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은 오랜 기간 동안 숱한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禪)은 분명히 뒤의 경우이다. 그리고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는 구호를 통하여 그런 입장을 아예 공식 입장으로 표명하였다. 전에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선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작년에 입적한 해인사 방장 혜암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왔다. “팔만대장경? 그거 깨친 사람에게는 다 똥닦개에 불과한 거야.” 앞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의 구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언급했듯이, 이것은 경전 그 자체, 또는 경전을 공부한다는 것 그 자체를 문제 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경전에 대한 태도, 경전 공부를 하는 태도에 시비를 거는 말씀일 터이다. 선사들이 보기에 경전에 담긴 가르침은 모두 결국 우리 자신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데로 귀착된다. 그것이 불교의 본령이라고 본다. 본령을 망각하고, 또는 뒤로 제쳐놓고 다른 신행에 몰두하는 것은 다 헛짓이요 심각한 장애물이라고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았다는 경전을 공부하는 것조차도 깨달음이라는 본령을 뒤로 제쳐놓고 한다면 헛짓이요 당장 때려치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도대체 가르침은 어떻게 받으라는 말인가? 피와 살을 가지고 살아 있는 선지식에게서 직접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을 것을 강조한다.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현장에서 가르침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글보다는 말을 더 신뢰한다. 실은 말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이란 그럴 듯한 명제, 논리적인 설명, 조리 있는 설득 같은 것을 뜻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불교 경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크리스트교의 성경도 그렇고 이슬람 성전 꾸란도 그렇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이들이, 특히 언급된 종교의 신자 가운데에는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심지어는 경전의 거룩함을 모독하는 얘기라고 화를 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학술적으로는 그 얘기가 상식화되어 있다. 학문적인 진리가 반드시 종교적인 진리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학술적인 상식을 수용하지 못하고 거부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종교적 믿음이라면, 그 믿음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곰곰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사실상 어느 종교에나 경전의 문자 하나하나를 절대시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좇아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이른바 축자적(逐字的)인 태도의 전통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문구 그 자체에 얽매이기보다는 거기에 담긴 메시지의 취지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데 주력하는 입장도 전통으로 형성되어 왔다. 앞의 경우에는 이런 얘기를 불쾌해 하겠지만 뒤의 경우에는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선에서는 그런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말로 가르침을 전하려고 한다. 이른바 선문답(禪問答)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예이다. 언어에 구속이 된 의식의 흐름을 언어의 사슬에서 풀어내주는 언어가 선문답이다. <대승기신론>에 보면 인언견언(因言遣言) 즉 말로써 말을 버린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취지를 담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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