를 구분해서 부르기 위한 <명칭/호칭>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아/空/진여/불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나는 무엇이며, 공은 무엇이며, 불성은 무엇인가?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반야바라밀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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