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은 모두가 아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불교는 아상을 버리는 종교입니다.
보시바라밀은 이러한 아상의 뿌리를 뽑아내게 하는
방하착의 생활 실천이라 하였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생활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보시하는 이를 수행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한다고 해 놓고서 베풀 줄 모른다면
백날을 가부좌로 앉는다고 하더라도 복이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복과 지혜는 수레의 양 바퀴처럼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두 축이 됩니다.
복이 없는 지혜나, 지혜가 없는 복은 참이 되기 어렵습니다.
복과 지혜를 함께 증장시키기 위한 최고의 수행이 바로 보시바라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빈 몸으로 이생에 잠시 와서
빈 배처럼 인연 닿는 데로 이리 저리로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빈 몸으로 돌아갑니다.
‘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죽을 때 그 ‘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며,
그렇다 보니, 죽어서도 이승의 집착을 못 버려 이승을 떠돌다가
인연 닿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대기업 회장이라고, 죽을 때 더 많이 가지고 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 총수나 우리네 어려운 이웃들이나 모두 다 죽어서
화장터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는 똑같이 껍데기만 들어갈 뿐입니다.
한 두어 시간쯤 지나서 불길 속에서 나올 때가 되면
모두가 한 줌의 재가 되어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대기업 회장이라고 더 오래 타지도 않고,
더 많고 멋진 재가 되어 나오지도 않습니다.
한평생 벌어놓아도 죽을 때가 되면 내 것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